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만주 장춘(신경) 출생.

해질무렵 부터는 없는책.
삼국지. 이문열, 박태원 삼국지를 읽었고
황석영은 아직, 읽어보자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지만 이문열 삼국지가 재밌다

초판 장길산 검색 안되네 ㅠㅠ

어느 순간 황석영을 읽지 않게되었다.
어느 순간 황석영을 다시 읽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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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8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대학입학선물로 형부에게 이문열 삼국지 받았어요. 추억이 떠오르네요. 참 열심히 읽고 그때부터 장길산이며 찾아 읽다가 무협지로 넘어간 ㅎㅎㅎ

대장정 2022-04-19 00:12   좋아요 1 | URL
책 선물해 주시는 형부도 계시고 부럽네요ㅎㅎ 홍콩 무협영화는 엄청좋아하는데 무협지는 안 읽어봤어요

그레이스 2022-04-19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길산 초판으로 읽었어요^^

대장정 2022-04-19 19:48   좋아요 0 | URL
초판이 젤 좋지요 ^^~~☆☆
 

판테온,
제국의 이상을 담은 거대한 그릇 - P37

베네치아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 일자로 뻗은 길인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좌우에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재위B27~AD14, 트라이아누스 Traianus, 재위 98~117, 네르바 Nerva, 재위 96~98 등 제국초기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업적 홍보를 위해 건설했던 포룸과 그곳을가득 채웠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제국을 선포한 로마의 위상이얼마나 높았는지 남아 있는 일부 유적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 P37

판테온. 로마가 멸망하고 많은 건물이 헐려 나갔을 때판테온은 교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오늘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 P41

건국 700년 만에 로마는 역사상 최고의 위치에 섰다. 300년 전 외적방어를 위해 쌓았던 성벽은 로마의 확장을 위해 일부 철거되었다.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친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중년기로 접어든 로마의 앞날에 장애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로마의 변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졌고 작은 소요들이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대풍이 되어 로마의 심장부로향하고 있었다. - P42

기원후 96년부터 180년까지 다섯 황제가 다스렸던 오현제 五賢帝 시대는 로마 역사상 최고로 평화로웠던  시기이자 가장 넓은 영토를 영유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발견되는 기념비적인 건물은 세상의 모든 신을모시는 판테온 Pautheon 이다. 기원진 27년 집정관 아그리파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기원후 125년경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재위117~138 황제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건했다. 무려 4,500t 무게의콘크리트 돔 지붕이 43m나 되는 커다란 공간을 덮었다. 세상에서 가장큰 기둥이 없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곳에 로마제국의 기상이 담겼다.
판테온은 1,300년 후에 피렌체와 로마에 건설될 또 다른 돔 지붕의 훌륭한 교범이 될 터였다. - P42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제국의 황혼 녘 - P43

콜로세움 서쪽에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는 콘스탄티누스개선문은 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개선문은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포룸 로마눔‘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에서 쓸쓸함이느껴지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공존하듯 로마의 번영과 쇠망도종이 한 장 차이였다. 제국의 영광을 대변했던 개선문이 동시에 쇠망을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P43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자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어버린 로마는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 P44

3세기 중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재위 270~275는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로마에 다시 성벽을 쌓았다. 이로써 북방의 갈리아 군대 침략 이후 600년 동안 성벽이 없어도 불안에 떨지 않고 살아가던 시절은끝나고 말았다. 성 밖으로 나가 제국의 위엄을 방방곡곡에 알리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 P45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황제 혼자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286 황제는 로마제국을동서로 나누고 황제·부황제가 함께 다스리는 사두정치 테트라키아를 도입했다.  - P46

그러나 세계의 머리는 하나일 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 P46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 억압받던 기독교에자유를 주었다. 이후 그는 동로마 황제까지 굴복시키면서 로마를 재통일하고 제국의 수도를 동방의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 이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된다. 건국 이래 천 년 이상 수도 역할을 했던 로마는 수도의 지위를 잃어버리자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 P46

이후 4세기 말이 되면 제국은 정치적으로 완전히분리되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하 비잔티움 제국이 공존하는 시대로접어든다. - P46

본디 칼을 쥐면 휘둘러보고 싶은 법이다. 이제 상황이역전되어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로마의 다신교를 억압했다.  - P47

로마는 계속 성벽 안에만 머물렀고 그들의 장점이었던 관용은 사라졌으며 황제의리더십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5세기 말, 유럽 서쪽에서밀려들어온 게르만족은 1,300년간의 길고 길었던 역사의 무대에서 로마를 퇴장시켰다. - P47

바티칸,
영욕의 시간을 견뎌낸 가톨릭의 성지 - P48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곳이바티칸 시국이다. 한편,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있는 곳 또한 바티칸이다. 교황청의 오랜 역사와 신비주의로 인해 종교와 과학의 대립, 음모와배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영화의 단골 배경이 된 곳도 이곳이다. - P48

오래전부터 바티칸 언덕은 이교도들이 점을 치는 공간이었다. - P48

바티칸이란 지명은 ‘점을 치다‘ 라는 라틴어 ‘바티키니아 vaticinia‘에서 유래되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순교했던 곳이 바티칸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점치는 언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된다.
- P49

로마의 5대 황제였던 네로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그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연결고리였던 기독교로 향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당했으며 예수의 첫 제자였던 베드로 또한 바티칸에 있었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했다.  - P49

그의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성베드로의 무덤에 방문하여 추모를 이어나갔다. 160년경 교황아니케투스 Anicetis, 재위 157~168가 그곳에 성베드로 기념비를 세우자 더욱더 많은 순례객이 찾아와 기념비에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 P49

콘스탄티누스1세는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도록 명령했고 350년에 낙성되면서 바티칸은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된다.
- P49

중세 이래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지를 소유한세속의 군주이자 세계 가톨릭의 수장이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실패,
교회의 부패와 타락, 종교개혁, 시민 의식의 성장으로 교황의 권위는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 P50

19세기에 들어 교황의 영지는 주변국에 의해 갈수록 줄어들더니 최후의 보루였던 로마마저 이탈리아의 통일을 부르짖던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면서 결국 자취를 감췄다. - P50

이탈리아 왕국에 모든 영지를 몰수당한 교황 피우스 9세는 지난 천년간 유지해왔던 교황령이 자신의 대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린 것에 대한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에 틀어박혀 60년간 스스로를세상과 격리했다. - P51

20세기 들어서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더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던 피우스 11세 Pius XI, 재위 1922~1939는 1929년이탈리아 총리였던 무솔리니와 교섭을 벌여 라테라노 조약을 맺는다. 교황청은 엄청난 금액의 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은 자주권을 가진 국가로인정받게 되었다. 
- P51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교황령이 부활해 ‘바티칸 시국‘
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여의도에 6분의 1 수준이며, 9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지만 상징성만큼은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 P51

바티칸 박물관, 1377년,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온 교황청은 바티칸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 P51

르네상스 교황들,
다시 일어나는 빈사의 로마
- P5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위기에 빠졌을 때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과 위기를 디딤돌 삼아 국면전환을 이룬 사람이다.
로마는 후자에 해당함이 분명하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일곱 번의 큰 화를 입었고 그때마다 절망을 딛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 P51

특히 15세기는 아비뇽 유수와 서방교회 대분열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중세 모습의 로마를 밝고 세련된 르네상스풍 도시로 만들어가던 인상적인시기였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새로운 생각과 지식으로 무장한 교황들이있었다. - P51

인문주의를 최초로 지지했던 교황 니콜라우스 5 세 Nicolaus V. 재위1447~1455는 성베드로 대성전이 있는 바티칸 언덕으로 교황청을 이전하면서 추락한 교회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 P54

식스투스 4세 Sixtus IV, 재위 1471~1484는 교황청의 도서관을 더욱 확장하여 예술과 학문을 장려했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예배와 교황 선출을위한 추기경 회의가 열리는 지극히 신성한 장소인 시스티나 예배당을건립한 것은 그의 최고 업적이었다. 도로가 포장되고 테베레강에 다리가놓이면서 로마는 르네상스 멋을 갖춘 청결하고 세련된 도시로 바뀌었다.
- P55

v 트레비 분수, 화려함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바로크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 P55

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사생활이 극도로 문란했던최악의 교황으로 알려저 있다. 반면,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 예술가들이 로마에서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 P56

이후 등장한 율리우스 2세 Julius II, 재위 1503~1513는 대외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해서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역시 예술 분야에서는누구 못지않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바티칸 박물관의 콘셉트를 최초로 만들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로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명했다. - P56

게르만족의 침략 후 영원히 잠들어버린 줄 알았던 로마는 천 년간 켜켜이 쌓였던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부활하여 다시 유럽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 P56

교황청이 르네상스 인재들에게투자하면서 로마는 바뀌기 시작했고 세상은 전보다 살맛 나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퇴행을 거듭했던 로마는 르네상스 교황들과 거장 예술가들에 의해 다시 생명을 얻어 앞으로 나아갔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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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우스 성벽,
공화국 경계를 허물고 대외로 진출하다 - P32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의든 타의든 독립을 해야 할때가 온다. 홀로서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고통이 따르며 시행착오로 인한숙고의 시간도 필요하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성벽을 허물어야 새로운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로마도 용기를 가지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스스로 허물어 버리자 더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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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자는 열 개의 길을 통해 서유럽이라는 매력적인 숲을 만나러떠난다. 이 길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를 관통하는 네 길이다. 문명의 횃불을 들어 유럽에 어둠을 밝혔던 로마가 그 시작점이다. 이어 신 중심의 사회였던 중세를 지나 다시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피렌체로 연결된다. 길은 새롭게 자각한 인간의 잠재력이최고조로 발현되었던 베네치아를 돌아 모든 이탈리아의 길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밀라노까지 연결된다. 이 모든 길이 비로소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의 대동맥이 된다.
- P7

두 번째는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를 통과하는 세 길이다. 알프스의 웅장함을 조망하는 최고의 장소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던 루체른에서 길은 시작된다. 이어 거친 자연환경을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인터라켄을 지나, 관용의 정신으로 인도주의를 실천했던 제네바까지 길은 연결된다. - P7

세 번째는 고대부터 로마의 문화를 착실히 받아들였던 프랑스를 통과하는 두 길이다. 문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베르사유에서 길은 시작되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근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혁명의 심장 파리에 다다른다 - P7

마지막은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통과하는 길이다. 영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에 성공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중심에 있었던 도전과 혁신으로 가득 찼던 런던에서 길은 끝난다. - P8

로마에서 시작해 런던에서 끝나는 열 개의 길은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거대한 역사의 축이 된다.
이로써 유럽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 숨 쉰다. 길의 끝에서 맥박이 요동치는 역동적인 숲을 꼭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숲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곳까지 시야를 넓히고, 세상을 이해하는 경계를 더욱 확장하길 기원한다. 그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썼다.
가을의 길목에서 이상엽 - P8

첫 번째 길
로마, 문명의 길 - P19

"로마인이여, 너는 명심하라.
권위로써 여러 민족을 다스리고,
평화를 관습하고,
패배한 자들에게는 관대하고,
교만한 자들은 전쟁으로 분쇄하도록 하라"
-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 P21

V 포룸 로마, 로마 시대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자 복합문화공간이었다. - P29

우선 타르퀴니우스는 시민들을 위한 대규모 오락 시설을 기획한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Aventinus 언덕 사이의 늪지대 물을 빼고그곳에 원형 대전차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 Circus Maximits 를 만들었다. 영화 <벤허>에서 선보인 박진감 넘치던 전차 경주가 이곳에서 펼쳐졌다. 일상에 지친 로마 시민들은 이곳에서 사두마차 경주를 보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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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철은 그때에 반쯤 마신 정종 잔을 들어 최달영의 얼굴에 뿌리면서 외쳤다.
"그래, 잘해 처먹어라, 앞잡이 놈아!"
일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달영은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나중에 후회할 거야."
결국 나중에 이일철이 후회한 것은 자기가 감정을 쉽게 드러냈다는 것뿐이었다. - P555

"내일 공장으루 찾아갈 거예요."
대답 없이 일철이 대문 밖으로 횡하니 사라졌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이튿날 폭력배들은 용산철도국 영등포공작창으로 몰려왔다. 이때에는 농성하던 노동자들도 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 P557

전투가 오래 걸리지 않은 것은 그만큼 사상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이전에 일제와 싸우던 때에도 이렇듯 과감한살상 진압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 P558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 P559

철도노동자들은 용산과 영등포를 망라하여 천칠백여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전국으로 번져나가게 된 도화선은 대구에서 시작된다. - P559

경상도의 전지역이 항쟁에 휩싸였고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이고충청도 대전, 전라도 광주 화순 목포 등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미군은 경찰, 그즈음 갓 창설한 국방경비대, 우익 청년단과 깡패들 등을총동원하여 진압작전에 나섰고, 과거와 다른 것은 거침없이 양민학살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마산에서는 시위 중인 육천여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이만 팔천여명이 살상을 당했으며 무려 일만 오천여명이 체포 연행당했다. - P562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 P564

그는 곧 경계를 풀고 걷는데 앞에서 국민복 차림의 남자가신문을 둘둘 말아 쥐고 다가왔다. 최달영은 그를 보면서 ‘내가 저자를 어디서 보았던가 하면서 매우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방금 지나갔던 두 청년이 뒤에서 달려들며 그의 양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최달영은 개의 목줄을 놓쳤고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앞에서 다가온 자가 신문지에 쌌던 칼을 그의 배에 재빨리 찔러넣었던 것이다. 뒤에서 최를 붙잡은 자들도 한 팔로는 그의 상반신을잡은 채 다른 손으로 칼을 뽑아 양 옆구리를 수차례 쑤셨다. 터진논고랑의 물처럼 피가 쏟아져나왔고 최달영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그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위를 향하여 눈을 치뜨고 올려다보자 앞에서 맨 처음에 칼질을 했던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야마시타! 나 조영춘이다. 방우창 이이철 열사가 저승에서 기다리구 있을 거다." - P569

최달영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목을 떨구면서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 P569

"정말 삼팔선을 넘어가야 할까봐."
신금이의 말에 선옥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럴 수 없어. 삼백만 당원이 있는데 나만 살자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당 중앙도 아직 지하에서 활동 중이고, 정 피치 못할 경우에만 넘어가고 있다구."
북에서 내려오는 월남민들도 점점 늘어가구 있잖아."
"저쪽은 진작 토지개혁 하구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했으니까.
혁명에 적응 못하는 사람들두 많겠지." - P573

"참 그지때기 같은 세월이구나!"
신금이가 훌쩍이면서 중얼거렸다. - P575

"형사나 끄나풀 중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건 맞기두하구 틀리기두 하지. 역할을 저희끼리 정하기두 하지만, 이런 경우는 보험 들어두자는 게야.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 - P578

"그런데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진 않고 늘 미흡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아닌가. 그것도 시간이 무척 오래 지나서야 그러더군요.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아요." - P585

미국의영향 아래에서 갓 창설된 유엔에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었고 분단정부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다. 넉달 뒤에 북에서도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남과북의 국방경비대와 인민보안대는 각각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적대적인 정규군이 되었다. 제주도의 폭동 진압차 출동 명령을 받은 국방군 일부가 여수 순천에서 항명 거사하고 이 지방에서는 좌우가 엇갈리면서 양민학살이 자행된다. 이후 한라산지리산을 비롯한 남쪽의 거의 모든 산악지대는 유격대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삼팔선에서는 남북 양 군대의 전투가 일상적인 사건이 되었다.
- P590

"얼른 돌아와서 엄마하구 같이 살자!" - P595

내가 오래전부터 언급해왔듯이 『철도원 삼대』에 대한 구상은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북한 당국의 안내로 평양백화점을 방문했고 여성 총지배인과인사를 나눈 뒤에 현장 안내를 맡은 부지배인을 만났다. 총지배인이 전쟁 당시에 한 지역의 생필품을 공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후문이 있었으니, 부지배인 노인도 물류의 유통이나 수송에 역량을 보인 사람으로 노년에까지 책임 부서를 맡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 P613

이 소설의 제목이 ‘채널예스‘의 지면을 빌려 연재할 때에는 ‘마터2-10‘ 이었는데, 그것은 산악형 기관차로서 지금은 통일공원에분단의 화석처럼 놓여 있는 기관차의 제작번호였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낯설 수도 있다는 편집진의 의견이 있었고, 보다쉽고 대중적인 ‘철도원 삼대‘를 제목으로 결정했다. 이 제목은 오랫동안 내가 가제로 붙여두었던 것으로, 처음의 제목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 P617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
막내 차군도 말했다.
"저두요. 김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더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 P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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