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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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외할머니는 치매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는 누워만 있는 게 갑갑하셨던지 자꾸 일으켜 달라고 하셨다. 부끄럽게도 나는 외할머니의 부탁을 귀찮아하고 짜증을 냈다. 외할머니가 내 응석과 투정을 다 받아주시면서 나를 키워주셨던 건 까맣게 잊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께 짜증만 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이제 몇 년 있으면 나는 엄마에게 치매가 올 것을 걱정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게 치매가 올 것을 걱정할 것이다. 치매는 내게 죄책감과 불안감을 함께 안겨 주는 단어다. 하지만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에 대해 더 밝고 따뜻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 노인들이 서빙을 하다 어떤 음식을 주문 받았는지 잊어버리고 틀린 메뉴를 가져다 주는 음식점이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일본 NHK 방송국의 PD 오구니 시로는 7년 전만 해도 치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주변에 치매를 앓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2012년 원래 촬영하기로 했던 프로그램에 차질이 생기면서, 치매 노인들이 모여 사는 간병 시설을 대신 취재하게 됐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치매 노인들은 직접 음식을 하고 빨래를 했는데, 제작진을 위한 점심식사도 직접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나오기로 예정된 햄버그 스테이크 대신 만두가 나왔다. 노인들이 원래 내 오기로 했던 메뉴를 잊어버린 것이다. 오구니 PD는 처음에 당황했지만,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틀에 치매 노인들을 가둘 수 없다고 느끼고,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종업원인 음식점에서, 사람들은 메뉴가 틀리게 나와도 화를 내지 않는다. '주문을 틀린다'고 미리 전제를 했고, 다른 메뉴가 나와도 맛있으면 되니까. 이 아이디어가 실제 음식점으로 실현되는 데 5년이 걸렸다. 


​  오구니 PD가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준비할 때 세웠던 두 가지의 원칙이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식당답게 음식의 질을 고집하기(멋있을 것, 맛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실수가 목적이 아니다. 일부러 실수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이다. 좋은 일을 하는 거니 어떻게 하든 용납될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음식점인데 음식점으로서의 퀄리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하시는 분들도 좋은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서빙해야 더 보람을 느낄 것이다. 실수가 용납되는 곳이라 해도 일부러 실수를 한다면 음식점은 단지 하나의 촌극으로 끝날 것이다. 


​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끝에, 2017년 6월 3일과 4일 단 이틀, 도쿄 시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오픈했다. 실수가 전혀 없으면 어떡할까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실수는 곳곳에서 일어났다. 주문을 받으러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할머니도 있었고, 다른 테이블끼리 메뉴가 서로 뒤바뀌어 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쁜 와중에 일하는 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못해 일하는 분들의 인내심이 바닥 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수를 하면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오랜만에 자기 몫을 해냈고,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응을 얻으며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종업원 할머니가 일을 하고  받은 돈으로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들을 사는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뭉클했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음식점을 준비해 온 사람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식당을 찾아준 손님들의 배려가 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미리 주문이 틀릴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도, 정말 주문이 틀리면 화를 내는 손님도 있을 법한데, 손님들 모두가 화를 내지 않고 종업원들을 배려해 주었다. 잘못 나온 메뉴도 맛있게 먹거나, 다른 손님의 것과 바뀐 메뉴를 다시 바꿔 원래 요리를 받았다. 조금 늦어져도, 틀려도 괜찮다고 용납해 주는 손님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치매 환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더 느리고, 더 많이 틀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고 간결해서 읽기 좋은 글이지만, 책의 구성은 아쉽다. 음식점의 준비 과정을 먼저 이야기하고 음식점이 실제로 실행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기대감이 점점 더 커졌을 텐데, 그 반대의 구성이어서 후일담을 덤으로 듣는 느낌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음식점에서 일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이야기나, 암 투병 중인 친구와 함께 음식점에 간 이야기는 여러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왜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 사이에 다른 이야기들을 넣었는지 의문이다. 특별히 그 이야기들을 중간에 넣어야 할 이유도 없고, 원래 진행되던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 책의 구성을 좀 더 세심하게 짰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일본어 원서 표지(위)와 한국어판 표지(아래)


  한국어판에서는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표지와 본문 곳곳에 넣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더한 것이 돋보인다. 원래의 일본어 로고처럼 "아차, 실수"라고 하는 듯 한 글자의 방향만 살짝 뒤튼 제목도 사랑스럽다. 다만 원서에서는 오구니 PD가 경어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한국어에서는 반말로 번역된 것이 아쉽다. 경어체로 번역했으면 이야기하는 느낌, 부드러운 느낌이 더 살아났을 텐데.


​  이런 아쉬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은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 보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발견했다. KBS에서 작년 8월에 이 음식점의 포맷을 빌려 '주문을 잊은 음식점'을 오픈했었다는 것이다. KBS에서 베낀 걸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KBS 김명숙 PD가 오구니 PD에게 정식으로 문의해서 포맷을 빌려왔다고 한다. 이연복 셰프가 총괄 셰프였고, 송은이 씨가 총 지배인을 했다고 한다. <KBS 스페셜>에서 두 회에 걸쳐 방영했다는데 다시보기로 봐야겠다. 우리의 '주문을 잊은 음식점'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한국판 '주문을 잊은 음식점'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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