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 여성 철강 노동자가 경험한 두 개의 미국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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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차별과 혐오를 넘어 통합을 노래하는 여성 철강 노동자의 목소리’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양극성 장애 분투기’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가난하고 공화당을 지지하며 기독교인인 미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임신중단’이 미국에서 얼마나 정치적으로 극명한 주제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책 뒷면, 사회학자 오찬호의 분석이 제일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일 주요한 문단은 여기 399쪽이다.




어린 시절에 들은 온갖 상투적인 말이 일시에 떠올랐다. 꿈꾸면 이룰 수 있어! 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특별한 꽃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특별하다는 감정에 매료된 나머지, 나라를 온통 집어삼킨 개인주의의 유독성에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독선과 거만, 개인적 쾌락, 개인적 이야기, 개인적 믿음, 개인적 자만에 꼼짝없이 예속되어 눈가리개를 한 채 이데올로기에 매달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선호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면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필요도 없으며, 우리의 현실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부정하는 것들이라면 제거하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선호했다. 공동체 대신에 열차 사고와 재앙과 스캔들을추구했다. (399쪽) 




의사들은 혼합 상태의 양극성장애가 제일 위험한 형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울증은 자살 충동을 일으키고 조증은 충동을 더한다. 혼합 상태의 양극성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면 실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발병 시기 중간에는 속수무책으로 변덕에 휘둘린다. 미사일에 묶인 채 고요한 도시로 날아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다가도 허공에 대고 재잘거리는 귀뚜라미가 된다.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였다가 꼭두각시의 목소리를내는 술 취한 복화술사로 변하고 그다음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꼭두각시놀음을 창가에서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가 된다. 한마디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스스로 회의하게 하는 그런 질병이었다. - P49

"제발, 성모 마리아님, 제발요."
몇몇 신자는 소지품을 챙겨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제발요."
오르간 연주가 끝나는 것에 맞춰 부모님은 몸을 돌리고 일어섰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참았다. 성모님은 침묵을 통해 말씀하신 거였다. 넌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아이가 아니란다.
부모님이 입구를 향해 걸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스스로 평범한 아이라고 체념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 가거라."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긴 의자들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과언니를 빼면 복도도 비어 있었다. 목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다른 여자는 없었다. 엄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엄마도 들었어?" 내가 물었다.
"뭘 들어?"
"여자 목소리."
"여자 누구?"
"아니야, 됐어." - P58

친구들은 나를 버렸다. 부모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입원을 1년에 몇 번이나 했지만 내 상태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았다. 급기야 의사들은 전기충격요법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 치료를 받는동안에는 일을 할 수도,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치료에 필요한 강한 진정제는 정신을 혼미하게 했고, 부작용으로 사고력과 기억력은 온전하지 못했다. 페인트칠과 독서는 커녕 장도 보러 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 P138

내가 보기에 토니는 쉽게 사랑할 수 있는 동물을 좋아하는 듯했다.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문 앞으로 달려와 꼬리를 흔드는 개에게는 성의를 다했지만, 당장에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지 않는 동물에게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사고가 난 날, 나를 보러 왔을 때 토니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만을 보았다. 나는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집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눈물이 흘렀던 자리에는 지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재미있는 것 좀 할까?" 내가 물었다. "게임 할까? 아니면 점심 먹으러 나갈까?" - P155

후에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 이라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그를 지지했다. 오래 청취한 라디오 토크쇼는 가톨릭교회와 같은 교훈을 가르쳤다. 두렵지않은 게 두려웠다. 부시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두려웠다. 불시에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테러리스트들이 두려웠다. 두려움을 키우지 않는다면 악귀가 언제 나를 놀라게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부시를 지지했다. 부시가 누구든 공격하길 원했다.
복수심에 불타 자기방어를 과하게 하는 것 같아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나약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P185

‘미래의 남편감을 찾아 대학 생활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별 공통점이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내가 다닌 여자고등학교에는 말괄량이가 수두룩했다. 우리는 목표도 이상도 높았다.
공부에는 진지한 반면 농담에는 무심했다. 5년 계획을 세웠고, 여자가 주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믿었다. 프랜시스칸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미시즈 학위를 따고 싶다는 여학생의 말에도 움찔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신앙생활을 쉽게 했다. - P220

나는 ‘연대‘라고 쓰인 팻말을 손에 든 채 그 남자의 저주 섞인 비난으로부터 멀어져갔고, 그 순간 두려움이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툭부러져 내리는 걸 느꼈다. 애초의 생각과 달리 재생산권이나 정치적주장이 아닌, 실제로는 나를 떠난 적이 없는 믿음에 고양된 채 거대한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믿음은 바리케이드의 양쪽으로-예전엔 제 자신의 신성함에 도취된 독선적인 십대 소녀로서, 지금은 어둠 속에서 속죄의 기도를 드렸던 여성으로서 나를 데리고갔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린 시절 배운 그 두려움에 빚지지 않았다. 반대 시위대의 외침은 분홍색 모자의 물결에 묻혀 점점 멀어져갔고 정치적 견해보다 더 깊은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변화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어쩌면 그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난 뒤, 예배당에서 드렸던 기도-여성으로 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해주세요가 마침내 응답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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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5-27 2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몇 년 되어서, 오찬호 선생님의 리뷰? 추천사?가 있었는지 가물했는데, 단발머리님께서 알려주시네요.

˝분투기˝로 분류하신 단발머리님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그런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3-06-10 16:51   좋아요 1 | URL
완독 축하 감사드리려고 하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ㅠㅠ
얄라알라님 이번달에도 같이 읽기 화이팅해요! 벌써 10일이라고 합니다.

다락방 2023-05-28 1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3-06-10 16: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벌써 6월이라서요. 6월 책은 주문했더니 바로 오더라구요.
이제 시작하면 되겠는데 말입니다. 허허.

책읽는나무 2023-05-28 2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간 빠듯하셨을텐데...
완독 축하드립니다^^

‘양극성 장애 분투기‘
놓치고 있었구나 싶어서 아차..싶었네요.^^

단발머리 2023-06-10 16:53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축하 인사 감사드려요. 답이 넘 늦었네요 ㅠㅠ

저는 ‘정신 건강‘에 대한 이야기랑 종교 이야기가 제일 솔깃했거든요. 역시 책에서 각각 ‘꽂히는‘ 부분이 있는가 봐요.
우리 6월에도 화이팅입니다!!

건수하 2023-05-29 0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바쁘고 피곤하셨을텐데 고생하셨어요.

저도 요즘 <미괴오똑>을 읽어서인지 - 여기서는 우울증을 다루지만 - 양극성 장애 얘기에 좀더 집중하게 되었어요.

단발머리 2023-06-10 16:59   좋아요 1 | URL
수하님 축하인사 감사해요. 답이 넘 늦었어요. 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나요......

전 <미괴오똑>을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지적으로, 또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자극적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필리스 체슬러(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바로 그이/카불의 신부)의 <여성과 광기>하고도 많이 겹쳐져 보였구요.
수하님 리뷰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 벌써 쓰셨을까요? ㅎㅎㅎ

건수하 2023-06-10 17:32   좋아요 1 | URL
저도 전자책으로 들었는데, 뭔가 써보려니 강렬한 느낌만 남아있고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읽고 써보려고요 ^^

단발머리 2023-06-10 17:33   좋아요 1 | URL
더 시간 지나면 더 기억 안 납니다. (찰싹! / 회초리 소리) 서두르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