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지음 / 일진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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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도서 등산가 김장호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를 남극에서 읽은 사람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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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높은 사람은 쉼 없이 준비한다. 그것도 보란 듯이 떠버리지 않고 남모르게 알차게 준비한다.

그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즐거운 것일 때, 그때부터 그는 남몰래 준비하느라 평일 엿새도 고된 줄 모르게 된다. 진실로 알피니스트란, 산에 오르기 위하여 평소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다.

평소의 몸가짐, 그 산을 내 속에 들어앉게 하는 일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머리에 떠오르는 순수 무구한 꿈. 그 꿈의 언저리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망!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6/03/14/76RGX7O5A5A7BO4PGHUO3Q3G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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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단행본 편집 가이드북 - 스크롤 웹툰이 한 권의 만화책이 되기까지
현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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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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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현 박사님의 犯에 대한 번역어는 참 적절하다.


범을 범하다라는 1:1대응이 아니라 경계를 함부로 저촉하거나 넘는다는 뉘앙스를 고려해 '아랑곳않고 / 거침없이'라 풀었다.


논어에도 범이 두 번 나온다.


학이(學而)에선 이호범상자(而好犯上者), 윗사람을 범하다,

헌문(憲問)에선 물기야 이범지(勿欺也 而犯之), 속이지 말고 범하다, 라고 두 번 등장한다.


후자의 범지라는 술목구조는 범안간쟁(犯顔諫爭), (군주의) 안색을 범하고 논쟁한다라는 뜻이다. (후술한다)


요컨대 논어에서 犯은 범상(윗사람을 범하다)과 범안(안색을 범하다) 두 번 나오는 셈이다.


학이의 경우 해당 구절에 대해 하안, 황간, 포함 등 전세대 주석가들은 따로 범을 풀이하지 않았고

주자주에서 犯上謂干犯在上之人(범상위간범재상지인), 윗 자리에 있는 사람을 범하다라고 하였다. 참고로 그 다음 구절 소호범상은 13년도 연수원 입학문제였다.














이때 성백효 선생님은 干을 犯과 동의어로 보았으나 간섭하여 범하다, 라고 따로 병렬처리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때도 성백효 선생님은 범을 범하다라고만 넘어갔다. 승정원일기 전문가 이도현 박사님의 해석을 따르자면 윗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라고 스무스하게 읽힌다.


학이의 범상은 괜찮다. 헌문의 범지(범안)이 탐구할 게 있다. 고 한형조 교수는 유작 <두 개의 논어>에서 학이 2장은 관례대로 따랐으나 헌문 23장은 두 번 따로 해석했다.


p517은 '눈치 보지 말고 따지고 들어라'이고 p799는 '숨기지 말고, (군주가 싫어하더라도) 적극 거론하라'















그러니까 따지고 들다, 적극 거론하라, 라는 뜻 두 갈래로 나뉜다.


지적 혁명가다운 파격적인 해석인데 저승에 가있는 그에게 그 함의를 물어보기는 불가능하다.


헌문의 경우 해당 구절에 대해 공안국이 犯顔諫爭(범안간쟁) 안색을 범하고 간쟁하다라는 4구를 제시한 이후 집해 집주 모두 이를 따른다.

집주에선 범씨(范祖禹, 범조우)의 주석을 인용해 범은 자로에게 어려운게 아니었으나 속이지 않는게 어려웠으므로 무릇 선생님께서 먼저 속이지 말고 후에 범하라고 가르친 것이다라고 하였다(范氏曰 犯非子路之所難也而以不欺爲難故夫子敎以先勿欺而後犯也)

학이의 범상이 윗사람을 범하다라고 산뜻하게 해석되는 것과 달리






헌문의 범지는 그것을 범하다는 술목구조이기에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범안간쟁으로 해석이 고정되었으나 여전히 누구의 안색을 범한다는 것이지는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문맥상 군주는 맞는데 자구 자체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범(v)안(o)이 (자신의 안색을) 범한다는 것인지 (군주의 안색을) 범한다는 것인지는 아직은 모른다. 레퍼런스가 더 필요하다.


주자어류와 여유당전서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정본 다산 여유당전서 8권 논어고금주1의 학이 해당 구절에선 범상에 대한 어원적 해설은 더 없고 숱한 옛 학자의 글을 모아 그 철학적 윤리학적 함의를 드러낸다. 어의는 논란의 여지가 없고 이에 대한 담론을 톺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편 여유당전서 9권 논어고금주2 헌문 해당 구절은 어의를 정박시킬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다산은 보충설명을 통해 隱情壅蔽(은정옹폐), 숨겨진 실정이 막고 덮이는 것을 속이다,

冒威諫爭(모위간쟁), 즉 위엄을 무릅쓰고 간쟁하는 것을 범하다라고 하였다.


위협의 危가 아니라 위엄의 威이기 때문에 임금의 위엄을 무릅쓴다가 되어 범안의 해석이 임금의 안색을 아랑곳하지 않다가 된다.


이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예기(禮記)의 단궁상(檀弓上)의 사친, 사군, 사사에서 사군 부분(事君, 有犯而無隱 임금을 섬길 때는 범함은 있되 숨기지 말아야한다)만 편집인용해서 헌문의 해당 구절이 군주에 대한 문맥임을 명확히 했다.


나아가 다산은 범이무은과 같은 4구로 부연설명한다. 直言無隱(직언무은), 즉 바르게 말하고 숨기지 않는 것을 이르러 범이라한다, 라고 黃曰에 이어진다. 아마 禮書通故(예서통고)를 쓴 청나라의 고증학자 황이주의 주석일 것 같다.(방금 조금 찾아봤는데 정확히 못 찾아서 일단 '아마'라는 가정법을 붙인다)

논어집석의 헌문 부분은 범지의 해석이 범안간쟁이라는 점을 다양한 주석보을 인용하며 명확히 한다. 여론의 이어지는 부분에선 주자어류의 구절을 언급하는데 찾아보니 주자어류를 일부 축약 인용했다. 그래도 범지=범안=임금의 안색을 범하다라는 맥락을 보강하는 구절이다.


예컨대 집석에선 

朱子曰 唐人諫敬宗遊驪山, 謂若行必有大禍 驪山固不可行 以爲有大禍則近於欺라 되었는데 원래 주자어류의 전문을 솜씨좋게 축약한 것이다. "如唐人諫敬宗遊驪山, 謂驪山不可行, 若行必有大禍. 夫驪山固是不可行, 然以爲有大禍, 則近於欺矣."


해석하면 이렇다.

당인(당나라 때 어떤 신하)이 (당) 경종에게 려산으로 유람 가는 것을 간언하며 려산은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니 만약 간다면 반드시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릇 려산이 본래 가기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은 맞지만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속임수에 가까운 것이다.


이 모두 자로의 태도에 대한 선생님(공자)의 우려를 부연설명한다.


해당 구절이 포함된 전문을 ctext에서 긁어와 보면 이렇다.

徐問: “‘勿欺也, 而犯之. ’子路豈欺君者? 莫只是他勇, 便解恁地否?” 曰: “是恁地. 子路性勇, 凡言於人君, 要他聽, 或至於說得太過, 則近乎欺. 如唐人諫敬宗遊驪山, 謂驪山不可行, 若行必有大禍. 夫驪山固是不可行, 然以爲有大禍, 則近於欺矣. 要之, 其實雖不失爲愛君, 而其言則欺矣.”


https://ctext.org/text.pl?node=591653&if=gb


대만 푸페이룽의 공구서, 공자사전도 확인해보았는데 색인에서 5획으로 찾아보아도 따로 해설을 찾을 수 없었다.


전한 주석가, 논어집주, 논어집석, 주자어류, 다산 여유당전서, 예기, 한형조 해설 등을 더듬어 犯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구 하나의 해석이 전체의 일관성을 조율할 수 있다 믿은 옛 선현처럼.


논어에 보이는 犯의 두 용례, 학이의 범상과 헌문의 범지(범안)을 해석할 때 이도현 박사님의 예를 따라


범상= 윗사람을 범하다 = 윗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다

범지=범안간쟁=군주의 안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간쟁하다

라고 하면 해석이 말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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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in truth, the kind of prose I find myself reaching for—a synthesis of the formal and the conversational, the classical and the contemporary, where aesthetic sensibility and scientific thought are not held apart but made to speak to one another. And yet, I must admit, it rarely comes quickly; such writing tends to demand more time than one would like to give it.


다른 언어로 읽고 쓰면 문화권에 내장된 원칙에 따라 나의 자아도 바뀌어 글이 느낌이 달라진다. 동아시아어로는 유럽어만큼의 귀여움을 낼 수가 없고 유럽어 모드로 바뀌면 왠지 더 시크하게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되는데, 어떤 언어가 되었든 나 자신이 너무 묻어난 내 글을 나 스스로 너무 혐오한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파편과 조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끔 헬렐레 미쳐서 포스팅을 하게 되고..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문어체와 구어체, 고전과 현대, 미학과 과학이 융합된 글은 이런 글이다. 한국어는 뭔가 말하듯이 주욱 쓸 수 있는데 영어는 트레이닝의 영향 때문인지 검토가 습관이라 늘 시간이 많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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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in the modern imagination, a quiet quarterbacking of the self—an invisible play-calling that happens far from the stadium lights, somewhere between the gut and the mind. One eats, one thinks, one assumes causality runs upward, from brain to body, intention to action. But there’s a catch—always a catch—not the well-worn paradox of Catch-22(1961) by Joseph Heller, but something subtler, more insidious: the system has been calling its own plays all along.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Who, indeed, governs the governors, when the governors are microbial, multitudinous, and metabolically chatty?


To attend to the microbiome, then, is not a wellness trend so much as a reorientation of authorship. The narrative voice fractures. You are no longer the singular “I” drafting your day, but a consortium, a low-key collective—part Roman senate, part Discord server—negotiating mood, focus, even desire. Some mornings feel locked in, laser-focused, main-character energy. Others drift—thoughts branching, recombining, a kind of cognitive jazz. And the suspicion begins to form, almost embarrassingly obvious in retrospect: this isn’t random. This is ecology performing cognition. To dismiss this as mere fad or biohacking noise is, frankly, an obnoxious ad hominem masquerading as critique, one that ignores a growing body of literature on microbial metabolites, neuroinflammation, and synaptic plasticity.


In such a frame, diet sheds its moral overtones—clean versus indulgent, disciplined versus fallen—and reveals itself as architecture. Fibers become scaffolding, ferments become emissaries, polyphenols a kind of chemical rhetoric whispered to bacterial intermediaries who, in turn, annotate your neural text. Ex nihilo nihil fit. Nothing comes from nothing—not clarity, not creativity, not even the illusion of control. And somewhere in that recursive loop, between the bite and the thought, the self is no longer a fixed narrator but a process—adaptive, porous, and, if we’re being honest, in a whisper of a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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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글은 N2 수준에서는 꽤 좋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를 한 시간 동안 읽고 한 권을 한 달 걸려 읽겠지만 모든 학습과정이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진다. 재미없고 지루한 인고의 과정을 견뎌낼 수 있는가, 에 관건이 달렸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문고본이 주는 작은 평화는 덤이다.

그러나 그 소확행에 안주하면 곤란하다. 김영민 교수는 지적 영양실조를 주의하라 하였는데 마스다 미리의 글이 그렇다. 늘 비슷비슷한 주제의 일기형 에세이다.

특정 문형을 눈에 익히고 10자 이상의 글자로 이루어진 관습적 어미를 한 큐에 넘어가는 훈련을 하는데는 좋지만 어느 수준에 올라서면 졸업할 필요가 있다. 공회전이 정상정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역사, 경제, 정치,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어휘를 제공하는 다른 호흡의 글을 읽어야 실력의 퀀텀점프를 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를 집었다가 너무 어려워 포기했었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다시 집어도 여전히 난해하다. 언젠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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