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 작은아이 방 뒤쪽 베란다로 향했다. 작은 아이 침대 아래쪽도 찾아봤는데 거기에는 장난감과 블루 마블과 바둑판이 있었고 내가 찾는 건 없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쌓여있는 물건들을 이쪽저쪽으로 내려놓고 가로로 길고 세로가 짧은 플라스틱 상자를 열었다. 큰 상자에는 앨범과 노트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일기와 일기장, 일기장들. 거기 있는 일기장과 노트는 거의 다 내 것이었다. 그 상자를 내려놓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건 편지 상자. 나 때는(라떼는) 편지를 자주 쓰지 않았던가. 친구에게, 동생에게, 다시 친구에게, 먼 곳에 있는 이에게. 따로 묶어둔 꾸러미가 보여 열어봤다. 내게 제일 많은 편지를 써 주었던 사람의 편지가 그 안에 잔뜩 들어있었고, 그리고 그 많은 편지 사이로 남편의 편지가 하나. 딱 하나 들어있었다. 정말 딱 한 번 쓰지는 않았을 텐데 다 분실했을까.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한지 봉투에 한지 편지지. 정갈한 글씨가 보기에 좋다. 읽지는 않고 다시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는다 (특이사항 1. 같이 살고 있음/특이사항 2. 글씨가 많음)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그 사람의 편지. 정확히는 크리스마스카드. 제일 오랜 시간 좋아했던 사람, 잘 되지도 안 되지 않은 그런 관계가 되어 버린 사람.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라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그런 흔한 말. 정성 가득한 글씨 속에 보이는 그 사람의 마음. 이제는 내게 와서 닿을 수 없는.
2022년 단발머리 픽 ‘올해의 책’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츠바이크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 당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소상히 밝혀낼 뿐만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연인 페르센의 심정을 자세히 그려낸다. 편지를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육성은 너무나 생생하다. 마리가 그의 시누이에게 쓴 편지, 페르센이 자기 여동생에게 쓴 편지가 특히 그렇다. 이 세상 어떤 글보다도, 편지는 더 직접적으로, 편지를 쓴 그 사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내게 남아 있는 편지 속에는, 그 사람들이 사랑했던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내게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그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우리집에.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가 여기 있어요. 여러분의 마음을 찾아가세요. 여기 있어요, 저희 집에. 작은 아이 방 옆 베란다, 플라스틱 상자 속에 여러분의 마음이 남아 있어요.
적립금 마감이 어제라고 알라딘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책을 한 권 샀다(한 권 살 때 진짜 한 권 사는 사람). 친애하는 잠자냥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인데 잠자냥님의 픽은 언제나 옳고, 저자는 츠바이크니까. 기대감 200% 상승. 돌아섰더니 큰애가 또 급하게 필요한 책이라 해서 주문하려니 배송비가 붙는다. 어쩔 수 없이 내 책 한 권 더.
츠바이크 책이 왔는데, 어맛! 2부는 두 사람의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