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선재에 다녀왔다
3층은 홍정인의 여성노동과 생태를 두루두루 다룬 작품으로 원래부터 다수의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두루미DMZ Qrreeuk가 인상깊었다. 드래곤 라자가 생각난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이것은 또 별도로 포스팅
1층과 2층은 스페인 갤러리와 협업해 TBA21의 소장품을 전시했다. 아트선재는 동서양을 균형있게 다루며서 미래에 아젠다를 선점하고 그 이슈를 잘 보여줄 수 있으면서 마케터블한 작품을 가져오는데 영민함을 발휘한다. 전시가 바뀌는 흐름만 봐도 동서동서 균형이 있고, 서양의 경우 레바논계 프랑스인이라든지 스페인이라든지 주류문화권 내에서도 주목받지 않은 다양한 목소리를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언뜻 생각해봐도 서용선→아투이→이요나→반데벨데→서도호→호추니엔→하종현 으로 로테이션이 있다
참조: https://artsonje.org/exhibition-program/exhibition/?_exhibition_type=past_exhibition&_paged=2
그 큐레이션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하므로 이유가 명확해야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차후 어떤 네트워크, 인적자원, 브랜드이미지에 연결될지를 예측하고 감수하며 행하는 점에서 전략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트선재는 작품을 보여주고 파는 상업화랑이 아니라 전시를 통해 어떤 이슈를 먼저 다루느냐 어떤 지역과 관계를 맺느냐 어떤 감수성을 한국의 예술 담론에 도입하느냐를 주도적으로 결정한다. 갤러리와 국공립기관 사이의 어딘가를 잘 포지셔닝했다.
그래서 이번 TBA21 연계전시는 비단 스페인 작가의 작업을 수입해 보여주는 미술도매상의 역할을 넘어서, 스페인 특유의 혼종문화, 기후위기와 탈식민, 쪼그라드는 구제국과 인구급증으로 영향력이 커지는 식민지 사이의 전복적 관계 그리고 인간의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동시대 미술의 궤적을 보여준다. 단지 매달 매달 전시 콘텐츠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문화적 스탠스를 선취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일종의 비즈니스이자 공공외교이리라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2층 끄트머리 레히나 데 미겔의 74분 영상이다. 레히나는 스페인어로 읽은 여왕regina이라는 뜻이다. 다른데선 레지나라고 읽는다.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자주나오는 (중세라틴어발음의) 사아알웨salve 뤠쥐이이나아아regina의 그 regina다. 안녕 레지나? 여왕 만세
Nekya, a river film 네키아 영화의 강(2022)은 스페인 남서부 리오틴토 지역의 고대신화와 식민착취, 노동운동, 생태파괴의 역사에 우주 생명탐사를 중첩해 하나의 장소를 다루면서 지역, 지구,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성찰하는 정치精緻한 영화이자, 고고학, 광물학, 지역사, 식민사, 천체생물학, 생태노동, SF 모두 한 큐에 쓰리큐션을 성공시킨 담대한 영화다. 이런 영화는 보고 나면 생각할 질문이 많아진다.


리오틴토라는 지역을 작가는 그저 하나로만 정의하지 않고 기억의 매장지이자 미래 실험실로 재구성하면서 이런 챕터를 버무린다.
1) 외계행성을 향해 탐사하는 우주선으로 광물탐사의 의미를 성찰하다가
2) 남미 안달루시아 광맥탐사을 논하다가
3) 산맥아래로 내려가 그리스신화의 지하세계 이야기하고
4) 페니키아 전에 있었다는 스페인의 사라진 고대문명 타르테소스 이야기를 섞고
5-6) 이를 다시 로마와 콜로니, 노예노동의 이야기로 발전시키다가 리오틴토의 식민지회사 (독일자본에 영국직원에 스페인회사)와 광물소성으로 인한 거주환경 저하로 그 지역 사람들의 생태주의, 노동투쟁(유럽 최초)를 다루는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명시적인 엔딩없이 우주의 진공을 부유하는 우주선으로 다시 이어져 끊임없는 순환고리를 형성하고 리오틴토 지역의 극한노동 및 광물탐사와 연결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생명의 기원, 외계생명의 가능성을 질문하고, 우주라는 먼 공간을 위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보게 만드는(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역사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미래의 이미지와 과거의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오디세이아의 지옥인 네키아의 검은 이미지의 우주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과거의 안달루시아 금광 은광개발을 현재의 우주탐험과 엮어 자원채굴의 욕망이 대륙과 세기를 초월해 반복된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주를 다루는 스페인의 방식이 흥미롭고 다른 문화와 비교해보면 재밌다. 픽션에서 우주를 다루는 방식은 문화별로 다른데 이유는 우주는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시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는 배경설정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한 사회문화가 어떻게 역사와 기술, 인간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느냐를 반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서부개척의 일환으로 우주는 미개척지라고 생각한다. 전인류의 확장이라는 큰 소명을 미국이 대리해서 실현해준다고 믿는다.
즉 우주는 신프론티어이고 원래 냉전시기 군사기반의 나사의 프로젝트에서 비로쇠어 영화에서도 자주 미군과 연계된다. <인터스텔라>, <아마겟돈>, <마션> 같은 영화는 인간이 환경을 극복하고 식민지화한다는 서사다. 문제는 진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다루기 위해 우주는 도전과 성취의 무대로 그려진다.
이렇게 10대의 개척자 스피릿이 뿜뿜 풍기는 미국에 반해 한국의 우주는 현실의 은유처럼 다뤄진다. 미국이 프런티어정신이면 한국은 언더독정신이다. <승리호>의 영어제목은 space sweepers로 우주쓰레기청소부다. 우주라는 화려한 배경은 있지만 서사는 철저히 현실의 고통, 언더독정신, 재벌비판, 소자영업자 옹호, 그리고 마지막에 누가 도와준다는 점에서 메시아적 구원의 구조 안에서 굴러간다.
<별들에게>나 <더 문>, <정이>도 거의 지구에 남은 가족, 책임감, 감정이 중심이 되어 우주로 배경을 바꾸었을 뿐 사실상 우주 자체보다는 지상 문제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미국과는 달리 공감과 생존을 테마로 한 현실비판의 감정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은 우주실사영화가 드물다. 훨씬 좋은 대체제가 있기 때문. 일본애니의 우주작화는 대단하다. <건담>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달리 현실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데 이유는 애초에 우주라는 공간이 현실적 도피처의 일부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보다는 더 큰 철학적 질문, 주체로서의 개인, 운명과 세계의 구조에 대한 질문이 엿보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큰 로봇을 조종하는 일본소년의 이미지인데 이는 거대한 서양 문명의 외피를 입었으나 정신만큼은 동양 소년이 조종한다는 동도서기(한국버전), 화혼양재(일본버전)을 상징한다. 서구적 기술문명을 완전히 탈피할 수도, 쉬이 버릴 수도 없기에(즉 로봇을 버리거나 로봇 없이 서바이벌이 불가능하기에) 일본적 정체성이 충돌하거나 조화를 이루면서 네러티브가 만들어진다. 나아가 기계와 혼의 융합이라는 최근 논의되는 (사이보그로 부터 이어지는) 포스트휴먼철학까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주를 미개척지로 여기고 인류확장을 위해 투쟁하는 군사기업의 미국,
우주를 배경설정으로 다루며 사회현실적 갈등을 중심에 둔 한국,
우주를 애니메이션의 무대 삼아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일본
과는 달리 아트선재 스페인 영화 네키아에서 우주는 인간이 묻고 있는 오래된 질문의 다른 표현이다. 위로 올려다 본 우주로부터 아래로 내려다 본 우주(지하)까지 시선이 옮겨지며 미래가 과거로 등치된다. 식민주의의 역사, 인간의 생존조건, 신화적 과거, 포스트 식민을 논하면서 리오틴토 지역의 고대 지하신화 → 광물 자본주의 → 우주 생명탐사까지 한 축에 다루는 영화를 보고나면 우주는 저 멀리 개척지도, 또 다른 서바이벌 게임장이나 현실도피처가 아닌 이미 우리의 일부였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금, 은, 철, 니켈 등 온갖 광물의 이름을 읊조리는데 영어와 다르면서 비슷한 스페인식 발음의 과학용어를 듣는 재미가 있다. 스페인어는 유럽어 중 가장 발음이 쉽다고 마케팅되어 초급반 강의가 많다. 낱말 단위로 발음은 쉬운 편이지만 실제 회화에서는 단어들이 묶여 흘러가듯 발음되기 때문에 듣기가 어렵다. 웃고 들어가 울고 나오는 셈.
유럽 스페인어와 남미 스페인어도 어휘, 문법, 발음에서 다르다.
예컨대 유럽에서 차는 coche지만 남미에서는 carro나 auto다. 컴퓨터는 스페인에서 ordenador지만 남미에선 computadora다. 유럽은 질서잡아주는 기계, 남미는 미국때문. 핸드폰도 스페인은 móvil, 남미는 celular다.
같은 단어라도 발음이 다르다. 예를 들어, c는 스페인 본토에서는 영어의 th나 한국어의 ㅎ에 가깝게 들리는데 남미에서는 z에 가깝게 들린다.
문법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남미에서는 단순과거(pretérito indefinido)를 주로 쓰는 반면 스페인에서는 아베르+뻬뻬(haber+pp)의 복합과거(pretérito perfecto)를 더 자주 사용한다. 스페인 말라가 출생으로 알려진 레히나 데 미겔이지만 이 영화의 나레이션은 남미식 스페인어 같다. 프레테리토가 더 많이 들린다. 예컨대 영화에서 cubrieron이라 했다. 스페인이었으면 haber cubrido라 했을 것이다. 물론 스페인어의 힘듦은 발음보다는 재귀대명사 se의 여러 용법(무인칭인가 수동태인가 스스로인가 등)에도 있지만 아무말 대잔치는 여기까지. 오늘은 오늘의 전시와 영화를 가야해서 글은 여기까지 쓰고 나-가야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