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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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작가의 이번 작품 <흑산>은 읽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아니 좀더 시간을 두고 있다가 읽고 싶었다. <칼의노래>나 <현의 노래><남한산성>의 역사소설 느낌이 너무 좋았는데 <내 젊은날의 숲>을 비롯한 다른 작품에서는 왠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선느낌이 들어 다시 역사소설을 썼으면 했는데 이번작품 '흑산' 은 타작품에서도 많이 다루어진 부분이라 어떻게 그가 표현해낼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동안 읽은 작품들의 여운이 남아 있어 작가의 작품은 조금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기전에 <서찰을 전하는 아이>에서 또한 '천주교박해' 에 대하여 언급해 놓았지만 그 책은 아이가 본 역사였기에 물론 이 작품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한승원님의 <흑산도 하늘길>은 이작품과 뜻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한승원님의 <흑산도 하늘길>은 바다로 둘러쌓인 흑산에 갇혀 뭍으로 나가지 못하는 약전의 가족과 뭍에 대한 그리움 애틋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흑산에 길들여지듯 그곳과 하나가 되는 포기하는 삶처럼 흑산인이 되어가는 이야기였다면 <홍어장수 문순득,조선을 깨우다> 에서는 일개 홍어장수로 인해 자칫 흑산에서의 약전의 삶이 일개 범부의 삶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삶에 돌을 던지듯 그곳에서 새로운 '실학' 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고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게 되었다.그런가하면 강진에 유배되어 내려온 약용에게까지 그 파문이 전해질 수 있던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들여다보고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김훈 노련한 작가가 담아 내려던 것은 지금까지 다루어졌던 흑산에서의 정약전의 삶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천주교박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그 이야기를 축으로 하되 무수히 이름도 없이 죽어간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그만의 살풀이,아님 넋두리식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자산어보를 쓴 약전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며 이름없이 죽어나간 '민초'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그들의 삶을 찾아주는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함께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고향의 옆동네는 천주교박해를 받던 시절에 천주교인들이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마을을 이룬 곳이 있다. 그곳은 모두가 천주교인이다. 그렇게 하여 친구들도 물론 태아때부터 그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영세를 받아 천주교인인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믿음이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고 종교' 라고 보는데 그동네 친구들과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자궁안에서부터 받아 들이고 몸 속 아니 뼛속까지 밴 '천주교'라는 믿음은 감히 일반인인 우리가 가까이 범접하지 못하는 그런 경지였던 것이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며 배우게된 역사속 천주교박해는 좀더 친구들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보게 되었고 언젠가 가서보게된 백여년이 넘은 '공세리성당'은 그시대를 그나마 밑그림이라도 그려보게 만들어 주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 서학하면 그 큰 줄기에 '황사영과 정약종과 그의 형제들' 있듯이 그들과 관계한 많은 민초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지금까지 그들의 삶이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작가는 그들의 삶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아니 황사영이나 정약전이나 그의 형제들과 똑같은 평행선위에 민초들을 놓고 그들을 어루만지고 토닥이고 그들의 발바닥에 낀 더깨처럼 그들을 따라 어디로든 따라가며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어찌 인간이 살아가는데 고난과 아픔 슬픔이 배제된 삶이 있을까? 사람살아가는데 한줄기 곡절은 누구나 있는 것이다. 양반이라고 소년등과를 했다고 그 삶이 평탄대로가 되란 법은 없는 것이다. 소년등과를 한 황사영,그의 처 또한 잘나가는 정씨네였기에 그의 삶은 그야말로 반석과 같을줄 알았는데 누가 그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을까. 어찌보면 작가는 배교를 할 것인가 아님 맞써서 싸울것인가? 라며 작가의 물음속에 '황사영과 정약전' 을 놓은 것일수도 있다.서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인 민초들은 그들을 옮가매려는 올가미에 맞써 싸웠다고 본다면 황사영은 어찌보면 그저 순순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으로 민초들처럼 맞써 싸웠다면 역사와 그의 삶은 달려졌을 것이다. 소년등과를 하여 미래가 밝던 그가 '서학'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 한번 제대로 발휘해보지 못하고,그야말로 빛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 어찌보면 안타깝다고 작가는 풀어내고 있다.그런가 하면 정약전의 삶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술로써 그런 자신을 감추며 현실을 어느정도 품어 안으려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그들의 밑에서 자유인이 아니었던 민초들이 그들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되어서 북경이며 그외 꼬불꼬불한 산길을 몇십리를 들어가 살아도 그들은 그들나름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믿음과 죽음 그리고 올가미에 맞서지 않았을까,그런 민초들의 아픔과 슬픔 질곡의 삶을 작가는 토닥토닥 아니 목울대를 울컥하게 하는 통한의 슬픔을 다 쏟아내고 있다.그래서일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버겁다. 좀더 매끄럽다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읽다보니 눈이 버걱버걱한다. 하지만 작가를 이해한다. 황사영과 정약전이 씨실이라면 그들 밑에서 함께 한 민초들을 날실로 하여 작가는 지금 거칠면서도 튼튼한 옷감을 짜고 있는 것이다. 작가 또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까.이름없이 죽어간 민초들은 때론 젓빛 도라지꽃으로 피었다가 말보다 더 억세고 질긴 생명력으로 표현되었다가 새우젓보다 더 곰삭은 삶으로 점철되기 위하여는 작가가 먼저 곰삭어야했을 것이다.


작가의 문장은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여 입안에서 가슴안에서 곰삭여야 함을, 좀더 문장안에서 머물러야 함을 이 책을 읽으며 느낀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황사영의 붓 끝에서 깨알 같은 글자들이 살아나서 반짝였다. 글자들은 저마다 절규하면서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문장이 아니라 글자 한 자 한 자가 갈고 잘 다듬어진 후에 그자리에 박힌것처럼 문장안에서 빠져나올줄을 모르고 빛을 발한다. 온 몸으로 글을 쓰는 그의 고통과 무게감이 함께 실려 너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런 그도 가끔 그만의 살인적인 미소를 실어 놓듯 잠시 쉼터를 제공한다. '이 돈이면 공명첩을 사서 역참에 매인 마부 신세를 면하고도 그래도 남아서 목 좋은 자리에 주막을 차릴 수도 있겠구나.그런데 주교는 한사코 마부질을 하라시는구나......' 어찌해야할까 우리의 마노리, 먼지 풀풀나고 북경을 걸어서 다녀오자면 그 길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생명도 부지기수인데 거금이 생겼다. 그 돈이면 자신의 삶을 바꿀 기회인데 마부에서 벗어나 좀더 번듯한 삶을 살 수 있을 듯 한데 주교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부질을 평생하라고 한다.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어찌보면 욕심부리지 않고 사는게 민초의 삶이라 그가 말한다. 과한 욕심을 부렸기에 그는 화를 자초하듯 죽음에 이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정약전은 그를 가로막고 있는 '바다' 를 보며 한마리 '날치'가 되고 싶은 생각도 가져본다. '날치가 왜 날아오르는 것이냐?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가?' 그는 자신의 삶에 희망을 가지듯 날치에게도 희망을 실어본다,아니 품어본다.하지만 흑산도에 매인 삶인 창대라는 녀석은 그와 다른 세상을 본다.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물 밑에 잡아먹으려 덤비는 놈들이 있을 것입니다. 허나,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는 날치가 아닌 다음에야......' 그랬다 날치가 되어봐야 날치를 알고 날치가 왜 날아오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약전이 왜 흑산도로 유배를 하고 그와 함께 하던 민초들이 왜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죽어가며 믿으려했던 서학, 그것은 민초가 되어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런면에서 작가는 스스로 이름없이 죽어간 민초가 되어 그들의 한많은 삶을 풀어내고 있다. 때론 마노리가 되어 북경에 다녀오는가 하면 때론 배교를 하면서 그들을 엄탐하는 새우젓 장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가하면 자신의 여동생을 자신이 살기 위하여 죽이기도 하고 때론 옹기를 구워가며 자신의 주인을 숨겨주며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게 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 그들의 끈질긴 삶을 연명하기 위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이유없는 '삶'은 없듯이 모두가 그 빛이 다를뿐 세상에 온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인데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맞부딪혀 싸우느냐 아니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작가는 역설하며 그라면 맞써 싸우는 편을 택하고자함을 간접적으로 들어낸 듯 하다.'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나는,겨우,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정약전을 통해 본 흑산은 희망을 간직한 '자산' 이 되었듯이 아니 벗어날 수 없어 바다를 품었듯이 비록 아픔을 간직한 민초들의 삶이 박해를 받아 이름없이 스러져 갔어도 역사는 희망을 간직하고 굳건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런 이름은 없지만 걷건하고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삶의 희망과 같은 민초들의 삶을 그의 곰삭은 손맛으로 재탄생한 '흑산'은 그래서 더 힘들게 붙잡았던 것일까.내게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금 무게감과 힘을 빼고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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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목꽃 13일째와 피고 있는 꽃들

 

 



 

 

겨울비가 내리느라 날이 어두워서일까 아침에 베란다에 나가니

다른날 같으면 이시간이면 행운목꽃이 졌을텐데 오늘은 피어 있다..아침 10시경..

세상에나... 벌써 13일째인데 간혹 이렇게 필 것이 남아 있다니..

녀석 그 열정에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덕분에 아침의 베란다는 은은한 향기,

이젠 몇 개 남지 않아서인지 향기를 맡기 좋을 정도이다.

 





 





 





 





 





 

 

오늘 저녁에 몇 개 더 피고 나면 이젠 없을 듯 하다.

그동안 정말 녀석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다.

우울한 가운데 희망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녀석이 피어서 울집에 생기를 주기도 했다.

11월 행운목꽃이 있어 정말 행복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꼬물꼬물 꽃대를 올리고 있다.

안방베란다에 있는 보라색 바이올렛은 밤사이 민달팽이가 지났는지 녀석의 흔적이..

거실베란다에 율마가 햇빛을 가리고 있어 바이올렛에 햇빛이 잘 들지 않아

꽃대가 잘 올라오지 않는 듯 하여 율마를 옮겼더니 그동안 햇빛을 충분히 받았는지

서서히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거실베란다 뿐만이 아니라

안방베란다에도 안방창문가 올려 놓은 바이올렛에도 꽃대가 꼬물꼬물..

이녀석은 포트나 작은 화분에서 키울 수 있어 공간만 있으면 포트에 흙을 담아

잎꽂이를 해 놓아서 울집에 제일 많은 녀석이 '바이올렛' 이다.

그런데 이제 꽃대를 올리니 한동안 녀석 보는 재미에 살 듯 하다.

 



 





발렌타인 자스민

 

발렌타인 자스민이 활짝이다.

이녀석은 활짝인데 다른 가지에는 이제 몽오리가 올라오고 있다.

먼저 핀 것은 이제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데 떨어진 것도 이쁘다.

그런데 바이올렛 화분위로 떨어지니 바이올렛이 핀 듯한 착각...

 



 
시클라멘

 

 

시클라멘도 꽃대가 하나 둘 올라오기도 하고 핀 것도 있고..

작년엔 무척이나 많은 꽃대가 올라왔는데 올핸 아직 덜하다..

그래도 씨를 받아서 심은 것도 많이 자라서 꽃대를 올리고 있고 여기저기 화분에 시클라멘..

녀석은 보기엔 괜찮은데 사진빨이 영 아니다.

 

 



부겐베리아

 

 

부겐베리아..창가에서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녀석...

다른 가지에서는 꽃이 보이지 않는데 이 가지만 꽃이다.

색이 화려해 피면 이쁜데 꽃은 어느것이나 지고나면 밉다.

 



제라늄

 

 

안방베란다의 화단엔 제라늄이 한창..

삽목을 해서 새로 얻은 개체에서도 꽃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아직은 작지만 겨울에 창가를 아니 화단을 밝게 해줄 녀석들이다.

제라늄 뒤로는 은행나무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아직 떨구지 못하고 있다.

집안에 있는 은행잎은 바람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고 그냥 매달려 있다..

 



 





 





아젤리아...

 

 

녀석을 보면 지금이 봄인것 같다.

봄에 피어야 더욱 이쁜데 녀석 추운 계절에 피어 꽃잎이 그리 좋지 않다.

그래도 자꾸만 꽃을 올리는 녀석, 이번 추위에 단단히 삐질 듯 하다.

 

그외 사랑초는 날마다 피고 지고 늘 녀석을 보는 재미에 창가를 베회하기도 한다.

청사랑초도 죽은 줄 알았더니 잎이 하나 둘 올라오고 있다. 창가에 있지 않아

햇빛을 많이 못봐서인지 청사랑초는 좋지 못하다. 내년 봄에는 옮겨주어야 할 듯..

 

추운 계절 초록이들이 있고 녀석들이 주인장의 발소리에 응답하듯

가끔 이렇게 꽃을 보여주니 그 맛에 이 계절을 이겨낼 듯 하다.

초록이들은 추운계절을 조금 춥게 지내야 이쁜 꽃을 보여준다.

안쓰럽다고 겨울에 화분을 따듯한 거실로 옮겨 놓으면 군자란이나 그외 것들은

꽃을 보기 힘들다. 우린 옮겨놓을 정도가 아니다. 베란다마다 가득가득..

녀석들마다 정해진 자리에 늘 박혀 있듯 하다.

방마다 창가엔 '넉줄고사리'나 '햇빛이 잘 드는 곳엔 '장미허브' 화분을 놓아

그나름 푸르름을 보게 해 놓아 어디 들여놓을 곳도 없다. 거실에도 여기저기 화분이 있으니..

그래도 향기가 아닌 이쁜 색의 꽃을 이렇게 보답해주는 것을 보면

비가 내리는 날엔 그 나름 운치가 햇살이 좋은 날엔 햇살따라 베란다로 향하게 한다.

오늘도 녀석들과 먼저 눈데이트로 시작을 한다.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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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 캥거루 블랑켓 - 브라운
(주)아이코닉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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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 참 쓰임새 많을 듯 하다.고딩 딸들에게 하나씩 해주면 쓰임새 많게 올겨울 잘 사용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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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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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그는 토끼일까 인간일까? 그 중간이라고 해야하나. 사람이면서 토끼의 모습으로 태어난,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또한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그래서 토끼로 태어났을까? 초등하교 선생님이었던 맑은 여자가 오빠를 고문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평생을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고 차상문,무 또한 원하는 않는 삶으로 태어나 인간사 부조리를 겪어야 했다.

 

그가 잉태되던 순간부터 태어나던 순간까지 모두가 '희귀한 역사' 의 한 장면이었듯이 그의 모습 또한 '기묘한 영장류'인 토끼의 모습이라 그 또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타의에 선택되었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며 살아야 했던 삶이 인간사에서 토끼의 모습으로 그것도 IQ200 이란 숫자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주듯 그의 삶은 평범함을 벗어나 겉모습처럼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런 삶이 평탄했을까.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완벽한 토끼도 아닌 인간과 토끼의 중간쯤 되는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의 독특한 인생사는 역사와 맞물려 그의 인생다큐를 보듯 슬픈 역사가 펼쳐진다. 읽다보니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는 작품을 연상하게 되었다. 끝이 없는 이야기가 줄줄,정말 작가의 무한한 상상속에서 풀어내고 풀어내도 끝없이 나올듯한 고치의 실처럼 '차상문'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의 역사가 아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경 남북문제와 성문제 외국인취업자문제등 다향한 사회의 이면들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나 혼자 이산화탄소를 내뱉지 않는다고 환경문제가 해결될까,잉태의 순간부터 부정적이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삐딱이' 인것처럼 그는 '인간사'에도 완전하게 끼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토끼의 모습으로 자연에 귀속되어 완벽하게 토끼로도 살 수 없음이 슬프다.

 

미국유학까지 다녀오고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는 전문자리까지 보장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최고로 치는 대학의 교수직까지 얻게 되지만 사회는 아니 역사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국에 편승하여 아웃사이더가 되어 점점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차상문,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듯이 자신의 삶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이었을까.IQ200의 천재토끼였지만 인간사에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반듯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힐 그런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왜? 인간이 아니여서.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레푸스 사피엔스인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라서일까?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이 정말 사회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교수직을 뒤로 하고 사회의 뒷면에 숨어서 그가 사회에 '토'를 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그가 혼자 그렇게 노력한다고 사회가 바뀔까. '허, 그놈 참..... 토끼가 범을 두려워하지 않으니,장차 천지를 들었다 놓을 관상일세. 이놈아,부디 자중자애하시게.만유에 다 제 뜻이 있는 것을......' '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요?' 어디까지 앞만 보고 달여가야 멈출까.아니 한번쯤 뒤돌아보게 될까? 그런 시간이 있기나 할까? 앞만 보고 무조건적으로 달려가는 인간사,동화속 토끼와 거북이처럼 주변은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달려만 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만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렇게 자만하며 불편한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꼬집는다. 인간인듯 하면서 완벽한 인간도 아닌 토끼인듯 하면서 완전한 토끼도 아닌 그런 토끼 영장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사는 '불편함' 으로 거듭난다.그러다 '은둔자'가 되어버리는 토끼 차상문,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면 유나바머에서 소설은 싹텄다고 하는데 독특하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카진스키 이야기는 소로의 <월든>을 읽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발달된 문명속에서 탄생하고 삶을 이어나간 이가 문명을 벗어나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소로 역시나 2년여 기간인가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은둔자로 살았지만 다시 문명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완벽하게 문명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차상문이란 토끼 영장류의 탄생도 독특하지만 그의 슬픈 인생사도 독특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니 뭔가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것처럼 웃다가보니 눈물이 나오는 겪이 되고 말았다. 문명의 이기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하고 역사에 편승하여 앞으로 토끼처럼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 우리도 어쩌면 토끼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토끼 영장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불편함을 고쳐보려 노력하지 않으며 쿵쿵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나만 아니면돼.' 라는 생각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그대들에게 토끼 영장류 차상문이 경고하고 있다.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천명관 작가의 <고래> 이후 정말 그와 흡사한 독특한 서사를 보았다. 처음에 낯설음은 작가의 사설에 편승하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도달한것처럼 빠르게 앞만보고 달려간다.그러면서 무언가 놓친것을 뒤늦게 생각하게 한다. 읽고나도 무겁고 찜찜하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일까? 그리고 토끼 한마리가 가슴으로 들어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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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 큰 스카프 (올리브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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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카프 맘에 든다. 색상도 잔잔하고 길이도 괜찮은데 가로폭이 약간 망설이게 한다.넓은게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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