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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그림들 - 나의 생명이 그림으로 연결되어 어느 날 당신과 만날 것이다 ㅣ 주용의 고궁 시리즈 2
주용 지음, 신정현 옮김, 정병모 감수 / 나무발전소 / 2022년 10월
평점 :
관심이 가는 신간들은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로 조금씩 읽어보곤 한다. 이 책도 그렇게 앞의 몇십 페이지를 읽어본 책이었다. 미리 읽어본 부분 중에서 한 옛 화가의 시점에서 쓴 서문에 사로잡혔다. 과거인이 화자인데도 '부가가치'라는 현대의 용어를 쓰면서 천연덕스럽게 '이 말은 여러분 시대의 말'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정말로 옛 화가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그린 그림인데도 그 그림의 미래는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이 죽고 나서 수백 년 뒤에 그 그림을 볼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밖에 없는 화가의 고독, 그럼에도 그림을 통해 아주 먼 미래에 자신의 그림을 보아줄 사람들과 만날 것이라는 희망. 이 두 가지 감정이 4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서문으로 충분히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책 전체를 읽어봐야겠다고 기억해 두고 있다가 드디어 다 읽었다.
명, 청 시대의 황궁이었던 자금성은 청이 멸망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진 뒤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되었다. 이 책은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연구소장인 저자가 그곳에 소장된 그림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림들 중에는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시기에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가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에서 대만으로 가져온 유물들로 만든 것이다), 상하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이 아닌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그림들은 자금성 고궁박물원 소장품이고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소장품도 원래는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어떤 작품도 옛 중국의 그림을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의도에서는 벗어나지 않으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단순히 각 그림의 조형적 특징이나 미술사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그림에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써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뿐 아니라 그 그림에 그려진 사람, 그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한 사람, 그 그림이 그려진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들까지 그 그림과 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비극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에는 '덧없음'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이나 부귀영화, 권세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쇠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여인은 세상의 비정함을 결국 이기지 못했고, 천재 문장가는 뛰어난 글재주로 부와 높은 관직을 얻었지만 돈을 물 쓰듯 쓰다 탕진하고 가난 속에서 죽었다.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군주는 구중궁궐에서 시서화에만 탐닉하고 전란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궁 밖 백성들은 돌보지 않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먼 북방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 성군으로 칭송받으며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았던 황제들도 군주로서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의 모습을 한 자신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조차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런 격정적인 드라마를 이면에 숨겨두었는데도 책에 실린 그림들은 한결같이 고요하고 담담하다. 화려한 연회를 그린 그림이나 황제의 행적을 칭송하는 선전용 그림,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거나 수백 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림들조차 그렇다.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 저자는 어느 그림에서나 시간의 흐름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깊은 고독을 읽는다. 하지만 그 적막함이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저자가 일부러 잔혹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골라 왔나 싶을 정도로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화가들은 그림 속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책에 실린 그림들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그림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이나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미술사와 중국사, 중국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본문 전체를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 특히 서양 미술사의 도상학적 분석처럼 그림의 각 요소에 담긴 의미들을 하나하나 밝혀낸 뒤 그 의미들을 연결해 그림을 그린 의도를 파악해 낸 <중병회기도> 챕터는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 중국사와 중국 미술사를 알아가는 즐거움, 그림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애초에 중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보니 번역자가 주석을 충실히 달았지만 중국사, 중국 문화, 중국 고전 문학에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러 군데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악역인 요 성종 야율융서는 이 사람의 고조부다)가 죽은 지 수십 년 뒤에 북송의 마지막 황제 흠종이 죽었는데(천조제는 1128년 사망, 흠종은 1161년 사망) 두 황제가 금나라 황제가 연 연회에서 함께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북송의 황녀 유복공주가 탈출해서 송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야사다. 유복공주와 함께 금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위태후가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모두 보았을 유복공주의 입을 막기 위해, 탈출한 유복공주를 가짜로 몰아 죽였다는 이야기는 저자의 상상이다. 일단 내가 찾아낸 것은 이 두 가지지만, 나처럼 중국사를 잘 모르는 외국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야사거나 저자의 상상일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글과 그림, 만듦새 모두 우아하고 유려한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체 분량이 640페이지에 이르고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는 이 책은 내용의 무게로나 실제 무게로나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만큼 풍성한 이야기와 그림들이 담겨 있다. 한 번 정독한 뒤에 이따금씩 마음에 와닿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놓고 책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상해도, 그저 그림 자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