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임보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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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이새벽 작가님의  『고양이 임보일기』를 주문했다. 이새벽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작년 가을이었다.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더 빌릴까 해서 서가들을 둘러보다, 우연히 이새벽 작가님의 『고양이 그림일기』를 발견했다. 작가님이 고양이들과 식물과 함께 한 나날들을 일러스트와 일기로 그려낸 책이었다. 


그 이후로 이새벽 작가님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고양이와 식물을 담은 일러스트와 글을 즐겨 보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님이 새끼 길고양이 다섯 마리를 임시보호하다 입양을 보낸 이야기를  『고양이 임보 일기』라는 책으로 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책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지만,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 출간한 지 세 달이나 지난 지금에야 주문을 했다. 전편인  『고양이 그림일기』도 예전부터 갖고 싶었기 때문에 함께 주문했다. 



4월 9일


주문한 지 하루 만에 책이 도착했다. 『고양이 그림일기』와 비교해 보니 그림체가 확연히 더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다. 임시보호했던 다섯 아가나 『고양이 그림일기』 이후로 작가님이 키우고 있는 검은 고양이 베리나 더 작고 올망졸망해서 그런 걸까.  


그런데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그려낸 현실은 만만치 않다. "새끼 고양이가 다섯 마리면 똥도 오줌도 설사도 모두 다섯 배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 뒤의 말을 들으니 더 짠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괜찮다. 괜찮지 않으면 큰일이 날 테니." 아이고, 작가님. 


4월 10일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길고양이들이 겪어야 하는 잔혹한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났다. 어미가 잘 키우고 있는 새끼 길고양이들을 도와준다고 거두었다가 결국 어미와 생이별시키고 정작 자기는 책임도 지지 못하는 사람, 데려온 고양이를 책임지지 못하고 강제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하는 고양이 공장으로 가게 한 사람. 어설픈 선의 때문에 오히려 고양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나도 그런 어설픈 선의와 부족한 지식 때문에 고양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적들이 있었다. 내가 누굴 나무라나 싶다. 



4월 11일


표지에 나온 작가의 말대로 혼자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를 돌보는 것은 만만치 않다. 나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 어미와 떨어진 새끼 고양이를 돌보긴 했지만 단 2주 동안만이었고, 사실상 고양이를 주로 돌본 건 집에 계신 엄마였다. 그런데도 먹는 대로 설사를 하고 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새끼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님은 나와 달리 혼자서, 그것도 다섯 마리나 되는 새끼 고양이를 돌봐야 한다. 분유와 사료와 설사가 뒤섞인 비린내가 온 집안과 몸에 배이고, 몸 곳곳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만든 상처가 늘어간다. 


아래 컷만 봐도 다섯 아이들을 돌보느라 엉망진창이 된 작가님의 집안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분유 먹이고 배변 시키는 법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신 것이 놀랍다. 


4월 12일


작가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고양이 그림일기』 의 시점 이후로 '베리'라는 까만 암컷 고양이를 길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베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자기도 어린데 자기보다 더 어리고 약한 새끼 고양이들을 그루밍해주고, 배변 유도도 해 주고, 화장실 쓰는 법도 가르쳐준다. 작가님이 잠시 맡았었던 또 다른 길고양이 시로에게 얻어터져 가면서도 계속 다가가서 결국은 시로의 마음을 열고. 나야 책과 블로그,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일러스트로만 보는 아이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인 것 같다. 


작가님과 베리, 임보 아기들, 든든한 흰둥이, 상처 받으면서 닫혔던 마음을 열어가는 시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사랑스럽다. 우울할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나와,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도 녹아내린다. 


4월 13일


임보 아기들이 한 명씩 입양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안도감이 들면서도 아쉬워진다. 한 마리씩 입양 갈 때마다 안도하면서도 허전함을 느끼는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베리도 돌보던 아기들이 한 마리씩 사라질 때마다 허전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섯 아이들은 모두 좋은 곳에 입양을 갔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삼색이의 새 이름 홍시를 마지막으로 다섯 개의 이름을 모두 수집한 날엔 배부르고 행복한 용이 된 기분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 날에는 악몽을 꿀 리 없었다. 용이 고양이를 모두 구했으니까." 이 마지막 문단에서 나도 안도했다. 지금까지 한 마리의 고양이도 구하지 못했던 나는 다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모두 구한 용에게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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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임보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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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촘촘해진 그림체가 새로운 캐릭터들(임시보호하고 있는 아기 고양이들, 베리)의 사랑스러움을 잘 살린다.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를 키우는 고충과 보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길고양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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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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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보기왕이 온다』의 책 예고편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 히데키는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그것'을 처음 만났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현관문 너머로 키가 큰 회색 형체가  보였다. 외할머니를 찾던 '그것'은 외할머니가 지금 집에 없다고 하자 외삼촌을 찾았다. 그런데 외삼촌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히데키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외삼촌도 없다고 하자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다. 그러자 가만히 누워있던 외할아버지는 현관문 너머의 존재에게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히데키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서도, 대답해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 히데키에게 '그것'이 다시 찾아온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졌고,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 중일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라 어떤 책일지 더 궁금해졌다. 그러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어 읽게 되었다. 


​  첫 장에서 느낀 공포는 비현실적인 공포다. 히데키를  위협하는 '그것'은 '보기왕'이라는 괴물이다. 자신에게 대답한 사람을 산으로 끌고 가 버린다는 보기왕은, 수십 년에 걸쳐 히데키를 찾을 정도로 집요하다. 안심하고 있으면 다시 돌아와 히데키와  그의 가족들을 노리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보기왕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공포는 점점 더 커진다. 보기왕이 존재하고 자신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더 두려운 것이다. 


​  공포가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마침내 히데키가 보기왕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이다. 히데키가 자신을 도와주는 퇴마사 코토코의 지시대로 가족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보기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 전화에 코토코가 남긴 음성 메시지는 정반대다. 당신을 집으로 오게 한 건 보기왕의 함정이고, 지금 당장 집에서 빠져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음성 메시지를 믿지 말고 자신의 지시를 계속 따르라는 핸드폰 속 코토코의 목소리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음성 메시지 속 코토코의 목소리. 도대체 둘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히데키는 핸드폰 속 코토코를 선택한다. 


​  히데키가 이제는 괜찮다고 안심하고 읽는 독자도 마음을 놓았을 때,  작가는 뒤통수를 친다. 핸드폰 속 코토코는 사실 보기왕이었고, 핸드폰 속 코토코가 내린 지시도 보기왕을 퇴마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키를 유인하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보기왕은 히데키 앞에서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다. 그래도 주인공이자 서술자이고, 영화판에서는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하는 캐릭터인데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다. 이제 겨우 작품의 3분의 1 지점인데. 설마 정말로 죽었을까 싶었는데, 다음 장에서 무언가에 머리의 반을 먹힌 처참한 모습으로 히데키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히데키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  비현실적인 존재 보기왕이 불러일으키는 첫 장의 비현실적 공포와 달리, 두 번째 장에서 느끼는 공포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 서술자가 히데키에서 그의 아내 카나로 바뀌면서, 그들의 결혼 생활이 히데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히데키는 자신이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빠이고 적극적으로 육아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나가 생각하는 히데키는 자신이 좋은 아빠라는 생각에 도취된 사람이었다. 카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는데, 히데키는 속 편하게도 카나가 순산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를 돌보느라 책 한 페이지 읽기도 힘든데 히데키는 온갖 육아 서적을 사와서 읽어보라고 강요한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용변을 치우는 일처럼 정말 힘들고 귀찮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자신의 모습을 블로그에 올리고, 아빠 모임에 참여하는 데만 열중한다. 


​  여기에서 내가 느낀 공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자로서 느끼는 공포다. 연애할 때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다정했던 사람이라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도와주는 것은 '남'의 일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지 자신의 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같이 하려는 사람을 만나기 참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데 남편은 아이와의 행복한 모습만 블로그 포스트로 올려놓은 것을 보고 카나는 폭발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녀와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사회와 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카나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공포를 느낄 것이다. 


​  또 하나는 관계에서 느끼는 공포다. 히데키는 카나와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카나는 히데키가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었다. 나는 상대방에게 잘하고 있고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상대방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둘의 관계는 겉보기에만 괜찮지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내게도 그런 관계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히데키처럼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나'의 모습 자체에 도취되어 정작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배려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졌다. 


​  보기왕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공포도 피부로 와 닿을 만큼 생생하게 구축되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뒤흔드는 것은 이런 현실적인 공포였다. 히데키 가족을 돕는 퇴마사 일행은 말한다. 보기왕은 사람 마음의 빈 틈을 파고 든다고. 보기왕이 히데키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도 히데키와 카나 사이의 감정의 골을 교묘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틈이 생기면 어떤 슬프고 끔찍한 것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공포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그러나 세 번째 장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전개는 이런 주제의식을 흐려놓는다. 수십 년 동안이나 히데키와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자신과 접촉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속일 정도로 교활하고 악랄한 보기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러나 퇴마사 코토코는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 보기왕을 너무나 쉽게 제압한다. 코토코가 진작에 나섰으면 히데키가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딸 치사가 보기왕에게 끌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토코를 의심하던 형사가 코토코가 경찰청의 높으신 분과 친분이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굽신거리는 모습은 일본 만화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클리셰라, 진지했던 소설의 분위기가 한 순간 우습게 느껴졌다.  


  코토코의 활약으로 보기왕에게 끌려갔던 치사가 무사히 엄마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에서 이제까지의 어두움과 공포가 모두 걷혀 개운했다. 하지만 보기왕이라는 존재가 자아내는 공포와 그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주제의식을 끝까지 끌고 나가는 뒷심이 부족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결정적인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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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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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책을 부른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 Del amor y otros demonios』 을 다른 책 덕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라틴아메리카는 처음인가요?』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 사건과 인물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꿈, 신화 등의 환상적인 요소들을 결합한 문학 사조)'을 소개했는데, '마술적 리얼리즘'의 예시로  이 소설을 들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었다. 강렬한 매력이 있는 이 소설을 만나게 되어서 행운이라고 느꼈다. 


​  이 책은 시작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소설은 1949년 콜롬비아의 어느 예배당 내 납골묘에서 한 소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유골에 달려 있던 22미터가 넘는 풍성한 머리채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소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20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는 200여 년 전 소녀가 아직 살아 있던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  소녀의 이름은 시에르바 마리아로,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던 18세기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에서 살고 있던 귀족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시장에 가다 미친 개에게 물렸다. 상처는 아주 가벼웠고 세 달 동안이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열이 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시에르바 마리아가 광견병에 걸렸다고 의심했고, 상처를 다시 째거나 오줌을 마시게 하거나 독성이 있는 약을 먹이는 등 온갖 엉터리 치료를 해댔다. 멀쩡한 사람도 오히려 병이 나게 만드는 치료에 소녀가 반항하고 발광하자, 카르타헤나 시의 사제들은 소녀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수녀원에 갇혀 구마 의식을 치르게 되었고, 카르타헤나의 주교가 믿고 신뢰하는 젊은 신부 델라우라가 그녀의 구마 사제로 임명됐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병이 아니었으면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을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  이 책의 중심 줄기는 시에르바 마리아와 델라우라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다. 사람들은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둘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악마는 사랑할 줄 모르고 증오만 하는 그들이다. 그러니 '사랑'은 두 사람이고, '다른 악마들'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이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 중에서 '사랑'의 비중은 의외로 크지 않다. 남주인공인 델라우라는 작품의 3분의 1이 지난 뒤에야 등장하고, 작품의 중간 지점에서야 시에르바 마리아를 처음 만난다. 마르케스는 '다른 악마들'을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지키고 싶은 것은 '사랑'이었겠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다른 악마들'이 어떤 것인지 집요하게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악마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광기, 이단, 악마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다. 시에르바 마리아는 백인 귀족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지만 부모는 그녀에게 무관심해 그녀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무관심한 부모 대신 흑인 노예들의 손에 자라면서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어와 기독교 대신 아프리카의 언어들과 종교를 자신의 언어와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백인 귀족이라기보다는 흑인 노예에 가까운 차림새와 언행을 보여준다는 이유만으로 시에르바 마리아는 악마가 들렸다고 오해받는다. 권력을 쥐고 있는 주류인 고위 기독교 사제들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단, 악마로 규정하고 고문하거나 죽인다.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바로 악마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소설에서 광신과 이성의 대립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이성과 계몽이 빛나던 시대였지만 무지와 계몽의 과도기에 많은 사람들은 종교재판의 희생양이 되었고, 힘이 없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을 발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 소설은 200여 년 전 그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그 시대의 광기와 무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와 함께 우리는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아가려다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  소녀는 단지 개에 살짝 물린 것이었고 가벼운 감기 때문에 열이 난 것일 수 있다. 멀쩡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니 아프고 겁이 나서 반항했을 뿐이었다. 지식인인 델라우라와 아브레눈시우는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권력이 없다.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소녀에게 악마가 씌었다는 것이 진실이고, 진실이어야 한다. 결국 델라우라는 소녀와 강제로 격리되어 평생 참회하며 살아야 했고, 소녀는 다른 사제들이 거행하는 고문이나 다름 없는 구마 의식을 치르고 목숨을 잃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르지 않겠다고 서원했던 소녀의 머리카락마저도 빡빡 깎였다. 사랑하는 델라우라와 결혼하면 스스로 자를 머리카락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한 때문이었는지, 고슴도치처럼 짧게 깎였던 소녀의 머리카락은 소녀가 죽은 뒤부터 수백 년 동안 계속 자라나 수십 미터나 되는 머리채가 되었다. 


​  이들의 사랑도 안타깝지만 '다른 악마들' 중에서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아버지 카살두에로 후작이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방치했지만, 아픈 딸을 돌보면서 뒤늦게 부성애를 느끼게 된다. 그가 딸을 수녀원에 보낸 것도 딸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시에르바 마리아는 끝내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첫사랑 둘세 올리비아와는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못했지만 사소한 어긋남들 때문에 끝내 이루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아내 베르나르다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베르나르다마저 귀족 부인이 되고 싶어 자신에게 접근했을 뿐 자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할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잃은 후작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다. 광신과 증오 때문에 사랑하지 못했고 사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다른 악마들과 달리, 뒤늦게서야 사랑하려고 했지만 결국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도 못했던 그가 안타까웠다. 


​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는 이들을 악마로 몰아가는 진짜 악마들, 그리고 사랑하고자 했으나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이. 이들의 온갖 감정과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쓸쓸해졌다. '사랑'은 결국 '다른 악마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악마들'이 강제로 깎았던 소녀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죽은 뒤 계속 자라 광신, 권력자들, 세월에 저항하고 있다. 이 책에서 사랑은 승리하지도 행복한 결말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 집요하고 강렬한 생명력으로 우리가 사랑의 힘을 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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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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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외할머니는 치매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는 누워만 있는 게 갑갑하셨던지 자꾸 일으켜 달라고 하셨다. 부끄럽게도 나는 외할머니의 부탁을 귀찮아하고 짜증을 냈다. 외할머니가 내 응석과 투정을 다 받아주시면서 나를 키워주셨던 건 까맣게 잊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께 짜증만 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이제 몇 년 있으면 나는 엄마에게 치매가 올 것을 걱정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게 치매가 올 것을 걱정할 것이다. 치매는 내게 죄책감과 불안감을 함께 안겨 주는 단어다. 하지만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에 대해 더 밝고 따뜻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 노인들이 서빙을 하다 어떤 음식을 주문 받았는지 잊어버리고 틀린 메뉴를 가져다 주는 음식점이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일본 NHK 방송국의 PD 오구니 시로는 7년 전만 해도 치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주변에 치매를 앓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2012년 원래 촬영하기로 했던 프로그램에 차질이 생기면서, 치매 노인들이 모여 사는 간병 시설을 대신 취재하게 됐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치매 노인들은 직접 음식을 하고 빨래를 했는데, 제작진을 위한 점심식사도 직접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나오기로 예정된 햄버그 스테이크 대신 만두가 나왔다. 노인들이 원래 내 오기로 했던 메뉴를 잊어버린 것이다. 오구니 PD는 처음에 당황했지만,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틀에 치매 노인들을 가둘 수 없다고 느끼고,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종업원인 음식점에서, 사람들은 메뉴가 틀리게 나와도 화를 내지 않는다. '주문을 틀린다'고 미리 전제를 했고, 다른 메뉴가 나와도 맛있으면 되니까. 이 아이디어가 실제 음식점으로 실현되는 데 5년이 걸렸다. 


​  오구니 PD가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준비할 때 세웠던 두 가지의 원칙이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식당답게 음식의 질을 고집하기(멋있을 것, 맛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실수가 목적이 아니다. 일부러 실수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이다. 좋은 일을 하는 거니 어떻게 하든 용납될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음식점인데 음식점으로서의 퀄리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하시는 분들도 좋은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서빙해야 더 보람을 느낄 것이다. 실수가 용납되는 곳이라 해도 일부러 실수를 한다면 음식점은 단지 하나의 촌극으로 끝날 것이다. 


​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끝에, 2017년 6월 3일과 4일 단 이틀, 도쿄 시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오픈했다. 실수가 전혀 없으면 어떡할까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실수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주문을 받으러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할머니도 있었고, 다른 테이블끼리 메뉴가 서로 뒤바뀌어 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쁜 와중에 일하는 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못해 일하는 분들의 인내심이 바닥 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수를 하면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오랜만에 자기 몫을 해냈고,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응을 얻으며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종업원 할머니가 일을 하고  받은 돈으로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들을 사는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뭉클했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음식점을 준비해 온 사람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식당을 찾아준 손님들의 배려가 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미리 주문이 틀릴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도, 정말 주문이 틀리면 화를 내는 손님도 있을 법한데, 손님들 모두가 화를 내지 않고 종업원들을 배려해 주었다. 잘못 나온 메뉴도 맛있게 먹거나, 다른 손님의 것과 바뀐 메뉴를 다시 바꿔 원래 요리를 받았다. 조금 늦어져도, 틀려도 괜찮다고 용납해 주는 손님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치매 환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더 느리고, 더 많이 틀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고 간결해서 읽기 좋은 글이지만, 책의 구성은 아쉽다. 음식점의 준비 과정을 먼저 이야기하고 음식점이 실제로 실행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기대감이 점점 더 커졌을 텐데, 그 반대의 구성이어서 후일담을 덤으로 듣는 느낌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음식점에서 일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이야기나, 암 투병 중인 친구와 함께 음식점에 간 이야기는 여러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왜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 사이에 다른 이야기들을 넣었는지 의문이다. 특별히 그 이야기들을 중간에 넣어야 할 이유도 없고, 원래 진행되던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 책의 구성을 좀 더 세심하게 짰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일본어 원서 표지(위)와 한국어판 표지(아래)


  한국어판에서는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표지와 본문 곳곳에 넣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더한 것이 돋보인다. 원래의 일본어 로고처럼 "아차, 실수"라고 하는 듯 한 글자의 방향만 살짝 뒤튼 제목도 사랑스럽다. 다만 원서에서는 오구니 PD가 경어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한국어에서는 반말로 번역된 것이 아쉽다. 경어체로 번역했으면 이야기하는 느낌, 부드러운 느낌이 더 살아났을 텐데.


​  이런 아쉬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은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 보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발견했다. KBS에서 작년 8월에 이 음식점의 포맷을 빌려 '주문을 잊은 음식점'을 오픈했었다는 것이다. KBS에서 베낀 걸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KBS 김명숙 PD가 오구니 PD에게 정식으로 문의해서 포맷을 빌려왔다고 한다. 이연복 셰프가 총괄 셰프였고, 송은이 씨가 총 지배인을 했다고 한다. <KBS 스페셜>에서 두 회에 걸쳐 방영했다는데 다시보기로 봐야겠다. 우리의 '주문을 잊은 음식점'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한국판 '주문을 잊은 음식점'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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