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보다 여행 - 어느 여행자의 기발한 이야기
왕영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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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말 말만 들어도 설레이고 늘 갈증을 느끼는 것이 여행이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부터 모든것이 기계와 떨어져서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조수석에 앉아 내가 들고 있던 것은 '지도' 였고 인터넷에서 뽑은 갈만한 곳에 대한 자료들이었지만 나를 대신해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으로 모든것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여행을 다녀온 후 블로그에 후기를 남겨 뭔가 나의 여행에 대한 흔적을 더 많이 알리고 남보다 더 좋아 보이게 포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가졌던 '자유여행' 의 의미보다는 무언가로부터 지배를 받고 과제물을 제출하듯 꼬박꼬박 후기를 남기기 위한 '사진' 은 진정한 아날로그식 여행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여행을 떠나려면 제일먼저 챙기는 핸드폰 충전기 디카 충전기와 그외 밧데리등 기계를 위한 것들이 가방을 먼저 차지한다. 그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여행을 하려고 사진을 조금 덜 찍던가 남들에게 여행을 갔다는 문자를 몇 통 줄이면 왠지 모르게 아무 의미없는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 든다. 그만큼 여행은 나만을 위한 여행이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지기 위한 여행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 것들을 콕콕 집어 내어 작가가 풀어내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이 생각을 풀어낸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동기 없는 배움은 무의미하다. 동기 없는 삶은 감옥이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라는 말처럼 점점 체험의 비중을 두고 있는 우리내 생활이 자신을 체험한것을 혼자 간직하기 보다는 블로그를 통해 '공유' 를 하기 시작하고 부터 여행은 그야말로 사치스런 취미가 되어 버리고 그에 맞게 변질된 체험여행도 많이 등장을 하게 되었다. 자기 자식들에게 돈으로 유산을 남겨주기 보다는 '이년에 걸친 세계여행' 으로 유산을 남겨 놓는 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멋진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겨본다. 자신이 꿈 꾸던 그런 삶을 더 늦기 전에 자식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로 못 박아 놓으며 여행을 하지 않으면 한 푼도 주지 않는 그런 아버지가 과연 있을까 했지만 그런 이야기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여서일까 나 또한 그런 필수여행을 하고 싶어서일까.

'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학교였다.'
많은 돈을 들여 여행하기 보다는 저렴하면서도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좀더 자유로운 범위에서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추구하는 나 또한 '집보다 여행' 은 아니지만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행하는 것을 원한다. 아니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완전한 '여행생활자' 가 아니기에 '집보다 여행' 을 부리짖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가 살던 집이 아니 나의 보금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낀다. '집나가면 개고생' 이라는 말처럼 집에서 보다야 나가면 무엇이든 고생이다. 잠자리부터 먹는것까지 무엇하나 내 맘에 드는것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즐기려 하는것은 보다 새롭고 뭔가 새로운 비상구를 열 듯 그 문을 나서서 만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만남과 추억' 이지 싶다. 힘든 여행에서 간신히 뜨거운 물 한 컵 얻어 가족이 함께 먹었던 컵라면 하나가 정말 귀하게 여겨지듯 집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것을 모험하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은 그 떠난다는 자체가 좋은 것이다. 

다른 여행서와는 다르게 여행을 가서 여행지에서 느낀 여행에세이가 아닌 순수한 '여행' 에 대한 생각과 변화된 것들 그리고 여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불확실성과 즉흥적 선택은 여행자에게 곤혹스럼움을 주는 동시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짜릿함을 선물한다. 여행이 끝난 후 기억에 남는 것도 이와 비슷한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여행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행자로 하여금 이런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만듦으로써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좀 더 자신있게 상황을 컨트롤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데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능력을 일상에도 적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라는 말이 무척 공감이 간다. 많은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여행에서 얻는 것들이 일상에서 큰 힘이 되기에 우린 '재충전' 이란 말을 들며 여행을 즐기도 할 것이다. 여행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여행을 즐기느냐 하는 것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아날로그적이던 여행이 디지털화 되어간다는 것은 사실인듯 하다. 점점 내가 생각하고 함께 힘을 합쳐 대처하는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는 여행보다는 진정한 아날로그식 여행을 떠나고 싶기도 하다. 문명의 이기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섬여행을 하기도 했는데 빛이 속도와 같은 빠른 여행보다는 느리게 걷고 느리게 흡수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떠나기전 한번쯤 읽어볼만한 여행에세이다.

'소통의 궁긍적 목적은 본질을 찾는 것이다. 무조건 정보를 많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것들을 찾아내어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내고 실천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본질과 균형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자아이다. 여행은 건강한 소통을 되찾고 자아를 향하는 힘찬 발걸음이다. 여행은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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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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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하루키의 작품은 내겐 오랜 시간을 뜸들이고 비로소 손에 잡을 수 있다. 몇 작품이 있지만 아직도 읽지 못한 작품이 더 많은데 <1Q84> 3권이 나오면서 좀더 그의 작품과 친숙해지고 싶어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다. 하지만 하기휴가기간이라 진도는 나가지 않고 책 내용 또한 날 붙잡고 한참을 서성이게 한다. 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데 우연하게 고등학교 다니는 큰딸은 '노르웨이 숲' 원서를 읽고 있다.어디까지 읽었는지 서로 내용을 이야기 하며 좀더 '상실' 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루키가 그리고 있는 상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라 말하며 많은 상실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와타나베의 사랑과 삶을 배워나가는 방식을 그려나가는 것을 읽으면서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와타나베 기즈키 그리고 나오코
고등학교 친구인 기즈키와 마지막 밤 당구게임을 한 와타나베, 하지만 기즈키는 그가 '삶' 을 버리겠다는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만다. 17살에. 그의 남겨진 애인인 나오코와 이상한 관계로 엮이며 사랑을 하게 되는 와타나베,기즈키가 그에게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떠나갔듯이 나오코 역시나 '알 수 없는 상실감'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까지 가게 된다.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녀가 완치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하나.

미도리 나오코 그리고 와타나베
나오코를 만나면서 우연하게 같은 강의를 듣던 미도리가 다가오고 그들은 친구이상의 감정으로 흐른다. 아버지가 서점을 하여 자매를 키우고 있는 미도리는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마져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으시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의 희망' 을 붙잡고 병원에 입원중이신 아버지를 간호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미도리를 나오코가 없는 빈자리를 채우듯 그녀 또한 애인이 있으면서 그들은 관계를 이어 나간다.

나가사와 하쓰미 그리고 와타나베
와타나베가 다니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한 선배 나와가사, 그는 독하게 공부를 하여 외무고시에 합격을 하기도 하지만 여성편력이 무척이나 심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의 유일한 애인인 하쓰미를 3년여 사귀면서도 결혼은 반대하면서 다른 여자들을 헌팅하듯 한다. 그런 그의 짝처럼 늘 와타나베를 데리고 나가는 나와가사, 하지만 그도 하쓰미가 자살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빈자리를 느낀다. 

나오코 레이코 그리고 와타나베
유년기부터 기즈키와 친구처럼 지낸 나오코, 그둘 사이에 와타나베 전까지는 타인이란 없었다. 둘만이 전부였던 그들, 하지만 기즈키가 이유도 없이 자살을 하고 나서 나오코 또한 정신병원인 '아미료' 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단짝처럼 한방을 쓰는 레이코, 그녀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다. 피아노를 치다가 우연하게 새끼손가락의 마비로 인하여 정신병을 얻게 되고 동기들은 잘나가는데 겨우 피아노선생을 하며서 살던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는 남자가 생기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여 딸을 낳게 되지만 우연하게 레슨을 받으러 온 13살 레즈비언 소녀에게 겁탈을 당하고는 정신병이 도져 그녀 또한 아미료에 들어와 음악선생을 하며 남들을 도와주며 산다. 그녀는 8년여 병원생활을 하여 '세상' 에 나아가는 것을 겁내 하고 있다가 병이 심해져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던 나오코가 짐을 정리하러 병원에 왔다가 자살을 하게 됨으로 하여 와타나베에게 그녀의 마지막을 전해줄겸 세상에 나오게 된다.

'내게 기즈키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즈키의 죽음으로 나의 어도어 센스(사모의 정)라고나 할 수 있는 기능의 일부분이 완전히 영원히 손상되어 버린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무척 친한 친구는 아니어도 유일한 고등학교 친구였던 기즈키의 죽음 이후 어도어 센스를 잃어버린 와타나베처럼 기즈키의 애인이었던 나오코 역시나 '어도어 센스' 를 잃어버린것은 아닐까. '좋은 이별' 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친구의 자살로 인하여 무언가 자신안에 있던 것을 '상실' 해 버린 그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나오코의 죽음으로 인해 깨달은 와타나베 '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언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한달여 여행동안 깨달으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상실' 의 시대에 만났던 노래 '노르웨이 숲' 처럼 인간관계도 무성한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는 삶도 죽음도 모두가 일부분임을 말하고 있다.

한참 예민한 나이인 17살에 겪게 된 친구의 자살과 그의 연인었던 나오코의 자살 그리고 여자친구를 자청하는 미도리 아버지가 죽기전 잠깐 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거치며 그는 점점 죽음에도 삶에도 단단하게 여물어 간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고 사랑도 삶의 일부분이고 모든것에 대한 상실 또한 삶의 일부분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삶은 또 변할 수 있다. 문체작가라 할 정도로 세세하면서도 성애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읽으면서 점점 그에게 몰입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와 잘 짜여진 삼각관계를 끊임없이 이루어 내어 원제처럼 '숲' 을 만들어 내는 그의 놀라운 마력은 한번 그의 작품을 읽으면 '중독' 외 되게 만든다. 이작품 전에 <1Q84> 를 읽었는데 '표현이 정말 놀랍다' 라고 느꼈는데 이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남보다 더한 타고난 표현력을 가지고 있나보다. 상실감을 겪어가며 성장해 가는 와타나베를 통해 지난시절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상실의 시대' 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성의 문화가 표현되기는 해도 그가 단편 '반딧불이' 를 가지고 이런 장편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반딧불이가 밤하늘 속에 잠깐 빛을 발하며 날아가고 그 순간을 '환상'처럼 기억하듯 모든것은 지나고 나면 순간의 삶이며 젊은 날 슬프고 감미로운 사랑은 삶을 더욱 단단하게 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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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가는 길
케니 켐프 지음, 이은선 옮김 / 이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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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진가를 몰랐던 내 아버지 O.C. 켐프에게 바친다.'
루게릭병으로 자신의 삶을 다 살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떠난 후에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가치를 알아가는 아들의 진솔한 이야기다. 케니 뿐만이 아니라 우린 사물이건 사람이건 바로 곁에 있을 때는 그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 정말 필요했던, 그사람의 존재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사물도 마찬가지겠지만... 부모님은 또 어떠실까? 옆에 있을 때는 그저 '잔소리꾼' 으로 알다가 내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아보면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잘해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하면 이미 떠나고 안계시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을까?
버러진 물건으로 뚝딱뚝딱 다시 새로운 것을 잘도 만들어 내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보물창고인 차고는 그야말로 없는것이 없을 정도이고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하다. 고막을 다쳐 한쪽 청각을 상실한 아버지가 가고 싶던 공군이 아닌 육군에 보병으로 가게 되었지만 꿈을 포기 하지 않고 전속 신청을 하여 비행기 조종을 하게 된 이야기 '어이, 켐프, 이 운 좋은 자식. 너 땡잡았다! 전속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500명의 대대원 중에서 전속 신청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고, 성공한 사람은 아버지 혼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에겐 한쪽 고막의 이상도 꿈 앞에선 문제될게 없었다. 노력만 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모아 놓기도 하고 남이 자신을 욕을 먹여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던 분, 그런 분의 빈자리가 얼마나 클까? 

아버지는 가장 귀한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내어 차가 고장이 났을 때 폐차장에 함께 가서 필요한 부품을 구하고 그 부품들로 자신이 고장내어 놓은 차를 혼자서 수리하게 한 아버지, ' 비록 내 솜씨가 형편없고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차를 못슨다 해도 직접 고치면서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고기를 그냥 주는 것과 미끼 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차이를.' 탈무드에 자주 나오는 글을 이 글에서도 보는 듯 하다. 물고기를 선뜻 입에 물려 주기 보다는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던 앞날을 내다 보는 아버지는 손수 몸으로 아들에게 보여주신듯 하다. 그의 교육 방법이 요즘 무엇이든 자식들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앞장서는 부모들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며 큰 가르침을 준다. 

남들처럼 배움이 큰것도 아니요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직업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식들과 함께 경험하고 느끼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었던 것 같다. 거기에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것들로 새로운 물건을 재탄생 시키면서 무엇이든 '의미'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루게릭이라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육체를 어쩌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나서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보내셨을까. '죽기전에' 하번 자신이 비행했던 비행기를 한번 보는 것을 꿈으로 여겨 아들에게 폐물처럼 버려진거아 같은 비행기에 앉아 보여지는 것들을 말해보라 하는 아버지의 꿈과 삶이 상실해가는 것을 보며 눈물이 글썽였다.난 내 아버지에게 잘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이다음에 후회할 일을 지금 저지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여기고 무엇이든 못 만드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루게릭병으로 짧은 여생을 마루리 하고 몇 개월이 지난 후 아버지의 빈자리를 비로소 느낀 그가 아버지의 물건을 치우려 집에 갔다가 아버지가 늘 머문 '아버지의 장소' 인 차고에 들어가 보고서야 비로소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추억과 존재가치' 를 들여다 보게 된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했다시피 뭘 만드는 것에 관한 한 최고였고, 재료만 있으면 핵폭탄이라도 만들 수 있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궁리해 고치면 재활용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활용을 뛰어나게 잘하셨던 아버지는 처음 인생의 난관이었던 청력상실은 이겨냈지만 두번재 얻은 '루게릭병' 은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을 하고 말은 아쉽고 안타까운 아버지의 인생을 뒤돌아 보며 아버지에게 보내는 연서처럼 쓴 짧은 글이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안겨 주기도 하며 눈물 흘리게 한다. 이시대의 아버지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뒤로 밀려나 찬밥신세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한데 늘 자식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추억이 되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되새기를 글을 읽으며 내 아버지에게도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보며 내 옆을 지금 함께 해주고 있는 그에게도 잘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너무 놀랍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나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의 손은 힘이없고 차가웠다. 아버지의 몸은 점점 기능을 멈추어가고 있었고, 눈물이 맺힌 채 반짝이는 눈만 심장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 너희들 그거 아니? 이제 아버지가 드디어 양쪽 귀로 들을 수 있게 됐구나!'  아버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의 한 말씀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평생 한이 되었던 한쪽 귀의 청각상실이 얼마나 그를 힘들게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님의 말씀처럼 죽음으로 인해 양쪽 귀의 청각을 가지게 되었다. 

문득 이 책을 읽다보니 작년 여름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큰병원에 입원하게 되시고 이것저것 검사결과 폐암2기라는 판정이 나고 우리 가족 모두가 지옥에 떨어진듯 하던 그 힘들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난 처음으로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을 보았고 팔십평생 자식들을 위해 농사를 지으시며 자식들 먹거리를 책임지셨던 강인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몸은 그야말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장작개비 같았다. 아버지의 팔 다리를 주무르며 눈물짓던 그때, 남은 시간동안 좀더 잘해드려야 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도 잠시. 내 삶에 저 집중하게 되고 점점 아버지의 아픔을 잊게 되는 현실이 가슴 아프지만 어쩌지도 못하는 그 마음을 가끔 전화로 위로하는 못난 딸, 그래도 큰소리로 '허허' 웃으시며 한곳도 아프지 않으시다며 나와 내 아이들을 먼저 챙기시는 아버지, 아프지 말고 좀더 오래사시길 바래보며 이 책을 읽었다. 짧지만 느낌이 강한 이야기이며 지금 '나' 를 뒤돌아 보게 하는 책이다. 무언가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실천할 때임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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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나비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박완서 지음 / 푸르메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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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문학상을 받은 5개의 작품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의 시선에서 바라 본 이야기들이라 그런지 가슴에 와 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문단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노작가의 힘은 작품에서도 다분히 들어나는 듯 하다. 이 책은 오래전에 구매를 해 놓고 읽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작이 나온것을 보니 작가의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보며 읽게 되었는데 여자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더욱 술술 읽어나가게 된 것 같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성폭행을 당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고 그런 아이를 선배의 병원에 가서 소파수술을 한 후 그녀 또한 '소파수술' 전문 의사가 되는 그녀에겐 자신의 일을 그만두게 되기 전 딱 한가지 소원이 있다. 아이를 죽이는 일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고 싶은 소원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처음 그녀가 병원을 개원하게 된 곳은 사진관 이었던 곳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던 '의자' 가 하나 있다. 그 의자는 어디로 치우지도 못하고 있다가 첫 손님으로 아버지가 그 의자에 앉게 되는데 의자의 주인은 아버지였던 것처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 후로도 치우지 못하고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의자, 병원은 생각보다는 잘 되어 첫날부터 병원비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가며 건물주인의 미혼인 딸의 아이를 받게 된다. 그것이 그녀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살아 있는 아기' 가 되는 셈이기도 하고 그 아이는 미혼모의 아이가 아닌 건물주의 업둥이로 되는 비밀을 간직한 채 그곳으로 일을 그만두는 30여년의 세월동안 그곳을 지킨다. 하루하루 일을 그만두어야 할 즈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남의 아이가 아닌 자신의 아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들고 마지막 날 찾아온 처녀의 아이를 살려보려 노력을 하지만 받는 순간 살아 있던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한다. 

엄마의 말뚝2, 자신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 왜 그런일이 벌어지는지 자신도 모르지만 어느 날, 친구의 집에서 앵두주를 마시고 취해 돌아온 그녀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전해진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 하지만 자신의 가족은 모두 무사하다. 그런데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친정엄마, 눈길에 넘어져 골반을 심하게 다치신 것. 자신의 식구가 아니라 다행이라 해보았지만 엄마도 가족이나 마찬가지. 잠깐 잠을 취한 후에 병원에 도착하여 상황을 듣게 되는데 생각보다 중상이다. 연세도 있으신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 엄마가 수술후에 이상한 증상을 보이신다. 아들을 잃고 꿋꿋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힘든 수술후에도 희망이 얼마없다.그런 어머니 앞에서 장례에 대하여 말하던 친구들의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의 유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보내달라는 것, 어머니의 투병은 끝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아픈 이야기다.

꿈꾸는 인큐베이터, 늘 학교선생님인 동생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언니, 그런 동생에게 멀리 떨어져 있기보다는 가까이 자신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 어떻겠느냐는 말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이 이사를 오면서 그녀는 동생의 아들을 보게 된다. 그런 조카가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하는 날, 비디오로 남기려 하지만 그녀의 서툰 솜씨로는 켜는것 조차 힘들다. 그런데 마침 옆에서 저음의 멋진 남자가 대신 찍어주겠다고 나서고 그가 찍은 비디오는 동생의 맘에 든다. 우연하게 만난 그 남자와 딸과 아들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던 중, 그녀는 집요하게 그가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하여 물고 늘어지다 자신 또한 시어머니와 시누이 덕에 양수검사를 하고 아들을 낳은 것을 상기한다. 과연 아들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간 생명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번 더 여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준다. 

환각의 나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가정을 혼자 힘으로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늘 손발처럼 움직였던 딸, 남동생이 있지만 그녀는 치매기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없어지셨다. 다른 때 같으면 남동생네 집으로 향하는 의왕터널 근처에서 발견되는데 어머니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근처 도시와 그들이 살았던 곳까지 포스터와 그외 방법을 동원하여 찾아 보지만 어머니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지신 것일까. 한편 무당집이었다가 현재는 절집으로 거듭난 마금이라는 처녀가 사는 절에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자신의 집인양 들어와 아욱을 다듬는 것에서부터 아욱국을 맛난게 끓이기도 하여 그녀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처럼 살게 된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오래전 하숙집을 경영하며 하던 솜씨로 절살림을 하며 마금이와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다. 우연히 이곳 근처를 지나던 딸은 빨래줄에 걸린 어머니의 옷을 보고는 대웅전으로 향하다가 너무도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두 승복 입은 여인을 보게 된다. '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까.' 현실이 아닌 환상을 보는 것 같은 신비함으로 끝을 맺은 소설은 만약에 내 부모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는 듯 하다.

소설들은 모두가 여자의 시선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쓴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여자만의 문제이겠는가. 소파수술을 해야만 하는 여자들, 그것은 그녀들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 누군가 원하는 상대가 있었기에 그런 문제가 발생을 하였고 그것을 여자의 눈으로 들여다 보았기에 아니 건물주 황씨처럼 '아들' 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남자' 를 바라보는 눈과 '여자' 를 바라보는 눈은 태어날 때 부터 다르다는 것을, 그 간극으로 인해 여자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에 대하여는 '꿈꾸는 인큐베이터'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듯 하다.  아들이면 세상에 나올 수 있지만 ' 딸' 이라고 하면 세상에 태어나기 보다는 미리 '죽음' 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태아, 그런 아이들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여자들의 자궁, 그 자궁에서 함께 태어난 남자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를 모시기를 꺼려 하기도 한다. 아니 자신이 모시는 것이 아닌 여자가 모시는 것, 아내가 모시는 것이라며 전적으로 아내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런 아내에게서 어머니는 집에 갇혀지게 되기도 하고 자신의 방에 갇혀지게 되면서 사납게 변하고 거울속의 자신조차 알아 보지 못하지만 그 세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갔을때는 그런 자신이 살던 세상의 고치에서 탈피하여 나비가 된듯 편안하고 자유로움에 젖어 지내게 된다. 소설들은 가만히 보면 보이지 않는 끈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속 중에서 여자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보고 나온 것처럼 소설을 읽고 나면 친구와 많은 수다를 떨어 가슴에 묻어 두었던 '화' 를 털어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자이기에 사회로부터 받는 알 수 없는 규제가 소설로 승화된 느낌이랄까.여자들이 읽는 다면 많은 부분 공감을 할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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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탈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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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꼭 살아서 돌아갈 거야. 군대에 갔다 오면 틀림없이 면 서기 시켜준다고 했거든.' 
스무 살, 한참 꽃다운 나이에 남들은 일찍 장가를 가서 애 둘씩은 두고 있었지만 신길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일본군에 징집되어 관동군 고바야기 부대의 일원으로 국경 전투에 임하게 된다. 너무도 가난하여 소작농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그들에게 '면 서기' 라기 허울 좋은 사탕발림은 그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열쇠처럼 일본군에 징집되어 가는 데 한몫을 한다. '총알을 피해다려나.' '관세음보살을 되뇌어보라.' 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전장에서 늘 되새겨 보지만 고향은 멀기만 하고 죽음은 너무도 가깝게 늘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전쟁만 끝나면 배부르게 먹고 가난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던 청사진의 미래가 고향과 함께 점점 멀어져만 간다. 금방 끝나고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했던 전쟁에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포탄의 밥이 되어 죽어 가기도 하고 얼어가는 것도 모르고 동사되기도 하고 그 생지옥과 같은 곳에서 탈출하여 어딘지 모르지만 '그곳' 으로 떠나려고 발버둥치다 총알밥이 되기도 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처량하고 고달픈 일본군으로의 일상에서 살아남는 수보다는 점점 죽어가는 수가 많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만나는 '한국말과 고향같은 사람들' 로 인하여 향수를 달래던 그들은 누가 거둬들여야 하는 불쌍한 민족이란 말인가.


'그들은 이제 한 덩어리로 뭉친 일본군이 아니라 하나, 하나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이 아닌 소련군이 우세하여 그들은 어쩌다 보니 소련군이 되어 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선택으로 국적을 달리 하게 된 그들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하여 소련군을 택했지만 그들의 의사가 어디에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이든 소련군이든 늘 배고픔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전장에서 힘든 일을 소화해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그대로 고향에 돌아간다면 면 서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느 날, 소련군이었던 그들은 다시 독일군이 된다. 더 나은 현실을 택하기 위하여 자신의 국적이 중요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고향은 점점 멀어져 가고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좀더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 해야만 하는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삶 속에서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어느사이 '2차대전' 의 속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의 국적은 어디이고 누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인가?'
노르망디의 해변에서 힘든 일을 하며 고향을 꿈 꾸던 그들은 미군포로가 되었지만 자신의 국적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 미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 곳이고 고향이 어디쯤일지 모르면서 미국으로 향했던 그들이 마지막 발버둥처럼 자신의 국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국제포로' 가 된 신세. 좀더 그들이 무능하지 않아 그곳에서 탈출을 했더라면 고향 근처는 아니어도 고향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그들의 또 다른 삶은 일구었다면 비참하지 않았을 터인데 마지막 처참하게 자신들이 선택하지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그들의 질곡의 삶, 기구한 삶이 한국전쟁 60년을 맞이 하여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 이 남자는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 국경 분쟁 당시 소련군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 소설은 '노르망디 조선인(한국인)' 이라는 한장의 사진에서 출발을 했다. 일본군으로 징집되었지만 소련군으로 독일군으로 또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어 세계사의 한복판에 내던져졌지만 강대국들의 배타적인 자국주의에 인간이기 보다는 물건으로 취급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우리의 지난날의 질곡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전장에서의 생생함이 사실대로 묘사되고 신길만이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꾸만 멀어져 가는 꿈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비참함을 극대화 시켜준 듯 하다. 비단 작품속 인물이 한 둘은 아닐터 지금도 이승을 떠돌고 있는 원한의 영혼들의 들어나지 않은 '진실' 은 무척이나 많을 듯 하다. 역사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 밝혀지기도 해야지만 잘못을 저지른자 들은 사과를 해야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언제까지 정정당당하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역사 앞에서 옳고 그름은 후세를 위해서도 인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빼앗아 간것은 돌려줘야 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보상' 을 역사의 저울추가 기울지 않게 지불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의 묘기중에 얼굴이 바뀌는 신통한 묘기가 생각난 것은 무엇 때문일지. 소설속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사실' 이기에 더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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