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똑똑한 내가 쥐를 못 잡을 리 없다.
잡았다가 놓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잡지 않은 것은 잡고 싶지 않아서이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주인의 얼굴을 처음 본 게 인간과의 첫 만남이었다.
털 없이 매끈한 게 참 신기하게 생긴 족속도 다 있구나 싶었다.
주인은 선생이다. 매일같이 배 터지도록 먹고 소화제를 챙긴다.
책 펴 놓고 졸다가 침도 곧잘 흘린다. 나는 고양이지만 이따금 생각한다.
선생은 정말 편한 직업이구나. 그래도 주인은 이 노릇이 지긋지긋하다며 푸념한다.

인력거꾼네 검둥이는 힘은 세지만, 교양이 없다.
검둥이는 나한테 지금껏 잡은 쥐가 몇 마리 되냐고 묻더니 인간만큼 인정머리 없는 것도 세상에 없다고 흉을 봤다.
나는 절대 쥐를 잡지 않을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평생 주인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자고 마음먹었다.

설날 아침, 주인 앞으로 온 엽서 한 장. 파스텔로 그린 틀림없는 나의 초상이다.
고양이들이 펜을 쥐고 책을 펼쳐 공부하는 그림엽서도 도착했다.
책상 귀퉁이 쪽 춤추는 고양이 그림 위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엽서 오른쪽 옆에는 <어느 봄날 책 읽고 춤추는 고양이의 하루>라는 하이쿠까지 적혀 있다.
고양이 주제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지만, 몰래 떡국을 먹다 휘청대는 바람에 떡국 먹고 춤추는 고양이로 찍혀 체면을 구겼다.

손님이 찾아왔다. 금테 낀 메이테이 선생은 허풍쟁이 미학자다.
끝없는 말장난으로 주인을 놀려 먹기 바쁘다.
그 앞에서 쩔쩔매는 주인은 내 눈동자처럼쉴 새 없이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다.
주인의 옛 문하생 간게쓰 군은 앞니가 하나 빠져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지만 재밌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그저 시간을 때우려 끊임없이 입을 놀리는 시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대문의 종이 튀어 오를 정도로 울렸다.
짜랑짜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기모노 자락을 다다미에 끌며 들어왔다.
벗어진 이마, 가는 눈과 균형미 없이 유난히 큰 코가 눈에 띈다.

사업가인 가네다의 부인이었다.
딸의 결혼 문제로 간게쓰 군의 성격을 알고 싶다며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어 대더니 샐쭉하며 돌아갔다.
메이테이 선생과 주인은 예의 없는 부인의 태도에 황당해했다.

고양이는 발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디를 어떻게 걸어도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늘을 가는 것처럼,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고양이 꼬리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묘약이 담겨 있다.
덕분에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한심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가네다 부부의 집을 엿보다 돌아왔다.
주인이 가네다 집안과의 관계를 반대한다고 간게쓰 군에게 말했다.
주인의 말에 나도 야옹야옹 하고 두 번을 울었다.

똑똑. 깊은 밤, 부엌 덧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침실까지 들어와 높지도 않은 주인의 콧등을 깨물고 달아난 그 쥐일 것이다.
똑똑한 내가 쥐를 못 잡을 리 없다.
지금까지 잡지 않은 것은 잡고 싶지 않아서이다.
똑똑. 쥐가 아니라 도선생이었다.
주인을 깨우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선생은 안주인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인 상자를 정성껏 챙겼다. 선물 받은 참마가 든 네모난 상자였다.
단무지가 안방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안주인의 버릇을 도선생이 알 리 없다.
다음 날, 주인 부부는 순사에게 참마를 도둑맞았다고 신고했다.

보통 때처럼 가네다 댁에 몰래 숨어들었다.
숨어든다는 말은 좀 그렇다.
이 광활한 대지에 막대기를 세우고 울타리를 쳐누구누구 소유라고 정하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직접 만든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렇게 우기는 건 괜찮다 해도 출입을 금지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나는 어느 곳이든 드나들 수 있다.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으면 나았을 거라는 말에 결국 쥐를 잡기로 했다.
나도 사회적 동물이다. 오늘 밤, 반드시 주인 가족을 기쁘게 해 주겠다.
일찌감치 작전을 세워 두었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달그락달그락. 나는 널마루에서 선반 위 놈들을 올려다본다.
앞발에 힘을 잔뜩 주고 얍 하고 뛰어올랐다.
"도둑이야!" 주인이 안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덥다. 이 옅은 회색 점박이 무늬 털옷을 벗어 빨든 당분간 전당포에 맡기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사치스럽다. 날것으로 먹어야 할 걸 굳이 익히고 굽고, 품을 들인다.
다리가 네 개나 있는데, 두 개밖에 쓰지 않는 것도 사치스럽다.
더 웃긴 건 이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서로 바쁘다 떠들기 바쁘다.

인간의 세월과 고양이의 세월을 같은 비율로 계산하는 건 부당하다.
주인의 세 살배기 셋째 딸은 울고 짜는 것과 누워 똥오줌 싸는 것, 젖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에 분노하는 나와 비교하면 그저 한심한 수준이다.

주인은 남들 앞에 자랑할 만한 성품이 못 된다. 늘 끝이 흐지부지하다.
공을 줍겠다고 울타리를 넘어온 학생들의 윤리 선생과 마주하고는 꼬리를 바짝 내렸다.
참마를 훔치다 잡힌 도선생과 마주쳤을 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안주인과 조카에게는 늘 엉터리 지식을 뽐내며 거드름을 피운다.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주인이 곰곰 생각한다.
메이테이 선생, 간게쓰 군, 가네다 부부, 울타리를 넘어온 아이들 모두 미치광이라고, 어쩌면 세상은 미치광이가 모여 사는 곳이라고.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래 봬도 나는 독심술을 터득한 고양이다.
얼마 전,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주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 가죽으로 조끼를 만들면 따뜻하겠네 하는 생각.
끔찍한 일이다.

경찰서에 출석해 도난품을 받아 온주인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밤송이머리 부에몬은 가네다의 딸에게 장난으로 연애편지를 보낸 일을 고백하며 울먹였다.
주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글쎄."라는 말만 했다.
참 재밌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아는 것은 삶의 큰 숙제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코 높이를 스스로 알 수 없듯 자신을 깨닫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제 부에몬은 주인의 집을 찾아온 덕분에 진정한 인간이 될 것이다.
주인처럼 다른 사람의 걱정에 냉담해질 것이고, 다른 사람의 곤경에 즐거워할 것이다.

고양이로 태어나 산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정해진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죽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울적해졌다. 부엌으로 갔다.
고양이도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뭐든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해볼 일이다.

두 눈 딱 감고 홀짝홀짝. 잠이 쏟아졌다. 첨벙!
나는 커다란 항아리에 빠졌다. 자연의 힘에 맡기기로 했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이 평온을 얻는다.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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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우리들은 벌써 10년 이상 아르헨티나의 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린 경험이 있으니까 안심해도 돼.
우리가 모두 가우초라고 했지만 나는 사실 수의사이고 루카스는 농기계를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파블로는 건축가, 아구스틴은 변호사, 그리고 내 동생인 또 다른 루카스가 실제 가우초라고 할 수 있지." 그들 중 가장 수다스러운 하비에르가 내 곁으로다가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 P241

신이시여, 당신께 오로지 이것만을 빕니다. 메마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허무함과 외로움으로 가득하게 되지않기를… 신이시여, 당신께 오로지 이것만을 빕니다. 제가 불의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매서운 발톱이 운명을 할퀸 뒤에 또다시 저의 다른 뺨을 치지 않기를……………. - P249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럼 잠은 어디서 자?" 나의 질문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시 웃었다. "어, 그냥 아무 데서나잤어. 골목길에 침낭을 펼쳐놓고... 실은 지금도 너희한테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씻기는 해야겠는데 난감하더라고. 그래서 주유소에 가서 사정을 하고 세차하는 호스로 샤워를 하고온 거야. 하하하. 우리가 좀 그래………… - P252

‘미나, 어제의 멋진 만남을 우리들은 평생 기억할 거야. 그 시간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우리의 마음속에만 남게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 어제 산에 올라갔을 때 너하고 레이나에게 주려고 만든 거야. 언제나 행운이 함께하길 빌게. - 아르헨티나 가우초 친구들로부터 - P255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항로 중 하나인 파타고니아의 항로를 개척한주인공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탄생한 책이 바로 <야간 비행>그가 보았던 세상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 비행을 나선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르지만 하늘을 사랑하고 파타고니아를 사랑했던 그의 영혼만큼은 그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말하는 사랑, 그런 마음으로 파타고니아를 사랑했던 그이니까. - P257

하비에르의 말대로 어쩌면 모든 일들은 우주의 움직임으로인해 운명 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고심하던 나는 비행기 일정을 바꾸고 산타페 주의 작은 도시 피르마트로 가는 버스 티켓을 샀다.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친구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거쳐대평원 팜파가 있는 아르헨티나의 심장을 지나 인티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쪽까지 가볼 수도 있겠구나! 우주의 움직임으로 ‘세상의 끝‘에서 그 친구들을 만난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새로운 만남과 경험들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피르마트로 가기 전날 밤을 하얗게 지냈다. 과연 어떤 멋진 일들이있을까를 상상하면서……………. - P259

‘새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물이 없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보르헤스가 어느 책인가에 썼던 말이야. 하루 종일 책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하는 하비에르의 어머니는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 P297

‘인간의 한계는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뀐다. 춤은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서로가 가장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길,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과정,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성장을 경험할 수있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 P302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어떤 질문을 먼저 받게 될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오랜 시간 머물며 여행을 하셨다구요. 여쭤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나저나 얼마 전 멘도사에서 매우 아르헨티나적인 경험을하셨다면서요? 우리 그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허걱... 아무리그래도 아르헨티나 온 국민이 보고 있을 토크쇼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좋은 얘기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얘기부터 하라니. 순간 당황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소매치기와 도둑이 많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아주 제대로 한 경험이니 만큼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 P317

"참 안 된 일이구나. 하지만 미나, 너무 상심하지 마. 어차피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물건이란 없어. 그것들은 잠시네 것이었던 것뿐이지. 세상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고 해. 분명네가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이 있을 거야."
"그래.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화가나고 억울해. 물건들은 그렇다 치고 내가 찍은 사진과 글들은 어쩌라고. 그것들은 분명 내 것이잖아. 안 그래?" - P321

"물론 그렇지. 하지만 네 모습을 봐. 잃어버린 것은 물건들뿐이고 넌 무사하잖아.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너의 건강한두 팔과 두 다리로 다시 걸으면 되는 거야. 다 잊고 열심히 다시걷는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321

여행은 끝났지만 내 가슴은 오히려 뜨거워지고 있었다. 영원한 애증의 대상과도 같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심금을 울리는 탱고 선율처럼 묘한 울렁임을 주는 그곳에서 얻은 추억들은 오래도록 나를 웃게 하고 때로는 눈물짓게 할 것이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잡아줄 것이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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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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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투명한 나선』 ― 총열의 강선에서 DNA까지, 유카와 마나부의 가슴속 하트

1.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지난해 여름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살인 추리소설을 읽었고, 올해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읽었다. 요코미조의 작품에서는 복잡한 혈연과 집안의 원한이 기괴한 살인의 수수께끼를 만들고, 아야츠지의 관 시리즈에서는 저택의 구조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 곳곳에 놓인 단서가 정교하게 맞물린다. 두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탐정보다 먼저 범인과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본격 추리소설들을 읽은 뒤 히가시노 게이고로 돌아오니 『투명한 나선』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그냥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총상을 입은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 수사가 이어지지만,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를 풀어내는 재미는 크지 않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범행의 기술보다 사건의 중심에 선 소노카와 히데미, 그리고 나에와 유카와가 서로 어떤 관계이며, 누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선택을 했는가 하는 사정들이다. 요코미조와 아야츠지에게 가족관계와 공간이 범인과 트릭을 밝혀내는 장치라면, 이 작품에서는 가족관계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장르상으로는 추리소설이지만, 읽는 감각은 살인사건을 품은 가족 이야기에 가까웠다.

추리의 긴장보다 가족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속도감은 그대로였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사건과 수사가 교차하는 흐름은 독자가 책을 내려놓을 틈을 주지 않았다. 복잡한 설명에 발이 묶이는 일도 없었다. 한번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마지막까지 술술 읽혔다.

그러나 잘 읽힌다는 것과 이야기가 새롭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지만 결말은 너무 일찍 보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악질 남자, 그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자, 그 여자를 지키려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살인과 은폐, 버려진 아이와 뒤늦게 드러나는 혈연의 비밀까지 소재 대부분이 익숙했다.

우에쓰지 료타는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기능적인 악역이었다. 소노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는 그의 행동에는 독자가 이해하거나 고민해 볼 만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나는 읽는 내내 그를 속으로 “그 상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가 철저한 악인으로 그려진 순간부터 누군가가 소노카를 지키기 위해 그를 죽였으리라는 방향이 보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으니 살인과 은폐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도 약해졌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범죄와 은폐를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 왔다. 『용의자 X의 헌신』도 비슷한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범행을 감추는 방법과 이시가미의 선택이 예상 밖의 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투명한 나선』은 익숙한 재료를 새롭게 뒤집기보다 예상한 길을 따라간다. 읽는 속도는 빨랐지만 이야기가 도착할 곳은 일찌감치 보였다.


2. 시리즈 안에서 뜬금없는 비밀

이 작품이 내세운 가장 큰 비밀은 유카와 마나부의 출생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에와 유카와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고, 나에가 유카와의 생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에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에 놀랐다기보다, 읽는 동안 품었던 의심이 맞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결말을 예상했다는 것과 출생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갈릴레오 시리즈 전체를 돌아보면 유카와가 양자였다는 설정을 준비해 온 흔적은 거의 없다. 앞선 작품들에서 차곡차곡 쌓인 단서가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진실로 모였다면 예상했더라도 납득과 감동이 따랐을 것이다. 아무런 낌새가 없다가 열 번째 작품에서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니, 오래 감춰 둔 진실이 밝혀졌다기보다 이번 이야기에 특별함을 더하기 위해 뒤늦게 붙인 설정처럼 보였다.

결국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이 작품 안에서는 예상하기 쉬웠고, 시리즈 전체에서는 뜬금없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그 간격이었다.


3. 나는 왜 ‘나선’을 총열의 강선으로 읽었는가

책을 읽는 동안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 ‘투명한 나선’일까. 한국판 표지에는 저녁노을이 번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바다 위로 투명한 선들이 회오리처럼 솟아 있다.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까지 겹치자, 나는 표지의 나선을 DNA가 아니라 총과 연결했다.

나는 총열 안쪽에 탄환을 자기 축을 중심으로 회전시키는 나선형 강선(腔線)이 파여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탄환이 나선형 궤적을 따라 날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강선을 통과하면서 생긴 회전은 총구를 벗어난 뒤에도 이어진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을 총열 속 강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탄환의 회전으로 받아들였다. 바다와 총상 시신, 회오리 모양의 표지가 내 생각을 그쪽으로 이끌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문예춘추의 공식 소개에서는 제목의 ‘나선’이 DNA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제야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혈연과 DNA 검사가 제목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한국판 표지 중앙의 선은 교과서에서 보던 두 가닥의 이중나선보다 아래로 좁아지는 소용돌이나 탄환의 회전을 시각화한 흔적에 가깝다. 제목의 공식적인 뜻을 몰랐던 독자가 총격 사건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판 표지는 한국판과 방향이 달랐다. 2021년 일본 단행본은 검은 바탕에 투명하게 비치는 뼈의 손과 붉은 장미를 배치했다. ‘투명함’과 소노카가 일하는 꽃집을 연상하게 한다. 2024년 일본 문고본은 아기 바구니와 인형을 내세워 버려진 아이와 부모·자식의 관계를 곧바로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은 바다와 소용돌이를 앞세워 혈연의 비밀보다 총격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작가가 총열의 강선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식적인 해석이 아니라 내가 표지와 사건을 따라가며 만들어 낸 독법이다. 그렇다고 틀린 답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제목이 작품 밖에서 다른 이미지를 낳았다면, 그 또한 독서가 만들어 낸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투명한 나선』은 DNA의 이중나선이면서 동시에 총열 속에 숨어 있는 강선이었다.


4. DNA로 확인되는 혈연, 삶으로 맺어진 가족

이처럼 작품 속 DNA는 나에와 유카와가 혈연으로 이어졌음을 밝혀 주는 결정적 단서다. 그러나 유카와에게 부모는 나에 한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을 낳은 사람은 나에지만, 자신을 키운 사람은 양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카와는 어느 한쪽만을 고르지 않고 나에와 양부모 모두를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인다.

히데미와 소노카의 관계도 비슷하다. 히데미는 소노카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소노카를 지키려 한다. 히데미에게 소노카는 혈연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DNA는 누가 누구와 피로 이어졌는지는 알려 주지만, 함께 살아온 시간과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까지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목의 ‘투명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혈연뿐 아니라 검사 결과에도 나타나지 않는 가족의 마음까지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에 유카와가 나에에게 양부모와 생모 가운데 한쪽을 선택할 수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부모라는 뜻을 전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말하려는 바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출생의 비밀이 갑작스럽게 붙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유카와가 혈연만을 기준으로 부모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은 좋았다.


5. 명석한 두뇌와 가슴속 하트

나는 갈릴레오 시리즈의 핵심이 과학적 트릭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카와 마나부가 사랑받는 까닭은 명석한 물리학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냉철하게 현상을 분석하면서도 사건 속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머리로 진실을 찾아내지만, 그 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이유와 마지막에 내리는 판단은 사람을 향한다.

이번 작품에는 갈릴레오 시리즈를 대표할 만한 화려한 과학 실험이나 기발한 물리학적 트릭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유카와는 자신의 명석한 두뇌로 흩어진 관계와 행동의 이유를 짚어 내고, 나에와 소노카가 처한 사정에는 마음을 기울인다. 경찰보다 먼저 진실에 접근하지만 곧장 누군가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사실을 밝히는 일과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을 함께한다.

갈릴레오 시리즈에서 사건을 푸는 것은 유카와 마나부의 명석한 두뇌지만, 그를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이 물리학자의 가슴속 하트다. 이번 작품의 사건은 다소 뻔했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뜬금없었지만, 유카와라는 인물의 매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학적 장치가 약한 작품이었기에 그동안 논리와 이성 뒤에 가려졌던 그의 마음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6.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에게 ― 2026년 7월 23일, 영면에 들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다. 워낙 많은 작품을 쉼 없이 발표해 ‘소설 찍는 기계’라고 불렸고, 집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여러 명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의 다작을 단순히 숫자로만 말할 수는 없다. 본격 미스터리와 과학 미스터리, 사회문제와 가족 이야기를 가리지 않고 썼으며, 어떤 장르에서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막힘없이 읽히는 소설을 내놓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2026년 7월 23일 새벽 대장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68세였다. 늘 다음 작품이 나올 것 같던 작가였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새 작품이 나오면 이번에는 어떤 사건을 만들어 냈을까 기대했고, 작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든든했다.

그렇다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투명한 나선』의 아쉬움을 덮고 싶지는 않다. 좋아했기 때문에 더 기대했고,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익숙한 소재와 반복되는 구도가 더 잘 보였다. 이번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렀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앞선 작품들과 충분히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마음이 허전했던 까닭은 작품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가 더는 유카와의 다음 이야기를 써 줄 수 없다는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문장을 따라 막힘없이 달렸고, 유카와 마나부의 냉철한 추리와 가슴속 하트를 다시 만났다. 내가 따라간 것은 범인의 정체만이 아니라 유카와 마나부였고, 그 인물 뒤에는 내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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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cidaden Buenos Aires
만남은 여행의,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고 새로운 꿈을 빚어가는 사람들과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서 함께 웃고 울 수 있었음에, 그로 인해 내 삶이다시 생명을 얻었음에 감사한다. - P132

"저기 저 건물・・・ 아무래도 여행하는 사람 같은데 저걸 유심히 바라보기에 뭔가를 알고 그런 줄 알았지 뭐야. 저 건물이 바로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감금했던 곳이거든. 일부러 비좁은 건물을 선택했다고 하더군.
저 안에 몇 명을 수용했다더라... 아무튼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을 가득 채워 가두고서 모두가 죽어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하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야. 어떻게 그런 일을 하여간 바로 이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네, 젊은이." - P137

런던에서 살고 있으니 혹시 유럽을 방문하면 꼭 연락을 달라는내용이었다. 그곳에 취직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수영이에게는 아무도 상상 못 할 이유가 있었다.

아직 취직을 한 건 아니구요. 어릴 적부터의 꿈이 있는데 그건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났으니 일단 감사히 인생의삼분의 일을 한국에서 살고, 또 삼분의 일은 내가 원하는 나라들을 실컷 돌아다니며 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에가서 사는 거예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시작으로 런던을 택한 것뿐이에요. - P151

귀신이 곡하고도 남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년간 이메일을 통해서만 소식을 전해 듣던,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홍길동처럼 살고 있는 줄로만 생각해서 볼 엄두도 못 내던 수영이가 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비명을 질렀다. 언제나처럼 친구들을 여럿 대동하고 골목대장처럼 씩씩한 모습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라 보카의 오색찬란한 건물들 앞에서 햇살을 받으며 나를 보고 웃던 수영이의 까무잡잡한 얼굴. 그런 운명적인 만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우리는 각자의 친구들과 주변 구경을 마친 후 노천 카페에 마주 앉아 생맥주를 주문했다. - P153

그 중어느 하나라도 어긋났더라면 우린 그렇게 남미 땅 끝에 위치한 타국의 항구에서 영화 같은 만남을 갖지 못했을 터인데, 수영이와내가 그곳에서 만난 것은 정말 신의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아보아도 믿어지지 않던 그 순간, 그 만남. 수영이는 그렇게 놀랍고 반갑기그지없는 찰나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런던으로 돌아갔다. - P155

수영이가 나의 여행 중에 나타났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같다. 아마도 그것은, 인생은 도전해 볼 만한 일들로 가득한 것이며 쉬지 않고 꿈꾸면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밤에 나타나 요술 지팡이로 마법을 걸어주고 사라지는 동화 속 요정처럼 수영이는 예고없이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 미지의 땅에서 돌연 내 앞에 나타나 잠자고 있던 꿈들을 깨워주었다. 인생이란, 그녀의 말처럼 참으로 신기한 일들로 가득한 듯하다. 그래서 젖 먹던 힘을 다해달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 P157

"사람들이그랬죠? 라디오 택시가 아니면 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맞아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봐요. 라디오 택시라는 마크 하나가 더 있는 것뿐 그들도 나쁜 짓을 하려면 왜 못 하겠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라디오 택시라도 다 안전한 게 아니듯 우리 같은 택시도 무조건 위험한 건 아니란 거죠. 나 절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날 한 번 믿어봐요. 가는 곳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게요. 정말이에요." - P175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그 사이 정체불명의 수상한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만 같았다. 양손에 많은 짐을 들고서 그 사이를무사히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정말 이 말을 믿어도 될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택시 운전사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살면서 가끔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누군가의 말 속에 담긴 진심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의 경고의 목소리가 아닌, 오로지 그 사람의 눈동자가 왠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나의 육감만을 믿어야 할 때였다. 그래, 한번 믿어보자. 그러자.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쉬고 택시에 올랐다. - P175

"믿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한 말은 다진짜예요. 솔직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택시가 안전하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라디오 택시만이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 역시 믿을 게 못 되죠. 라디오 택시 회사에 취직을 하려면 돈을 많이 내야 하는데 난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것뿐이고 나 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이곳엔 가난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 도둑질을 일삼는 건 아니거든요. 힘들지만 열심히 노력하면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답니다. 그러니 라디오택시도 위험할 수 있고 반대로 우리 같은 택시도 안전할 수 있어요. 세상 어디에서나처럼 말이죠." - P176

그러면서 그는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자기 아들의 사진을 꺼내보여주었다. "바로 이 아이 때문에 난 더욱 열심히 일을 하며 살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들이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있도록 택시 승객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있구요. 몇몇 개념 없는 운전사들 때문에 나처럼 열심히 일하는사람들까지 치한으로 몰리는 건 정말 화가 난다니까요." - P176

‘위대한 안데스의 독수리여, 안데스의 보금자리로 나를 데려가주오. 내잉카의 형제들과 그곳에서 살고 싶네. 오 위대한 독수리여, 쿠스코에서나를 기다려주오. 그곳에서 함께 마추피추와 후아이나피추로 산책을가야지요......? - P183

"평등주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니 흥미롭네." 누군가 한마디를 던졌다. "맞아. 평등주의. 나이가 많든 적든, 더 많은 것을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가 평등하다는 거야. 나이 어린 사람이 무조건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윤리도 없지. 어린아이도 현명하고 지혜롭다면 나이 든 사람들이 똑같이 존중하고존경을 하지. 남녀간에도 그래. 둘 중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똑같이 역할을 나누어 하거든. 예를 들어 누군가 결혼을 할 때 그 마을 사람들에게서 가장 존경받는 남녀가 함께 주례를 맡는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 P187

삶이란 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무덤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어느 나라의 속담도 있듯이 죽음이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그것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게만 받아들이지 않던가 인생이란 것이 어차피 그렇게 잠시 거쳐가는 길이란 사실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갖지 못해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도 없을 텐데. - P189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인생은 생각보다 간단해.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지? 그것처럼 우리에게도 가장 기본이되는 삶의 원칙들이 있는데, 우리 것은 본래 단 세 가지였어. 첫째, 도둑질하지 말라. 둘째, 거짓말하지 말라. 셋째, 나약해지지말라. 그 세 가지만 지키면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거야. 행복하게 산다는 거.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아주 단순한 일이거든.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짓밟고 침략한 이후로는 그 세 가지에 한 가지 원칙이 더해졌지." - P190

"배신하지 말라. 사실 역사가 우리를 가혹한 운명에 처하게 했지만 우린 그것을 원망하거나 모든 것을 앗아간 서양 정복자들에게 미움을품거나 하지않고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평화롭게 살고 있어. 말하자면 그들이 침략을 했건 말건 우리의삶에는 달라진 게 없지. 그런데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바로 배신하지 말라는 계명이 하나 더 늘어난 거야. 그 말은 곧, 배신하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우리 인디언들의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던 단어 몇 개도 생겨났어. 만약, 혹시, 어쩌면,아마도 그런 것들이지. 우리에게 말은 곧 약속이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이라는 단어 따위는 사용할 필요가 없었는데 새로운 문화가 섞이면서 서로를 100% 신뢰할 수가 없게 된 거야. 예, 혹은 아니오, 그렇게 모든 것이 투명했는데 이제는 아니야. 안타까운 일이지." - P191

훌리오를 만나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심한 몸살을 앓았다. 웬일인지 꼼짝할 수가 없었고 다음날은 열도 나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아마도 그들의 현실을 대면하며 느껴야 했던 아픔과 뭐라 표현할 길 없는 커다란 감동이 뒤섞여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알 길이 없다. 하지만 훌리오의 가족과 함께 보낸 하루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시간 중 하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210

‘꿈은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엔 슬프게도 나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많은 산을 넘었다. 하지만 나의 인생길을 바꾸어놓은 수년 전 그 만남은 내게 더 큰 확신을 안겨주었다. ‘꿈은 분명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진정으로 간절히 갈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길은 열린다.‘라는 믿음을 말이다. - P219

Pasiónen Buenos Aires
인간은 장애물을 마주할 때 자신의 진정한모습을 발견하는 법, 삶의 여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련은 분명 나를 더욱 성장시키고성숙하게 하는 스승이다. 또한 아픈 만큼 성숙해진 사람은 빛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의 가슴,
다시 뜨거워지다 - P221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 걸음 쉬어가는 여유,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차분하게 가슴에 저장하는 시간은 여행에서나 인생에서나 꼭 필요하다. 이번 여행, 그러한 나만의 장소로 나는 파타고니아를 선택했다. 격한 감동과 뜨거운 정열,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 여행에서는 빙하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 일이 어울릴 듯싶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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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마담 쪽에서 소노카 씨한테 연락한 적은 없었어?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네기시 히데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저를 거절한 상대를 쫓아다니는 볼썽사나운짓은 젊었을 때부터 한 번도 해본 적 없답니다."
"그랬는데 지난달 23일에 우에쓰지 씨 쪽에서 마담한테 전화했다 이 말이지. 무슨 용건이었는지 알려 주면고맙겠는데." - P148

"안 나갔어요.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얼굴도 안 비쳐요. 이런 할머니가 가게에 자꾸 어슬렁거리면 손님도 흥이 떨어지잖아요? 오늘도 특별한 손님이기다리고 계신다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쉬고 있었을거예요. 집에 틀어박혀 있는 생활에도 익숙해졌지 뭐예요. 그래서......." 네기시 히데미가 구사나기를 향해 생긋 웃었다. "알리바이는 없는 셈이죠." - P151

정말 조만간 저 가게를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친구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P154

"그 마담이 소노카 씨를 만나러 꽃집에 갔다는 사실을계장님께 말하지 않은 건 마음에 걸리네요."
"걸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의심스럽지. 잊었을 리는없어. 대화 흐름상 당연히 나왔어야 해. 그런데 히데미마담은 자기를 거절한 상대를 쫓아다니는 볼썽사나운짓은 젊었을 때부터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못까지 박았어." - P158

"그래. 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어쩐지 이상해서요. 본인을 만나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소노카 씨는 그런 타입은 아닐 것 같거든요.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말에 따르면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남에게 쉽게 휩쏠리는 성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여성이 유흥업에 맞을까요? 생존 경쟁이 치열한 세계잖아요?" - P159

가오루는 계속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작심하고 말해보았다.
"아마 그렇겠지."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꽃집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갑자기 호스티스를 해보지 않겠냐니." - P159

"멋진 부부였어요. 나이 차가 있었는데 남편분이 온화한 성격이라 부인에게도 다정했죠. 적어도 저는 나에 씨가 남편 험담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그때는 골프가한창 유행이라 나에 씨도 남편의 권유로 배우고 있다고했어요. 여행도 좋아해서, 남편분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둘이 함께 여기저기 구경 다녔죠." - P175

"콘도가 완성될 무렵에는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스키의 인기도 꺼졌으니까. 그렇지만 원래 스키를 좋아해서구입한 사람도 많았을 거야. 설비는 제법 좋았다고 하니까. 삼십 년 넘게 분양이 안 돼서 파격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건물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고 들었어." - P182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수도권에서 그런 곳으로 이주한 사람도 있다고 해요. 스키 시즌이 아닐 때 머물러도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 장기간 잠복하기엔 절호의 은신처죠." - P182

바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종이컵이 옆으로 슥 밀려났다. 동시에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소노카는 걸치고 있던 후드 재킷 앞섶을 여미며 일어났다. 환기 때문에 창을 열어 두었는데 이 지역 공기는벌써 다가올 계절의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 P186

하지만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 덕분이다.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당했을때는 SNS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안이컸는데, 막상 전원을 꺼 두고 보니 생각보다 일상에서다방면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P187

그래서 아무리 지루해도 텔레비전을 보는 수밖에 없다. 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손쉽게오락거리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도피 생활을 시작한 후로 계속 고민하는 문제였다. - P187

나에는 옛날부터 틈만 나면 지즈코에게 "소카는 교제 상대를 잘 살펴봐야 해. 저 애는 남한테 잘 휩쓸리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던 터라 나에가 불쑥 찾아왔을 때 소노카는 몹시동요했다. 도어폰 소리에 예, 하고 무심코 대답했는데문 너머에서 나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너무 놀라설거지하던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 P193

나에의 말투는 침착했다. 하지만 소노카가 동요하지않도록 하려는 게 보였다.
소노카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결심했다.
괜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나에의 말을 따르기로, 잠자코 따라가겠다고……………. - P203

"누군가 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는 거야? 경찰이 콘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우연히둘 중 한 사람이 이 콘도는 슬슬 경찰에 들킬 것 같으니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보다야."
"하지만 그 경우 그런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야."
우쓰미 가오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정적이긴요, 한 사람뿐이에요. 계장님도 아시잖아요." - P216

"왜 일본어라고 생각했어? 구사나기가 물었다.
"막연히 그랬다고 했잖아.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냥잊어."
유카와는 작게 손사래를 치고 텀블러를 들었다. 버번하이볼을 입에 머금는 친구의 옆얼굴을 보며 구사나기는 머리를 굴렸다. 이 물리학자가 의미 없이 저런 말을했을 리 없다. - P228

"알았어.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자네, 언제부터 관여했어? 처음부터? 아니, 그럴 린 없지."
유카와가 어깨를 으쓱 들썩였다.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삼십 분밖에 없으니까 쓸데없는 줄다리기는 하기 싫어. 마쓰나가 나에에게 연락해서 유자와의 콘도를 떠나라고 지시했잖아." - P231

"웃기지 마!" 구사나기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주변 손님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구사나기는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두 사람이 도망치도록도와 놓고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군." - P232

"그 여성은 궁금했습니다. 소노카 씨가 누구에게 인형을 받았는지, 그리고 원래 주인은 어디 사는 누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네기시 씨." 유카와가 온화한 목소리로 부르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가리켰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이 인형은 당신이 만든 거지요?"
히데미는 유카와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 P245

‘望‘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인형의 성별은 모릅니다. 남자아이라면 ‘노조무‘, 여자아이라면 ‘노조미‘라고 읽을 수 있을까요? 아이가 태어나면 붙여 주려 했던 이름이 아니었을까. 제 상상은그렇습니다. 실제로는 딸이 태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아이는 이 이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이름이 빛을 본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 긴자에서 한 클럽이 문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다만 ‘노조무‘도 ‘노조미‘도 아닌, 한자를음으로 읽은 것이었죠. ‘보움‘(*‘望‘은 ‘보우무‘로도 읽을수 있는데 ‘VOWM‘의 일본식 발음과 같다.) 말입니다." - P246

하하하! 히데미는 웃었다. 실제로 우스웠다. 물론 유카와의 추리를 비웃은 건 아니었다. 몇십 년을 숨겨 온비밀인데 총명한 인물이 덤벼들면 이토록 간단히 풀 수있다니. 소중하게 지켜 온 긴 세월이 어리석게 느껴진것이다. - P246

"시마우치 소노카 씨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유카와가 말을 이었다. "소노카 씨는 경찰에 추궁당할까 봐 종적을 감췄을 겁니다. 자기 입으로 진상을 털어놓긴 싫은거지요. 범인이 자수해 주길 바라는 겁니다." - P249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러갔다. 스물일곱 살 때처음으로 후견인이 생겼다. 오래전에 환갑을 넘긴 주지승이었다. 교활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라 함께 있으면즐겁고 활기가 있었다. 씀씀이가 후해서 매달 몇십만 엔씩 용돈을 주고 고급 아파트도 마련해 주었다. 함께 해외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 P255

마지막 남자는 범죄와맞닿아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한번은 외국산 애완동물을 취급한다는말을 흘렸으니 아마 밀수업자였으리라. - P257

불법 권총을 갖고 있던 것은 그 남자였다. 호신용이라고 했다. 일반 권총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는데 쏠 때마다 장전하는 타입이었다. - P257

테스트 사격에 따라간 적이 있다. 오쿠타마의 산속에서 히데미도 나무를 쏴 보았다. 반동이 엄청나서 몸이뒤로 날아갔다. 남자는 그런 히데미를 보며 웃었다.
그는 그 불법 권총을 히데미의 집에 두었다. 기름종이에 싸서 보관할 때도 신경 썼다. 히데미도 분해와 손질방법을 배웠다. - P257

그러던 어느 날,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진 속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품에 안고 있는 물건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 인형이었다. 파란색과 분홍색 줄무늬 스웨터를 입은 긴 머리 인형. 틀림없다. 직접 만들었으니 잊을 리가없었다. - P259

"죄송합니다. 불쑥 찾아와서……………."
"괜찮아. 구사나기가 시켰지? 미리 연락하지 말고 찾아가라고."
"중요한 진술을 얻고 싶다면 상대에게 유예 시간을 주지 말 것. 그게 설령 오랫동안 알고 지낸 물리학자일지라도・・・・・・ 라고."
유카와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 녀석이 할 법한 소리군. 하지만 결국 자네는 내게약간의 시간을 주었어. 공동 출입구 인터폰을 누른 뒤로벌써 이십 분 이상 지났으니." - P-1

"오늘 오전, 네기시 히데미가 계장님께 연락해 왔습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집으로 와 달라고 해서 계장님이 직접 찾아갔는데, 본인이 우에쓰지 료타 씨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그랬군." 유카와의 반응은 건조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 P-1

"계장님이 유카와 선생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이렇게물어보라고 지시하셨어요. 그 고약한 버릇은 언제 고칠거냐고."
"고약한 버릇?"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찾아내고서도 경찰에는알리지 않고 먼저 용의자에게 달려가는 버릇 말이에요.
이번에도 그러셨다면서요? - P-1

"그런가. 구사나기한테는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자네에게 먼저 말한다고 화낼 친구는 아니지. 어쨌거나 오늘은 구사나기의 대리인으로 찾아왔다고 했으니."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오루는 유카와의 옆얼굴을 보았다.
"마쓰나가 나에는."
유카와가 가벼운 한숨을 흘리고 말했다.
"내 친어머니야." - P-1

따라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일본에서 응원할 테니열심히 하고 오라고. 기다리진 않을 테니 거기서 좋은사람을 찾으라고…………….
그는 괴로워 보였지만 나에를 설득하려 하지는 않았다. 똑똑한 사람이니 그녀의 속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슬펐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생리가 끊겼다. 경험해 보지 못한 기묘한 구역질도 계속되었다. 임신이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P332

누구 아이냐. 어쩔 작정이냐, 다그치는 말뿐이었다.
아버지는 당장 지우라고 호통쳤다.
나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우라는 강요에 고개만 가로저었다.
사장은 자신의 불찰이라며 부모님께 사과했다. 아마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을 지켜 주었다. 나에의 심정을 헤아려 준 것이다.
부모님은 곤혹스러워한 끝에 조건을 제시했다. 아이는 낳아도 좋다. 단 양자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 P332

전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나에는 받아들였다.
이윽고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마나부学라는이름은 전부터 생각해 두었다. 아버지처럼 현명해지길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 P333

"부모님과 쩌렁쩌렁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제 방까지들렸어요. 돌려 달라. 못 돌려준다. 내놔라, 못 내준다.
마치 장난감을 두고 싸우는 아이들 같았죠." 그가 냉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결국 타당한 결론에 도달했다고생각합니다. 제게 선택권을 주었으니까."
그랬다. 그를 불러서 한쪽을 고르라고 다그쳤다. 그시점에서 나에는 희망을 버렸다. 아무리 친부모라도 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를 선택할 리가 없다. 예상대로그는 지금 이 상태가 좋다고 대답했다.
만남은 허락해 주어서 나에는 짬이 날 때마다 만나러갔다. 마나부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늘 어두웠다. - P335

"이 세상에 진짜는 없다. 인간은 모두 외톨이......."
마나부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철없고 유치한 소리죠. 그 무렵에 항상 입에 달고 다녔어요."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깨달았어. 내가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이제 만나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지." - P336

"물론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죠 우연히도 제 친구가 수사 책임자였는데 아사히 나나라는 그림책 작가에관해 물으러 왔더군요. 그래서 작가 본명을 알게 됐어요. 친구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런 이유였나. 어째서 마나부가 이번 사건에 끼어드는지 전혀 몰랐다. - P337

"하지만 큰 착각이었어요. 그로부터 몇십 년이나 지나서,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인생을 보아 온 지금은 그때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지금 제가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입니다. 키워 준 부모님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저를 낳고, 그 부모님께 맡겨준 분에게도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때.. 한쪽을고르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어요. 그럴 수는 없다. 양쪽 다 내 부모라고." - P342

마나부가 나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나면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죄송했다고."
나의 가슴에 북받쳐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억누르려고 침을 꼴깍 삼키고 마나부의 눈을 바라보았다. - P342

"아까 다른 기회라고 했지? 자세한 사건 설명은 다른기회에 얘기해 주겠다고. 그럼 나를 또 만나 줄 거니?"
"물론입니다. 저희는 가족이잖아요." 마나부가 미소를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그렇죠. 어머니숨이 멎을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 품에 안아봐도 될까? - P342

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부 자그맣게 이름을 부르며 나에는 두 팔을 뻗었다. - P343

언제부터였을까?
전부 거짓말은 아닐까. 소노카의 어머니가 내 딸이라는 건 착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최근 일 같기도 하고 훨씬 전, 어쩌면 소노카를 만난 날부터 머릿속에 그런 의혹이 있었던 듯도 하다. - P347

하지만 그 가능성에는 눈을 감았다. 모르는 척했다.
믿고 싶었다. 내가 버린 아이가 낳은 딸과 함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꿈같은 시간이었고, 살아 있는 보람을느꼈다. 그 꿈같은 시간에 걸맞게 소노카는 솔직하고 착한 아이였다. 진짜 손녀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 소노카를 괴롭히는 우에쓰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소노카를 지키고 싶었다. - P347

히데미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까?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시 한번 권총 사진을 보았다. 그날을 떠올렸다.
찾아간 장소에 주택도 없고 막다른 길 바로 아래가 절벽이라는 것을 깨달은 우에쓰지는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P348

"기다려요. 제가 아니에요. 제가 하자고 한 게 아니에요. 소노카예요. 그 녀석입니다. 그 녀석이 할머니를......."
거기까지 들었을 때 방아쇠를 당겼다. 눈은 질끈 감고있었다. - P349

냉정할지언정 냉소적이진 않은 안정형 탐정인간 ‘유카와 마나부‘를 마침내 발견해 낸 작품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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