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이었다. 친구가, 친애하는 다정한 친구가 다이어리를 선물해 주었다. 다이어리계의 명품으로 통하는 몰스킨 다이어리였다. 여기에다가 일기 써. 강한 다짐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평범하고 느슨한 권유였다. 핫핑크의 예쁜 다이어리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해 중, 고등학교, 대학교, 직딩 때까지 이어졌다가 퇴사를 기점으로 중단되었던 ‘종이 일기쓰기’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10시가 조금 넘어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손을 씻고 다이어리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직 만년필 세계에 입덕 하지 않은 상태라 펜에 대한 선호가 불분명하지만, 내가 가진 펜 중에 가장 새 제품이고 얇은 펜으로 밤마다 일기를 써 내려갔다. 다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쓰라는, 계속해서 쓰라는 친구의 권유와 명품 다이어리의 아름다운 외모에 힘입어 한 줄을 쓰고, 그다음 한 줄을 이어 나갔다.
2020년, 그렇게 시작된 ‘종이 일기쓰기’는 작년에도 올해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올해는 많이 못 써서 빈자리가 눈에 확연하기는 한데, 그래도 중단하지 않고 이어서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부지런히, 예식을 거행하듯 소중히 이어져 왔던 ‘종이 일기쓰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다른 쓰기가 아닌 이 ‘종이 일기쓰기’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이 아니라면 계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 나 혼자만의 쾌락을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다시 일기장을 펼친다.
주말부터 읽는 책은 아니 에르노의 『탐닉』이다. 이제 7등분선을 넘은 것 같은데 복잡한 생각에 자꾸만 읽기가 중단된다. 『단순한 열정』의 연인 A와 『탐닉』의 S는 동일인이다. 당시의 경험을 소설로 엮어냈던 에르노는 이후에 연애 기간에 썼던 일기를 모아 출간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경이롭다. 이미 작가로서 사회적 명망을 쌓았고 직업적으로도 성공한 그녀의 전혀 다른 면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기쁨과 슬픔.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통. 그를 욕망하듯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구.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 잠 못 드는 밤. 그의 전화, 재회와 섹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기다림.
그녀는 촌스러운 긴 치마에 살색스타킹을 신었고, 나는 짧은 미니스커트에 검정스타킹을 신었다. 키, 머리, 눈 색깔, 몸매(그녀는 약간 땅딸막하다)면에서 이보다 더 대조되는 두 여자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주부와 창녀. (58쪽)
언제나 나는 한 남자에게 너무 많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 자신을 지나치게 소모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내게 어떤 애정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단지 내 이름 때문이라면, 내가 작가라는 사실 때문이라면 도망치고 싶다. 가장 큰 두려움은 그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67쪽)
S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때 아니 에르노는 48세, 그의 애인은 35세였다. 나는 여자 나이 48세가 어떠할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나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문제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 같다. 그녀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고,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종이에 쏟는다. 자신의 사랑과 절망을, 그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그의 아내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와 원망을. 그녀는 종이 위에 써 내려간다. 그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일기를 썼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오겠다고 약속한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쓴다. 그가 간 후에 아쉬운 마음에 쓴다. 또다시 그를 기다린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육체에 갇힌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고상한 척, 우아한 척 하지만, 우리 인간도 결국엔 동물이고. 동물로서 하는 행동, 생존을 위한 행동은 좋고 나쁨을 가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녀에겐 음식처럼, 사랑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다 내주고도 더 주고자 하는 사랑. 그리고 자신이 준 사랑의 일부를, 정말 극히 일부만이라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돌려받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하다. 간절한 사랑. 소녀 같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