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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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라고 하면 보통 전황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 전쟁을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사 책에는 전쟁 당사자 양쪽이 어디에 진영을 두었고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고 후퇴했으며, 어디에서 승리했고 어디에서 패배했는지 표시한 지도들이 가득 실려 있다. 양쪽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으며 그 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어떤 전략이, 어떤 전투가 승패를 판가름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에서 주목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고 지속되게 한 국내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남긴 의미다.

 

저자는 왜 베트남 전쟁의 진행 과정보다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역사의 큰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남아 있어, 그 외의 중요한 기억들이 잊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베트남 전쟁 특수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실린 베트남 전쟁 관련 서술에서 전쟁 특수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전쟁 특수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기억한다. 잘못된 결정으로 시작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 이 두 역사적 기억의 간극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찾는 것은 우리가 놓친 중요한 기억들이다.

 

저자는 우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당시의 미국과 한국의 국내외 정황을 살펴보면서, 미국이 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한국이 왜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는지 각자의 동기를 분석한다. 그런 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지지부진한 공격과 미군과 한국군 내의 불평등, 참혹한 민간인 학살, 전쟁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보상 등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살펴본 뒤,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서 얻어야 할 진짜 교훈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참전자의 증언부터 관련 연구서, 논문부터 미국과 한국의 정부 문서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모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했고, 미국과 한국,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의 공과를 밝히고 있기에 이 책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베트남 전쟁 자체를 넘어서서 베트남 전쟁이 있게 한 역사적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 남긴 영향을 살펴보기에, 독자들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와 그 전후 시기의 한국사와 세계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부터 사실은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건이었는데 더 큰 군사적 충돌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파병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과연 그 목적을 이루었을까? 조목조목 짚어본 뒤 저자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이다. 미국은 베트남 내의 정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을 시작했고 전쟁 중에도 잘못된 전술을 펼쳤기에 그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전공은 세우지도 못하고 철수했고, 한국은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얻어내려 철수를 미루다가 애꿎은 군인들만 희생시켰다. 양국에서 부유층, 고위층은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길 회피해 사회적으로 그보다 낮은 계층에 있던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엽제 후유증과 PTSD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한국군 중에는 포로가 한 명도 없고 실종자는 모두 탈영자들이라며 한국 정부가 외면했기에 고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까지 있다. 사회 한편에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도 전쟁 당시부터 반전 여론이 거셌으며 베트남 전쟁을 하기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대통령들이 인정한 미국과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쟁의 그림자들은 가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수고와 희생, 그로 인해 얻은 국익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국과 가족들에게 헌신했다. 그들만을 가해자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전쟁의 가해자로 만든 것은 국가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한국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게 했기에, 그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참전자들에 대한 보상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 정부의 결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그곳에 갔던 모든 사람들은 애국자이며, 그들이 나라를 위해 한 노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해 국가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고만 특별 담화에서 입장을 밝히고, 참전 군인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에 힘쓰지 않았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직시해 전쟁 특수에만 주목하는 반쪽짜리 기억을 온전한 역사적 기억으로 바꾸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저지른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며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는 것이 곧 안보라고 말한다. 또다시 냉전 논리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국민을 지켜주고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 국민 스스로가 지키고 싶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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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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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 일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고 싶다고 누구나 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일할 자격’이 없으면 일할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시장에서 ‘일할 자격’은 어떤 것들일까. 이 책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일할 자격’은 ‘정상성’이다. 젊고 건강하고 신체나 정신에 이상이 없을 것.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저자는 ‘일할 자격’이 있는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밝히고, ‘정상’ 노동자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야기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며 월급이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삶. 이런 삶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쏟는 노력은 비정상적이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수행할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업무 외 시간에도 자기 계발에 힘쓴다. 순종적이면서 자기 주도적이라는 모순적인 인재상은 사실상 실현하기 불가능하니 그런 인재인 척 처세한다. 이렇게 끝없이 노력해도 눈에 보이고 수치화할 수 있는 성과가 있어야만 노력하고 있다고, 성실하다고 인정받는다. 슬프게도 그렇게 노력해서 이룬 성과는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 사회에서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쉬지 않고 달리는 마음을 자기계발서는 동력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은 불안이고 자본주의는 그런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건강하고 성실하고 정상적인 노동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는 우리 내면에 주입된 환상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그 환상을 동력으로 굴러간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환상 속 모범적인 노동자상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람들,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이 보인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청년들, 미혼모, 정신 질환자, 자신도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인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더 나이 든 노인들을 돌보는 일로 떠밀리는 돌봄 노동자들, 과체중이어서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노동자로 치부되는 사람들, 현역병의 신체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충역이 된 사람들. 이들이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비정상’ 노동자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목소리와 이들이 처한 현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정상이라는 범주 밖으로 밀어내고 삶을 영위할 권리마저 위협하는지 분석한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 자신이 정상적인 노동자, 쓸모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관리, 자기 계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을 소진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심지어 조장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 노쇠해지고, 언제라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어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날 수 있다. 이 경쟁 사회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노동력, 더 젊고 건강한 몸들을 찾는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178개의 기술협약 중 현재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22개뿐이고,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협약들에는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근절을 위한 협약, 업무상 재해 급여에 관한 협약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뒷덜미가 서늘해지지 않을 노동자가 어디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자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일할 자격을 요구하며 삶을 영위할 권리조차 공짜로 내어주지 않는다. 세계 인권 선언에 따르면 그 권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인데. 이 사회가 지닌 노동의 환상에 잡아먹히지 말고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직시하라고 하지만, 그 환상을 채워주지 않는 노동자가 다시 노동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이 다 게으른 노동자의 핑계라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실제로 나 자신도 ‘네가 노동자로서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남 탓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도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도 자신도 성실한 사람,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소진되다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 되었을 때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저자는 절망하기보다는 계속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한다. 일할 자격뿐만 아니라 말할 자격조차 박탈하는 힘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동료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비정상의 범주에 있는 노동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1급 몸, 1등 국민, 정상적인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몸, 국민, 노동자를 나누는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일의 세계 안에서도 나다움을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 세상은 ‘일할 자격’을 요구하면서 그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내치는 사회가 아니라, 단순히 ‘일할 권리’뿐만 아니라 더 행복하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일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나도 절망하기보다는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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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누운 한국사 - 요통부터 번아웃까지 병치레로 읽는
송은호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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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재미있는 역사책을 읽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이 책은 어떨까요. 열한 명의 역사 인물들이 앓았던 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각 인물이 어떤 질병을 겪었는지, 그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살펴보고,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책의 효능과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서 시 효능

이 책의 효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입니다. 글 자체의 재미와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이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과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전자입니다. 서문과 목차만 읽어도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지고, 각 챕터의 도입부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 독자들은 쉽게 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각 챕터 앞에는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인물에게 주는 처방전이 있는데, 챕터의 내용을 명쾌하고 발랄하게 요약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처방전 페이지를 약국에서 주는 약 봉투 모양으로 디자인해서 더 유쾌합니다.


각기 다른 두 분야를 접목시킨 책은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기 쉬운데, 이 책은 역사와 약학의 균형이 좋습니다. 역사가 약학에, 약학이 역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역사 지식도 약학 지식도 함께 쌓을 수 있습니다. 각 챕터의 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았던 세계사 속 인물의 이야기도 챕터 끝마다 부록으로 넣어서 세계사 지식도 덤으로 얻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약학 전공이다 보니 약학 부분이 좀 더 탄탄하긴 합니다. 저처럼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병의 증상과 그 원인, 그 병을 치료하는 약과 치료법의 원리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작년에 나온 책이라 최근의 연구 결과, 신약 개발 현황 같은 최신 정보도 담겨 있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의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겠죠.


또 하나의 효능은 공감입니다. 고름이나 이질, 결핵처럼 현대에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은 역사 인물들도 있지만, 지금의 우리도 쉽게 걸릴 수 있는 병에 시달렸던 역사 인물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생존을 위해 늘 긴장 상태로 살면서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렸던 정조,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던 박지원, 스트레스 때문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렸던 순종 등의 역사 인물과 우리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거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래서 병에 걸리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고 역사를 만들었죠. 그 사실이 의학이 발달한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인이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감, 운동 부족, 업무 과다 등으로 어떤 면에서는 병에 더 취약해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병을 안겨주는 환경과 요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작은 위로로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으니까요.

 

독서 시 주의사항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마다 걱정되는 건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입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가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니죠. 역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옛날이야기처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역사 인물이 겪은 병과 그로 인한 역사의 비극,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성적인 문장으로 풀어나가고요.


다만 기존의 잘못된 역사 상식들이 보이니 이 점은 주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노론이 사도세자의 정적이었기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도세자가 실제로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내관과 궁녀들, 심지어 자기 후궁까지 살해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서는 정조가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탕평책을 고수한 것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 어찰 이야기도 했다면 정조와 노론이 대립 관계이기만 한 것처럼 보일 위험에서 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왕이라는 해당 챕터의 큰 그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비밀 어찰 이야기는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정치의 전체 그림을 미리 짜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도 정조의 수명을 깎아낼 만큼 고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비밀 어찰 이야기를 넣었어도 그 챕터에서 말하려는 바(정조는 살벌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평생 스스로를 채찍질해 불면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렸던 왕이었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거나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의 난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태조를 만나러 간 사자들이 태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함흥차사의 전설이 된 것이죠. ‘방석은 명석한 아들이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 이방석이 남의 집 가축을 쏴 죽이고 궁 안에 기녀를 들이고 공부를 싫어하는 등 세자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고요. 조사 하나로도 맥락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고, 대중 역사서는 더 많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팩트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 팩트가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단순한 문장이라도 신중하게 써야 하고요.


그리고 조선 왕은 제후국 군주의 위치에 있는데 황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부분도 보이고, 문종이 아직 왕이 되지 않은 세자를 시호로, 그것도 수백 년 뒤에 숙종이 추존해서 올린 시호인 단종으로 부르는 부분도 보입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작은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효능과 주의사항을 체크해 보시면 내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이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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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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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에만 읽겠다고 마음 먹은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설국』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설국』과 그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 여행기의 비중이 꽤 큰 데다 책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걷다가는 (전봇대의) 전깃줄에 목이 걸린다는' 에치고유자와의 폭설. 그 안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자도 일부러 눈이 올 때를 기다려 에치고유자와에 갔다니 이 책을 눈 오는 날에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책을 사고 4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지만. 눈 오는 날에 조금씩 읽다 눈이 많이 오던 지난 달 어느 날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여기에 올린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 지금까지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 여정과 문학 세계, 그 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여행한 감상을 촘촘하게 엮어나가기 때문이다. 바느질한 자국도 보이지 않고 눈이 녹아 스며들 듯이. 책장을 덮고 나니 저자와 함께 눈 내리는 겨울날 일본 곳곳을 여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온 것 같다.

저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세계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 '섬세한 허무'. 가와바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년 시절까지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청년 시절에는 첫사랑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슬픔과 이별이 지배했던 성장기를 보냈기에 그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환희와 분노,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가 닿은 곳은 허무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는 서사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가와바타의 묘사들만 읽어도 그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허무에 압도되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 앞에 선 기분이었다.

적막한 설원의 아름다움에는 매번 매혹될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가 돌아올 곳은 결국 따뜻한 집과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니까. 가와바타의 단편 한 편도 안 읽어보고 말하기에 우습지만, 내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짐작한 가와바타의 문학 속 세계는 그런 설원과 같다. 나는 선문답 같은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보다는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 더 공감한다. 섬세한 허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가와바타의 묘사는 매혹적이지만, 문학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는 신념 아래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쓰고 직접 행동했던 오에의 행보를 지지한다(사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도 한 편 안 읽어봤으면서 이러는 것이 우습지만). 내게도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허무보다는 삶을 지향하니까. 그럼에도 분주하고 복잡한 현실 세계에 지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속 세계에 잠시 머물다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섬세한 허무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가 이 정도면 됐다고 느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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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푸드 한국사 -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외래 음식의 역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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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스키, 아이스크림, 초콜릿, 피자, 커리, 우유, 빵, 차, 향신료, 이 아홉 가지 글로벌 푸드의 한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글로벌 푸드는 처음에는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지고 소비되었지만 사람들의 이동과 교역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지금은 전 세계에서 만들고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 음식들이 언제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고 어떻게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얻었는지,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 챕터에 한 음식씩, 그 음식의 기원에서부터 그 음식과 관련된 최근의 유행까지 쭉 훑어보는데 역사적 사실들을 가볍고 쉽게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 컬러로 된 사진, 그림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 지루하지 않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하는 K푸드의 미래에 거창한 포부가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홉 가지의 글로벌 푸드를 통해 근대 이전부터 현대까지 그 음식과 관련된 세계사와 한국의 생활사를 접할 수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저자가 권하는 방법이다. 독자들도 자신의 글로벌 푸드 경험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과 공동체의 글로벌 푸드 경험사가 많은 이들의 식탁 위에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하니, 나도 나의 글로벌 푸드 경험기를 간단하게나마 써보겠다. 우선 위스키는 입에 대본 적도 없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콘 아이스크림이 하나에 500원이었던 시절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콘 아이스크림을 사러 슈퍼에 달려갔었고, 장미꽃이 새겨진 초콜릿 블랙로즈가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초콜릿인 줄 알았다. 처음 먹어본 피자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큰맘 먹고 사주셨던 피자였는지,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피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주던 한국식 카레보다는 철 들고 나서부터 먹게 된 일본식 카레와 인도 커리를 더 좋아하고, 셋 중에선 인도 커리를 제일 좋아한다. 우유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주번이 매일 교실로 들고 오던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 상자와, 학교 한쪽의 우유 창고에서 풍기던 우유 비린내다. 초등학생 때는 설탕이 살짝 입혀진 은방울과 하얀 크림이 든 보름달빵을 좋아했고, 고등학생 때 급식을 먹기 귀찮으면 매점에서 파는 옥수수빵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는 커피를 안 마시는 내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고, 중동에 여행 갔을 때는 향신료를 가리진 않았는데 베트남 음식을 먹을 땐 꼭 고수를 뺀다. 이렇게 각자의 기억에 새겨진 글로벌 푸드를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면, 책에서 알게 된 역사와 책에는 없는 나만의 역사가 겹쳐 더 풍부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생각한 방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 인물이나 역사물 속 캐릭터가 이 책에 실린 아홉 가지 음식 중 어느 음식을 먹어봤고 어느 음식을 못 먹어봤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요즘 빠져 있는 캐릭터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2년경에 사망했으니 근대가 시작된 이후에 들어온 위스키, 아이스크림, 초콜릿, 피자, 커리, 빵은 당연히 못 먹어봤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온 살균한 대량 생산 우유가 유통되기 이전 한반도에서의 우유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우유는 조선 시대 왕과 왕족들이나 먹을 수 있었으니 못 먹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는 마셔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한반도에 차가 알려진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년~647년)고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흥덕왕 3년(828년)이라니 살아 있을 당시에는 차도 못 마셔봤을 것이다. 향신료 중에서도 후추는 조선 중기에야 양념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고추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을 전후해서 들어왔으니 두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도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 인물이 생전에 보냈던 일상을 더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생각보다 늦게 한반도에 들어왔고 한반도에서의 역사가 짧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글로벌 푸드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K푸드에 적용해 만방에 한국을 알리겠다는 결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음식 하나도 아주 먼 길을 거쳐 우리에게 와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니,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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