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빠져나온 이금순은 박헌영을 호위하여 충청도 지방을 향하고 있었으며, 충청북도 시골에 숨었다가 경성콤 사건이 잦아든지 일년 뒤에야 광주로 내려가게 된다. 박헌영은 그후 해방이 될때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공장에 인부로 숨어 있었고 이금순이 유일한 외부와의 레포 역을 맡았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조직의 마지막 운동이었다. 경성콤이 와해된 1941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 운동은 물론 해외 조선인의 항일 무장투쟁도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 P500

"저저 놀란 눈 좀 보라지. 정말 하늘도 땅도 뒤집힐 놀랄 일이 터져버렸소."
조는 박선옥을 손가락질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박선옥은 그가갑자기 미친 줄 알고는 더욱 겁을 먹었다.
"조, 조선이 해방되었소!"
"쉬잇, 안으루 들어가요."
박선옥이 그의 소매를 당기자 조영춘은 대뜸 뿌리치고는 연신웃어댔다.
"일본이 항복했다구, 공장마다 방송을 들었대요. 오늘은 일두 때려치구 다들 집으루 돌아갔어." - P514

조선 해방의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뜬금없이꿈같은 소리를 믿지 못했고, 방송을 들은 사람들도 직직대는 라디오의 잡음 속에서 가냘프게 들리는 일왕 히로히토의 일본말을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P514

그러자 누군가가 기계를 멈추며 만세를 불렀다.
"조선 독립 만세!"
멍하니 섰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온 공장이 떠나가게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 P515

일왕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이며 패전에 대한 항복의 의미는 한 글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영국 등으로부터 동아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주권 배격과 침략이 그의 뜻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 내용은 연합군 수뇌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으로얼버무려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의 식자층과 당시의 어느 논객은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 P520

항복 방송이 아니라 종전 방송이었다. 8·15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아홉시 동경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어째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는가. 그것은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 P521

조선반도의 삼십팔도선 분할은 1945년 8월 9일에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조선에 진격하자 8월 11일 미국 전략정책단이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삼팔선을 그어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했다는 것이 공식적 견해였다. 조선반도의분할은 미국이 즉흥적으로 주도하고 소련이 아무것도 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견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미국의 전략이었다. 미국 측 전략가들은 세개의 주요 항구를주목했고 이중 두개의 항구인 부산과 인천을 자기들 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삼팔선을 따라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이미 포츠담회의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의분할을 안건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 P521

1945년 9월 9일 오후 세시 사십오분,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조선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위해 남조선점령군 미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지통치권을 넘겨받는 조인식을 진행했다. 그것은 항복문서 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식민통치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 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과 미군 남조선점령군 사령관은 통치권 이양 문서에 나란히서명했다. 통치권 이양식을 마친 미군 남조선점령군과 일제 조선총독부 측은 당일 오후 네시 삼십오분 조선총독부에서 국기 교체식을 진행했다. 부근에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P525

서울 시내 열개 경찰서장과 경기도 내 이십일개 경찰서의 서장이 미군정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모두가 일제의 경찰이었거나 관리의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최달영은 발령받은 용산서로 출두했다. 조선인 신임 서장은 역시 이전에 일제 경찰 경시였고 정식으로 순사 시험을 치르고 간부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고위직에 오르려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체포하고 투옥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이력이 적힌 서류를 들고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P534

"한국은 하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여기 일년이 다른 나라의 십년이라구 하지 않더냐, 여기 십년은 바깥의 백년 세월과도 같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들 수백살씩 먹은 게지." - P537

해방되고 육개월이 못 되어 전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조직한 민중은 짧은기간이었지만 자신들의 열망에 기초한 자주독립국가와 민주사회건설에 성큼 다가서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해방 초기부터 미군의진주로 인하여 이러한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가는 과정은 인민들에게 역사와 사회발전 법칙에 대한 풍부한 교육적 효과를 안겨주었다. - P545

누군가가 단상에나서서 지난 이월에 결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측 좌익진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여운형 허헌 박헌영 등에게 보내는 성명 서한을 낭독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며칠 간격으로 남한 우익진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총재와 부총재에 각각 이승만과 김구를 추대하고 있었다. - P546

초여름에 군정 당국은조선정판사위폐사건을 조작하여 악성 인플레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 전가하려고 했다. 같은 시기에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고 김일성, 김두봉 등이 위원장, 부위원장을 맡았다. 미군정은 조공 지도부박헌영 등에 체포령을 내렸고 이후 남한의 사회주의 조직은 완전히 지하로 들어갔다. 몇몇 전설적인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인사들이 체포되었다. 가을에 접어들자마자 전평의 총파업과 함께시월인민항쟁이 벌어지고 피의 진압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을 선출한다.
-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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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몰고 와서 마당의 기둥에다 목줄을 당겨 바짝 붙들어맨다.
이때에는 돼지도 벌써 저 죽을 줄을 알고 똥을 부직부직 싸면서 뒷발을 구르고 꽥꽥거리며 요동을 친다. 주먹만 한 쇳덩이가 달린 채석장 해머를 몸 뒤에다 감추고 침착하게 돼지의 대가리를 겨누기맞춤한 거리까지 다가선다. 길게 사이를 두지 않고 한 호흡에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해머로 돼지 이마를 딱 내려친다. 이마 뼈가 주 저앉은 돼지가 졸지에 기절하면 즉시 잘 갈아놓은 칼로 목을 딴다.
그러면 조수를 맡은 맏누이가 바가지와 양동이를 들고 와서 돼지피를 받는다. - P293

피가 거의 빠졌다 싶으면 죽은 돼지를 배가 하늘로 가도록 뒤집어놓고 머리를 자르고 목덜미에서 항문까지 베어 내장을 수습한다. 그러고는 끓인 물을 부어가며 잘 갈아놓은 칼로 뻣뻣한 털을 밀어낸다.
돼지 잡는 일뿐 아니라 기르는 일도 고되고 험했으니 무엇보다도 양돈의 성공 여부는 사료를 어떻게 얻느냐 하는 데 달려 있었다. - P294

뒤에 알았지만 주재소의 조선인 순사 보조원들은 정식 순사보로 발령받은 자들이 아니었고, 최달영처럼 끄나풀이 되어 활동하며 나이가 들어서 순사 보조원이라고 부를 뿐이지 자기와 똑같은 임시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순사보다도시정에 나가면 조선인들에게 권세가 막강하였다. 이러한 자들을조선인들은 앞잡이나 끄나풀, 또는 여우라고 불렀고 친일 사회단체의 공개적인 장을 맡아 앞잡이들을 총괄하는 각 기관의 조선인촉탁들을 꿩이라고 불렀다. - P305

이들은 공안기관 용어로 정탐 또는 밀정이라고 칭했다. 한일합병 직후에 헌병 삼천여명, 경찰 이천육백여명, 그리고 헌병 보조원 사천팔백여명에 순사보 삼천여명, 정탐삼천명이었다. 헌병 보조원과 순사보도 밀정 역할이 위주였으니정탐과 합치면 일만 팔백여명이고, 헌병과 경찰 한 사람당 두명의개인밀정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그 수는 어림잡아서 이만 오천여명이 되었다. 이러한 직임이라도 얻어보려고 해마다 이십 대 일의 경쟁을 통과했으니 들지 못한 자들까지 잠재적인 앞잡이로 본다면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의 앞잡이가되어 몇푼의 생활비와 작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 P306

밀정의 종류는 대개 네가지로 분류가 되었다. - P306

첫째는 최달영의경우처럼 고용밀정이라 하는데 월급이나 상여금에 혹해서 직업적으로 개인이나 기관의 정보원 노릇을 한다. 그와 같은 자들은 경찰서 헌병대 특무기관 등에 고용된 밀정과 순사나 헌병의 정보원 노릇을 하는 개인밀정으로 구분된다. - P306

둘째는 어느 사건이나 정보를위해서 필요한 기간만큼만 밀정질을 하는 임시적인 촉탁밀정이 있었다. 이 경우에도 상여금을 탐내서 하는 예가 대부분이었다. - P306

셋째는 밀고자인데 말하자면 준밀정이다. 이해관계나 원한 때문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제보자와 구별된다. 제보자는 물으니까 대답한다는 식으로 피동적인 경우가 많으므로 정보 제공의 행의에 이해관계가 없기 마련이다. - P306

넷째는순사나 헌병이 수사나 탐문의 필요에 따라 직책으로 밀정질을 하는 경우이다. 민간인 또는 활동가로 변장해서 직접 침투하거나 또는 자기의 개인밀정을 사용해서 간접으로 정보를 입수하기도 한다. 기관에서는 밀정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밀정을 정탐하는경우도 있었다. - P307

이러한 유형 중에서 중심은 어쨌든 고용밀정과 촉탁밀정이었다. 그중에서도 밀정업자라고 부를 만한 거물들이 있었다. 이런 부류는 일진회 같은 친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하거나 독립운동가 중에서 변절한 자들이 총독부 경무국 촉탁이니 일본 외무성 촉탁 따위의 직함까지 받아서 유지나 권력자로 행세했다. - P307

기샤가 재빠른 솜씨로 화투장을 바꾸거나 숨기고 상대방에게 맞춤한 패를 주어 판돈을 과감히 걸게여 싹쓸이를 했다. 어수룩한 도박꾼인 것처럼 판에 끼어서 부추기며 기샤의 속임수를 돕는 자를 조슈라 하고, 장소를 마련하고 밑천을 대는 자를 슈진이라 하며, 돈 많고 도박을 즐기는 고객들을 모아 오는 자를 오야라고 하였다. 이들은 대개 서너명에서 많으면 칠팔명씩 한 구미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과 방법도 대개는 개화기를 지나고 조선의 갑오잡기나 투전에서 화투로 변하면서 일본 도박꾼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 P308

남대문역이 즉 경성역이었는데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는 예전에 부르던 이름으로 그냥 그렇게 불렀다. 더구나 서울역이라는 역 이름은 해방이 되어서야 부르게 될 이름이었다. - P319

"일본인 조선인 한인 만주인 몽골인 등이 서로 화합하여 평화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뜻이다. 또한 정착을 원하는 어느 나라 어느종족의 누구든지 함께 살 수 있다. 물론 앞장서서 끌고 나가는 것은 첫 단계에서 일본이 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에 하야시가 껄껄 웃으면서 일철에게 말했다.
"들었나? 대일본제국의 관동군이 평화의 만주를 만든다. 철도가그 선발대라구." - P325

다.그러나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중국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함께 싸웠다. - P326

때리고 차고 물을 먹이고 달아매고 하다가 나중에는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넓적다리를 지지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자기의신념을 지키고 그 운동을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에서 이재유 동무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초조해진 경찰은 음식도 잘 못 먹고 보행도 못하는 이동무를 자기들이 업고 부축하여 취조실로 끌어내어 전기고문까지 하였다. 이재유 동무는 나중에 그의 동무들에게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을 각오하였다‘라고 회상했다. - P336

"벚꽃 동산에 피어 있는 꽃, 바랜 꽃도 있고, 피는 꽃도 있네."
모리다는 일본 노래의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던 조선인 정치범들은 잘 지었다고 칭찬해주었고, 모리다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쓸쓸히 웃기만할 뿐이었다. 이 일로 엄한 추궁을 받은 모리다 순사는 경성에서멀리 떨어진 함경도의 산골 오지 주재소로 좌천되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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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코민테른은 서신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에대하여 지식인 중심, 파벌주의, 계급성의 결여, 사상의 혼잡성, 민중과 분리되어 있는 관념주의를 비판하며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공식화했던 터였다. 따라서 신세대 활동가들에게는 과거의 선배들과다른, 활동 노선의 전환이 운동의 임무와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식인 사회주의자 몇몇이 모여 당 조직이라고 결성하여선포하는 게 아니라, 매개 활동가들이 노동자 농민의 삶의 현장에들어가 그들을 의식화하고 투쟁을 통하여 단련한 다음에 거기서부터 아래에서 위로 조직을 결성하여 당을 건설한다는 당연한 조직방침이었다. 193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형태의활동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고 만주에서는 민족주의계의 무장투쟁이 차츰 사라지고 사회주의 계열이 중심이 된 무장투쟁이 - P239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서 중국에서 싸우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중국 당에, 일본에서는 일본 당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정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땅에서 당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 목전의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 국권을 빼앗겨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혁명을 할 토대마저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 P240

이재유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면서 대학 전문부에 다녔고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 P240

그들은 문건을 만들어 북선 지방에는 우편을 통하여 보낸 다음그 지역 조직원이 다시 등사하여 평양 인근 공장들과 평북의 광산등지에 우편으로 송부했고, 전국 각지의 공장과 광산 신문지국 등에 발송하고 서울과 인천의 가두에서 수백매를 살포했다. 기관지의 이름은 콤뮤니스트‘였는데 내용은 반전투쟁의 전개, 소비에트동맹의 사수, 중국 홍군과 소비에트의 옹호, 제국주의전쟁을 일제 - P245

에 반대하는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환할 것, 조선의 절대 독립 등이었다. 삐라 격문은 ‘일본의 만주 점령에 반대하자!‘는 것과 ‘붉은5·1절‘이라는 두종류가 있었다. - P246

그는 제일차 조선공산당을 설립할 때에 화요파의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최연소 발기인에 들었다. - P246

신의주에서 비밀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신의주의 청년 하나가 술이 만취하여 일본인과 싸우다가 자기가 공산당원이라고 호기 있게 소동을 벌였고,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 문초하여 조선공산당의 전모가 드러나는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에 전국적으로 검거 선풍이 불어 김형선은 박헌영 김단야와 더불어 중국 상해로 탈출했다. 십이월테제가 나온 이래 중국 만주 일대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주체적으로 조선 국내에서 당을 재건하려는 입장을 국내 연장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두해에 걸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만주총국 일본총국이 해체되고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각기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에 흡수되었다. 이때에 김형선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및 상해에 있는 모든 단체와의관계를 끊고 김단야와 제휴하여 조선에서 운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 P247

활동가들에게는 이십사시간의 불문율이 있었다. 즉 체포된자는 고문을 받기 마련이며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동지들의 도피를위하여 최소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치안 당국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검거하자마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쥐어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의고문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무너진 자는 전향하여 적의 도구가 되거나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이탈자가 되었고, 끝까지 버텨내고 견딘 자는 몸이 망가져 옥사하지 않으면 살아남아 더욱 단련된 활동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조직이란 모든 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였다. - P267

그녀가 평양을 거쳐 경성으로 와서 까페의 여급으로 일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여옥은 마치 태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던한 기생이나 다름없는 까페 여급 일을 능숙하게 치러냈다. 그녀는 술도 마셨고 손님들과 담화도 나누었지만 별다른 춘사는 벌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여옥은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말라 죽은 나무 같은 여자였을까. 신금이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었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금이 할머니는 아들 이지산과 손자 이진오에게까지늘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 P283

"그 시절에 가엾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한여옥은 어둠 속에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고, 뒷마당으로 나가 함지에 물을 가득히 채워 목욕을 했다. 찬물이 머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아랫배와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목욕을 하고는 방 안에 이부자리를 붙여서 깔고 누웠다. 베개도 나란히 붙여두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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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을 옳게 영작한 것은?
그녀를 보면 나는 언제나 죽은 누님이 생각이 난다.
1. I never see her but I remind of my dead sister,
2. I never see her but I am thought of my dead sister.
3. I never see her without being reminded of my  dead sister.
4. I never see her without reminding of my  dead sister.

길라잡이
정답 3
해설
• I never see A but A reminds me of X.
= I never see A without A‘s reminding me of X.
• I never see A but I am reminded of X.
= I never see A without being reminded of X.
- P126

※ 다음 중 밑줄 친 곳에 들어갈 가장 적절한 것은?
( ), I don‘t know him.(‘98 행정고시)

1. Meeting not him before.
2. Having not met him before
3. Not having met him before6
4. As not meet him before
5. Not meeting him before

길라잡이
정답 ③
해설: 준동사의 부정형 중에서도 완료형의 부정형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정동사의 완료형의 부정방식과 준동사의 완료형의 부정방식은 전혀 다르다.
As I have not met him before, I don‘t know him.
⇒ Having not met him before, ~ .(x)
⇒ Not having met him before, ~ .(0)
He is proud that he has not done such a thing.
⇒ He is proud of having not done such a thing.(x)⇒ He is proud of not having done such a thing.(0) - P179

※ 다음 문장을 영어로 바르게 옮긴 것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지구가 둥글다고 할 수 없었다."

1. At that time no one could say that the earth was round.
2. In those days anyone cannot tell that the earth is round,
3. At that time anyone could say that the earth is round.
4. In those days no one could say that the earth is round.
5. In those days anyone could not say that the  earth was round.
길라잡이
정답.4)
해설 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고, 따라서 주절의 시제가 비록 과거일지라도, 종속절에는 고유한 자신의 시제인 현재시제가 와야 한다. 시제일치의 예외에 해당한다. 주의할 것은 ②번지문에서처럼 not과 any가 그 순서가 뒤집힌 꼴로는 사용하지 않고, 따라서 부정 주어로 구성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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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쌀보다 돈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금이가 그래도 보통학교를 나온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유용한 일이었다. 조선어 대신 ‘국어‘를 배워 어른들이못하는 일본어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이다. 금이는 막내올케를 따라 영등포로 나갔다. 방직공장에 취직할 때까지 한달쯤그녀의 동무 집에 양식을 주고 숙식을 했다.
- P116

"우리의 영용무쌍한 대일본제국의 관동군은 단지 오일 만에 요동성과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오랫동안 종속되어왔던이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일철이 아직 철도종사원양성소에 재학 중이던 이듬해 겨울방학 중에 만주국 건립이 선포되었고,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가집정에 취임했다. 만주는 이제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다. - P118

"선반부와 주조부가 치수와 주형의 착오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투다보면 우리끼리 인심 사나워질 테고 싸움이 커지면 누군가가 해고될 게 뻔하지 않소. 조선도 그렇게 해서 망한 거요. 여우같은 일본은 그런 식으로 조선 백성을 가지고 노는 거요."
"우리가 다 조선 사람이라는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지요."
- P122

"그걸 모두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우리네끼리만 아웅다웅하지.
여기는 조선 땅이고 우리가 쥔이란 말이야." - P122

"땅이나 공장이 생산수단인데 그게 다 돈이거든. 그걸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가지면 골고루 먹구살 수 있지만, 그걸 다 차지하구있는 몇몇 놈이 우리를 맘대루 부리잖소? 옛날에는 왕과 측근의 벼슬아치들이 차지하고 있다가 그들 주변의 권력자들이 대물림하여재부가 되었고, 이젠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전체를 차지하여 그놈들과 더불어 우리를 부려먹구 있소." - P125

마르크스의 『선언을 필사본으로 읽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해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나는 얇은 공책 한권은 그 자신의 필사에 의하여 세권으로 불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독서하는 동안 그렇게 쓰인 필사본이 자기에게도주어졌을 것이다. 『자본』은 일본어로 된 것을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 조금만 알 수 있었고 일본 학자가 해설한 『유물론』은 처음부터너무 어려웠다. - P128

"아부지가 운이 좋긴 뭐가 좋아요? 아부지한테는 왜놈들이 상전이구 주인이잖아요? 제 말씀은요, 일본 놈이든 조선 놈이든 그냥목숨만 부지할 정도루 주는 대루 먹구사는 종놈이 아니라, 일한 만큼 대우를 받으며 살자는 거예요. 그런 사회가 오면 나라도 독립이되겠지요." - P130

그는 조직의 방법에서, 확실하게 믿음직한 소통을 주고받을 수있는 두 사람의 동지를 만들어 세 사람이 논의하면서 각자가 자기일터를 찾아가 같은 방법으로 논의할 수 있는 그룹을 형성한다는것이었다. 접촉점을 최소화하면서 삼삼은 구, 삼사 십이, 삼오 십오, 하는 식으로 조직을 넓혀간다고 하였다. 나중에 이러한 점조직을 세마리의 말이 끄는 썰매 같다고 하여 트로이카 방식이라고 부르게 된다 - P142

"이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무슨 뜻이에요?" 이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산자를 말하며 우리 같은 노동자의 또다른 명칭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철은 안대길에게서 들은대로 옛날 서양의 로마시대에 사회에 기여할 것이라곤 자신과 같은 노예를 재생산하는 능력밖에 없는 계급을 이르는 말이었다고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 - P144

형제는 그때에 입장을 확인하고 서로를 이해하기로 약속했다고한다. 이러한 약속을 둘은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다. 처음의 약속이 어긋나게 된 것은 해방 후였고, 그것은 이미 아우 이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 P150

시간이 많지 않으니 긴요한 점만 짚어보십시다.  활동가와 대중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며 누구는 항상 앞장서고 또 누구는 따라가기만 하는 일도 없어져야 합니다. 개인과 대중이 의식화되면 서로에게서 배우게 되지요. 대중 없는 당은 머릿속 관념일 뿐이겠지요. 일제의 폭압이 심해질수록 좌편향이 되기 마련인데, 그럴수록 우리는 침착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되 너그러워야 하고 감출 것은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근로대중의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말이나 행동도 경계해야 되겠지요." - P154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은 다른 일인가요?"
"나에게도 그게 항상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두개의 무거운 철쇄에 묶여 있어요. 일제의 식민 억압과 부르주아 사회체제입니다. 근로대중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 두 과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 P154

그날 이철이 뇌리에 새긴 것은 서두르지 말되 급변하는 상황을놓쳐서도 안 된다는 것과 노동대중의 자율성과 지도력을 신뢰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활동가는 대중을 도우면서 끊임없이 대중의 지도를 받는 존재라야 했다. - P154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혁명조직은 식민지 조선의 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침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했어요. 코민테른 극동부에서 파견되었다는 인사,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다는 인사, 프로핀테른 극동부에서 파견 나왔으며 국제당의 레포 회의에 참가했다는 인사,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니중국공산당 만주성회니 태평양노동조합의 파견원이니, 그리고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는 무수한 인사가 있었지요. 이들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가려고 일어서는 조선의 근로대중을 놓고 서로 자기 조직이라면서 운동선을 중복시키고 주도권다툼을 해왔지요. 이런 사람들이 밖에서 배웠던 조선에 대한 지식은 국내에 들어와 운동하는 데 현실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 P166

이들은 각자의 운세에 따라서 사창가나 공장으로 팔려갔다. 이러한 일본 관청의 경험은 관례가 되어 나중에 전쟁 시기의 징용과 정신대 동원에 활용되었다. 굶주린 부모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진 이 소녀들은 사창가에서 자신의 살을 베어 파는 것 같은 고통 속에 시들어갔고, 공장에서는 소모품처럼 죽어갔다. - P174

진기는 금속노조의 집회에서 알게 되었던 노동자 친구였다. 세살이나 아래였는데도 또라진 반말로 그를 대했다. 어이, 이진오. 우리 다 쇳가루 먹고 사는 버러지들 아닌가. 요즘 세월에 자칫하면 군홧발로 뭉개지고 마는 목숨들이지.
- P196

자동차공장 해고노동자였던 진기는 몇년 전에 공장 굴뚝 위로 올라가 일년 가까이 고공농성을 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스물두명의 해고노동자가 자살했고그는 아홉번째의 자살자였다. 그에게는 아들 둘에 딸 하나, 세 자식이 있었고 아내는 그가 해고당한 뒤 수년간 식당에서 일하며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렸다. 진기는 노래를 잘했다. - P196

심지어는 「인터내셔널가」까지 할머니에게서배웠다. 신금이 할머니에게 인터내셔널가는 누가 가르쳐주었느냐고 물으니 이철이 시동생에게서 배웠고 할아버지도, 네 아버지도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진오는 랜턴을 켜놓고 텐트 안에 누워서노래를 흥얼거렸다.
- P211

까딱까딱 상투 끝 애기 새서방
왈낭절낭 말 타고 장가가누나
우리우리 다 같이 놀리워줄까
그래그래 그러자 놀리워주자
새서방 망태 꼴망태 의주벙거지 날라리
새서방 망태 꼴망태 의주벙거지 날라리

장독 같은 시악씨 늙은 시악씨
가마 타고 눈감고 시집가누나
우리우리 다 같이 놀리워줄까
그래그래 그러자 놀리워주자
색시 맥시 맥맥시 언덕 아래 구럭시
색시 맥시 맥맥시 언덕 아래 구럭시 - P211

일어나라 저주로 인 맞은 주리고 종 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넘쳐 결사전을 하게 하네
압제의 세상 뿌리 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 P212

이는 우리의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내셔널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의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내셔널로 인류가 떨치리 - P213

또한 탄떼기는 ‘차떼기‘에 비하면 푼돈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멀고 먼 지방을 연결하는 기관차는 사람도 나르지만 물자와 그 지역의 특산물도 나른다. 그곳에서는 값이 녹은 물건이 저곳으로 이동하면 몇배가 되기도 한다. 먼 곳일수록 그 격차는 커진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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