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 제국의 이상을 담은 거대한 그릇 - P37
베네치아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 일자로 뻗은 길인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좌우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재위B27~AD14, 트라이아누스 Traianus, 재위 98~117, 네르바 Nerva, 재위 96~98 등 제국초기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업적 홍보를 위해 건설했던 포룸과 그곳을가득 채웠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제국을 선포한 로마의 위상이얼마나 높았는지 남아 있는 일부 유적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 P37
판테온. 로마가 멸망하고 많은 건물이 헐려 나갔을 때판테온은 교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오늘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 P41
건국 700년 만에 로마는 역사상 최고의 위치에 섰다. 300년 전 외적방어를 위해 쌓았던 성벽은 로마의 확장을 위해 일부 철거되었다.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친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중년기로 접어든 로마의 앞날에 장애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로마의 변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졌고 작은 소요들이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대풍이 되어 로마의 심장부로향하고 있었다. - P42
기원후 96년부터 180년까지 다섯 황제가 다스렸던 오현제 五賢帝 시대는 로마 역사상 최고로 평화로웠던 시기이자 가장 넓은 영토를 영유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발견되는 기념비적인 건물은 세상의 모든 신을모시는 판테온 Pautheon 이다. 기원진 27년 집정관 아그리파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기원후 125년경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재위117~138 황제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건했다. 무려 4,500t 무게의콘크리트 돔 지붕이 43m나 되는 커다란 공간을 덮었다. 세상에서 가장큰 기둥이 없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곳에 로마제국의 기상이 담겼다. 판테온은 1,300년 후에 피렌체와 로마에 건설될 또 다른 돔 지붕의 훌륭한 교범이 될 터였다. - P42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제국의 황혼 녘 - P43
콜로세움 서쪽에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는 콘스탄티누스개선문은 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개선문은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포룸 로마눔‘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에서 쓸쓸함이느껴지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공존하듯 로마의 번영과 쇠망도종이 한 장 차이였다. 제국의 영광을 대변했던 개선문이 동시에 쇠망을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P43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자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어버린 로마는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 P44
3세기 중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재위 270~275는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로마에 다시 성벽을 쌓았다. 이로써 북방의 갈리아 군대 침략 이후 600년 동안 성벽이 없어도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가던 시절은끝나고 말았다. 성 밖으로 나가 제국의 위엄을 방방곡곡에 알리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 P45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황제 혼자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286 황제는 로마제국을동서로 나누고 황제·부황제가 함께 다스리는 사두정치 테트라키아를 도입했다. - P46
그러나 세계의 머리는 하나일 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 P46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 억압받던 기독교에자유를 주었다. 이후 그는 동로마 황제까지 굴복시키면서 로마를 재통일하고 제국의 수도를 동방의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 이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된다. 건국 이래 천 년 이상 수도 역할을 했던 로마는 수도의 지위를 잃어버리자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 P46
이후 4세기 말이 되면 제국은 정치적으로 완전히분리되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하 비잔티움 제국이 공존하는 시대로접어든다. - P46
본디 칼을 쥐면 휘둘러보고 싶은 법이다. 이제 상황이역전되어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로마의 다신교를 억압했다. - P47
로마는 계속 성벽 안에만 머물렀고 그들의 장점이었던 관용은 사라졌으며 황제의리더십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5세기 말, 유럽 서쪽에서밀려들어온 게르만족은 1,300년간의 길고 길었던 역사의 무대에서 로마를 퇴장시켰다. - P47
바티칸, 영욕의 시간을 견뎌낸 가톨릭의 성지 - P48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곳이바티칸 시국이다. 한편,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있는 곳 또한 바티칸이다. 교황청의 오랜 역사와 신비주의로 인해 종교와 과학의 대립, 음모와배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영화의 단골 배경이 된 곳도 이곳이다. - P48
오래전부터 바티칸 언덕은 이교도들이 점을 치는 공간이었다. - P48
바티칸이란 지명은 ‘점을 치다‘ 라는 라틴어 ‘바티키니아 vaticinia‘에서 유래되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순교했던 곳이 바티칸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점치는 언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된다. - P49
로마의 5대 황제였던 네로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그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연결고리였던 기독교로 향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당했으며 예수의 첫 제자였던 베드로 또한 바티칸에 있었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했다. - P49
그의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성베드로의 무덤에 방문하여 추모를 이어나갔다. 160년경 교황아니케투스 Anicetis, 재위 157~168가 그곳에 성베드로 기념비를 세우자 더욱더 많은 순례객이 찾아와 기념비에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 P49
콘스탄티누스1세는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도록 명령했고 350년에 낙성되면서 바티칸은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된다. - P49
중세 이래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지를 소유한세속의 군주이자 세계 가톨릭의 수장이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실패, 교회의 부패와 타락, 종교개혁, 시민 의식의 성장으로 교황의 권위는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 P50
19세기에 들어 교황의 영지는 주변국에 의해 갈수록 줄어들더니 최후의 보루였던 로마마저 이탈리아의 통일을 부르짖던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면서 결국 자취를 감췄다. - P50
이탈리아 왕국에 모든 영지를 몰수당한 교황 피우스 9세는 지난 천년간 유지해왔던 교황령이 자신의 대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린 것에 대한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에 틀어박혀 60년간 스스로를세상과 격리했다. - P51
20세기 들어서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더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던 피우스 11세 Pius XI, 재위 1922~1939는 1929년이탈리아 총리였던 무솔리니와 교섭을 벌여 라테라노 조약을 맺는다. 교황청은 엄청난 금액의 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은 자주권을 가진 국가로인정받게 되었다. - P51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교황령이 부활해 ‘바티칸 시국‘ 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여의도에 6분의 1 수준이며, 9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지만 상징성만큼은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 P51
바티칸 박물관, 1377년,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온 교황청은 바티칸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 P51
르네상스 교황들, 다시 일어나는 빈사의 로마 - P5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위기에 빠졌을 때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과 위기를 디딤돌 삼아 국면전환을 이룬 사람이다. 로마는 후자에 해당함이 분명하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일곱 번의 큰 화를 입었고 그때마다 절망을 딛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 P51
특히 15세기는 아비뇽 유수와 서방교회 대분열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중세 모습의 로마를 밝고 세련된 르네상스풍 도시로 만들어가던 인상적인시기였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새로운 생각과 지식으로 무장한 교황들이있었다. - P51
인문주의를 최초로 지지했던 교황 니콜라우스 5 세 Nicolaus V. 재위1447~1455는 성베드로 대성전이 있는 바티칸 언덕으로 교황청을 이전하면서 추락한 교회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 P54
식스투스 4세 Sixtus IV, 재위 1471~1484는 교황청의 도서관을 더욱 확장하여 예술과 학문을 장려했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예배와 교황 선출을위한 추기경 회의가 열리는 지극히 신성한 장소인 시스티나 예배당을건립한 것은 그의 최고 업적이었다. 도로가 포장되고 테베레강에 다리가놓이면서 로마는 르네상스 멋을 갖춘 청결하고 세련된 도시로 바뀌었다. - P55
v 트레비 분수, 화려함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바로크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 P55
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사생활이 극도로 문란했던최악의 교황으로 알려저 있다. 반면,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 예술가들이 로마에서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 P56
이후 등장한 율리우스 2세 Julius II, 재위 1503~1513는 대외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역시 예술 분야에서는누구 못지않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바티칸 박물관의 콘셉트를 최초로 만들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로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명했다. - P56
게르만족의 침략 후 영원히 잠들어버린 줄 알았던 로마는 천 년간 켜켜이 쌓였던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부활하여 다시 유럽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 P56
교황청이 르네상스 인재들에게투자하면서 로마는 바뀌기 시작했고 세상은 전보다 살맛 나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퇴행을 거듭했던 로마는 르네상스 교황들과 거장 예술가들에 의해 다시 생명을 얻어 앞으로 나아갔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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