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빠져나온 이금순은 박헌영을 호위하여 충청도 지방을 향하고 있었으며, 충청북도 시골에 숨었다가 경성콤 사건이 잦아든지 일년 뒤에야 광주로 내려가게 된다. 박헌영은 그후 해방이 될때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공장에 인부로 숨어 있었고 이금순이 유일한 외부와의 레포 역을 맡았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조직의 마지막 운동이었다. 경성콤이 와해된 1941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 운동은 물론 해외 조선인의 항일 무장투쟁도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 P500
"저저 놀란 눈 좀 보라지. 정말 하늘도 땅도 뒤집힐 놀랄 일이 터져버렸소." 조는 박선옥을 손가락질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박선옥은 그가갑자기 미친 줄 알고는 더욱 겁을 먹었다. "조, 조선이 해방되었소!" "쉬잇, 안으루 들어가요." 박선옥이 그의 소매를 당기자 조영춘은 대뜸 뿌리치고는 연신웃어댔다. "일본이 항복했다구, 공장마다 방송을 들었대요. 오늘은 일두 때려치구 다들 집으루 돌아갔어." - P514
조선 해방의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뜬금없이꿈같은 소리를 믿지 못했고, 방송을 들은 사람들도 직직대는 라디오의 잡음 속에서 가냘프게 들리는 일왕 히로히토의 일본말을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P514
그러자 누군가가 기계를 멈추며 만세를 불렀다. "조선 독립 만세!" 멍하니 섰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온 공장이 떠나가게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 P515
일왕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이며 패전에 대한 항복의 의미는 한 글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영국 등으로부터 동아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주권 배격과 침략이 그의 뜻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 내용은 연합군 수뇌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으로얼버무려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의 식자층과 당시의 어느 논객은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 P520
항복 방송이 아니라 종전 방송이었다. 8·15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아홉시 동경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어째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는가. 그것은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 P521
조선반도의 삼십팔도선 분할은 1945년 8월 9일에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조선에 진격하자 8월 11일 미국 전략정책단이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삼팔선을 그어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했다는 것이 공식적 견해였다. 조선반도의분할은 미국이 즉흥적으로 주도하고 소련이 아무것도 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견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미국의 전략이었다. 미국 측 전략가들은 세개의 주요 항구를주목했고 이중 두개의 항구인 부산과 인천을 자기들 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삼팔선을 따라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이미 포츠담회의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의분할을 안건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 P521
1945년 9월 9일 오후 세시 사십오분,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조선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위해 남조선점령군 미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지통치권을 넘겨받는 조인식을 진행했다. 그것은 항복문서 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식민통치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 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과 미군 남조선점령군 사령관은 통치권 이양 문서에 나란히서명했다. 통치권 이양식을 마친 미군 남조선점령군과 일제 조선총독부 측은 당일 오후 네시 삼십오분 조선총독부에서 국기 교체식을 진행했다. 부근에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P525
서울 시내 열개 경찰서장과 경기도 내 이십일개 경찰서의 서장이 미군정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모두가 일제의 경찰이었거나 관리의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최달영은 발령받은 용산서로 출두했다. 조선인 신임 서장은 역시 이전에 일제 경찰 경시였고 정식으로 순사 시험을 치르고 간부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고위직에 오르려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체포하고 투옥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이력이 적힌 서류를 들고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P534
"한국은 하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여기 일년이 다른 나라의 십년이라구 하지 않더냐, 여기 십년은 바깥의 백년 세월과도 같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들 수백살씩 먹은 게지." - P537
해방되고 육개월이 못 되어 전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조직한 민중은 짧은기간이었지만 자신들의 열망에 기초한 자주독립국가와 민주사회건설에 성큼 다가서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해방 초기부터 미군의진주로 인하여 이러한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가는 과정은 인민들에게 역사와 사회발전 법칙에 대한 풍부한 교육적 효과를 안겨주었다. - P545
누군가가 단상에나서서 지난 이월에 결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측 좌익진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여운형 허헌 박헌영 등에게 보내는 성명 서한을 낭독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며칠 간격으로 남한 우익진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총재와 부총재에 각각 이승만과 김구를 추대하고 있었다. - P546
초여름에 군정 당국은조선정판사위폐사건을 조작하여 악성 인플레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 전가하려고 했다. 같은 시기에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고 김일성, 김두봉 등이 위원장, 부위원장을 맡았다. 미군정은 조공 지도부박헌영 등에 체포령을 내렸고 이후 남한의 사회주의 조직은 완전히 지하로 들어갔다. 몇몇 전설적인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인사들이 체포되었다. 가을에 접어들자마자 전평의 총파업과 함께시월인민항쟁이 벌어지고 피의 진압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을 선출한다. - P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