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야당의 대선후보의 부인에 대한 검증으로 한참 시끄러울 때였다. 언론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사안은 크게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그녀의 과거 남자관계에 대한 것이었고, 하나는 경력 위조 및 부풀리기에 대한 의혹이었다. 그녀의 과거 문제는 (일억만분의 하나) 그녀의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근무했던 학교의 이름을 교묘하게 보정함으로써 다른 학교에서 근무한 것처럼 꾸미고, 1년여의 근무경력을 3년으로 부풀리는 등 허위 이력서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런 종류의 실수(본인의 주장)를 앞으로는 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자신의 목표(취업)를 위해 이력서를 십 여건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오랜 기간의 대대적인 비판에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따로 예산이 집행되는 영부인의 자리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 범법행위마저 불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봤다.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즉, 그녀의 과거 남자관계는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공개하거나 이해받을 필요가 전혀 없지만, 대학교의 겸임교수 즉 시간강사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저지른 범죄 행위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판단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한 게 맞을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맞는 걸까.
검색해보았더니, ‘사적인 영역’, ‘공적인 영역’에 대한 글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놀랍고 감사한 인터넷 세상) 근처 도서관 홈피에서 검색해보니, 다들 무슨 일 나셨는가. 『인간의 조건』이 모두 대출 중이다. 일단 예약을 걸어놓고 지난주에 도서관 서가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살짝 펼쳐본다.
자유주의적 공사 구분이 근대정치의 맥락에서 공적 영역이 다루는 것과 사적 영역이 다루는 것을 차별화하고, 이를 각각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했다면, 아렌트는 본질적 특성을 중심으로 공적인 것을 추려내고, 이를 다루는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95쪽)
근대사회가 열리고 민주주의 정치가 등장하면서 정치가 다시 작동했는데, 이때 경제가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다. 경제가 공적 관심의 중심으로 들어선 근대는 ‘사회적인 것의 등장’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사회적인 것의 등장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초래했다.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민주주의의 기틀이 형성되었지만 공적 영역에서 공적인 일을 온전히 공적으로 다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00쪽)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위해 공적 세계가 계속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행위의 존속이 공동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인데,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사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는 집 안에서 해결하고,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서는 오직 공적인 문제만을 다룰 수 있도록 해, 두 영역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리스 사회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 가운데 오직 자유인 남성만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을 가졌다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아렌트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입장에서는(이 책의 저자), 아렌트가 공적 사안과 사적 사안의 본래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구분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교회 다녀오는 길에 대출한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의 저자 나카마사 마사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치'를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파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렌트가 상정한 '정치'의 원형, 즉 폴리스의 정치에는 그런 관계는 없고 '공적 영역'에 등장해 '활동'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만 있을뿐입니다. 반대로 생명 유지를 위한 '필연성'으로 인해 지배/피지배 관계에 있는 집'의 영역은 불평등의 영역입니다.
폴리스의 겉면인 정치의 무대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활동하는 반면, 집에서는 노예나 가족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렌트가 특별히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입니다. 다만, 아렌트가 '정치'의 '자유'를 이상적으로 논하는 탓에 집안의 불평등이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평가는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106쪽)
‘페미니스트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혐오한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이런 맥락에서 나왔던 걸까.
내가 궁금해했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범주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한 것 같다. 어디까지가 사적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공적 영역인가. 공직자의 사적 영역은 어느 선까지 보호되어야 하고, 어느 선까지 검증받아야 하는가. 다른 맥락에서 궁금증도 있다. 이를테면, 정희진 선생님의 표현 그대로 ‘거리에서 사람이 죽으면 공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지만, 집 안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살해당하면 부부간의 ‘사소한(?)’ 부부싸움의 결말이라 여겨지는 상황은 정당한가’라는 물음이다. 가정 내 폭력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을 사적인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보아야 하는가. 여성의 일은, 기능은, 임무는, 역할은 사적인 것인가.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사적 역할의 수행이 훨씬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여겨지는가.
일단은 상호대차 신청을 해서 대출 대기중인 『인간의 조건』을 읽어 봐야겠는데, 그 책을 다 읽는다고 해도 답이 나올지 잘 모르겠다. 이런 예쁜 세트가 있는데, 이 책들이 아직 집에 없는 관계로 나의 공부가 자꾸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지금 구입한다고 해서 다 읽을 자신은 없고, 그렇지만 중고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던데 지금 구매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은 매우 바쁘고 혼란스럽다. 공부를 위해 준비하는 데만도 오백만 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