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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나비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박완서 지음 / 푸르메 / 2006년 6월
평점 :
이 책은 작가가 문학상을 받은 5개의 작품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의 시선에서 바라 본 이야기들이라 그런지 가슴에 와 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문단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노작가의 힘은 작품에서도 다분히 들어나는 듯 하다. 이 책은 오래전에 구매를 해 놓고 읽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작이 나온것을 보니 작가의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보며 읽게 되었는데 여자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더욱 술술 읽어나가게 된 것 같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성폭행을 당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고 그런 아이를 선배의 병원에 가서 소파수술을 한 후 그녀 또한 '소파수술' 전문 의사가 되는 그녀에겐 자신의 일을 그만두게 되기 전 딱 한가지 소원이 있다. 아이를 죽이는 일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고 싶은 소원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처음 그녀가 병원을 개원하게 된 곳은 사진관 이었던 곳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던 '의자' 가 하나 있다. 그 의자는 어디로 치우지도 못하고 있다가 첫 손님으로 아버지가 그 의자에 앉게 되는데 의자의 주인은 아버지였던 것처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 후로도 치우지 못하고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의자, 병원은 생각보다는 잘 되어 첫날부터 병원비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가며 건물주인의 미혼인 딸의 아이를 받게 된다. 그것이 그녀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살아 있는 아기' 가 되는 셈이기도 하고 그 아이는 미혼모의 아이가 아닌 건물주의 업둥이로 되는 비밀을 간직한 채 그곳으로 일을 그만두는 30여년의 세월동안 그곳을 지킨다. 하루하루 일을 그만두어야 할 즈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남의 아이가 아닌 자신의 아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들고 마지막 날 찾아온 처녀의 아이를 살려보려 노력을 하지만 받는 순간 살아 있던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한다.
엄마의 말뚝2, 자신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 왜 그런일이 벌어지는지 자신도 모르지만 어느 날, 친구의 집에서 앵두주를 마시고 취해 돌아온 그녀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전해진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 하지만 자신의 가족은 모두 무사하다. 그런데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친정엄마, 눈길에 넘어져 골반을 심하게 다치신 것. 자신의 식구가 아니라 다행이라 해보았지만 엄마도 가족이나 마찬가지. 잠깐 잠을 취한 후에 병원에 도착하여 상황을 듣게 되는데 생각보다 중상이다. 연세도 있으신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 엄마가 수술후에 이상한 증상을 보이신다. 아들을 잃고 꿋꿋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힘든 수술후에도 희망이 얼마없다.그런 어머니 앞에서 장례에 대하여 말하던 친구들의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의 유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보내달라는 것, 어머니의 투병은 끝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아픈 이야기다.
꿈꾸는 인큐베이터, 늘 학교선생님인 동생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언니, 그런 동생에게 멀리 떨어져 있기보다는 가까이 자신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 어떻겠느냐는 말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이 이사를 오면서 그녀는 동생의 아들을 보게 된다. 그런 조카가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하는 날, 비디오로 남기려 하지만 그녀의 서툰 솜씨로는 켜는것 조차 힘들다. 그런데 마침 옆에서 저음의 멋진 남자가 대신 찍어주겠다고 나서고 그가 찍은 비디오는 동생의 맘에 든다. 우연하게 만난 그 남자와 딸과 아들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던 중, 그녀는 집요하게 그가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하여 물고 늘어지다 자신 또한 시어머니와 시누이 덕에 양수검사를 하고 아들을 낳은 것을 상기한다. 과연 아들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간 생명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번 더 여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준다.
환각의 나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가정을 혼자 힘으로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늘 손발처럼 움직였던 딸, 남동생이 있지만 그녀는 치매기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없어지셨다. 다른 때 같으면 남동생네 집으로 향하는 의왕터널 근처에서 발견되는데 어머니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근처 도시와 그들이 살았던 곳까지 포스터와 그외 방법을 동원하여 찾아 보지만 어머니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지신 것일까. 한편 무당집이었다가 현재는 절집으로 거듭난 마금이라는 처녀가 사는 절에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자신의 집인양 들어와 아욱을 다듬는 것에서부터 아욱국을 맛난게 끓이기도 하여 그녀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처럼 살게 된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오래전 하숙집을 경영하며 하던 솜씨로 절살림을 하며 마금이와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다. 우연히 이곳 근처를 지나던 딸은 빨래줄에 걸린 어머니의 옷을 보고는 대웅전으로 향하다가 너무도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두 승복 입은 여인을 보게 된다. '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까.' 현실이 아닌 환상을 보는 것 같은 신비함으로 끝을 맺은 소설은 만약에 내 부모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는 듯 하다.
소설들은 모두가 여자의 시선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쓴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여자만의 문제이겠는가. 소파수술을 해야만 하는 여자들, 그것은 그녀들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 누군가 원하는 상대가 있었기에 그런 문제가 발생을 하였고 그것을 여자의 눈으로 들여다 보았기에 아니 건물주 황씨처럼 '아들' 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남자' 를 바라보는 눈과 '여자' 를 바라보는 눈은 태어날 때 부터 다르다는 것을, 그 간극으로 인해 여자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에 대하여는 '꿈꾸는 인큐베이터'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듯 하다. 아들이면 세상에 나올 수 있지만 ' 딸' 이라고 하면 세상에 태어나기 보다는 미리 '죽음' 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태아, 그런 아이들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여자들의 자궁, 그 자궁에서 함께 태어난 남자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를 모시기를 꺼려 하기도 한다. 아니 자신이 모시는 것이 아닌 여자가 모시는 것, 아내가 모시는 것이라며 전적으로 아내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런 아내에게서 어머니는 집에 갇혀지게 되기도 하고 자신의 방에 갇혀지게 되면서 사납게 변하고 거울속의 자신조차 알아 보지 못하지만 그 세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갔을때는 그런 자신이 살던 세상의 고치에서 탈피하여 나비가 된듯 편안하고 자유로움에 젖어 지내게 된다. 소설들은 가만히 보면 보이지 않는 끈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속 중에서 여자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보고 나온 것처럼 소설을 읽고 나면 친구와 많은 수다를 떨어 가슴에 묻어 두었던 '화' 를 털어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자이기에 사회로부터 받는 알 수 없는 규제가 소설로 승화된 느낌이랄까.여자들이 읽는 다면 많은 부분 공감을 할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