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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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에는 각 장의 원전이 된 괴담과 삽화를 함께 실어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가 더욱 강해진다.


  무서운 이야기는 듣고 나면 밤에 잠을 못 잘 걸 알면서도 듣고 싶어진다. 그렇게 괴담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 는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이야기'라는 뜻으로, 일본의 소설가 교고쿠 나츠히코가 일본에서 전해져 오는 괴담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다스렸던 시기, 1603~1867)에 괴담집을 만들기 위해 각 지방의 괴담을 수집하러 떠돌아다니는 청년 모모스케와 해결사 마타이치 일당이, 함께 괴이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이다. 괴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으니 이 소설 자체가 일종의 괴담집이다. 


  괴담집인데도 이 소설에서는 귀신이나 요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모스케와 마타이치 일당이 겪는 기묘한 사건들은 겉보기에는 귀신이나 요괴의 농간처럼 보이지만, 결말에서 귀신이 아닌 사람이 저지른 짓으로 드러난다. 진상을 알고 나면 사건을 일으킨 인간의 탐욕과 증오,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들을 처단하는 마타이치 일당도 마냥 선하고 정의롭지만은 않다. 마타이치 일당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사건을 해결한다. 마타이치 일당이 교묘한 수를 써서 범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범인들 못지않게 잔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악귀보다 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건은 해결되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세상에는 요괴나 귀신이 저지른 짓으로 알려진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괴담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세상에는 어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뒤에는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의 감정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은 앞으로도 잔혹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기묘한 사건들, 어지러운 세상을 보는 마타이치 일당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 고통과 원한에서 구하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 다칠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진상을 밝히지 않는다.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구르다 보니 사람에게서 어떤 선한 것도 바라지 않게 된 마타이치 일당에게도 인정은 남아 있다. 희미하게나마 남은 사람의 온기가 잔혹한 이야기들에 지친 마음을 감싸준다. 

  이야기들 자체가 흥미로우니 그저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악인들이 처단되고 잘못되었던 일들이 바로잡히는 모습에 통쾌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씁쓸한 마음이 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항설백물어』 는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분량도 5백 페이지가 넘으니, 읽을 것이 많아 좋다. 읽을 것이 많다는 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쌓아둔 것만큼이나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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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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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가 아내의 불륜 상대인 남자와 그의 임신한 아내를 죽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쉬유이許友一는 뭔가 미심쩍다고 느낀다. 수사 방향을 놓고 선배 경찰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한 다음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에 출근하니 뭔가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히 2003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2009년 3월 15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6년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가, 6년 전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간다. 이 한 줄의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흥미롭다. 쉬유이와 기자 루친이盧沁宜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2009년의 이야기와 과거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예상치 못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쉬유이는 살인사건의 진상뿐만 아니라 자신이 잊어버렸던 자신의 진실까지 마주하게 된다. 


  이런 추리소설에서 반전을 미리 알게 되면 재미가 없는데, 바보 같이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딱 반전이 밝혀져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하지만 반전을 알고 나서도 그 반전이 밝혀지기까지의 전개 과정이 흥미로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반전을 뒤엎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두 번째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과 범행 동기는 억지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다. 자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앞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어서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변하면서 작품 전반을 지배하던 분위기도 갑자기 변한다. 참혹한 살인사건과 기억상실,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무거운 소재와 중간중간에 인용되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 'The Man Who Sold the World'의 섬뜩한 가사가 빚어내는 안개 속 같은 분위기가 결말에서 싹 걷혀 버린다. 


  좀 더 무게감 있고 어두운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아쉽겠지만, 주인공이 기억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안개 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풀어가는 이야기의 힘이 뛰어나다. 그리고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들처럼 홍콩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의 홍콩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후의 작품들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이야기 자체의 흡인력이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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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기 세계신화총서 11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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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를 읽고 그 책에 소개된 소설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를 읽었고,사람의 세상에서 죽다와 같은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일본 소설 여신기를 읽게 되었다두 소설을 만들어낸 프로젝트는 '세계신화총서'라는 프로젝트로한 영국인 편집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신화를 분석하는 책도 좋고 신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어도 좋으니 자기 나라의 신화를 모티브로 한 책을 쓰라는 제안이었다.사람의 세상에서 죽다』는 중국의 백사 전설을 모티브로 중국의 작가 리루이가 쓴 소설이고,여신기는 일본의 창조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의 신화를 모티브로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쓴 소설이다. 기리오 나쓰오는여신기』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창조했을까?

 

고바야시 에이타쿠, <창으로 바다를 휘젓다>, 창으로 바다를 휘젓고 있는 남자가 이자나기, 그 옆의 여자가 이자나미다. 이자나기가 바다를 휘저어 뭉친 덩어리가 일본 열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신기』 의 원전이 되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신화는 이렇다. 태초에 부부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함께 일본 열도와 여러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이자나기는 황천까지 가서 이자나미를 다시 데려오려 했다. 그러자 이자나미는 자신이 봐도 된다고 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횃불을 켜고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나 이자나미는 살이 썩어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놀란 이자나기는 달아나 버렸고, 이자나미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황천에 버려진 이자나미는 이자나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루에 인간을 천 명씩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하루에 천오백 명씩 인간이 태어나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는 매일 천 명이 죽고 천오백 명이 태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자나기-이자나미 신화와 오키나와 어느 섬의 풍습을 뒤섞어 『여신기』를 완성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죽은 무녀 나미마와 황천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여신 이자나미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둘 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에게 버려지고 원한을 품었다. 나미마는 뒤늦게 자신이 아이를 낳는 도구로 이용당했음을 알게 되고, 이자나미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혼자 짊어지는 여자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 한탄스러워한다. 

  나미마가 살았던 고대 일본의 어느 작은 섬은 대무녀가 우두머리가 되는 모계사회이지만, 개인이 사회 제도에 억압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무녀 집안의 첫째 손녀는 섬을 이끄는 대무녀가 되지만, 둘째 손녀는 밤의 세계, 죽은 자들의 세계를 섬기는 무녀가 되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무덤 곁을 지켜야 한다. 무녀가 될 딸을 낳지 못하는 무녀 집안은 마을 전체에서 따돌림당하고 고기잡이를 나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다. 딸을 낳지 못하는 것이 생계를 위협받을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뒤집어보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도 당연히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평생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규율을 깨고 나미마가 아이를 낳았고, 빛의 무녀가 되어야 할 아이가 어둠의 무녀가 되었어도 마을에는 어떤 천벌도 떨어지지 않는다. 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이 얼마나 헛되고 자의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자나미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을 때 이자나기는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여자와 남자의 신체상 구조와 기능이 달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여자인 이자나미가 남자인 이자나기에게 건방지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이자나미의 첫 아이가 뼈 없는 기형아로 태어난 것은 부당한 처사다. 이자나미가 어두운 황천에서 매일 사람을 죽이고 있을 때 이자나기는 전국을 유랑하며 사냥을 즐기고, 가는 곳마다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시킨다. 이자나미가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자신은 사람을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런데도 신인 이자나기를 해칠 수 없어 이자나미는 상대 여자들만 죽이니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인간도 신도 벗어날 수 없는 이 부당한 상황에 인간인 나미마와 여신인 이자나미는 어떻게 대처할까. 나미마는 자신을 배신한 마히토를 죽이지만, 죽은 마히토의 영혼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마음이 약해진다. 복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달은 나미마는 이자나미에게 이제 이자나기를 용서해 주자고 말한다. 그러나 이자나미는 자신은 복수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이자나기를 벌하는 것이라며, 뒤늦게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자나기를 끝내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자나미는 황천의 여신, 죽음의 여신으로 남는다. 

  기리노 나쓰오가 보는 세상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인간에게나 신에게나 가혹하고 차갑다. 나미마처럼 복수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을지, 이자나미처럼 용서도 화해도 거부하고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은 아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애매한 태도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여신기』 는 황천보다도 더 차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신의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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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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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블로거)

 

  저 말고 증언한 독자 분이 또 있었나요? 있었구나. 그럼 제가 굳이 증언할 필요가 있나요? 사람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한 명이라도 더 증언하면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구요? 뭐 그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제가 읽고 느낀 대로 얘기할게요.

 

  이 소설의 부제가 '욥기 43'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욥기는 42장까지만 있어요. 그러면 이 소설은 새로운 욥기라는 얘기죠. 최근직 장로님 인생을 되돌아보면 욥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거든요.

 

  욥이 어떤 사람이냐면요, 옛날 이스라엘에 살던 착한 부자였어요.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복을 받았는지 자식도 많고 재산도 많았죠.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한테 욥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했어요. 욥이 온갖 고난을 겪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지 보자구요. 하나님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욥에게는 온갖 고난이 닥쳐와요. 갑자기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전재산이 날아가고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욥의 자녀들을 다 죽였어요. 게다가 욥 본인은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서 밤낮으로 피가 나도록 피부를 긁어야 했어요. 이쯤 되니 욥도 선하게 살아온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냐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죠. 그러자 하나님이 욥한테 말해요. 네가 나보다 선하냐고, 나의 뜻을 다 알고 있냐구요. 자신이 교만했다는 것을 욥이 인정하고 순종하자 하나님은 욥의 병을 고쳐주고 전보다 더 많은 재산과 죽은 자녀들 수만큼의 새 자녀들을 안겨줘요. 최 장로님도 선하게 사시다 기차 사고로 온 가족을 다 잃으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회심하셨다구요. 그 이후로 장로님은 재혼하셔서 아들도 얻었고, 다시 재산도 모아서 이 목양면에 교회를 세우셨어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새로 얻은 아들인 최요한 목사죠.

 

  그런데 주일학교에서 처음 욥 이야기를 배웠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욥의 자녀들은 왜 아무 죄도 없이 죽어야 했을까요? 욥이 다시 자식들을 얻었다고 해도, 이미 죽은 자녀들은 돌아올 수 없잖아요? 자녀들은 그저 잃어버렸던 재산처럼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인 건가요? 작가님도 젊었을 때는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욥의 자녀들의 마음으로 욥기의 후속편을 쓰고 싶었다고 하셨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고 나니 자식을 잃은 아버지인 욥을 비난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욥을 이해해선 안 되고, 함부로 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하셨어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욥을, 최 장로님을 바라보려고 했어요.

 

  하나님은 최 장로님이 죽으려고 했을 때 최 장로님을 부른 게 당신이 아니라고 하셨었죠.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살리려고 도움을 구하던 두 번째 사모님의 목소리였다구요. 그때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대요. 결국 최 장로님을 살게 한 건 최 장로님 자신이었어요. 하지만 아내와 자식이 죽은 지 반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게 된 게 부끄러웠겠죠. 그렇게 얻은 새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장로님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믿음으로 장로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이끌어 갔을 거예요. 저도 하나님을 믿지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를 살게 하는 건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가 아닐까, 하구요. 최 장로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욥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욥이라면 적어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욥이 아니라 욥의 자녀의 처지에 놓인다면요? 죽은 자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욥이 새로 얻은 자녀들은 행복했을까요? 욥이 그애들을 그애들 자체가 아니라 죽은 자식들의 대체품으로 대했더라도요? 욥의 입장, 장로님의 입장에 서 보려고 했지만 자꾸 욥의 자녀들의 입장에 서게 돼요.

 

  그래서 방화 사건의 진상이 뭐인 것 같냐구요? 제 생각은 이래요. 최요한 목사는 목사직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했어요. 더 이상 죽은 이복형을 대신하는 존재나 하나님이 내린 축복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죠. 조원효 씨 증언대로 최 목사는 교회 건물과 어머니가 증여해 준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독서실을 사려고 했어요. 자기한테도 맞지도 않고 부담스럽기만 한 목사직 때려치고 독서실 총무 노릇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려구요. 그런데 아버지인 최근직 장로님은 농협에 전화를 걸어서 아들에게 대출해 주지 못하게 했죠. 본인은 그게 정말 아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들은 유일한 탈출구가 막혀버렸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겠죠. 만진이 학생이 목사님이랑 어떤 꼬마가 싸우는 걸 봤다고 했죠? 목양슈퍼 아줌마는 피해자 중에 정민석이라는 아이한테 아무 데나 불 지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구요. 최 목사는 민석이가 목사실에 불을 지른 걸 보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예요. 불을 끄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하지도 않은 거죠.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고로 죽은 것처럼 보이려고. 목사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까지 자기 저승길에 끌고 가나 싶긴 한데, 그게 최 목사가 아버지와 하나님에게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을 거예요.

 

  이게 욥의 자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반항이라니, 슬프지 않나요? 지금까지 내 삶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 왔지만, 죽는 것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 자신이 욥인지 욥의 자녀인지조차 모르겠어요. 사는 것도 힘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것도 무섭지만, 내 의지로 죽는 건 못하겠거든요. 그러니 최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반항도 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저는 하나님도, 욥도 이해할 수 없겠죠. 욥의 자녀 같은 처지에 놓이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구요. 다만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제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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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리루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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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백사의 전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책  『백사전』 을 통해서였다. 전설의 내용은 이랬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던 백사가 있었다. 백사는 천 년을 수련해 마침내 아름다운 인간 여인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백소정白素貞이라는 인간 이름을 붙였다. 백소정은 인간 남자인 허선許仙과 사랑에 빠져 혼인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법해法海라는 승려에게 정체를 들켜, 항저우의 서호西湖 호숫가에 있는 뇌봉탑雷峰塔 아래 갇히게 되었다. 만화책에서의 결말은 백소정이 낳은 아들이 훗날 장성해 탑 아래 갇힌 어머니를 구해준다는 해피엔딩이었다. 


노을이 지는 서호 풍경. 사진 왼쪽의 탑이 백소정이 갇혀 있다는 뇌봉탑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백소정이 영원히 탑 아래 갇혀버리는 것이 <백사전>의 원래 결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에서 리루이李銳라는 현대 중국 작가가 <백사전>을 토대로 『인간세상人間』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이 우리나라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돌고 돌아 <백사전>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자신이 백소정의 환생이라고 믿는 현대인 여성 하추백何秋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법해는 백소정을 뇌봉탑 아래 봉인하면서 '탑이 무너지는 날에 백사가 풀려난다'는 시 구절을 남겼다. 하추백은 1924년 9월 25일, 뇌봉탑이 무너지는 날 태어났다. 뇌봉탑 아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뇌봉탑 여기저기를 후벼파댄 결과였다. 영영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탑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인간의 잔인함은 뇌봉탑뿐만 아니라 하추백의 삶과 백소정의 삶까지 짓밟았다. 서로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던 두 여인의 삶이 조금씩 겹쳐 보인다. 

  백소정은 인간이 되기 위해 2999년 동안 깊은 동굴에서 수련했지만, 밖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람 목소리에 동굴에서 나와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백소정을 시험하려 했던 관음보살이었다. 관음보살은 백소정에게 인간의 잔인함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잔인하지 못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는데도 백소정은 끝까지 인간처럼 잔인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요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약초를 구해온다. 자신의 약 제조 비법을 훔쳐가 놓고도 변명만 늘어놓는 이웃집 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기 동족들을 수도 없이 죽인 인간들이 괴질에 걸렸을 때, 자기 피만이 해독약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피까지 인간들에게 내어주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인간들이 자기 피가 오히려 독이었다고 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백소정은 순순히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 그녀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해친 인간은, 그녀가 친자매처럼 아끼던 청사 요괴 청아를 배신하고 죽인 청년이었다. 

  단지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 받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백소정이 남긴 유일한 혈육 허사린은 겉보기에는 다른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새와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땅 위를 기는 뱀의 습성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평범한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 허사린은 본성을 억눌러야 했다. 그런 허사린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 것은 마을 훈장의 바보 딸 향류낭이었다. 향류낭은 현실에서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지만, 꿈속에서는 뱀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허사린의 괴로움을 혼자 알아채고 위로해준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향류낭마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시집가기 전날 밤 자결해 버린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의 진실을 들은 뒤, 허사린은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는데도 인간 세상에서 관리로 살지 않겠다며 뱀 흉내를 내는 광대가 된다. 아들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준 허선은 다시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으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정말 눈이 멀어버린다.

  요괴가 아닌 인간, 그것도 현대인인 하추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배제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백사전>을 원작으로 한 전통 연극에서 허선 역을 맡았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이 백사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청년은 그녀에게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자며 달콤하게 말했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1957년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공산당이 반공산당 사조를 완화하려고 지식인, 학생의 표현의 자유를 장려한 운동. 하지만 공산당은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했다.)이 일어났을 때, 남편은 하추백이 자신에게만 털어놓은 비밀까지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며, 하추백을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치는 독사'라고 몰아붙였다. 그녀는 남편의 폭로로 강제노역을 하고 남편과 이혼한 뒤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고향집에 돌아온다. 그때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다던 고향집의 매화나무가 유난히 화려하게 꽃을 피워 그녀에게 뿌려주었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나무가 그녀의 허선이었다는 것을. 백소정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서 인간이 되었고, 허선은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99년 뇌봉탑 지하에서 법해가 쓴 수기가 발굴되고, 5년 뒤인 2004년, 80세가 된 하추백은 법해의 글을 읽게 된다. 법해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백사 전설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라는 것을 느끼지만, 하추백은 담담하기만 하다. 하추백은 담담했지만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이 착하고 여린 존재들이 이토록 모진 일을 겪어야 했을까.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이 아무리 그들을 모질게 대하더라도 그들은 잔인해지지 못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현대의 인간 세상에서도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생한 허사린은 뱀에 미친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고, 허사린의 애완 뱀이 된 청아는 인간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넣어 목숨을 끊는다. 

  환생한 허사린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요." 자신에게 이 말을 해줄 향류냥도 없어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준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자신과는 다른 존재에게는 한없이 모진 인간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착하고 여린 존재들을 두 팔 벌려 안아주며 말하고 싶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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