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뒤 올리버는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 I 'm gay " 라는, 그것도 그의 나이 75세에...  44년의 결혼생활 내내 그랬었다면서, 고치려 노력을 했지만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버지 할, 그의 말을 들은 올리버는 그제서야 부모님의 냉랭한 결혼생활이 이해가 된다. 서로를 좋아하고 정중했지만 어딘지 연인같지 않았던 둘, 올리버는 불행했던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찾겠다는 아버지를 응원해 줘야 하는건지 당혹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게이 선언을 한 뒤의 아버지의 태도였다. 그가 놀라 자빠지게도 아버지는 점잖은 전직 박물관장의 허물을 벗어던지곤 너무도 신나게 게이 생활에 돌입하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아오셨을까 싶게 활기차게 게이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올리버는 생소함과 동시에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게이 커뮤니티에 가입하면서 활발하게 친구를 심지어는 애인도 사귀던 아버지의 말년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커밍 아웃 4년만에 폐암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기운차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던 아버지는 결국 암에 져서 돌아가시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가 키우던 개 아서와 함께 쓸쓸하게 살아가던 올리버는 슬픔이라는 주제에 천작해 더 이상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 그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그를 파티에 끌고 가보지만서도 그의 우울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프랑스 배우인 안나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일 때문에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자유스러움과 사람을 잘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진 여자였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닮은 꼴인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빠지고 만다.  38살에 사랑에 빠진 것이 다행스럽다긴 보단 당황스러운 올리버는 그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엄마와의 가혹한 관계를 쭉 지켜봐왔던 관객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가 말년에 보여준 애인과의 열정적이고 우아했던 애정생활을 기억하던 그는 어떻게 아버지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아버지가 보여준 용감함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그는 안나와의 동거를 감행하지만, 결국 그녀의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한다. 이별의 고통에 절절매던 그는 드디어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되는데...



      

< 아서가 올리버에게 안나와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 장면. 아서는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종종대며 걸어간다.>




" 이제 어쩌지? "  " 나도 모르지."  "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 영화의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는걸 알게 해주는 마지막 장면>


관계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도 잘 아는 남자가 있다. 부모의 고통스런 관계를 보면서 자라온 탓에 사랑은 그저 고통의 시작일뿐이라고 그는 믿는다. 부모 모두 착한 사람이었다는걸 잘 아는 그로써는 그들의 불행을 사랑탓으로 밖에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딱히 불행하고자 작정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게이 선언 후, 그 둘이 맞지 않았던 것이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란 걸 안 다음에도, 그의 믿음은 쉽사리 깨지질 않는다. 고통스러운 관계를 어쩔 수 없어 지속하느니 홀로 있는게 낫다고 생각하던 그는 안나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흔들린다는 것이 기쁘기보단 당혹스러운 올리버,  그가 관계에 대해 여전히 견고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안 좋게 될 거라는 그의 믿음은 안나의 찌프린 표정 하나에도 전전긍긍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사랑한다면 불안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오래도록 고통 받느니, 희망을 버리고 그만 두는게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였을수도 있지만서도... 그렇게 연인을 떠나 보낸 그는 아버지의 말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교훈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과연 그건 무엇일까?


아무 생각없이 보게 된 영화인데 의외로 괜찮았다. 우선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눈빛을 바꾸는 것만으로 슬픔을 표현해내던 이완 맥그리거는 그동안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일거에 불식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말년에 커밍 아웃을 선언한 뒤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역을 멋들어지게 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나이가 드셨어도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트랩 대령의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더라.  어린 시절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열혈 팬이었던 나로써는 그의 출연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외 안나 역의 멜라니 로랑은 몇 년전 본 <바스터즈>에서 낯을 익힌 여배우인데, 여전히 아름답고 연기도 안정적이여서 좋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로 강아지 아서가 있다. 주인공인 올리버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둘의 대화가 정말로 웃긴다. 보면서 아서와 올리버와의 대화가 조카와 내가 나누는 대화랑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놀랐는데, 어쩌면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유가  아이 대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다. 


심각하거나 아니면 한없이 추하고 경박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였음에도, 깔끔하고 유머스럽게 풀어간 점도 맘에 든다. 원작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구성이 참신한 소설을 보는 듯 신선했다. 억지로 짜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 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동성애와 죽음을 우아하게 다뤄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했다. 두 주제에 대해 두려움이나 편견을 더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나 아버지가 게이라는걸을 알게 된 후 주인공이 게이문화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 하는 과정은 감동적이더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러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하긴 75세의 나이에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은... 용감한 아버지와 이해심 넓은 아들 모두에게 박수를. 그리고 그들의 서툰 시작에도. 무엇보다 끝만 생각하지 말라고, 일단 시작해 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을 보낸다. 가보지 않는다면 그 끝이 어떨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모른다 해도 괜찮다고, 이 영화는 그걸 말하려 했던게 아닐까 한다. 그러니 지레 포기하지 말라고 말이다. 초심자들이라면 새겨 들어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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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이런!  알고보니 우리가 5대양 6대륙에서 살게 된 것도 다 요 다람쥐 스크랫의 허락되지 않은 도토리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의하면 말이다. 어찌나 간단해주시고 황당무계하던지, 이해가 되자마자 빵~ 웃고 말았다. 허풍선이 남작이 왔다한들 명함도 내밀지 못할 대단한 뻥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럭저럭 먹힌다는 거다. 왜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단 설명이 무척이나 명확해서 그런게 아닐까 ? 인간은 늘 단순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여간 영화는 오늘도 불철주야 도토리 쫓기에 여념이 없던 스크랫이 그토록 바라바지 않던 도토리를 손에 넣고 땅에 꽂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곤 으드드득~~~~땅이 갈리고, 스크랫은 지구의 핵안으로 떨어진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그저 도토리를 위해 달렸을 뿐인 스크랫은 그리하여... 지구의 판게아(Pangaea)를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어 놓기에 이른다. 만약 지구 과학 시간에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면 절대 헷갈리지도 졸지도 않았을텐데 ,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하여간 박진감 넘치는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성 제로를 지향하는" 다람쥐 대륙 이동설" 은 거창하게 영화의 초반을 장식하면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온다. 그렇다면 스크랫의 도토리 사랑에서 촉발된 대륙 이동은 과연 아이스 에이지 군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제 그 나비 효과 분석에 들어가보기로 하자.



오, 매니 매니 매니...한때 못 말리는 아내 사랑으로 영화 한 편을 날로 찍으셨던 맘모스 매니는 이제 10대 딸의 아빠가 되었다. " 십대" " 딸 " 두 단어 만으로도 그가 날마다 노심초사 안절부절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훤히 보이실 것이다. 문제는 한창 호기심이 많은 딸 피치에게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 해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고픈 딸과 딸을 제외한 모든 청소년을 불량하게 보는 매니 사이에 갈등이 싹튼다. 아빠 몰래 친구들을 만나러 갔던 피치는 그만 딱 걸려 버리고, 둘은 대판 싸우기에 이른다. 서로에게 못할 말을 주고 받던 와중, 하필 그때 대지가 무너지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 엄청난 혼란속에서 매니와 검치 호랑이 디에고, 나무 늘보인 시드는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빙하 한자락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된다. 바다가 이리도 넓었더냐...를 외치면서 끝없이 표류하던 그들은 드디어 육지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그 육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캐리비안 해적단'의 빙하시대 버전격인 거트 선장의 해적선이었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거트는 세 주인공에게 해적단에 합류할 것을 종용하나, 매니는 그저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뿐이다. 우여곡절끝에 해적선을 파괴하고 무인도에 도착하게 된 아이스 에이지 일행은 그 섬에 자신들만 있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된다. 거트 일행이 새로운 해적선을 만드는 중이라는걸 알게 된 매니 일행은 그 배를 탈취해  가족들을 찾아가기로 계획을 세우는데... 과연 그들의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 오합지졸 같아 보이지만 나름 해적으로써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해적단원들>



       < 의외로 큰 웃음을 선사해 주시는 이 영화의 히든 카드, 시드의 할머니. 조카 말에 의하면 그녀가 제일 웃겼다고 하니, 할머니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주목해서 보시길.>



    < 얼라리 꼴라리~~디에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대요~~~! 적이 친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걸 증명하고 있던 한 쌍. 아마도 5편엔 이들의 아들이 조연으로 출연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디에고를 닮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무척이나 어리버리할 듯...>


시리즈의 4편인데, 과연 재밌을까? 라는 궁금증에 보게 된 영화다.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일단  무난하게 이름값은 했지 싶다. 매니나 시드, 디에고등 전편에서 캐릭터 구축에 성공한 주인공들이 그 성격 그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모험을 하게 된다는 설정도 좋았고,  다양한 새 캐릭터들이 제 몫을 해낸다는 점도 괜찮았으니 말이다. 새 등장인물중 매니의 딸인 피치는 사랑스러움을 더해 왜 매니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는지 이해하게  했고, 정신이 나간듯 보이지만서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건씩 해주던 의뭉함의 대명사 시드의 할머니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악당 역의 원숭이(혹은 오랑우탄?)  거트 선장 역시 냉정하고 무자비한 역활을 잘 해내고 있었으며 , 팜프파탈의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암호랑이 쉬리는 왜 디에고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고도 남게 만들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한번쯤은 주장할만한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거기에 긴장감이 감도는 극박한 순간마다 터지는 유머는 왜 사람들이 아이스 에이지를 사랑하는지 생각나게 했는데, 특히 지루할만하면 나타나 주어서 우리에게 강력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는 스크랫은 여전히 도토리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과시해 보는 사람들을 짠하게 만들었다. 스크랫을 고생시키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법칙도 무시하던 제작진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존경스럽더라. 이젠 스크랫이 도토리를 차지할건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고생으로 우리를 즐겁게 할 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걸 보면 나도 이 시리즈에 꽤나 적응이 된 모양이다. 설정이라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허하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3D 영화임에도 그 효과가 미미했다. 배경이 날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이 3D엔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한 듯했다. 폭풍이 치는 바다를 생동감있게 그려낸 점에는 박수를 받을만했지만, 그것이 3D 영상과는 연결되지 못한듯했다. 2D로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아쉽던데, 그걸 보면 3D로 만든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지 싶다. 거기에 이야기 자체도 조금 산만했다. 정리 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정신없이 흘러 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감에도 종종 지루해질 타이밍이 생긴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스크랫이 나올때마다 안도감이 들었을까. 여기서 지루함을 끊어주겠지 싶어서 말이다.


하여간 재밌는 만화 영화를 보신다면 적어도 후회는 안 하시겠지만서도, 강력하게 기대하고 가신다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서도, 그럼에도 오랜만에 매니와 디에고, 시드를 보는 감상은 괜찮았다. 오래된 친구에게서 발견하는 신선함이랄까.  다음편도 나와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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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 이네즈와 함께 파리에 놀러온 길. 소설가인 길은 파리의 모든 것에 흠뻑 빠지고 만다. 여기서 글을 쓰면 잘 써질 것 같다면서 아예 이사 오자고 조르는 길, 하지만 파리가 그저 예쁜 관광지일뿐인 이네즈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자신이 너무 늦게 태어 났다면서 파리의 20년대를 동경해 마지 않는 길, 아부도 할 줄 모르고 미래도 불투명한데다 이단아 분위기를 팍팍 풍겨대는 길을 이네즈의 부모는 탐탁치 않아 한다.우연히 이네즈의 친구인 폴 부부와 조우하게 된 길은 자신이 박학다식하다는걸 기회가 있을때마다 선전하는 폴이 못마땅하다. 거기에 더 맘에 안 드는 것은 밉살맞은 폴의 말을 교주의 그것처럼 떠받드는 자신의 약혼녀. 결국 일행과 떨어져 홀로 파리의 밤 거리를 산책하게 된 그는 길을 잃고 헤매기에 이른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그 앞에 멋진 푸조차가 서더니 타라고 손짓을 한다. 얼떨결에 차에 오르게 된 길은 자신을 태운 부부가 본인들을 피츠제랄드 라고 소개하자 어안이 벙벙해진다. 하지만 그 피츠제랄드가 까페에 죽치고 있던 헤밍웨이마저 소개하자 그는 흥분에 몸을 부르르 떠는데...


존경하는 헤밍웨이를 만난 길은 그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고 평가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단호하고 박력있게 거절하는 헤밍웨이. 자신은 남의 책을 제대로 평가할만큼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면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이에 뛸 듯이 기뻐진 길은 원고를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까페를 나온다. 나오고서야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까페로 들어가려한 한 길은 자신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헤밍웨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다음 날 비정상적으로 들뜬 길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네즈를 남겨두고, 그는 다시 20년대의 파리에 도착한다. 드디어 그 위대한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게 된 길은 그녀가 자신의 원고를 봐준다는 말에 신이 난다. 거기에 그녀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내가 피카소라니...피카소의 그림을 둘러싸고 비평을 해대던 거트루드는 길에게 피카소의 애인인 아드리아나를 소개한다. 그녀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왜 많은 화가들이 그녀를 그리고 싶어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아드리아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길은 자신이 그녀에게 끌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데...


 밤이 되면 20년대로 가는 차를 탈 수 있는 파리라. 환상적인 발상이다.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일지 이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단지 우리가 파리의 20년대를 동경해 보거나, 그 시대를 재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시대를 방문해 그들을 만나본다는 설정이니 말이다. 단지 설정 하나만으로 그 시대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해서 밤이면 밤마다 새앙쥐가 창고에 숨겨둔 치즈 먹으러 달려가 듯,  그렇게 길이 파리 밤 거리로 나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 아니겠는가. 아니, 거부하면 안 되는 유혹이던가. 하여간 20년대, 당시는 몰랐겠지만 지금은 전설로 남은 사람들이 다 파리에 모여 있었다. 피츠제랄드 부부, 헤밍웨이,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 달리, 맨 레이, T.S. 엘리어트 ...이름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이다. 그때 파리는 그들이 막 자신들의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을때 서로를 지탱해주던 장소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서도, 당시 파리엔 그런 에너지가 충만했었다. 그리고 후에 그 에너지가 사방팔방으로 싹을 튀워 나가 거대한 문학과 예술의 사조가 되었지만서도. 그런 면에서 소설가를 지망하는 길이 그 시대를 갈망하고, 동경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파리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국적도 쓰는 언어도 달랐던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 그리고 전설로만 남은 그들의 애정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기타등등...  가장 흥미로운 시대, 파고 또 파도 여전히 호기심이 가시지 않은 시대, 해서 길은 기꺼이 그 시대로 낭만적인 밤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과연 거기서 그는 무엇을 얻게 될까?


파리의 까페, 비오는 거리, 낙조, 매혹적인 밤 거리 등을 아무말 없이 보여주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이렇게 파리가 아름답구나, 라는걸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이 말이다. 하지만 파리에 대한 예찬이 거기서 멈출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오히려 전희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그 이후로도 감독은 주구장천 파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낭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보여주니 말이다. 일단 감독은 모네와 베르사이유 궁전과 예술품들을 보여주면서 파리의 예술성에 감탄하게 하더니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파리가 가장 화려했다고 여겨지는 20년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정도되면 파리를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게 되기라 어렵다. 아니, 그보단 왜 사람들이 파리 파리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 해서 파리의 모든 매력들을 영화 하나를 보면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장점이다. 거기에 배우들의 매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는데, 미래의 장인을 앞에 두고 공화당 우익(장인의 정치성향)들을 치매 광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길 역의 오웬 윌슨은 삐딱하지만 사랑스러운 소설가의 모습을 깜찍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거기에 정말 그럴 듯하게 헤밍웨이를 연기하던  코리 스톨은 설득력에 부족함이 없었다. 늙은 헤밍웨이만 봐서 진짜 젊은 시절의 헤밍웨이가 그랬을까는 모르겠지만서도, 진짜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을 연기한 캐시 베이츠야 뭐, 말해봤자 입만 아픈 배우고, 달리는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나 아드리아나를 연기한 마리옹 꼬티아르 역시 제 역활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다들 모이니 매혹적인 20년대를 그려내기에 부족함이 없더라. 한없이 낭만적이여 보이는 그 시대를 말이다. 덤이라면  감독이 그 시대를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는 것이겠지. 우린 그 당시를 낭만적이고, 좋았던 시대로 여기지만서도, 실은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아마도 그게 세상사인 것 같다고 우디는 넌지시 일러준다.

감독이 우디 앨런이다. 그런데 그도 늙으셨는지, 누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디의 작품인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여겨지는 날카로움이 사라져서 말이다. 다른 감독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었지 싶다. 그렇게 별로 우디의 색깔이 진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서도, 그래도 잘 만든 영화긴 했다. 단지 중반을 넘어서 살짝 힘을 잃어간다는 것과 파리의 낭만을 지나치게 미화한 점, 전설적인 소설가와 화가들을  주마등 스치듯 보여주기만 한다는 점이 별로였다. 하긴 그 모든 사람이 한편의 영화에 출연하는데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다는건 무리겠지. 그런 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과 대화를 이끌어 내고 상황을 이어나갔다는 자체가 앨런이 대단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는게 아닐까 한다.

우디 앨런. 아마 그도 죽고 나면 헤밍웨이나 달리처럼 전설로 남게 될 것이다. 후대인들은 전설이 된 그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 대단한 감독이었다고.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 라고. 그를 더 잘 알지 못해서 안타깝다고...이를 짐작하고 있었던지, 우디는 말한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지나고 나서 전설이 될지 모르지만서도, 당시 그들은 그걸 몰랐다고. 그저 삶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만의 삶을 살아내고, 전설을 만들어 내라고, 전설과 낭만은 결코 멈추지 않은 시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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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을 따라 훗카이도 츠카우라로 내려온 리에는 도야코 호수 근처에 까페를 연다. 까페 이름을 <마니 까페>라 지은 부부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일상을 묵묵히 일궈 나간다.  그런 그들에게 까페에 온 손님들은 소중한 이웃이 되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욕심없어 보이는 부부와 손님들 사이의 소통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주면서 삶의 평온함을 일깨워 주고 있던 영화다.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남편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빵을 만드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하고 싶다는 부부의 바람은 일단 시작부터가 순조롭다. 2층에 손님이 묵을 방까지 마련한 그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미리 척척 만들어 주는 눈치의 달인 유리 공예가 요코씨, 리에를 볼때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를 연발하는 우체부 총각, 매일같이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아베씨, 그외 세상에서 가장 먹음직스런 야채를 길러내는 농부 부부등 리에와 미즈시마 부부의 일상은 친숙한 사람들이 늘어남과 함께 풍성함으로 채워진다. 한적한 시골 호수 옆,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있는지조차 알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그럼에도 부부의 까페 손님은 끊이질 않는다.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수다스럽지 않은 부부는 그럼에도 자신의 까페를 찾아온 손님들의 사연에 예기치 않게 끼여들게 된다. 남자에게 차인 뒤 까페에 놀러와서는 땡깡을 부리는 도시 아가씨,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 하는 소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살하기 위해 신혼여행지로 찾아온 노부부등 손님들의 사연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불행하다는 것과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가진 그들은 "마니 까페" 의 부부가 내놓은 빵과 음식을 먹으면서 점차 안식을 찾아간다. 늘 남을 배려하는 착한 성품에 부족할게 없어 보이는  삶임에도 종종 까닭없이 우울함에 젖던 리에는 드디어 자신의 행복의 열쇠를 찾아내게 되는데...


맨처음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착한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 진짜 착하다. 착한걸 좋아한다. 심지어는 착한 것에 맹목적이다. 그게 나쁘냐고? 그럴리가. 착한게 싫을리는 없지 않는가. 오히려 착함에 극한에 가까운 신 경지를 개척하는 그들을 볼때면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게 종종 지나쳐서 진심이라기 보단 가식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좋은 인간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메뉴얼에 따라서 말이다. 자신의 본 마음을 표현하기 보단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고, 또 그렇게 착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어쩜 일본 사회의 아킬레스 건이 되는게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경증적인 사회의 전형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폭발하면 어떻게 될거라 생각되시는가? 집단 광기로 이어진다. 아마 기회만 주어진다면 착한 것의 정반대로 순식간에 달려갈 것이다.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건강하지 않은 사회, 비밀이 많은 사회. 언제 위선의 가면이 벗겨질지 모르는 사회, 이 영화는 그러한 일본사회의 단면을 살짝 들여다 보게 하고 있었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물론 나로 하여금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잘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게 꼼수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영화를 만들다니, 그건 그만큼 이 영화에 머리를 쓰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감성에는 충실했을지 모르나, 지적으로는 어찌나 게으르던지, 온갖 클리쉐들이 부끄러운줄 모르고 뻔뻔하게 총출동하더라. 오죽하면 나중엔 화면을 향해 팝콘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작작들 좀 하라고. 이 정도면 말이지, 배경으로 나온 자연에 미안한거다. 안구가 절로 정화되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면서 역겹다는 생각을 하는게 쉬운건 아니니 말이다. 하여간 인간이 문제라니까. 그렇게 간만에 맘에 안 든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대충 적어 보자면 이렇다.


일단 클리쉐 투성이다. 동경에서 놀러온 도시 여자는 오자마자 자신이 남자에게 차였다면서 동네방네 떠들어 댄다. 그렇게 시건방을 떠는 여자와 시골 총각은 하루만에 사랑에 빠진다. 귀가 밝다고만 이유를 밝힌 유리 공예가는 사람들이 무언가 필요하다고 말할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준다. 초능력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은 능력이다. 아이들을 줄줄이 낳는 농부 부부는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농부는 아마도 얼굴을 찌프리고 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다니던 미스테리 아저씨는 결정적인 순간 트렁크를 열고는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이보다 뜨악할 수 없겠다 싶은데도, 뉘앙스를 보니 다들 자랑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정말 함께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떠나버린 엄마를 그리워 하는 소녀는 리에가 만들어준 호박 수프를 안 먹겠다고 선언한다. 어찌나 연기가 서툴던지, 목석이 연기하는 듯하다. 그래도 뭐, 죽음을 목전에 앞둔 노부인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찌그러져 있던 할머니가 빵을 먹자마자 맛있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어찌나 유치하던지 소름이 돋았다. 내 말하는데 할머니의 소름돋는 연기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잔상이 남을까 싶어 머리까지 흔들었다니까. 트라우마가 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거기에 왜 할머니가 소녀처럼 행동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복하는게 더 보기 좋은게 아닐까? 왜 할머니가 소녀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스테리 중 하나였다.


아마도 영화를 그렇게 찍을 수밖엔 없었던 것은 감독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예쁘장하고 눈살 찌프릴 일 없으며 마냥 행복해 보이는 유토피아 같은 삶 말이다.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영화가 주장하는 대로 행복하기만 할 것인지,내진 과연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비약을 하자면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에 버금가는 인공적인 사회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별게 아닌 것을 대단히 소중한 것인양 말하는 일본인들의 호들갑 역시 점수를 깍아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들 그렇게 난리를 펴대던지, 역시 난 무뚝뚝해 보여도 대소사 구분은 할 줄 아는 한국인이 더 맘에 든다.


하여간 이 영화는 영화라기 보다는 한편의 긴 관광지 홍보용 광고나 뮤직 비디오 같았다. 맛있어서 오이씨를 외치는게 아니라, 오이씨를 멋지게 외치기 위해 먹는 듯한 장면들에선 과장된 연기에 짜증이 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바삭 소리가 나게 찢는 장면들도 자꾸 반복되니 싫증이 나더라.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셋팅되어 나온 요리들은 화보집으로 직행해야 할 듯하고, 부부는 하루종일 노동을 하는데도 아무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다, 까페는 늘 깔끔을 넘어 정갈하고, 머리를 자르는데도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무엇을 주문하건" 네, 분부대로 합지요" 라고 대답하는 남편에, 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친절한 이웃들, 멋진 풍경에 맛있는 음식,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폼만 잔뜩 잡고 있는 영화였지 않는가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막 대하고, 그럼에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한결같이 잘 한다는 설정을 보아하니, 분명 감독이 여자이지 싶다. 나도 여성이지만 말이지, 언제나 남자들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살아도 된다고 믿는 여자들을 보면 당혹스럽다니까. 좀 성숙해도 되지 않나? 알고보면 그게 보기도 좋고 마음도 편한데 말이다. 하여간 이래저래 마음이 들지 않던 영화, 오랜만에 입 맛을 버리게 해준 영화였다. 보실지 마실지는 알아서들 챙기시길. 그런데 나 왜 이 리뷰를 이렇게 길게 쓴거야? 꽤나 열받긴 한 모양이구만...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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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사 2012-06-27 13:59   좋아요 0 | URL
음.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은 저도 읽었어요. 저도 꽤 좋게 본 기억이 있네요. 나중에 에릭 오르세나의 작품들을 다 찾아 읽었을 정도로요. 그런데 이 작품때문인지, 다른 작품때문이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네요. 하여간 본지 오래되서 내용은 가물가물 하지만서도 말여요. 그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해서 말해보자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보심 되요.
비슷하지도 않다는...특이한 군상도 없고, 새로운 이야기도 없어요. 섬 사람들 이야기도 아니고, 아마 섬이 아닐걸요? 훗카이도가 섬인가요? 하하하...그건 저도 일본은 잘 몰라서리... 하여간 닮은 점 없다는...그렇게 믿으심 될 거여요.

이네사 2012-06-27 14:03   좋아요 0 | URL
책을 찾아보니 <식민지 전시회>였네요. 이 작품을 보고 에릭 오르세나에게 반했었어요.
거기에선가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책이 800페이지 정도 넘어가야 이건 좀 읽을만하겠군, 이라고 콘라드가 말했다고 한 거였을거여요. 대충 그 비슷한 말이었는데,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요.
 


명색히 탐정이긴 하지만 사무소 장만할 돈을 마련하지 못한 나는 단골 술집 " 칼러 오하타"에 죽치고 앉아 고객들의 전화를 기다린다. 왜 영화 제목이 저 모양일까 궁금하셨던 분들을 위해 미리 언질을 준 것인데, 탐정 사무소를 술집으로 삼을 정도라면 이 사람이 대충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이 될 거 같아서 적기도 했다. 그렇다, 그는 미래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충대충 그날그날 되는데로 살아가는 인간의 표본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탐정으로써 꽤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자신이 탐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여자에게 관대하다는 점 정도. 한마디로 돈을 받은만큼은 떼먹지 않는 신사 탐정이라는 것이다. 해서 그가 해결하게 된 이 사건을 들여다 보자면, 삿뽀르 유흥가 스스키노 거리를 무대로 탐정 사업을 하고 있던 나는 어느날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긴장하게 된다. 자신을 곤도 쿄쿄라고 밝힌 이 여성이 다짜고짜 자신이 시킨 일을 해달라고 부탁해 온 것이다. 왠지 불길하다고  속삭이는 탐정의 직감을 무시한 채, 쿄쿄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한 그는 그녀의 청에 응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젠 그 결과가 바로 다음날 그가 눈 속에  파묻히는 사건으로 연결이 되었다는 점.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쿄쿄에게 격렬하게 항의를 해보지만 의외로 그녀는 담담하다. 이에 본격적으로 분기탱천한 나는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되고 놀랍게도 그녀가 1년전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놀라는 마음을 진정하고 사건을 캐던 나는 그녀가 살해 되었으며, 살해범 역시 살해되었고, 그녀의 죽음의 진실을 쫓던 쿄쿄의 아버지 역시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걸 알게 된다. 게다가 그가 사건을 파헤치면 파헤치려 할수록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의 악랄함도 도를 넘어선다. 이쯤 되면 딱히 탐정이 아니라도 이 사건이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터, 다만 이제부터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해결해내야만 하는 일인가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이에 다른건 몰라도 탐정으로써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나는 사건의 배후를 본격적으로 파보기로 하는데...


일명 뽀글이 파마라 불리는 요요이즈미 요와 그닥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미인으로 소문이 난 코유키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탐정물로, 그닥 기대를 하지 않고 본다면 의외로 재밌게 보실수 있을지도.별로 탐정다운 듬직한 자세는 하나도 구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임기응변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허허실실 탐정을 지켜 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탐정의 조수로 나오는 타카타가 마츠다 류헤이 라는걸 보면서도 몰랐으니, 역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신들을 깜쪽같이 속이는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가 보다. 연작으로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원작이 12부작으로 이미 나와 있다고 하니 기대해볼만한 일이지 싶다. 적어도 소재 면에서는 달릴 일이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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