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리루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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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내가 백사의 전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만화책  『백사전』 을 통해서였다. 전설의 내용은 이랬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던 백사가 있었다. 백사는 천 년을 수련해 마침내 아름다운 인간 여인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백소정白素貞이라는 인간 이름을 붙였다. 백소정은 인간 남자인 허선許仙과 사랑에 빠져 혼인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법해法海라는 승려에게 정체를 들켜, 항저우의 서호西湖 호숫가에 있는 뇌봉탑雷峰塔 아래 갇히게 되었다. 만화책에서의 결말은 백소정이 낳은 아들이 훗날 장성해 탑 아래 갇힌 어머니를 구해준다는 해피엔딩이었다. 


노을이 지는 서호 풍경. 사진 왼쪽의 탑이 백소정이 갇혀 있다는 뇌봉탑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백소정이 영원히 탑 아래 갇혀버리는 것이 <백사전>의 원래 결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에서 리루이李銳라는 현대 중국 작가가 <백사전>을 토대로 『인간세상人間』이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이 우리나라에는 『사람의 세상에서 죽다』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돌고 돌아 <백사전>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자신이 백소정의 환생이라고 믿는 현대인 여성 하추백何秋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법해는 백소정을 뇌봉탑 아래 봉인하면서 '탑이 무너지는 날에 백사가 풀려난다'는 시 구절을 남겼다. 하추백은 1924년 9월 25일, 뇌봉탑이 무너지는 날 태어났다. 뇌봉탑 아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뇌봉탑 여기저기를 후벼파댄 결과였다. 영영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탑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인간의 잔인함은 뇌봉탑뿐만 아니라 하추백의 삶과 백소정의 삶까지 짓밟았다. 서로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던 두 여인의 삶이 조금씩 겹쳐 보인다. 

  백소정은 인간이 되기 위해 2999년 동안 깊은 동굴에서 수련했지만, 밖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람 목소리에 동굴에서 나와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백소정을 시험하려 했던 관음보살이었다. 관음보살은 백소정에게 인간의 잔인함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잔인하지 못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는데도 백소정은 끝까지 인간처럼 잔인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요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약초를 구해온다. 자신의 약 제조 비법을 훔쳐가 놓고도 변명만 늘어놓는 이웃집 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기 동족들을 수도 없이 죽인 인간들이 괴질에 걸렸을 때, 자기 피만이 해독약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피까지 인간들에게 내어주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인간들이 자기 피가 오히려 독이었다고 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백소정은 순순히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 그녀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해친 인간은, 그녀가 친자매처럼 아끼던 청사 요괴 청아를 배신하고 죽인 청년이었다. 

  단지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 받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백소정이 남긴 유일한 혈육 허사린은 겉보기에는 다른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새와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땅 위를 기는 뱀의 습성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평범한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 허사린은 본성을 억눌러야 했다. 그런 허사린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 것은 마을 훈장의 바보 딸 향류낭이었다. 향류낭은 현실에서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지만, 꿈속에서는 뱀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허사린의 괴로움을 혼자 알아채고 위로해준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향류낭마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시집가기 전날 밤 자결해 버린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의 진실을 들은 뒤, 허사린은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는데도 인간 세상에서 관리로 살지 않겠다며 뱀 흉내를 내는 광대가 된다. 아들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준 허선은 다시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으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정말 눈이 멀어버린다.

  요괴가 아닌 인간, 그것도 현대인인 하추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배제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백사전>을 원작으로 한 전통 연극에서 허선 역을 맡았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이 백사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청년은 그녀에게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자며 달콤하게 말했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1957년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공산당이 반공산당 사조를 완화하려고 지식인, 학생의 표현의 자유를 장려한 운동. 하지만 공산당은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했다.)이 일어났을 때, 남편은 하추백이 자신에게만 털어놓은 비밀까지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며, 하추백을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치는 독사'라고 몰아붙였다. 그녀는 남편의 폭로로 강제노역을 하고 남편과 이혼한 뒤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고향집에 돌아온다. 그때 여러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다던 고향집의 매화나무가 유난히 화려하게 꽃을 피워 그녀에게 뿌려주었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나무가 그녀의 허선이었다는 것을. 백소정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서 인간이 되었고, 허선은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99년 뇌봉탑 지하에서 법해가 쓴 수기가 발굴되고, 5년 뒤인 2004년, 80세가 된 하추백은 법해의 글을 읽게 된다. 법해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백사 전설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라는 것을 느끼지만, 하추백은 담담하기만 하다. 하추백은 담담했지만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이 착하고 여린 존재들이 이토록 모진 일을 겪어야 했을까.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이 아무리 그들을 모질게 대하더라도 그들은 잔인해지지 못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현대의 인간 세상에서도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생한 허사린은 뱀에 미친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고, 허사린의 애완 뱀이 된 청아는 인간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넣어 목숨을 끊는다. 

  환생한 허사린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어요." 자신에게 이 말을 해줄 향류냥도 없어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준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자신과는 다른 존재에게는 한없이 모진 인간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착하고 여린 존재들을 두 팔 벌려 안아주며 말하고 싶다. 하루를 못 봤는데 3년을 떨어진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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