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이던가, 아직은 덥다~ 라고 말하던 때 가을운동회가 있었다.
교실로 가는 길에 옆반 남자아이를 만났다. 수업 들어가는 반 아이가 아니라서 얼굴만 아는데, 그 날은 신발장 앞에서 인사를 하는거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그러더니 똑바로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한다. 저 계주 대표예요. 아~ 그렇구나. 달리기 잘하나 보네. 청팀이야, 백팀이야? 청팀이요. 오른손에 주먹을 불끈 쥐고, 큰 소리는 아니지만 작지 않은 소리로 외쳐 본다. 청팀 이겨라! 청팀 이겨라! 잘생긴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5분 뒤,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세면대 앞에서 K를 만났다. K는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의 학생이고, 1학기 내내 내 스케쥴을 관리해 주는 아이라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 이따가 운동장에 나오실 거에요? 응, 선생님도 이따 나갈거야. 선생님은 무슨 팀이에요? K는 무슨 팀이야? 아니, 선생님은 무슨 팀이냐고요? 그니깐, K는 무슨 팀이냐고? 저는 백팀이요. 선생님도 백팀! 그래요? 응, 백팀이야. 백팀 화이팅! 백팀 화이팅! 역시나 환한 웃음을 안고 K가 나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청팀이고 백팀이다. 나는, 이러한 나의 성향, 기질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며, 한없이 넓고 깊은 포용력의 표현이며, 이로 인해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거라 확신하지만, 나의 이런 행동에 유독 반감을 갖는 어떤 사람은 내가 중간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는 유약한 인간이며, 회색분자, 동물로 비유하자면 박쥐, 그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을 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 국민들 중 많은 사람이 안철수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는 좋은 의사, 좋은 사업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라는 험악한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확인되었는데, 그 때 안철수를 놀리며 그의 '현실감각 없음'을 비판하며 상기시켰던 단어가 '극중주의'였다. 안철수는 극중주의란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로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라 설명했는데, 그걸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는 본인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딱 가운데 서느냐고요. 그 선을 어떤 자를 가지고 와서 그을 거냐고요.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다. 언론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표차였다. 상원, 하원, 주지사까지 싹슬이 한 걸 보면 민주당이 참 못했구나 싶고.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다 나와서 민주당의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는데도 결국 트럼프의 개인기를 넘지 못했으니. 나쁜 사람이 가진 못된 매력에 미국 전체가 굴복한 모양새다. 그리고, 양당제의 폐해일 수도 있겠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기는 한데, 문재인이 싫어서 조국이 싫어서 윤석열을 찍었다. 이재명이 싫은데 얼마나 싫으냐면 그 표를 윤석열한테 줄 만큼 싫었다. 그 윤석열이 어떤 윤석열이냐면, 김건희가 직접 국민 앞에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 물으니, "임기반환점이라고 해서 괜히 국정 성과 이야기하지 말고 사과를 많이 하라고 하더라. 이것도 국정 관여고 농단은 아니겠죠?"라고 답하는 윤석열이다. 그건 국정 관여, 국정 농단이 아니다. 그건 그냥 ㅋㅋㅋㅋㅋㅋㅋㅋ 국정을 운영하는 거다. 여사가 하라는대로 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보고 있는 거다. 가서 사과 많이 하래요. 하아...
분단이라는 이분법 아래,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면 뭐하나, 우리 대통령은 윤석열이다. 이게 내 수준이고, 이게 우리 수준이다.
창피한 건 참겠는데, 자꾸 전쟁통에 뛰어든다고 하니 그게 제일 걱정이다. 청팀과 백팀을 모두 아우르는 드넓은 내가 되고 싶은데,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앞장서는 정부를 보고 싶은데, 전쟁의 위협과 협박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가능할까. 혹시.
혹시 가능할까.
트럼프 당선을 목전에 두고 친구가 추천한 책, 그리고 트럼프 월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읽어야 할 책들을 골라본다. 목차도 보지 않은 책들이다. 제목만 보고도 안다. 이런 시대가 왔다. 새로운 세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