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기로 그들의 별명을 지어서 불렀다. 가령 북경서 만났던 일꾼은고향이 함경북도의 산골이라고 해서 ‘산골 아바이‘라고 부르고, 살림맡은 사람은 키가 작고 바지런한 중학 교원 출신이었는데 ‘훈장‘이라지었으며, 민요를 걸찍하게 부르고 고지식하며 그들 말대로 인민적인책임자는 ‘머슴동지‘라고 지었다. - P27
어느면에서는 우리들보다 순수하고 이해타산이 없어 보였다. 생존경쟁이애초부터 배제된 사회이기 때문인가. 자신의 체제에 관한 우월성을 먼저 주장하거나 토론을 벌이려고 이를 악물고 덤비면 40년이 넘어도만날 수 없지만, 생활하는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면 10분만에 서로가한 핏줄임을 확인하게 되었던 점이 내가 이번 방문에서 깨달은 남과북의 인간관계이다. - P28
백인준 선생은 금년에 일흔둘이며 연희전문과 와세다를 나왔고 시인 윤동주와 동경 시절에 같이 하숙을 했다고 한다. 시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어머님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보니, 삶은 어려운데 시가 왜 이렇게 쉽게 써지느냐고 하는- 그 유명한 시를 쓸 무렵에 백선생과 윤동주는 함께 살았다고 한다. - P28
주위는 적막한데 먼 숲 속에서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밤 새소리는마치 서울 북한산 기슭이나 광주의 또는 해남의 야산 언저리에서 듣던 것과 똑같았고 어느 마을에선가 들려오는 컹컹 개짖는 소리까지도다를 바가 없으니 은 강토가 한동네인 셈이었다. - P32
남쪽에서의 내 삶의 흔적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물처럼 흘러갔다. 공산주의 소쩍새가 따로 있을리 없건만 사람들의 인생은 저토록심하게 갈라져서 전혀 다른 모양으로 살아왔고, 남과 북에서 태어나는모든 우리나라 아기들은 애초부터 둘로 헤어진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앞으로도 얼마쯤의 세월이 흘러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야 할것이다. - P32
저는 우리 남한 민중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순종하여 북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저는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무슨 뚜렷한 이념을 따르는 사람도 아닌 분단된 우리나라의 작가입니다. 따라서 저는 분단시대남한의 작가로서 통일을 절실하게 바라며 또한 실천할 의무가 있습니다. - P32
지금부터 우리네 조국강산은 봄입니다. 봄꽃은 우리나라 남쪽 끝의한라산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이 휴전선 철조망을 넘어서 북의 백두산 기슭에 피어납니다. 저와 우리 민중들은 우리나라 야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어린 풀꽃들을 눈물이 나도록 사랑합니다. 바로 저들의 재생력이야말로 이 무렵이면 우리 국토를 뒤덮는 탱크와 미사일을 이겨낼 위대한 힘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P33
평양은 한마디로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동경이나뉴욕과는 더욱 다른 도시이다. 글쎄, 별로 세계의 곳곳을 다녀보지는못했지만 내가 보았던 도시들 가운데서는 - 베를린과 비슷한 느낌이든다고나 할까. 어떤 유럽인은 평양을 동양의 부다페스트라고 표현한적도 있지만 나는 헝가리에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다만 서양고전 양식과 동양적인 양식이 섞여 있으며 조경은 우리식인데 광장이라든가 다리나 기념물이나 조각들이 서양식이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 P36
사유재산이란, 그것을 지니고 누리는 개인에게는 대단히 좋은 것이겠지만 대도시의 경우에서 보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장소를 이루는 데에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것이기도 하겠다. - P36
얼핏 눈에 들어오는 간판들을 대충 적어본다. 공산품상점, 농산물상점, 물고기 상점, 남새상점, 육고기집, 단고기(개고기)집, 국수집, 얼음보숭이청량음료집(아이스크림과 차와 음료수를 파는 다방 같은 곳), 리발소, 미장원, 목욕탕, 과자점(제과점), 전자기구 수리집, 옷집, 양복점, 국밥집, 책방 등등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개인 상점들이 아니라 국가에서 주민들에게 수요와 공급을 원활히 해주기 위하여 운영하는 편의시설들도 있고 각개 직장이나 주거지역 공동체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는데, 작은 업소에서 큰 곳에 이르기까지 발령을 받은 봉사원이나 관리인 또는 지배인이 있기 마련이다. 변두리는 주거지역의 아파트아래 층의 이러한 봉사와 편의시설들이 있었으며, 보다 번화한 중심가에는 대규모의 점포가 있었다. - P40
2칸 집에 들어가 본 것은 혼자 살고 있는 고 박태원(소설가) 선생의미망인 권경희 여사(82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아파트에는 인생을 출발하는 젊은 부부가 많고 따라서 아이들도갓난애가 대부분인데 한편으로는 자식들을 외지에 출가시킨 노부부나 정년퇴직한 노인도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 P44
그들은 ‘통제‘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며 그 말부터 고쳐야만 북한 사회에서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고 대답했다. - P48
"‘루이제 린저‘ 여사도 자꾸 그런 말을 해서 할 수 없이 우리가옥 견학을 시켜줬지요. 우리의 감옥은 농장입니다. 하나의 분리된거공동체지요. 이러면 또 아오지에서 강제노동시킨다고 하겠군요. 여튼 정도의 차는 있지만 지구상에서 사람이 만든 제도 아래 벌어지는 일은 다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P50
15도,25도, 40도 짜리의 세 종류가 있었다. 어느 유럽인 친구는 들쭉술을 중국 연변지방의 동포들 술집에서 먹어본 적이 있다며 식후 술로서는세계에서 최고의 맛이라고 감탄했다. 외국인들은 대개들 15도 짜리를좋아하는 모양인데, ‘미테랑‘의 평양 방문 길에 그의 부인이 먹어보고포도주보다 훨씬 좋다고 하여 12상자를 비행기에 실어주었다는 술이다. - P53
입후보자의 원칙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근로민중과 자기의 조국 그리고 제도에 대한 충실성과 헌신적 복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 P54
내가 북한 돈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에 당황하여 아내에게 달래서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여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즉 북의 돈은 노동의교환가치를 설정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의가치나 소비의 욕구는 구조적으로 일정한 정도를 넘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 P58
최선생과 그의 모친은 그 친구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더란다. 이런 경우는 그대로 뒤집어서 남쪽으로 월남한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나는 최선생에게 말했었다. 당시에 남으로 가느냐 북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는 생존의 조건에 따른 간발의 차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42년은 그러한 사람들을 우주처럼 어마어마한 거리로 떼어놓고 말았습니다. - P60
"내가 잘 아는 남쪽 어느 시인이 이런 시를 썼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두 절름발이다. 그들이 서로 온전해지려면 남은 왼발로 딛는 연습을, 북은 오른발로 딛는 연습을 해야 제대로 걸을 수가있다. 뭐 그런 시였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전후 세대들은 역사가남겨준 증오와 불신의 유산을 수십년 동안의 분단교육을 통해서 주입식으로 물려받아 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얘기한 사건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가 민족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늦지 않았으나 서로가 다른점은 인정하고 나아가서 같은 점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급히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정말 통일을 원하지 않는 세력은 한줌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 P65
개선문의 정치적 의미 개선문은 주체사상탑과 함께 82년 4월에 완공되었다. 82년은 김주석의 탄생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김정일 비서의 탄생 4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 두 건조물은 ‘혁명전통의 계승‘을 내외에 선언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P67
북한의 수령론과 후계자론은 다른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는데, 다만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저쪽의 통치권의 후계문제를 관념적으로 파악하려는 위험에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점이다. 정치가 무엇보다도 현실과 실천의 영역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의 형편과 속사정이 있다. 일단 그것을 사실로서 인정하자는 것이다. - P67
"우리 조선민족이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힘을 합칠때는 왔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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