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를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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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책제목이 좋다.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그냥 지나칠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건 뭔가?하고 잠깐 구경차 이 책에 다가가면, 유시민이라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까지 발견할 수 있다. 세 가지(책제목, 저자, 내용) 중에서 이미 두 가지를 이루었으니, 이 책의 운명(판매?)이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그럼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 에세이 형식을 띤 이 책은, 저자가 말하길, 보통 수준의 문장 독해력과 최소한의 논리적 사고력만 갖추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라 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상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기대도 서려 있다.
너무도 간명하고 당연한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말귀와 현실, 즉 언어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엔 맞닿기 어려운 간격이 있고, 이러한 두 차원을 순진하게도 일치시키려는 뜨거운 목청을 가진 사람들도 많음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모든 사태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락하자는 심보가 현실적인 자세라고 보진 말자. 무딘 이론으로 달려드는 것보단, 단단하고 예리한 이론에서 튀어나온 화살이 적의 심장을 더 힘차게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
헌법의 언어를 투명하게 해석한다는 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투명도에 일치하는 현실을 바라는 건 가능한 일일까? 그러한 이상적인 상황을 믿거나 기다리지 않더라도 다른 긍정적인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불투명도에도 여러 수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최소한 이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암묵적으로 가늠할 만한 점이 있을테니까. 그 점의 확보와 최대한 위로 밀고 나아가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 실천을 고깝게 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미천한 현실에서 바로 이데아에 떠도는 말귀를 낚아채서 당장 알라딘 램프의 부비기처럼 현실화를 바라는 성급함이 있음이다. 서로 다른 적대 관계에서(가령, 보수나 진보) 그것을 무턱대고 남발하면 현실은 그 단어의 포화에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의 중력의 힘을 무시하는 이상적인 언어의 진수성찬(과도한 주장)은 우리의 혀에 단 하나의 현실적인 맛도 주지 않을 수 있다.
한 사회가 어떤 (정치 권력의) 힘에 의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일 때, 대중은 위험 징후를 느낀다. 지식인은 아무래도 글을 통해 그것을 재빠르게 드러낸다. 그러나 비판의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은 아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세찬 움직임만이 강하고, 그 사이에도 있을 법한 자리들이 너무도 희미하다. 그래서 그런가?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일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두 진영의 명암이 자주 바뀌는 걸 보게 된다.
헌법 에세이라는 쉽지 않은 방향을 가진 이 책에도 역시 비판은 강하게 실려 있다. 머리말에 저자 자신의 삶 이야기도 동시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애초의 기획과 달리, 헌법 에세이의 무게가 책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후반응이라고 보인다. 정말, 이 책에는 뒤로 갈수록 저자의 경험과 삶 이야기가 짙어지고 단순한 에세이로 전락하는 형국을 보여준다.
그럼 비판은 어떤가? 누구나 비판을 할 순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이 참다운 힘을 얻는 것은 어떤 대상을 했느냐 보다는 어떻게 했느냐에 있다. 거의 비슷한 붉은 물이 스민 옷을 두고, 한 쪽 옷만 유난히 붉은 얼룩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말에선 저절로 무게가 새어 나가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비판도 그러한 한계를 넘지 못하는 거 같다. 저자의 시각에는 이명박 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다르다. 물론, 무조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옹호하진 않지만, 그 자체? 비판에도 왠지 가벼운 형식성이 감돈다.
그리고 기본적인 상식 수준에서 보더라도, 저자의 엉뚱한 비판력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가령 저자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한반도는 이념 대립과 군사력 대립으로 한때 다사롭게 비쳤던 평화의 햇살이 자취를 감췄다고 말한다. 과연 언제 남북에 평화의 햇살이 비춘적이 있었던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지원하고, 그것이 핵이 되는지 무기가 되는지 방관하는 순진한 얼굴에 비추는 햇살을 말하는 것인가?(지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북의 핵계발 저지에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두 번씩이나, 그것도 우리나라의 큰 축제였던 월드컵 폐막일을 앞두고 일어난 영평해전은 남쪽을 축하하는 폭죽이었던가?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국민의 행복'과 관련해서 우리 국민이 행복하지 않음과 현 정권을 집요하게 연결시키는데, 그럼 노무현 정권 때는 우리 국민이 행복했었는가? 그런데, 갑자기 정권이 바뀌면서 막 솟구치려는 행복에 갑자기 먹구름이 낀 것일까? 어떤 비교할 객관적인 데이터도 없이, 자신의 감성대로 자다 봉창 두들리듯이 써 내려가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현 정권의 탄생에 노무현 정권의 무능력이 한 몫 했음을 사람들은 안다. 이명박 정권은 그 기나긴 진저리의 반작용 이었고, 그래서 '그 때 그 사람들'의 책임도 막중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잘못을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 현 이명박 정권에 대한 옹호가 아니듯이,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흐름이 어떤 짙은 줄기를 형성한다고 해서, 그 전 정권에 대한 향수가 있음은 아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현 정권을 비판하는 대중이 기댈 곳이 마땅치 않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정치 집단도 역시 충분히 선을 보였고, 역시 답이 안 나오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끼였다면, 그래서일 것이다.
이 책에서 비판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과 이성이 공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는 식지 않은 감정이 저자를 인지상정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군사정권과 이명박 정권에는 거리낌 없는 이성의 비판(물론 거기에도 감정이 섞였겠지만)이 활개를 친다. 이 부분에서 오히려 저자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기본적인 그 무엇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 저자는 학생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써 내려간다. 아마 자신의 내면 안으로 더 내려가 맞대기 싫은 것들까지도 감내하고 쓴 기미가 엿보인다.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러한 여유와 용기가 저자에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본문에서 얻지 못한 것을 여기서 조금이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차근차근 헌법을 씹어볼 수 있는데, 다만 그 맛이 길진 않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최근에 나온 <추방과 탈주>가 더 진한 맛이 난다. 중도적인 시각을 가진 책으론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차분하게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독서를 하고자 하는 대학생들과 일반인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대중의 선택을 무조건 찬미하는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을 경계하자. 현대는 권력자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의 시대이다.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많지만 대중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드물다." p.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