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교가 종교로 불리는지.. 약간의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일단 불교에는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그러한 절대신(神)이 없다(우회적인 임시 방편으로 신을 다루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불교 안에는 긴 시간 동안 다르게 진행된 흐름들도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불교(학파, 종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불교가 다양한 이론들을 힘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체 논의를 통한 합리적인 선택을 기다리는 자세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론들조차 인연에 내맡기는 태도라고 해야할까?
따라서 종교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논리학과 인식론(불교에는 이 둘이 엄격하게 떨어지지 않는다)이 발달하고 인과-관계성을 강조한다(절대신의 기적으로 바뀔 틈이 없다). 그것을 철학적? 전개의 모습으로 보자면, 이미 서양 철학에 훨씬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아비달마를 비판하는 용수의 공사상(중관사상), 역시 아비달마(설일체유부)를 비판하면서 중관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식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의 긍정적인 격돌 이후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 디그니가의 '아포하론'과 다르마끼르띠의 '찰나멸 논증'을 꼽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론의 극단적인 몸짓들은 티베트로 흡수되어 다시 보존, 발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의 치열한 모습이 담긴 책들을 몇 권 골라보았다.
<-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의 이 책은, 보통 티베트하면 밀교를 떠올리는 고질적인? 분위기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철학의 온전한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물론 티베트와 밀교(딴뜨라)의 깊은 연관성을 속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다.
섣부른 예감일지 모르겠지만, 프랑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양 철학의 마지막 향유가 사그라들쯤에, 그것을 넘어갈 힘을 불교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개 창조적인 해석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더군다나 최근의 철학 흐름에 대해 무지해서, 과거 불교에서 이룬 뛰어난 성과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거나 번식시키는데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헌학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철학-텍스트를 다룬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통해 불교, 특히 중관과 유식이 끌어올려지고 있는데, 서로의 닮은꼴을 비비는 차원은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얼추 비슷함을 발견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비비는 작업에서 뜨거운 열이 나서, 예상치 못한 높이로 도약하는 그러한 발전을 기다려 본다.
<-어쨌든 중관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 유식은 현상학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 책 역시 유식사상과 현상학을 같이 다룬 것인데, 저자는 단순하게 이 둘의 비슷함을 강조하려는 작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좀 구식이 된 사유에 대한 끌림이 없더라도 유식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통합 접근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우리나라를 보자면, 원효나 의상 같은 큰 인물이 있다. 원효의 진가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날 거라는 예상을 해 본다. 최근에 나온 <스피노자와 붓다>처럼 서양에서 다소 이질적인 철학적 사유들이 불교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비트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것이 초기 단계라 다소 들뜬 흥분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충격이 여태의 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변형은 수행적 실천에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원효와도 만난 적이 있다. 신오현의 <원효 철학 에세이>에 실린 글 '스피노자 철학의 원효 철학적 해석'이 그것이다. 저자 신오현은 서양철학을 탄탄하게 거친 후, 동양철학 특히 불교로 방향을 돌렸는데, 불교를 철학적으로,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불교(철학)적으로 해석하기의 가능성까지 나아가려는 열의를 보여준다. 처음에 잠시 유식학에 관심을 두다가 어떤 계기로 원효를 만나게 되는데, 원효의 불학을 통해서 불교에 잠재되어 있지만 현재화 되지 않은 것과 근대 이후 서양철학이 다가왔지만, 벽에 부딪힌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 그러한 몸짓이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화엄에 큰 관심을 쏟았다. 화엄을 다룰 때도 그 기본 바탕엔 기신론의 적용과 확장이 있는데, 이는 중관과 유식으로 벌어진 극단의 간격을 비판적 안목으로 화해하는 실천적인 해석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학이 유럽학자들, 거기다 일본의 렌즈를 거친 자료를 통해 연구되는 실정이라, 아직까지 원효의 가치가 크게 나타나진 않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불행이면서 다행이라 여긴다. 중관과 유식의 극단의 치우침을 역동적으로 건드려서 되살리려는 원효의 실천적 기질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상당히 훌륭한 성과가 나올것이다.
보통 불교의 옳은 방향을 아비달마의 요소들(실재들)을 파괴하는 작업들에서 찾는데(가령 용수), 그러한 불교 안에서의 모습 말고도 인도의 정통철학인 베단타와의 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불교가 나왔을 때, 인도에서는 불교를 자이나교와 더불어 이단으로 여겼다고 하니,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에 앞서 전체적인 흐름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 같다. 많은 불교사를 다룬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라모뜨의 이름은 남다르다.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좁은 불교학 테두리에서만 그 울림이 작게 속삭였으리라..
벨기에에 라모뜨가 있다면, 구소련에는 체르바스키라는 걸출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불교논리학에 대해 조예가 깊었는데, 불교를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이 사람도 그냥 지나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귀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아쉽다(이 외에도 예전에 <소승불교개론>이라는 다소 얇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다).
현대적인 불교 연구는 서양이 먼저 시작했다. 순수한 학문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도우미로 시작한 것이지만, 그 성과를 단순히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시각에서 들춰진 불교는 본래의 생기를 잃었을 게다. 왜냐하면, 불교는 단순히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지 않은가. 자각과 체험, 그리고 실천이 빠진 불교는 대단히 위험한 이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교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동양의 학자들도 전수를 받고, 그것이 불교학의 원래의 방법인양 반복하고 있다.
<현대불교학 연구사>는 고대부터 최근까지 불교가 어떻게 발견, 해석, 연구되었는지를 폭넓게 다룬 책인데, 불교학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좋은, 그리고 이런 주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칼루파하나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데, 전에 시공사에서 <불교 철학사>란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번에 다시 <불교철학의 역사>로 환생했다. 불교학계에 큰 논의를 일으킨 책이니 만큼, 기회가 있다면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불교, 불교학을 둘러보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 불교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세계에 큰 반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학으로써 불교학의 역할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책인데, 불교 경전의 번역과 그 내막 등을 알기에 적당해 보인다.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 모음이라 더욱 반갑다.
<-아무래도 대승불교의 정수는 티베트로 많이 흘러 들어갔는데, 특히 중관사상의 새로운 발전상들도 찾아볼 수 있다.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 책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이지만, 잠깐 멈춰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쫑카빠는 티베트의 유명한 스님으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겸비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교상판석을 시도한 책으로 여러 비판적인 관점이 녹아있다. 유식과 관련된 해심밀경을 다루기도 하고, 용수, 청변은 물론 중관자립파나 중관귀류파 등 후기 중관 사상의 세세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책까지 번역되어 나왔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입문서 성격의 책은 빼고 실제적으로 불교의 참맛(그러나 적당히 어려운?)을 알려줄 만한 책을 골랐다. 그리고 유식과 중관에 대한 책은 다루지 않았는데, 이들은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는 필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얕지 않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위에서부터 차례로 추천하고픈 중요한 책들을 보자면, 맨 위에 다룬 <무상의 철학>,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은 현대적인 언어로 접근한 책이므로, 읽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현대철학을 과거의 뛰어난 성취를 통해서 자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티베트 불교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라모뜨의 <인도불교사>와 체르바스키의 <불교 논리학>도 불교학의 고전이자 중요한 책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룬, <현대불교학 연구사>와 <불교철학의 역사>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