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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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그는 토끼일까 인간일까? 그 중간이라고 해야하나. 사람이면서 토끼의 모습으로 태어난,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또한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그래서 토끼로 태어났을까? 초등하교 선생님이었던 맑은 여자가 오빠를 고문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평생을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고 차상문,무 또한 원하는 않는 삶으로 태어나 인간사 부조리를 겪어야 했다.

 

그가 잉태되던 순간부터 태어나던 순간까지 모두가 '희귀한 역사' 의 한 장면이었듯이 그의 모습 또한 '기묘한 영장류'인 토끼의 모습이라 그 또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타의에 선택되었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며 살아야 했던 삶이 인간사에서 토끼의 모습으로 그것도 IQ200 이란 숫자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주듯 그의 삶은 평범함을 벗어나 겉모습처럼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런 삶이 평탄했을까.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완벽한 토끼도 아닌 인간과 토끼의 중간쯤 되는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의 독특한 인생사는 역사와 맞물려 그의 인생다큐를 보듯 슬픈 역사가 펼쳐진다. 읽다보니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는 작품을 연상하게 되었다. 끝이 없는 이야기가 줄줄,정말 작가의 무한한 상상속에서 풀어내고 풀어내도 끝없이 나올듯한 고치의 실처럼 '차상문'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의 역사가 아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경 남북문제와 성문제 외국인취업자문제등 다향한 사회의 이면들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나 혼자 이산화탄소를 내뱉지 않는다고 환경문제가 해결될까,잉태의 순간부터 부정적이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삐딱이' 인것처럼 그는 '인간사'에도 완전하게 끼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토끼의 모습으로 자연에 귀속되어 완벽하게 토끼로도 살 수 없음이 슬프다.

 

미국유학까지 다녀오고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는 전문자리까지 보장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최고로 치는 대학의 교수직까지 얻게 되지만 사회는 아니 역사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국에 편승하여 아웃사이더가 되어 점점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차상문,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듯이 자신의 삶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이었을까.IQ200의 천재토끼였지만 인간사에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반듯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힐 그런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왜? 인간이 아니여서.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레푸스 사피엔스인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라서일까?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이 정말 사회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교수직을 뒤로 하고 사회의 뒷면에 숨어서 그가 사회에 '토'를 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그가 혼자 그렇게 노력한다고 사회가 바뀔까. '허, 그놈 참..... 토끼가 범을 두려워하지 않으니,장차 천지를 들었다 놓을 관상일세. 이놈아,부디 자중자애하시게.만유에 다 제 뜻이 있는 것을......' '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요?' 어디까지 앞만 보고 달여가야 멈출까.아니 한번쯤 뒤돌아보게 될까? 그런 시간이 있기나 할까? 앞만 보고 무조건적으로 달려가는 인간사,동화속 토끼와 거북이처럼 주변은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달려만 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만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렇게 자만하며 불편한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꼬집는다. 인간인듯 하면서 완벽한 인간도 아닌 토끼인듯 하면서 완전한 토끼도 아닌 그런 토끼 영장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사는 '불편함' 으로 거듭난다.그러다 '은둔자'가 되어버리는 토끼 차상문,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면 유나바머에서 소설은 싹텄다고 하는데 독특하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카진스키 이야기는 소로의 <월든>을 읽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발달된 문명속에서 탄생하고 삶을 이어나간 이가 문명을 벗어나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소로 역시나 2년여 기간인가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은둔자로 살았지만 다시 문명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완벽하게 문명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차상문이란 토끼 영장류의 탄생도 독특하지만 그의 슬픈 인생사도 독특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니 뭔가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것처럼 웃다가보니 눈물이 나오는 겪이 되고 말았다. 문명의 이기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하고 역사에 편승하여 앞으로 토끼처럼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 우리도 어쩌면 토끼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토끼 영장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불편함을 고쳐보려 노력하지 않으며 쿵쿵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나만 아니면돼.' 라는 생각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그대들에게 토끼 영장류 차상문이 경고하고 있다.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천명관 작가의 <고래> 이후 정말 그와 흡사한 독특한 서사를 보았다. 처음에 낯설음은 작가의 사설에 편승하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도달한것처럼 빠르게 앞만보고 달려간다.그러면서 무언가 놓친것을 뒤늦게 생각하게 한다. 읽고나도 무겁고 찜찜하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일까? 그리고 토끼 한마리가 가슴으로 들어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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