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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료의 무게에 눌려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시간이갈수록 집은 멀어지고 사료는 무거워지면서 나는 정말 사료 무게만큼이나 외로웠다. 그때 그 외로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그 어떤힘든 일도 다 견딜 것 같다. 외로움의 무게는 사료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컸으니까. 등에서는 땀이 나고 고무신 속 발에도 땀이 났다. 들가운데 논두렁에 지게를 받쳐놓고 지게 밑에 앉아 쉴 때 귀싸대기를때리던 추위를 견디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게 밑에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나는 혼자 얼마나 울었던가.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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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나는 공고를 가야만했다. 둘째라서. 할머니께서는 큰형밖에 대학에 보낼수밖에 없다 하셨다. 중3 담임선생님께선 어머니를 학교에 네번 부르셨고 나는 중학교옆에 붙어있는 후졌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할수 있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서울에 있는 공립 4년제 대학에 갈수 있었고 ROTC장교를 나왔고, 지금은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닐수 있었다. 고마우신 그 선생님 덕분에, 그 분 말씀을 따라주신 어머님 덕분에!

내가 다니던 농림고등학교에 ‘영농학생‘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영농학생에 가입하면 학교에서 공부보다 농사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논과 밭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내기나 벼 베기, 묘포장에 풀베기 같은 일은 전교생이 나서야 했지만 자잘한 일은 영농학생들이 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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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시는 어머니.
내 어머니도 새벽부터 석회 후레쉬를 들고 고동-우리 동네에선 다슬기를 고동이라 불렀다.-잡으러 냇가로 나가셨고 이른 아침이면 그 고동을 사러 고동장수가 트럭을 몰고 우리 동네에 왔다. 고동은 그 시절 7~80년대 우리 마을의 주 수입원이었다

어머니는 달 뜬 새벽 강을 건너가 밭을 매셨다.
호미 끝에 걸려 뽑히는 작은 돌멩이들이 돌아눕는 아픈 숨소리가 잠든 내 등에서 딸그락거렸다.
젖은 돌멩이 몸에 파인 호빗자국이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었다. 아프고도 선명한 그 다리를 건너 나는 세상으로 나갔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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