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월의 마지막 주말. 

 

 

 

 

한자경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이해>가 나왔다. 독일에 가서 칸트 등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불교철학으로도 그 지적관심이 확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자경 교수의 이러한 과정들은 꼬박꼬박 책으로도 나오는데, 그것을 따라가며 음미하는 재미도 괜찮다.  

 

 

 

 

 

 

 

 

 

 아무래도 <율리시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지금 테리 핀카드의 <헤겔>을 막 보는 참인데 1000 쪽이 넘는다. <율리시스>는 그보다 더하니, 양 손에 번갈아가며 아령하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카프카도 제대로 못 넘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은 언제 다 읽을 것인지 까마득하다.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가 새롭게 나왔다. 전에 나온 책은 절판이 된 모양이고, 출판사도 바껴서(번역자는 전과 같음) 나왔는데, 여기서 계속 다른 책들도 이어서 나올 태세다. 이론과 실천 모두 훌륭한 분으로 보이는데, 모든 책이 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내가 바라는 책은, <능엄경 강의>인데 이 책도 어서 번역이 되어 나왔음 한다. 

 

 

 

 

 

 

 

 

정말 <금강경>은 그 황금빛 발산처럼 무수히 많은 책들이 사방을 메운다. 이러한 풍족함이 좋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 좋은 금강경을 만나야 하는 어려움도 더불어 생긴다. 그 중에서 일단 한 권을 골라 본다면, 신소천의 <금강경강의>다. 오래된 책인데, 판을 거듭하고, 여러 출판사와 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잘 전해지는 책이다.  

 

 

 

 

 

 

<꾼달리니 딴뜨라>와 <쿤달리니 탄트라>는 같은 책인데,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모양이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요가와 차크라, 그리고 꾼달리니(쿤달리니)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중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참고로, 요가에도 종류가 많은데, 쿤달리니 요가도 그 중 하나다. 우리가 요새 미용이나 다이어트로 요가를 많이 하지만, 그건 엄밀하게 말하면(인도의 시각에서 보자면), 요가라기 보다는 필라테스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펠리니 감독의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겉장이 주는 느낌과 달리 꽤 쪽수가 많다. 펠리니 감독의 부인이자 뛰어난 여배우 줄리예타의 연기, 그 여자의 눈빛이 새삼 떠오른다. 그러나 쉽게 다시 펠리니의 영화를 보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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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한 만찬>을 리뷰해주세요.
빈곤한 만찬 - 음식, 영양, 비만에 관한 과학적 진실
피에르 베일 지음, 양영란 옮김 / 궁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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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단순하게 혹은 무모하게 만드는 것 중에 '이분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사고가 먹을거리에도 강하게 쓰이는데, "육식은 몸에 해롭고, 채식은 몸에 이롭다"는 생각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되도록 육식은 피하고, '콜레스트롤'이라는 그 부정적인 단어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시도는 건강을 위한 일상 안의 작은 모험으로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건강이란게, 육식과 채식의 그 표면에서만 그칠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의 대표주자인 소만 하더라도, 이 책에서는 우리가 알던 그 단순한 소만이 아니라, 다양한 소들이 나와 되새김질을 한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과일, 곡류, 돼지고기, 쇠고기 등에서 딱 멈추지 않았을까? 물론 유기농인지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를 따지는 태도가 있겠지만은. 그럼 다시 소로 넘어가서, 그럼 대체 어떤 다양한 소들이 이 책에 나오는지 구경을 해보자. 

전에 광우병 문제로 한우와 미국 수입산 쇠고기에 대한 강한 분리선이 우리 머릿속에 제대로 박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예민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이 책에 의지해서 딱 세 마리의 소를 떠올려보자.  

(가) 콩과 옥수수 사료를 먹는 소 

(나) 풀 혹은 아마인을 먹는 소(쇠죽을 먹는 소) 

(다) (가끔) 육식을 하기도 하는 소(광우병이 의심 됨)  

재수가 없으면 (다)라는 소를 먹을 수 있지만, 우리 전부 그럴 일이 없도록 기도하자. 그럼 (가)소와 (나)소가 남았는데, 아마 이 두 소를 가지고서, 이 책의 핵심을 어느 정도 건드릴 수도 있겠다.  우리가 먹는 소는 대부분 (가)일 확률이 높다. 콩과 옥수수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보관도 용이해서 가축 사료는 물론 양식어장에서도 널리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문 용어가 나오는데, 콩과 옥수수엔 오메가6 함유가 높다.  

(나)는 예전 우리 시골 어르신들이 풀을 끓여 쇠죽으로 먹인 소를 연상하면 쉽다. 이러한 방법은 손과 정성이 많이 가는데, 여기엔 오메가3가 높다고 한다. 오메가6과 오메가3는 최대한 간단하게 말한다면, 오메가6는 살을 찌우게 하고 오메가3는 비만을 억제하고 심장질환 등 여러 병에 이로운 효능을 갖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오메가3로만 구성된 식단이 좋은 것은 아니고, 이 둘의 균형이야말로 우리 건강에 좋다는 말이다. 

그럼 결론은 나온다. 우리가 쇠고기를 먹더라도, 어떤 사료를 먹은 소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몸상태(비만)와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먹을거리를 선택할 때, 단순히 쇠고기다 야채다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먹을거리의 섭생까지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비만의 문제만 하더라도, 콩과 옥수수를 많이 먹는 사람이 위의 (나)와 같은 (풀을 먹은) 소를 먹은 사람보다 살이 찔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더 무서운 건, 모유의 성분도 수 십년 동안 오메가6와 오메가3의 비율이 변화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점점 오메가6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전 세계의 비만 문제가 단순히 우리가 많이 먹어서 만이 아니라, 살이 찔 가능성이 높은 것들에 둘러 쌓인 환경도 고려해야 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어제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요하다. 여태 우리는 여기서 그쳤을 뿐이다. 더 나아가자! 어제 먹은 그것은 대체 무엇을 먹었던가?  

•  서평 도서의 좋은 점 - 건강과 비만을 고려하는 섭생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해준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사람을 살리는 먹을 거리>, <세포부터 건강해지는 마흔의 밥상>, <유전자 조작 밥상을 치워라>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건강한 섭생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영양학에서는 그 자체로 좋은 식품이거나 그 자체로 나쁜 식품이란 없다. '좋은' 분자나 '나쁜' 분자는 아주 드물다. 문제는 불균형이나 결핍 상태, 과잉 상태인데 이러한 상태야말로 우리 식생활에 혼란을 일으킨다." p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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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를 리뷰해주세요.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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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좋다.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그냥 지나칠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건 뭔가?하고 잠깐 구경차 이 책에 다가가면, 유시민이라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까지 발견할 수 있다. 세 가지(책제목, 저자, 내용) 중에서 이미 두 가지를 이루었으니, 이 책의 운명(판매?)이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그럼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 에세이 형식을 띤 이 책은, 저자가 말하길, 보통 수준의 문장 독해력과 최소한의 논리적 사고력만 갖추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라 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상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기대도 서려 있다. 

너무도 간명하고 당연한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말귀와 현실, 즉 언어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엔 맞닿기 어려운 간격이 있고, 이러한 두 차원을 순진하게도 일치시키려는 뜨거운 목청을 가진 사람들도 많음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모든 사태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락하자는 심보가 현실적인 자세라고 보진 말자. 무딘 이론으로 달려드는 것보단, 단단하고 예리한 이론에서 튀어나온 화살이 적의 심장을 더 힘차게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    

헌법의 언어를 투명하게 해석한다는 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투명도에 일치하는 현실을 바라는 건 가능한 일일까? 그러한 이상적인 상황을 믿거나 기다리지 않더라도 다른 긍정적인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불투명도에도 여러 수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최소한 이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암묵적으로 가늠할 만한 점이 있을테니까. 그 점의 확보와 최대한 위로 밀고 나아가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 실천을 고깝게 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미천한 현실에서 바로 이데아에 떠도는 말귀를 낚아채서 당장 알라딘 램프의 부비기처럼 현실화를 바라는 성급함이 있음이다. 서로 다른 적대 관계에서(가령, 보수나 진보) 그것을 무턱대고 남발하면 현실은 그 단어의 포화에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의 중력의 힘을 무시하는 이상적인 언어의 진수성찬(과도한 주장)은 우리의 혀에 단 하나의 현실적인 맛도 주지 않을 수 있다.

한 사회가 어떤 (정치 권력의) 힘에 의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일 때, 대중은 위험 징후를 느낀다. 지식인은 아무래도 글을 통해 그것을 재빠르게 드러낸다. 그러나 비판의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은 아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세찬 움직임만이 강하고, 그 사이에도 있을 법한 자리들이 너무도 희미하다. 그래서 그런가?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일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두 진영의 명암이 자주 바뀌는 걸 보게 된다.   

헌법 에세이라는 쉽지 않은 방향을 가진 이 책에도 역시 비판은 강하게 실려 있다. 머리말에 저자 자신의 삶 이야기도 동시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애초의 기획과 달리, 헌법 에세이의 무게가 책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후반응이라고 보인다. 정말, 이 책에는 뒤로 갈수록 저자의 경험과 삶 이야기가 짙어지고 단순한 에세이로 전락하는 형국을 보여준다. 

그럼 비판은 어떤가? 누구나 비판을 할 순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이 참다운 힘을 얻는 것은 어떤 대상을 했느냐 보다는 어떻게 했느냐에 있다. 거의 비슷한 붉은 물이 스민 옷을 두고, 한 쪽 옷만 유난히 붉은 얼룩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말에선 저절로 무게가 새어 나가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비판도 그러한 한계를 넘지 못하는 거 같다. 저자의 시각에는 이명박 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다르다. 물론, 무조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옹호하진 않지만, 그 자체? 비판에도 왠지 가벼운 형식성이 감돈다.  

그리고 기본적인 상식 수준에서 보더라도, 저자의 엉뚱한 비판력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가령 저자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한반도는 이념 대립과 군사력 대립으로 한때 다사롭게 비쳤던 평화의 햇살이 자취를 감췄다고 말한다. 과연 언제 남북에 평화의 햇살이 비춘적이 있었던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지원하고, 그것이 핵이 되는지 무기가 되는지 방관하는 순진한 얼굴에 비추는 햇살을 말하는 것인가?(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북의 핵계발 저지에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두 번씩이나, 그것도 우리나라의 큰 축제였던 월드컵 폐막일을 앞두고 일어난 영평해전은 남쪽을 축하하는 폭죽이었던가?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국민의 행복'과 관련해서 우리 국민이 행복하지 않음과 현 정권을 집요하게 연결시키는데, 그럼 노무현 정권 때는 우리 국민이 행복했었는가? 그런데, 갑자기 정권이 바뀌면서 막 솟구치려는 행복에 갑자기 먹구름이 낀 것일까? 어떤 비교할 객관적인 데이터도 없이, 자신의 감성대로 자다 봉창 두들리듯이 써 내려가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현 정권의 탄생에 노무현 정권의 무능력이 한 몫 했음을 사람들은 안다. 이명박 정권은 그 기나긴 진저리의 반작용 이었고, 그래서 '그 때 그 사람들'의 책임도 막중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잘못을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 현 이명박 정권에 대한 옹호가 아니듯이,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흐름이 어떤 짙은 줄기를 형성한다고 해서, 그 전 정권에 대한 향수가 있음은 아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현 정권을 비판하는 대중이 기댈 곳이 마땅치 않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정치 집단도 역시 충분히 선을 보였고, 역시 답이 안 나오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끼였다면, 그래서일 것이다. 

이 책에서 비판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과 이성이 공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는 식지 않은 감정이 저자를 인지상정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군사정권과 이명박 정권에는 거리낌 없는 이성의 비판(물론 거기에도 감정이 섞였겠지만)이 활개를 친다. 이 부분에서 오히려 저자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기본적인 그 무엇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 저자는 학생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써 내려간다. 아마 자신의 내면 안으로 더 내려가 맞대기 싫은 것들까지도 감내하고 쓴 기미가 엿보인다.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러한 여유와 용기가 저자에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본문에서 얻지 못한 것을 여기서 조금이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차근차근 헌법을 씹어볼 수 있는데, 다만 그 맛이 길진 않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최근에 나온 <추방과 탈주>가 더 진한 맛이 난다. 중도적인 시각을 가진 책으론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차분하게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독서를 하고자 하는 대학생들과 일반인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대중의 선택을 무조건 찬미하는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을 경계하자. 현대는 권력자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의 시대이다.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많지만 대중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드물다." 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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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불제 민주주의
    from 행복을 찾아서... 2009-03-23 13:51 
    후불제 민주주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유시민 (돌베개, 2009년) 상세보기 헌법의 풍경 과 더불어 헌법 & 기본권에 대한 교양필독서라고 부를 만한 책 의대다닐때도 항상 느꼈지만, 정의 ( definition ) 을 정확하게 모르면, 남이 사기칠때 속아넘어간다. 우리는 사실 헌법에 무슨 말이 적혀있는지, 기본권이란게 뭔지를 정규 교육과정 중에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군사정권 당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왜 불교가 종교로 불리는지.. 약간의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일단 불교에는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그러한 절대신(神)이 없다(우회적인 임시 방편으로 신을 다루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불교 안에는 긴 시간 동안 다르게 진행된 흐름들도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불교(학파, 종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불교가 다양한 이론들을 힘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체 논의를 통한 합리적인 선택을 기다리는 자세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론들조차 인연에 내맡기는 태도라고 해야할까? 

따라서 종교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논리학과 인식론(불교에는 이 둘이 엄격하게 떨어지지 않는다)이 발달하고 인과-관계성을 강조한다(절대신의 기적으로 바뀔 틈이 없다). 그것을 철학적? 전개의 모습으로 보자면, 이미 서양 철학에 훨씬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아비달마를 비판하는 용수의 공사상(중관사상), 역시 아비달마(설일체유부)를 비판하면서 중관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식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의 긍정적인 격돌 이후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 디그니가의 '아포하론'다르마끼르띠의 '찰나멸 논증'을 꼽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론의 극단적인 몸짓들은 티베트로 흡수되어 다시 보존, 발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의 치열한 모습이 담긴 책들을 몇 권 골라보았다. 

 

 

 

 

 

 

 

 

<-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의 이 책은, 보통 티베트하면 밀교를 떠올리는 고질적인? 분위기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철학의 온전한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물론 티베트와 밀교(딴뜨라)의 깊은 연관성을 속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다.       

 

 

 

 

섣부른 예감일지 모르겠지만, 프랑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양 철학의 마지막 향유가 사그라들쯤에, 그것을 넘어갈 힘을 불교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개 창조적인 해석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더군다나 최근의 철학 흐름에 대해 무지해서, 과거 불교에서 이룬 뛰어난 성과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거나 번식시키는데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헌학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철학-텍스트를 다룬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통해 불교, 특히 중관과 유식이 끌어올려지고 있는데, 서로의 닮은꼴을 비비는 차원은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얼추 비슷함을 발견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비비는 작업에서 뜨거운 열이 나서, 예상치 못한 높이로 도약하는 그러한 발전을 기다려 본다. 

 

 

 

  

 

 

 

 

  

 

  

 

<-어쨌든 중관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 유식은 현상학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 책 역시 유식사상과 현상학을 같이 다룬 것인데, 저자는 단순하게 이 둘의 비슷함을 강조하려는 작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좀 구식이 된 사유에 대한 끌림이 없더라도 유식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통합 접근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우리나라를 보자면, 원효나 의상 같은 큰 인물이 있다. 원효의 진가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날 거라는 예상을 해 본다. 최근에 나온 <스피노자와 붓다>처럼 서양에서 다소 이질적인 철학적 사유들이 불교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비트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것이 초기 단계라 다소 들뜬 흥분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충격이 여태의 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변형은 수행적 실천에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원효와도 만난 적이 있다. 신오현의 <원효 철학 에세이>에 실린 글 '스피노자 철학의 원효 철학적 해석'이 그것이다. 저자 신오현은 서양철학을 탄탄하게 거친 후, 동양철학 특히 불교로 방향을 돌렸는데, 불교를 철학적으로,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불교(철학)적으로 해석하기의 가능성까지 나아가려는 열의를 보여준다.  처음에 잠시 유식학에 관심을 두다가 어떤 계기로 원효를 만나게 되는데, 원효의 불학을 통해서 불교에 잠재되어 있지만 현재화 되지 않은 것과 근대 이후 서양철학이 다가왔지만, 벽에 부딪힌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 그러한 몸짓이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화엄에 큰 관심을 쏟았다. 화엄을 다룰 때도 그 기본 바탕엔 기신론의 적용과 확장이 있는데, 이는 중관과 유식으로 벌어진 극단의 간격을 비판적 안목으로 화해하는 실천적인 해석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학이 유럽학자들, 거기다 일본의 렌즈를 거친 자료를 통해 연구되는 실정이라, 아직까지 원효의 가치가 크게 나타나진 않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불행이면서 다행이라 여긴다. 중관과 유식의 극단의 치우침을 역동적으로 건드려서 되살리려는 원효의 실천적 기질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상당히 훌륭한 성과가 나올것이다. 

 

 보통 불교의 옳은 방향을 아비달마의 요소들(실재들)을 파괴하는 작업들에서 찾는데(가령 용수), 그러한 불교 안에서의 모습 말고도 인도의 정통철학인 베단타와의 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불교가 나왔을 때, 인도에서는 불교를 자이나교와 더불어 이단으로 여겼다고 하니,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에 앞서 전체적인 흐름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 같다. 많은 불교사를 다룬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라모뜨의 이름은 남다르다.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좁은 불교학 테두리에서만 그 울림이 작게 속삭였으리라..   

 

 

 

 

 

 

 

 

 

 

 

 

 

벨기에에 라모뜨가 있다면, 구소련에는 체르바스키라는 걸출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불교논리학에 대해 조예가 깊었는데, 불교를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이 사람도 그냥 지나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귀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아쉽다(이 외에도 예전에 <소승불교개론>이라는 다소 얇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다).  

 

 

 현대적인 불교 연구는 서양이 먼저 시작했다. 순수한 학문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도우미로 시작한 것이지만, 그 성과를 단순히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시각에서 들춰진 불교는 본래의 생기를 잃었을 게다. 왜냐하면, 불교는 단순히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지 않은가. 자각과 체험, 그리고 실천이 빠진 불교는 대단히 위험한 이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교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동양의 학자들도 전수를 받고, 그것이 불교학의 원래의 방법인양 반복하고 있다.   

 

 

 

 

 

 

   

 

 

 

 

  

<현대불교학 연구사>는 고대부터 최근까지 불교가 어떻게 발견, 해석, 연구되었는지를 폭넓게 다룬 책인데, 불교학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좋은, 그리고 이런 주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칼루파하나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데, 전에 시공사에서 <불교 철학사>란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번에 다시 <불교철학의 역사>로 환생했다. 불교학계에 큰 논의를 일으킨 책이니 만큼, 기회가 있다면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불교, 불교학을 둘러보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 불교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세계에 큰 반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학으로써 불교학의 역할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책인데, 불교 경전의 번역과 그 내막 등을 알기에 적당해 보인다.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 모음이라 더욱 반갑다.

 

 

 

 

 

<-아무래도 대승불교의 정수는 티베트로 많이 흘러 들어갔는데, 특히 중관사상의 새로운 발전상들도 찾아볼 수 있다.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 책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이지만, 잠깐 멈춰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쫑카빠는  티베트의 유명한 스님으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겸비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교상판석을 시도한 책으로 여러 비판적인 관점이 녹아있다. 유식과 관련된 해심밀경을 다루기도 하고, 용수, 청변은 물론 중관자립파나 중관귀류파 등 후기 중관 사상의 세세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책까지 번역되어 나왔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입문서 성격의 책은 빼고 실제적으로 불교의 참맛(그러나 적당히 어려운?)을 알려줄 만한 책을 골랐다. 그리고 유식과 중관에 대한 책은 다루지 않았는데, 이들은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는 필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얕지 않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위에서부터 차례로 추천하고픈 중요한 책들을 보자면, 맨 위에 다룬 <무상의 철학>,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은 현대적인 언어로 접근한 책이므로, 읽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현대철학을 과거의 뛰어난 성취를 통해서 자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티베트 불교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라모뜨의 <인도불교사>와 체르바스키의 <불교 논리학>도 불교학의 고전이자 중요한 책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룬, <현대불교학 연구사><불교철학의 역사>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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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ofilm 2021-09-0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TexTan 2021-11-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겨주신 글을 늦게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응 2022-01-2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지도가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이런수고로움 너무 감사하네요.

TexTan 2022-04-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서 남기신 글 봤습니다. 답변 늦어 미안합니다^^
 

들뢰즈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정치와 실천보다는 영화에 있다. 그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사유는 겉으로 보기엔 언뜻 "그래! 나랑 맞을 거 같아!"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읽어 갈수록  그리 쉽게 뇌에 스며들진 않는다. 그래서 다른 이의 '들뢰즈 읽기'를 통해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나 두리번 거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클레어 콜브록 보다는 로널드 보그의 글이 더 이해하기 쉽다. 최근에 일본인 우노 구니이치의 책을 발견했는데, 들뢰즈에게 배우기까지 했다니까 왠지 (저절로) 신뢰감?이 생긴다. 지금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를 읽고 있는데, 클레어 콜브록의 <이미지와 생명>도 이어서 볼 예정이다. 들뢰즈-이미지에 대한 감이 조금 더 분명해지길 원하면서.. 

들뢰즈로 들어가는 문에 베르그송은 창조와 생성의 기운으로 어떤 쉼 없는 탄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베르그송의 책도 정면으로 돌파한 적이 없는데,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을 것 같다.  

 

 

  

 

먼저, <창조적 진화>와 <물질과 기억>을 볼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점검 차원에서 다른 이의 베르그송 풀이를 참고해야 겠다.  

최근 지젝에 의해 들뢰즈와 헤겔의 위험한? 근접이 있었는데, 이러한 시도는 왠지 그럴싸한 끼워 맞추기에 흐를 여지도 있다. 특히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기묘한 지적 기질을 가진 자가 여러 우회로를 거쳐서 만들어내는 풍경은 자칫 일방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왜 헤겔이 들뢰즈와 닮았다고 볼 순 없겠는가? 그리고 니체는 어쩌란 말이지. 니체도 알고보면 예수와 (진정한) 기독교를 긍정했다는 해석도 나올테지. 그런 선행작업이랄까. 지젝은 니체가 말한 초인에 예수를 살짝 겹쳐놓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이비 해석과 진정한 그 무엇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는 없을텐데, 잠시 누군가의 입담이 강한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지금 현재, 가장 눈길을 끄는 책은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다. 매우 두꺼운 책인데, 차근차근 한 번 읽어 볼 생각이다. 요새는 적대적인? 독서를 자주 하게 되는데, 들뢰즈와 라캉, 니체와 헤겔를 같이 읽어 나가는 건 묘한 긴장감이 있다.  

끝으로 책을 고르다가 이제이북스 책들이 좋은 가격에 판매중인걸 발견했다. 구입하고픈 책을 위주로 몇 가지 추려본다. 

 

 

  

 

 

 

 

 

이 중에서는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기계 속의 생명>, 그리고 <살아 있는 인형>이 흥미로울 것 같다.

작은 책자로 나온 '아이콘 북스'와  '사이코 북스'는 아직 접해보질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몇 권을 맛 볼 생각이다. 

  

 

 

 

 

 

 

 

      

 

 

 

 

  

 

 

 

 

 

 

 

 이런 작은 책자의 매력은 어느 정도 뽑기 운이 있는 것 같다. 적은 분량으로도 자글자글한 핵심을 잘 담아 낸 책이 있는가 하면, 그냥 머리 속을 스윽 지나가는 듯한 느낌만 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중에서 우선, 사도마조히즘, 거세, 승화, 초자아, 무의식, 환상, 성도착, 프로이트와 거짓 기억 증후군 등을 먼저 볼 것 같다. 역시나 요새 관심사라 그런지 정신분석 관련 책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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