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물건들 - 옛 물건은 훗날 역사라 부르는 모든 사건의 '씨앗'이다 주용의 고궁 시리즈 1
주용 지음, 신정현 옮김 / 나무발전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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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후속작인 『자금성의 그림들』은 작년 3월에 읽었는데, 정작 전작인 이 책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읽지 않고 있었다. 도서관에 신청까지 해놨는데도. 그러다 지난 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다녀오면서 중국어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복습하고 싶어서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관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국내서 중에서는 한 권도 없었다. 아쉽지만 대신 예전부터 읽으려고 기억하고 있었던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치르던 시기,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는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자금성에 소장되어 있던 수십만 점의 유물들을 가져갔다. 그 유물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곳이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이고,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곳,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유물들이 소장된 곳은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이다. 장제스가 알짜배기 유물은 다 가져갔다고 하지만 베이징의 고궁박물원도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유물을 수집해 지금은 유물이 (저자의 말에 따르면) 186만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저자는 상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시대순으로 18개의 카테고리를 나누어 그에 해당하는 유물 수십 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서너 점에서 일고여덟 점의 유물에서 한 시대를 본다. 모래알같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미미한 것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는데 그 시대의 미감과 정신을 쏟아부은 유물에서는 당연히 그 시대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지금은 검푸른색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났을 청동기들에서 상나라의 풍요로움을 상상하고, 거리낌 없이 말을 타고 있는 여인들을 묘사한 그림과 도자기 인형을 통해 당나라 여성들의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짐작한다. 나라 하나가 백 년을 가지 못했던 혼란의 시기인 5대 10국 시대에 만들어진 보살상들은 더없이 고요하고 온화해, 신앙으로 위로를 받았을 당시 사람들을 생각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빼곡히 적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빼대로 자신의 상상과 감상을 덧붙여, 독자들이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을 읽으며 수천 년의 세월을 걸어가게 한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의 저자 주용을 '중국의 유홍준'이라고 했지만, 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보다는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가깝다. 고요하고 단정한 문체로 유물과 그에 얽힌 역사를 담담히 풀어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용 쪽이 조금 더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어떤 곳에서는 역사소설 같고, 어떤 곳에서는 에세이 같을 정도로 저자의 글은 문학적인 면모를 보인다. 저자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문장을 읽다 보면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혈마가 달려가는 초원이, 눈 속에 매화가 피어나 은은한 향을 풍기는 정원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중국인이다 보니 중국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들 수 있다. 하나라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는데, 저자가 하나라가 분명히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중국 학계의 입장이니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중국의 사상이나 문화가 서양의 그것들보다 더 깊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부심과 자만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저자는 중국사가 한족뿐만 아니라 여러 이민족들의 역사이기도 하고, 그들이 있어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워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제3자인 외국인 독자의 입장에서도 자부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부심 아래에서 역사와 인간,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기질이 있다며 각 시대의 기질을 자기 나름대로 정의하지만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 시대 나름의 가치를 발견한다. 한 시대라는 거대한 역사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사람들을 연민하면서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에 경의를 표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아름다움은 보통 사람의 종교이며, 홍진 같은 인생에 주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것을 이해해야 옛 물건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며, 이것이 자신이 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 책 속의 글과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고단한 삶이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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