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지음 / 강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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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처구니
(주로 ‘없다’의 앞에 쓰여)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
비슷한 말 : 어이2.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한숨만 나온다. 하는 짓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제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어처구니가 그런데 무슨 뜻이지? 어? 그러고 보니 내가 어처구니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쓰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전을 찾아보면 위와 같다. 즉, ‘그곳에는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들”이 산다’는 뜻이다. 그럼 이렇게 쓰면 될 걸 가지고 왜 저런 제목을 붙였나? 이상하게 읽다보면 참 어처구니없군,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우리가 늘 ‘어처구니없다’고 할 때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이 없다’는 뜻으로 쓰지는 않지 않은가? 주로 황당할 때,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날 때, 어이없을 때, 쓰는 말이 바로 ‘어처구니’이다. 이러고 보면 ‘어처구니’가 쓰이는 상황도 다소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래도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라서 어처구니의 유래에 대해 찾아보았다.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단다.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게 없다면? 맞붙은 두 돌만 있고 손잡이가 없다면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 아닌가?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또 다른 어처구니는 왕궁 등의 처마에 장식된 ‘토기’ 를 말하는데, 왕궁을 지으면서 처마에 ‘어처구니’ 를 올리지 않아 뒤늦게야 ‘어처구니’ 가 없음을 알게 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것 아닌가? 여기서 나왔다고도 본다고 한다. 놀랍게도 여기의 어처구니는 해당하는 한자도 있더라.

 

아무튼 참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어처구니, 성석제의 어처구니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군데군데 이건 소설이 아니라 수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작품들도 있었고, ‘엄청나게 크’기 보다는 다소 궁상맞고 소심한 생각을 담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제목에 충실하다.

 

1994년에 나왔고, 2007년에 개정되었다. 처음 이 소설집을 낼 때만 하더라도 작가는 작가의 길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작품들 중 장편으로 발전한 작품도 있다고 하고, 현재의 ‘성석제스러움’의 초창기 모습이 많이 보인다. 풋풋하지만 농익지는 않은 느낌. 한 입 콱 깨물면 꿀처럼 달거나 말랑말랑하지 않고 아직 아삭거리며 신 맛이 나는, 저절로 눈이 감기는 사과를 먹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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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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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Das Buch’, 독일어로 ‘그 책’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The Book’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너무 평범한 제목이 될 테고 그래서 제목을 바꾸었나보다. 원제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관심을 끌만한 제목이다.

 

한 남자가 있다. 책을 사랑하는 남자. 단순히 취미가 독서인 정도가 아니라 책 그 자체(책의 삽화, 활자, 종이, 냄새 등 책의 모든 것)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이 남자가 어느 날 ‘The Book’이 되어버린다.

 

독일 소설이고 사람이 다른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때문에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또한 공통적으로 그에는 훨씬 못 미치는 소설이라는 것도 함께 느낄 것이다. 일단 내용도 너무 짧은데다가(뭘 좀 느낄 만하다가 끝나버리는 느낌이다) 대체 이 작가가 여러 에피소드의 나열을 통해서 뭘 말하고 싶은지 주제의식을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다. 아마 작가는 뭔가를 특별히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책을 대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제시함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알아서 느끼게 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열된 에피소드들이 지나치게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참 매력적이다. 책의 디자인, 종이의 질감, 삽화 등이 내용을 떠나서 계속해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Das Buch’인 동시에 책 속에 나오는 ‘Das Buch’와도 닮았다. ‘Das Buch’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Das Buch’인 것이다. 물론 책을 읽은 우리는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공포를 준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사실 이 책이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 책의 설정이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단순히 판타지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람이 책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혹시?’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고 작가의 능력이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가히 출판물의 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는데도 출판계는 호황이고(그렇게 책을 안 읽어서 문제라는 우리나라가 세계 7위의 출판 국가란다) 신문의 book 섹션에는 매주 신간이 넘쳐난다. 대체 이 많은 책들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좋은 책, 그저 그런 책, 나쁜 책들이 범람하는 이 시기에 다른 이의 기준에 휩쓸리지 말고 정말 나에게 맞는 책을 선택해 오래오래 사랑하며 보는 것이 진짜 독서가가 아닐까. 책에 대한 과한 집착도, 기준이 없는 무분별한 책읽기도, 책을 등한시하는 것만큼 독자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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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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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가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2분짜리의 예고편만 보아도 영화가 짐작이 간다. 황량한 분위기, 건조한 문체, 냉정할 정도의 결말. 책 이상으로 영화화해낸 것을 보고 감탄이 나왔다. 캐틀 건이라는 것은 책으로 읽을 때는 실감이 잘 안 났는데 영화 예고편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온몸이 오싹하다. 역시 난 영상 세대이구나 라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은 누구일까. 아마도 코맥 맥카시 자신이 아닐까? 33년생인 그는 정말 노인이다. 베트남전, 걸프전, 911, 이라크전, 수많은 유명 인사들에 대한 공개 저격 사건들, 고등학생들의 총격전, 대학생들의 총격전, 시시때때로 터지는 크고 작은 테러, 범죄... 간혹 미국 범죄 드라마를 보다 보면 우리나라도 끔찍한 사건이 많이 일어나지만 저 나라는 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총기 규제에 대한 정책이 지지부진하며 범죄는 날이 갈수록 극악해진다. (미국이 수사물이 발전한 이유가 범죄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란다.) 나라는 어지럽고, 젊은 시절 희망을 가졌을 그도 이제는 나아질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모국을 바라보며 될 대로 되어버리라는 심정을 갖지 않았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과연 모스의 운명은, 시거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읽어나가다가 결국 맥이 탁 풀렸다. 내가 이 결말 때문에 여기까지 왔던가. 하지만 그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미국에서 과학수사가 발전한 이유가 미결된 사건, 잡지 못한 범인이 유독 많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처음부터 코맥 매카시가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10년만 젊었어도 이 소설은 이렇게 결말을 맺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정말 미국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그의 또 다른 소설이자 역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진 '더 로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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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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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일단 제목이 독특해서였고, 또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장르였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아도 안다. 이미 네스터는 죽었으며, 그를 죽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 중 과연 살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것은.) 이런 설정은 지겹도록 반복되어 온 설정이고, 정말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질 이 이야기 속에서 흔해 빠진 결말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은 여러 가지 장치를 사용하게 된다. 여기서는 아마도 '요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것도 별 것 없다는 것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열차 살인사건은 이것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러모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리게 된다. 아가사의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마지막 결말을 읽기까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고, 끝에 다다라서는 완벽한 구성과 세세함에 감탄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마저 생겼던 기억이 난다.(어떻게 이런 작품을 생각해 내었으며, 더 대단한 것은 이 정도의 작품을 수십 편을 더 써낼 수 있었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후대에 이 작품은 많이도 리메이크되고 오마주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영화 중 '8명의 여인들'이라는 작품과 우리나라 영화 중 '친절한 금자씨'도 이 추리소설 대가의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책 소개만 놓고 보면 아가사 크리스티를 뛰어넘고, 스페인 최고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뭐 아가사 크리스티를 뛰어넘었다는 것이야 책을 팔아야하는 출판사 소개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스페인의 최고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대체 그 상이 진짜 스페인의 대단한 상이기는 한지, 아니면 원래 이쪽 문학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어떻게 된 게 추리 소설(혹은 추리 소설 비스무레한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면 최소한 책의 절반 넘게 읽을 때까지는 결말에 대해 일정 부분은 몰라야 되는 것 아닌가? 초반부터 모든 것이 공개되고, 남은 분량의 책읽기는 이미 예정된 흐름을 확인하는 것뿐이라니... 만약 이게 추리 소설이 아니라고 쳐도, (그럼 독자가 이미 예측한 부분도 크게 중요하지 않을 테니)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소설에 남는 부분이 대체 뭐가 있는지 싶다. 예술, 자기의 완성, 삶에의 의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살인을 미화하는 것은 이미 프랑스 소설에서 수없이 본 장면인데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고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그 프랑스 소설들에서조차도 그렇다.) 더군다나 등장인물의 소개를 장황하게 하면서 할리우드 무비 스타(영화배우가 아니라 무비 스타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어울린다)에 대입하는 공식은 어이가 없다. 나는 그 무비 스타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세대도 아닌데다가 이미 알려진 사람의 이미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작가의 표현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가장 살인의 이유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결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진부할뿐더러 끝부분이 소설의 첫 부분과 이어지는 이른바 '수미쌍관'(;;)의 구조조차도 덜 진부하다 뿐이지 식상하기는 똑같다. 거기에 캐릭터에 대한 심리묘사는 우리도 모르고 있었던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는 정도는 절대 아니고, 누구나 알 만한, 그 상황이라면 작가가 아니라 독자 수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에서 그친다.

한국, 미국, 일본, 영국(여기에 간혹 중국과 프랑스)에만 치우친 독서 편식을 조금이라도 고쳐보고자 생소한 남미 책을 골랐는데 이래저래 실망이다. 그냥 스페인 소설을 읽었다는 것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이 책을 읽고 나니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동인 문학상이나 황순원 문학상이 얼마나 격조 있는 정통한 문학상인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을 보는 편이 어쩔 수 없이 안전하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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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합창 - 문학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8
아벨 산타 크루스 지음, 명수정 그림, 정선옥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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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별명이 붙으면 살에 피부가 붙듯 달라붙어 도저히 그 별명을 떼어 내는 일은 불가능해지기 마련이다. 말라깽이라는 별명은 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맥 빠지는 이름도, 그렇다고 눈부신 이름도 아니었다. 영웅이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겁쟁이도 아닌 평범한 병사의 별명으로 알맞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20~30대라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을 드라마가 있다.

1990년대에 방영되었던 외화시리즈 '천사들의 합창'.

먼저 KBS에서 방영되었고, 이후에 EBS에서 방영되었다는데 KBS에서 방영되었다는 건 잘 모르겠고 EBS에서 방영되었던 것을 띄엄띄엄 시청했었던 기억은 난다.

매번 시청하지 않아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도 어린이 드라마 치고는 꽤 주제가 무거운 편이라서 그 나이에는 꾸준히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참 생소한 나라인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였는데, 사실 멕시코 드라마라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고 그 때는 히메나, 마리아 호아키나 등의 이름이 발음할 때 참 예쁘면서도 독특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책 뒤편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원래 아르헨티나의 작품으로 나중에 멕시코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미국으로 수출된 후 다시 우리나라로 수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의 문제가 많았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실 중남미 쪽은 여행 가본 적도 없고 주변에 다녀온 사람도 없고 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 미지의(?) 세계인데, 얼마 전 한국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별 리그 2차전을 보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다.

책도 참 좋지만, 그래도 드라마 쪽이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오프닝 곡, 회전목마를 타며 빙글빙글 돌던 아이들(그런데 드라마의 원제인 '회전목마'는 무슨 뜻이었을까?), 천사 같던 히메나 선생님, 늘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던 경비 아저씨, 재잘대며 아이들이 들어가던 학교 앞 입구, 하늘색 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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