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녀와서 바둑학원 가기 전에 30분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아롱이는 그 시간에 꼭 게임을 하고 싶어한다. 보통 <클래시로얄>과 함께하는데 부수고 때리고 깨뜨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를 좀 줄이라고 했다. 설마 들릴 소냐. 두번째로 좋아하는 간식 비요뜨 초코링을 밀어 두고 게임 삼매경이다.


내가 읽고 있던 부분은 바로 여기다.



임신하면 처음 몇 달 동안은 흔히 식욕부진과 구토가 따른다. 이런 일은 다른 어떤 가축의 암컷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현상은 유기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종에 대한 유기체의 반항을 나타낸다. 유기체는 인, 칼슘, 철분이 결핍되는데, 결핍된 철분은 나중에 보충하기도 곤란하다. 과도한 신진대사 활동은 내분비계통을 자극하고, 자율신경계통은 흥분상태가 된다. 혈액은 그 비중이 감소되어 빈혈증을 초래하고, ‘단식하거나 굶주린 사람, 연속 채혈을 한 사람이나 회복기 환자 등의 혈액’과 비슷해진다. … 출산 그 자체가 고통이요 위험이다. 육체가 종과 개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이 이런 위기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57쪽)




새삼 내가 이 모든 과정들을, 시간들을, 고통들을 잘 견뎠다는 게 놀랍다. 나는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잘 돌아다녔고, (하나둘 영차!하고는) 잘 낳았고, 15개월을 모유 수유까지 했는데. 내 주위의 엄마들은 모두 다 그렇게 잘 했고, 잘 해냈고, 다들 그렇게 아이를 낳는 거라 생각했는데. 무미건조하게 사실과 현상만을 나열한 이 문단을 읽는데, 문득 내가 이 시간들을 이미 겪었다는 것이, 이 일들이 내 몸을 통과했다는 것이, 다시금 놀랍고 조금, 아주 조금 대견하기도 하다.




내 앞에 앉은 아이가 아롱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언젠가, 나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특권이며, 내가 너희들을 낳았다는 걸 난, 정말 기쁘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두 아이에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리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 문단을 읽고 있는 내 앞에, 만약 딸롱이가 앉아 있다면, 난... 

이어갈 수 없는 그 모든 말들을 말줄임표 속으로 집어넣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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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30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대견해하셔도 돼요, 단발머리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발머리 2017-06-30 19:00   좋아요 1 | URL
네, 그럼 조금만 더 대견하게 여길께요. ^^

다락방님께서 <멀고도 가까운>에서 인용해주셨던 그 문단이 생각났어요. 이 부분이요~~~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우리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지지 않고,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고, 하루하루의 대혼란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두 사람이, 본인들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우연히 함께 있었다. 둘은 서로의 유사함에 혹은 차이에 끌린다. 각자의 두려움과 한계를 오랜 기간 극복하고, 두 세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생겨난다. 수백 만 개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 안에서 헤엄치고, 어찌어찌해서 여정을 완수한 단 하나의 정자가 역시 단 하나의 어머니 세포와 만나 우리를 낳는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냘픈 그 짝짓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머니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그 혼란을 겪은 후 지상에 나오게 된다.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나 연약한 유년의 몇 해 동안, 단 한순간이라도 어머니가 한눈을 팔았더라면 당신은 촛불처럼 훅 꺼져 버렸거나, 욕조에서 익사했거나,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삼키다 목이 막혀 죽었을 것이다. (106쪽)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에서 저는 정말 철퍼덕 했어요. 아빠도 고생하셨겠지만, 엄마가 무던히도 생각나는 구절이예요.

저는.... 효녀가 될까봐요. 앞으로....

다락방 2017-06-30 19:01   좋아요 1 | URL
아아 이 부분 정말 너무나 좋죠! 저도 읽다가 너무 좋았던 부분 ㅜㅜ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아 정말 좋습니다 ㅜㅜ

단발머리 2017-06-30 19:05   좋아요 1 | URL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우리는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사람도,
더 못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요. ㅎㅎㅎㅎㅎ

cyrus 2017-06-30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산부들이 겪게 되는 힘든 일이 많지만, 그 중에 임산부 입장에서 가장 힘든 일이 먹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뱃속에 있는 태아의 건강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고 싶어도 참아내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요.

단발머리 2017-06-30 19:0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먹는 일이 힘들지요. 그런데... 정말 힘든 건요. 먹고 싶은걸 참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데, 배고픈데...
헛구역질이 나서 먹을 수 없는 거예요. 먹고 싶은데 못 먹는 거요.

태아의 건강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다고는 하던데, 그것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같아요.
태아의 건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뭐랄까. 그것도 문화의 영향이 있겠지만, 예쁜 아기를 낳아야한다는 강박이
임산부의 식생활까지 제재하는 느낌이요.
요즘에는 가리지 않고 그냥 임산부가 먹고 싶은 걸 먹는것 같더라구요.^^

비로그인 2017-06-3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은 정말 감동적으로 대단한 일을 해내신 거예요 모유수유만 해도 얼마나 힘든데요 ㅠㅠ
저도 두아이 출산해 돌보면서 여러번 유체이탈... 지금도 내영혼은 어딨는지.....
(저희집소년은 아레나10이라며 언제 같이 한판 뜨자는 ㅋㅋㅋㅋㅋㅋㅋ)
바둑학원이라니 멋져요~~♥

단발머리 2017-07-01 15:03   좋아요 0 | URL
아른님~~ 참말로 감사합니다 😊
저는 낳는 수고는 그럭저럭 잘 해냈는데 아직도 먹이는게 넘 힘들어요 ㅠㅠ
아른님 건강밥상이 너무 부럽고...
우리는 같은 물품을 사용하니 언젠가는 나도... 하는 생각에 작은 희망의 끈을 꼭 잡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희집 아롱이가 아른님댁소년의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간곡히 물어보고 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Jeanne_Hebuterne 2017-07-01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는 책상, 멋져요!

단발머리 2017-07-01 15:05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원래 용도라면.. 저희집 식탁이예요~~
하지만 제가 책을 펴면 금방 공부하는 책상이 됩니다 ㅎㅎㅎ

2017-07-03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5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17-07-0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잡고 공부하시는 겁니까?!!!! 시험도 보시구요?!
요점정리 노트 공유좀 부탁하구요~~~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7-07-06 15:19   좋아요 0 | URL
각은 잡았는데 저기 저 페이지에서 한 쪽도 못 나갔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ㅠㅠ 혼자 하는 거라 시험은 없구요 (야호!)
요점 정리는 해볼까 하고 있는데...
어떻게~~~ 열심히 해볼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