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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험한 과학책 - 지구인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허를 찌르는 일상 속 과학 원리들 ㅣ 위험한 과학책
랜들 먼로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20년 1월
평점 :
새벽 3시였다. 곧 3시 30분이 될 테고, 그리고는 새벽 4시. 포장이사 업체 분들이 8시에 오시기로 했으니 이제 겨우 5시간이 남았다. 5시간 안에 남은 짐을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울고 싶었다. 아니,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해? 자기야, 어떻게 해? 남편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아기자기한 소품이었으나 이제 자질구레하며 정체와 용도를 모르는 물건들을 종이봉투 안에 구겨 넣었다. 이사 가기로 한 집은 평수는 같았지만 구조가 달랐다. 포장이사이기는 해도 거실장에 방치된 짐들을 대강이라도 정리해야 새로 이사 갈 집에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 거였다. 귀중품은 미리 큰 가방에 넣어두었고, 속옷도 대략 정리해 캐리어 속에 넣었다. 아끼지 않는 책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특별히 아끼는 책들은 차에 미리 실어 두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쓰지 않을 물건들도 버리고, 책을 팔고 주고 정리했는데, 이제 남은 시간은 5시간이고, 거실장 정리는 요원하다. 이대로, 지금 이대로 집을 옮길 수는 없을까.
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은 나의 이러한 실존적 고민에 답해준다. 좀 더 빨리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아파트이고, 저자가 예로 든 집은 미국의 주택이다. 하지만 옮기는 집을 우리집이라 생각하고 과감히 이사를 감행해 본다. 짐을 싸지 않고 집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 집의 하중을 받는 부분에 맞추어 기초에 구멍을 뚫고 I빔을 놓으면 된다고 한다. ‘허리케인 타이’는 먼저 제거해야 한다. 허리케인 타이란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집을 날릴 경우를 대비해 집을 기초에 매어 두는 역할을 한다.
그 다음은 집을 통째로 옮겨야 하는 일이 남았는데, 이 경우 나는 복잡한 길을 운전하기 보다는 ‘집을 날려서 옮기는’ 방법을 선호한다. 헬리콥터 여러 대를 이용하는 방법과 화물 비행기를 이용한 방법이 있고, 유달리 큰 짐들을 옮기도록 설계된 고래 모양의 특별 비행기도 이용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집을 공중으로 올려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라면 비행기 전체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 그런 경우 저자는 787 드림라이너의 엔진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엔진 두 개면 작은 집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뜻인데, 안정감을 위해 세 번째와 네 번째 엔진을 추가할 경우, 엔진이 연료를 가득 채우고 출발하여 떠 있는 시간은 이렇게 계산할 수 있겠다.

계산 결과는 생각보다 암울해서 아무리 많은 엔진을 사용하더라도 집이 떠 있는 시간은 90분보다 짧다고 한다. 안타까운 지점이 아닐 수 없겠다.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주제 분류에 따르면, 이 책은 과학>기초과학/교양과학에 속하는 책이다. 그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독자의 기대란 무엇일까. 독자는 소설을 선택할 때와는 다른 필요에 의해 과학 도서를 선택할 것이다. 새로운 정보, 정확히는 새로운 과학 정보에 대한 욕구가 가장 주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즉 ‘재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재미’와 ‘즐거움’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재미’와 ‘즐거움’은 생각보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그 ‘무엇’이다. 관심 또는 흥미를 가지고 접했던 정보와 지식이 훨씬 더 오랫동안 더 강력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험이 이를 확인해준다. 나와 같은 과학 문외한은 알 수 없는 여러 과학 공식들과 일반인이라면 하기 어려운 정교한 계산 과정을 통해, 기발하고 놀라운 물음을 해결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훌륭한 서사로서 작동한다. 서사의 시작은 질문이다. 이를 테면 ‘집을 통째로 날려서 옮길 수는 없을까?’와 같은 기발한 질문이 그 시작이고, 그 시작점에는 호기심과 재미가 사이 좋게 자리하고 있다.
이사는 잘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몇 개의 수납장을 새로이 창조해 냈고, 그리고 버리고 또 버렸다. 첫날 밤, 나는 저자의 제안 그대로 실행했는데,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그 때에 어쩌면 이리도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나 스스로의 훌륭한 선택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이것이 인류의 지혜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인류 구성원 중의 하나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대충 바닥을 치우고 칫솔과 휴대폰 충전기를 담은 상자만 풀고, 나는 그렇게 잠들었다고 한다. 그림처럼, 쿨쿨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