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쉬
옌스 하르더 지음, 주원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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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도서전의 외국 출판사 부스들을 돌아다니다 종종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한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2019년 도서전에서 독일어도 모르면서 독일 출판사의 부스들을 둘러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4000여 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이었던 길가메시의 신화를 그린 그래픽노블인데, 모든 컷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부조를 본뜬 형태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이 책의 한국어판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내가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한국어판을 만들어줬으면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도서관에 신청했고, 마침내 읽게 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부조같이 그렸다'는 말은 아래의 본문 이미지를 보면 바로 이해될 것이다. 한 컷 한 컷이 한 장의 토판처럼 온통 흙빛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사물들은 토판 위에 도드라져 있는 부조처럼 그려졌다. 배경에는 갈라진 틈까지 조금씩 그려 오래된 토판 같은 느낌을 더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부조들처럼 인물들은 주로 옆모습으로 나타나는 정형화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과 움직임이 살아 있다. 작가는 단순히 과거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오늘날과 연결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고대 부조와 현대 만화의 스타일 사이에서 고민했고, 원근법이나 동적인 움직임 같은 현대적인 미술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심한 덕분에 고대 부조 속에서 인물과 동물, 자연 속 사물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독특한 효과가 탄생했다.


  워낙 오래된 토판이라 중간중간 부서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야기의 공백이 많다. 그런 데다 고대인의 감성과 문화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지금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홍끼의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사이사이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고,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이야기를 각색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반면 이 책의 작가는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컷에 올리고,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빠져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도약하는 부분은 컷과 컷 사이의 경계선을 점선으로 표시한다. 책 속 문장 하나하나도 원전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에게는 문장 자체가 어색하게 보일 수 있더라도 그 시대의 요소를 문장에 넣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어판 번역가도 그 어색한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고 한다. 대사도 현대인의 감성과 유머 감각에 맞춘 웹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간 셈이다. 그렇기에 웹툰과 이 책이 길가메시 신화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원전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면서 만화적인 효과도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는 끝까지 계속된다. 열두 번째 토판에서 저승에서 올라온 엔키두의 영혼은 길가메시에게 저승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보면 분명히 이렇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엔키두가 저승에서 본 인물 중 한 명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 마지막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걸 그대로 살리면 마무리가 애매할 수 있는데, 작가는 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가다 마지막 컷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결말이 사라진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힌 것들에 대한 예우로 마무리함으로써, 작가는 책을 읽고 있는 우리까지 수천 년의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간 신화 속 영웅들을 그리워하게 한다.

P. S. 작가의 작업 후기와 준비 스케치, 스토리보드에 참고 사진 자료들까지 실린 부록도 알차다. 번역자도 독일에서 고대 근동을 공부한 학자로 섭외했으니, 원래의 독일 출판사나 한국 출판사나 공을 꽤 많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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