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철은 그때에 반쯤 마신 정종 잔을 들어 최달영의 얼굴에 뿌리면서 외쳤다.
"그래, 잘해 처먹어라, 앞잡이 놈아!"
일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달영은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나중에 후회할 거야."
결국 나중에 이일철이 후회한 것은 자기가 감정을 쉽게 드러냈다는 것뿐이었다. - P555

"내일 공장으루 찾아갈 거예요."
대답 없이 일철이 대문 밖으로 횡하니 사라졌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이튿날 폭력배들은 용산철도국 영등포공작창으로 몰려왔다. 이때에는 농성하던 노동자들도 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 P557

전투가 오래 걸리지 않은 것은 그만큼 사상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이전에 일제와 싸우던 때에도 이렇듯 과감한살상 진압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 P558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 P559

철도노동자들은 용산과 영등포를 망라하여 천칠백여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전국으로 번져나가게 된 도화선은 대구에서 시작된다. - P559

경상도의 전지역이 항쟁에 휩싸였고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이고충청도 대전, 전라도 광주 화순 목포 등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미군은 경찰, 그즈음 갓 창설한 국방경비대, 우익 청년단과 깡패들 등을총동원하여 진압작전에 나섰고, 과거와 다른 것은 거침없이 양민학살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마산에서는 시위 중인 육천여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이만 팔천여명이 살상을 당했으며 무려 일만 오천여명이 체포 연행당했다. - P562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 P564

그는 곧 경계를 풀고 걷는데 앞에서 국민복 차림의 남자가신문을 둘둘 말아 쥐고 다가왔다. 최달영은 그를 보면서 ‘내가 저자를 어디서 보았던가 하면서 매우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방금 지나갔던 두 청년이 뒤에서 달려들며 그의 양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최달영은 개의 목줄을 놓쳤고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앞에서 다가온 자가 신문지에 쌌던 칼을 그의 배에 재빨리 찔러넣었던 것이다. 뒤에서 최를 붙잡은 자들도 한 팔로는 그의 상반신을잡은 채 다른 손으로 칼을 뽑아 양 옆구리를 수차례 쑤셨다. 터진논고랑의 물처럼 피가 쏟아져나왔고 최달영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그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위를 향하여 눈을 치뜨고 올려다보자 앞에서 맨 처음에 칼질을 했던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야마시타! 나 조영춘이다. 방우창 이이철 열사가 저승에서 기다리구 있을 거다." - P569

최달영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목을 떨구면서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 P569

"정말 삼팔선을 넘어가야 할까봐."
신금이의 말에 선옥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럴 수 없어. 삼백만 당원이 있는데 나만 살자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당 중앙도 아직 지하에서 활동 중이고, 정 피치 못할 경우에만 넘어가고 있다구."
북에서 내려오는 월남민들도 점점 늘어가구 있잖아."
"저쪽은 진작 토지개혁 하구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했으니까.
혁명에 적응 못하는 사람들두 많겠지." - P573

"참 그지때기 같은 세월이구나!"
신금이가 훌쩍이면서 중얼거렸다. - P575

"형사나 끄나풀 중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건 맞기두하구 틀리기두 하지. 역할을 저희끼리 정하기두 하지만, 이런 경우는 보험 들어두자는 게야.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 - P578

"그런데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진 않고 늘 미흡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아닌가. 그것도 시간이 무척 오래 지나서야 그러더군요.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아요." - P585

미국의영향 아래에서 갓 창설된 유엔에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었고 분단정부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다. 넉달 뒤에 북에서도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남과북의 국방경비대와 인민보안대는 각각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적대적인 정규군이 되었다. 제주도의 폭동 진압차 출동 명령을 받은 국방군 일부가 여수 순천에서 항명 거사하고 이 지방에서는 좌우가 엇갈리면서 양민학살이 자행된다. 이후 한라산지리산을 비롯한 남쪽의 거의 모든 산악지대는 유격대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삼팔선에서는 남북 양 군대의 전투가 일상적인 사건이 되었다.
- P590

"얼른 돌아와서 엄마하구 같이 살자!" - P595

내가 오래전부터 언급해왔듯이 『철도원 삼대』에 대한 구상은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북한 당국의 안내로 평양백화점을 방문했고 여성 총지배인과인사를 나눈 뒤에 현장 안내를 맡은 부지배인을 만났다. 총지배인이 전쟁 당시에 한 지역의 생필품을 공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후문이 있었으니, 부지배인 노인도 물류의 유통이나 수송에 역량을 보인 사람으로 노년에까지 책임 부서를 맡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 P613

이 소설의 제목이 ‘채널예스‘의 지면을 빌려 연재할 때에는 ‘마터2-10‘ 이었는데, 그것은 산악형 기관차로서 지금은 통일공원에분단의 화석처럼 놓여 있는 기관차의 제작번호였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낯설 수도 있다는 편집진의 의견이 있었고, 보다쉽고 대중적인 ‘철도원 삼대‘를 제목으로 결정했다. 이 제목은 오랫동안 내가 가제로 붙여두었던 것으로, 처음의 제목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 P617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
막내 차군도 말했다.
"저두요. 김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더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 P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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