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 로저는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른 어디론가 출장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 바쁜 사내다. 그런 그를 살뜰하게 보살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사람은 60년동안 집 안의 가정부로 일해온 아타오, 미국으로 유학갔던 10년을 제외한 로저의 모든 인생에 언제나 함께 있던 아타오의 존재는 로저로써는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돌아온 로저는 쓰려져 있는 아타오를 발견하게 된다. 아타오가 중풍에 걸린 것이다. 그제서야 아타오가 70이 넘은지 이미 오래며 평생 일해온 고장 난 몸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재활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는 로저에게 아타오는 단호하게 요양병원으로 갈 것을 고집한다. 이것이 나을 병도 아니고, 늘 출장을 다니느라 바쁜 로저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태어날때부터 자라는 것을 지켜봐왔다 해도 로저가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는 점은 달라질 수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아타오로써는 착한 로저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타오의 단호함에 집에서 가깝고 좋은 요양원을 찾던 로저는 우연히 친구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발이 닿게 된다. 병원에 나선 부터 요양원 신세가 된 아타오는 처음엔 깔끔한 성격때문에 애를 먹지만서도, 조금씩 주변 사람들에게 낯을 익히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된다. 이상한 사람만 있는 것 같던 요양원도 알고 보니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익숙해진 아타오는 이제 로저가 오는 날을 기다린다. 여전히 출장을 다니느라 바쁜 와중에도 집에 오게 되면 늘 들리는 로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타오가 양모라고 소개해서 아타오를 기쁘게 한다. 가족이 없다는 것이, 그리고 평생을 가정부로 살아왔다는 것이 남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이야기는 못되니 말이다. 다른 원생들의 친자식들보다 더 자주 찾아와 누구보다 살갑게 아타로를 대하는 로저, 그간 바쁘단 핑계로 있어 주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대화는 별로 하지 못했던 둘은 이제서야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게 된다. 좋은 가정부를 구해주려 했지만 아타오의 까다로운 기준에 알맞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로저를 결국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싱글인 로저가 걱정인 아타오는 로저에게 왜 좋은 여자랑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렇게 묻는 아타오는 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으셨느냐는 물음에 슬쩍 대답을 회피하는 아타오, 그녀 역시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타오는 자신이 모아온 것들 중에서 버릴 것을 추리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채 추억만 되새기게 된다. 아타오의 추억속에 자신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로저는 주체못하는 감동에 젖는다.


한편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로저의 엄마는 아타오가 쓰러졌다는 말에 문병을 온다. 아타오에게 자상하게 대하던 로저의 엄마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해준 일들을 잊을 수 없어 한다. 남는 집을 한 채 수리해서 아타오가 쓰도록 하자 했던 계획은 아타오가 다시 쓰려지면서 흐지부지 되는데... 점점 약해져만 가는 아타오를 바라보면서 로저는 자신이 언젠가는 냉정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는 다만 그 날이 빨리 오지 않기만을 바라지만서도, 아타오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만 가는데...


평생을 욕심없이 살았던 여인네에 대한 넘치지 않는 추도사다. 가정부이지만 실은 생모대신 엄마 노릇을 했던 한 여인의 소박한 일생과 그녀의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할 줄 아는 착한 청년의 애가이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기 위해선 그누군가 엄마처럼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존재가 그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것이 엄마나 아빠겠지만, 이 영화속 로저에겐 그것이 가정부 아타오였다. 자신이 낳긴 했지만 실제로 기르지 않았던 로저의 엄마는 로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진 함께 있는 순간을 견뎌내지도 못한다. 그건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만큼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타오에겐 그런 것이 없다. 그에겐 로저가 하는 모든 일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그런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던 로저는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던지... 아마도 그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키우고 지켜준 것은 8할이 아타오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보답하는 그가 누구보다 듬직해보였고, 또 늘 선량한 아타오라는 인물에 공감해서 보게 된 영화가 되겠다. 드라마틱한 전개라곤 없는 잔잔한 영화였지만 감동만큼은 진했지 싶다. 제목 그대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연출하고 연기한 점이 돋보이지 않았는가 한다. 느린 호흡인데도 지루하지 않다는 점은 아마도 연기자들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도 그렇고, 차분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연출 덕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면서 과연 사랑이란 혈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 살면 잘 죽는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서도, 과연 그럴까 싶을때가 있다. 나의 죽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서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아타오가 쓸쓸하지 않게 죽음을 받게 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그것이 최고의 보답이 아니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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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나무꾼 카츠는 삼년 전 아내를 여윈 뒤 속 썩이는 아들 녀석 하나와 살고 있는 예순살의 사내다. 나무만 보고 살았던 그의 단조로운 일상에 예기치 못했던 소동이 벌어진다. 영화를 찍는 팀 하나가 마을로 굴러들어 온 것인데,  촬영지를 찾는다면 산 속을 헤메는 그들이 안스러워 도와주던 카츠는 그들의 요구가 한도 끝도 없자 짜증이 난다. 그 중 압권은 엑스트라가 모자라니 단역으로 출연해 달라는 것으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해보자 싶어 좀비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 카츠는 동료들이 의외로 신기하게 받아들이자 으쓱해진다. 자신이 출연한 장면을 보곤 더 기분이 좋아진 카츠는 촬영장에서 도통 쓸모없는 녀석처럼 겉돌던 코이치를 목욕탕에서 만난다. 난생처음 큰 화면으로 본 자신의 연기에 신이난 카츠와는 달리 침울하기 짝이 없는 코이치, 촬영이 재밌다는 카츠의 말에 코이치는 도통 믿을 수 없어 한다. 잔뜩 풀이 죽어 자신을 역으로 데려 달라고 한 코이치는 그 보답으로 카츠에게 자신의 대본 노트를 건네준다. 그 밤에 도쿄로 도망칠 생각이었던 코이치는 탈출 직전 조감독들에게 붙들려 잡혀 오고, 그제서야 코이치가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카츠는 그 재밌는 촬영을 코이치가 마뜩해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어느새 촬영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의 직업은 나몰라라 하고 촬영장에서 자리를 잡게 된 카츠, 그는 엑스트라 섭외에서 장소 물색, 그리고 목소리가 작은데다 카리스마마저 없는 감독을 대신해 아예 촬영장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다. 그의 열성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영화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덕분에 코이치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데... 

 

 

감독 의자에 앉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맨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는 감독 코이치와 감독 의자인줄도 모르고 덜썩 앉아버린 카츠. 카츠는 코이치가 스물 다섯이라는 말에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이 스물 다섯 먹은 녀석이라고 알려준다. 그 옆에 있는건 예순살, 딱 내 나이라고 하면서...둘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하는 코이치에게 카츠는 말한다. 맞다고. " 나무가 제몫을 하려면 100년은 지나야 하거든" 이라면서.  코이치 뒤에 서 있는 나무가 150년임을 알려주면서, 카츠는 젊음이 마냥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도, 연륜이 대단한 것이라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된 것이 기쁜게 아니라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공황 상태인 코이치에게 카츠는 그저 말해준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스물 다섯이나 예순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고...>

 

 

<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나오던 노배우 역의 야먀자키 츠토무상,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치질로 고생중이시다. 현재 엉덩이의 압박을 참으시면서 촬영을 하시는 중으로, 배우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그 근사한 이미지가 실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너무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오히려 심하게 웃기던 이 노배우의 등장은 배우에 대한 환상을 깨알같은 웃음으로 부셔주고 있었다. 예술은 무슨 얼어죽을 예술, 노 배우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단지 돈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잠시 안스럽단 생각이 들게 하던데, 별로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비중있는 배우가 출연해서 의외다 싶었는데 역시나 반전이 있었다. 치질 때문에 몸서리를 치면서 영화를 찍으면서도, 영화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은 유지하고 계시던 것,  보통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으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내야 정상인 것 같은데 말이다. 몸은 비록 늙고 고장이 나서 진상을 부리지만서도, 그것이 정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모습이 어찌나 신선하고 의연해 보이던지... 종종 늙었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짜증을 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을 본다. 늙었으니 대접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노인을 공경하게 되는건 그들이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을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런지... 하여간 인간적으로 멋지게 늙는다는 것이 실은 별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던데, 감동이었다.>

 

 

< 백수로 정신 못차리고 사는 자신의 아들과는 달리 조금씩 사회인으로써 발을 내딛는 코이치가 무엇보다 부러운 카츠 아저씨. 처음 단역 엑스트라에서 시작된 일은 점점 다방면으로 커지기 시작, 이젠 촬영장에 그가 없으면 이상할 지경이 되버린다. 아내의 기일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촬영에 몰두하던 카츠는 같은 나이 또래의 코이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히려 아들에 대한 이해가 커져간다. 젊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냐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아들이 못내 못마땅했던 카츠는 코이치를 보면서 젊은 시절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된다. 재밌지 않나. 타인의 고통과 아픔은 그렇게 잘 보이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아들의 고민은 몰랐다는게 말이다. 그런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난생처음 아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백수로 사느니 아버지 일이나 도우라는 동네 아저씨들의 말에 그건 아들 마음이지 라면서 아들을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는 카츠, 아들은 그만 놀라고 만다.> 

 

잔잔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말을 하고 있던 일본 영화였다. 별 기대없이 봤는데, 2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게 휙 지나가더라. 잔잔하다 못해 종종 지루해지는 일본 영화를 생각하면 기적같은 연출이지 싶다. 별 이야기가 없는데도 오히려 그것이 이야기가 되던, 극적인 드라마 없이도 얼마나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하던 영화였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솔솔 자아내던 매력적인 극본도 좋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이었다. 원래는 오구리 슌이 출연한다고 해서 보게 된 영화였는데, 영화 시작하자마자 카츠 역의 아쿠쇼 코지상이 분위기를 압도하더니 끝까지 그러시더라.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연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기하시는 듯한데도 자유자재로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것을 보면서 역시 명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오구리 슌마저도 그에게 밀리는 듯했는데, 그렇다고 슌이 연기를 못한 것이 절대 아니었으니 코지상이 얼마나 연기를 잘 하시는지 짐작이 되실 것이다. 미모도 당해내지 못하는 재능을 목격하는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지...하여간  코지상, 생긴건 늑대 비스드름 하신데, 연기 하나 만큼은 여우처럼 잘 하신다. 그 감칠맛 나는 연기에 영화가 한층 더 재밌었다. 그 외에도 많은 연기자들이 자신이 맡은 역을 자연스럽게 해낸 것도 좋았다. 영화의 분위기랄까, 톤이라고 할까. 그런걸 흐트리는 연기자가 없다는 것은 보는 입장에선 굉장히 안심이 되는 일이니 말이다.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튀지 않은 연기로 영화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출을 잘 하지 않았는가 한다. 종종 웃기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다, 인공적이지 않고, 교훈을 강요하지 않으며, 등장인물들 각자가 천연덕스러울만치 자연스럽다는 점도 좋았다. 주변에서 일어날만한 이야기를 흔연스럽게 전달하던 것이나, 각자의 고민을 무겁지 않게,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지 않는 자세로 보여주던 것도 마음에 든다. 각자가 자신만 생각 하는게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인간은 원래 잘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타인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겠는가 회의적이었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설득력 있었지 싶다. 영화 뒷판에서 벌어지는 사정도 흥미진진했고 말이다. 잘 만든 영화다.  이 정도 퀼리티라면 문학작품에 비견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보고 나면 적어도 기분 만큼은 흐믓하실 듯...어떤 장면을 좋아하실지는 각자 다르겠지만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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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의 전설적인 스카우터 거스 로벨은 타자가 공을 치는 소리를 듣고도 자질을 알아보는, 직업적인 면에서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과 봐도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안목이 진가를 발휘하던 것도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 늙은 데다 시력마저 나빠지고, 거기에 성격마저 고집불통인 그를 구단에서는 은퇴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퇴물취급을 받을 수밖엔 없게 된 것은 인터넷의 발달, 영화 <머니볼>에서 봤다시피, 오클랜드 ' 애스렉티스' 구단 성공에 자극을 받은 많은 구단들은 이제 컴퓨터를 이용해 선수들을 데려오고 있었다. 즉, 육체노동에 가까운 --물론 다분히 예술적인 면이 가미된--야구계에서도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몰아내고 있었던 것, 해서 대표적인 아날로그 스카우터인 거스가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거스 본인이 현재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해서 명예롭게 은퇴하라는 친구 피트의 조언을 뿌리치고 그는 자신의 마지막 스카우팅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런 그가 못내 못미덥던 피트는 거스의 딸 미키에게 아버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최연소 파트너가 되기 위해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려 사는 변호사 미키는 화가 난다. 6살때 엄마를 여윈뒤 아버지 손에 자란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인지 아버지의 사정을 봐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여행에 동참하기로 하는데...



아버지를 따라 나선 여행에서 미키는 한때는 잘 나가는 투수였지만 어깨가 나간 이후 스카우터로 전향한 죠니를 만나게 된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때문에 금세 친해진 두 사람은 하지만 관계를 맺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미키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미키는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드디어 오래동안 해묵었던 갈등을 터뜨리기에 이른다. 왜 자신을 버렸냐는 질문에 거스는 그저 회피만 할뿐 대꾸를 하지 못한다. 과연 이대로 부녀의 갈등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 해 최대 대어라고 일컫는 고교 선수의 스카웃을 둘러싼 거스의 이견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간당간당한 거스의 위치는 발판을 잃을 듯 보인다. 그럼에도 거스는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데...

영화 <머니 볼>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던,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것을 찬양하던 영화라고 보심 되겠다. 수치는 선수를 알려 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눈과 귀로 파악하는 수밖엔 없다. 손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수고를 들여서 제대로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것을 설파하고 있던 영화였으니 말이다. 재밌는 것은 머니볼을 볼때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이 영화를 보니 또 이 영화에서 하는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머니 볼>이 ' 구세대를 가라, 우리 신세대는 보다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으로 야구를 하겠다'는 선언이라면, 이 영화는 '야구는 손과 발로 뛰는 것이지 수치로 모든 것을 내다볼 수 있는 게임이 아니'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헷갈리긴 한다. 아마 둘 다 옳을 것이다. <머니 볼>에서는 관습적이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야구계에 경종을 울려대는 것이었다면 , 이 영화에선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컴푸터만 두둘겨서 얄팍하게 승리를 이뤄내려 하는 신 스카우터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는게 다르다면 다를 뿐. 둘 다 옳은 지적이고, 둘 다 그럴듯하다. 다만, 디지털로의 대세는 이미 거스릴 수는 없는 것이고, 재능을 알아보는 아날로그적인 안목은 컴퓨터가 분석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둘의 관계를 배타적인것으로만 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지 싶다. 다시 말해 둘 다 옳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잔꾀는 소용이 없다. 모든 성과는 정석대로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소박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한다. 우린 모두 손쉬운 대박을 꿈꾸고, 머리를 잘 쓰는 것에만 흥미를 갖는데, 그렇지 않다고. 진정한 승리란 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들려준다는 점이 좋았다. 뭐랄까. 진실해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재밌었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다. 식상하기 그지 없는 부녀의 갈등에, 노쇠한 늙은 아버지를 비추는 연민어린 시선, 신구 갈등의 뻔하디 뻔한 전개, 미키와 죠니의 난데없는, 그리고 새로울게 없는 로맨스는 어쩌면 영화를 이렇게 상투적으로 찍으셨을까 의아하게 만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너무 늙은데다, 지끔껏 맡았던 배역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은 성격 묘사에 흥미를 잃기 충분했고, 섹시한 매력 정도는 풍길줄 알았던 죠니 역의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지극히 단순한 배역에 내가 다 안스러울 지경이었다. 미스 캐스팅이거나, 적어도 배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예가 되지 않을까 한다. 거기에 미키역의 에이미 아담스... 그래도 내가 이 배우에게만큼은 기대를 걸었는데,  늙어가는 중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 해서 피기도 전에 지는 꽃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안타까웠다. 그래, 한 물 갔다고 여겨지는 아날로그를 찬양하는 것은 좋다 이거다. 하지만 그럴려면, 적어도 그 아날로그가 신선하고 재밌고 참신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할 거라는 점을 잊고 있었던게 아닐까? 그러니까, 무조건 과거가 좋다는 말로는 설득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멋진 배우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을 생각이었다면 보다 탄탄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작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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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마이클의 아버지 찰스, 그는 지성은 높을지 모르나 좋은 가장이자 남편은 못되었다. 아들에겐 교양과 정직을 외치면서도, 그는 정작 아내와 자식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는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힘든 성장기를 보낸 마이클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여정이 불편하다. 인기있는 소설가가 되었지만 아버지에겐 여전히 반푼이일 뿐인 그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새록새록 떠오르는 비참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괴롭다. 하지만 그 날은 어머니의 대학 졸업식날, 아버지와 대립할때마다 그를 감싸주던 엄마 덕에 여지껏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로써는 못마땅해도 돌아와야만 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기억속에 생생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아 <반딧불이 정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려 한다. 그 속엔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유년기가 그대로 그려지고 있었고, 그가 아무리 픽션이라고 우긴다 해도 그것이 그의 자서전이라는걸 눈치챌 수 있게 쓰여져 있었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니 그들의 말을 일단 들어보려 하는 마이클, 물론 찰스가 쓰고 다니는 가면이 벗겨지는 충격도 만만찮을 것이겠지만, 유년 시절의 상처를 헤집어야 했던 마이클로써도 그것이 그리 속편한 것은 아니다. 아내와 별거중이라 가뜪이나 마음이 안좋은 그는 공항에 내려 집으로 가는 도중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나마 아버지와의 사이를 중재해주던 존재가 사라지자, 마이클과 찰스의 갈등은 폭발 일보 직전이다. 과연 이 두 부자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화해를 할 수 있을까? 아들과 아버지는 오늘도 여전히 상대가 못마땅하기만 한데...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과 마주할 수밖엔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다감하게 만들어 주던 엄마의 존재,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이던 엄마와 살면서도 늘 불만투성이던 아버지,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들의 존재가 못마땅하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기는 커녕 늘 미심쩍게 생각하는 찰스는 다 큰 아들을 반푼이 취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아내의 장례식을 앞두고서도 말이다. 다사로운 엄마의 부재로 인한 부자의 갈등이 심하게 부각되면서 그 갈등이 도대체 어떻게 풀려나갈 수 있을까를 궁금하게 만들던 영화였다. 영화는 왜 마이클이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며, 아버지란 사내는 왜 그다지도 가정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내였는가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해한다. 더이상 그가 괜찮은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 고통받던 유년기가 지나고, 성장한 아들은 이제 그 고매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를 고발하려 한다. 하지만 아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이젠 늙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그를 지켜주던 아내 마저 떠나 버리고 없자 그는 빈강정처럼 텅 비어 버린다. 아버지는 이제서야 자신이 못난 아버지 였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듯 보이는데...

시종 잔잔하게 흘러가던 영화였다. 심각한 갈등마저도, 파국에 이르기 전까지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다지 극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들의 평생의 업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듯 한데, 출중한 배우진들에 비해 극본이 아무래도 조금 달리지 않는가 한다. 종종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나오고, 이야기의 맥이 난데없이 끊어지는데다,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나중과 연결이 되지 않아서 어리둥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 뜬금없는 들어간 몇몇 장면들은 왜 그런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오랜만에 만난 이십대 이모가 십대 조카에게 속옷 바람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나, 아들 내외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굳이 섹스를 하는 씬같은거 말이다. 그런 장면들이 꼭 필요했을까? 진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서도. 나는 조카건 동생이건 간에 옷 정도는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왠만한 보통 사람들에겐 그 정도의 상식은 있지 않나? 거기에 엄마 장례식에서 아버지가 추도사는 하는데 섹스라니... 적어도 슬픔에 정신이 나가서 섹스 정도는 생각이 안 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엄마를 몹시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아들의 말에 동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어이없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라는 문제에 대해 반면교사로 이런 것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 라는걸 보여주던 영화. 하지만 솔직히 좀 무언가 부족하지 않았는가 한다.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아버지와 화해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난데없었고 말이다. 영화를 끝내야 하기에 억지로 화해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보다 설득력 있는, 짜임새 있는 극본이었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적어도 배우들의 연기력만큼은 안정되어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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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가고 있는 시인이 있다. 아내가 죽은 뒤 그의 인생은 빛을 잃었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아내의 원망을 사면서까지  집착했던 책과 글자에의 열정이 자신의 인생에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죽은 천재 시인의 미완성 시를 완성시킨다면서  "흩어진 시어"를 모으던 그는 그것으로써 자신이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과연 그런 거짓과 거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간앞에선 그저 힘을 잃게 마련 아니겠는가.


환상처럼, 마치 꿈을 꾸듯,  죽은 아내가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라고 말했던 과거의 그 날로 걸어 들어가게 된 그는 비로서 그날이 자신에게도 최고의 날이었음을 알게 된다. 앎에의 동경, 책에의 집착, 정신 세계에 몰두하느라 외면했던 아내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는 인생에서 남는 것은 사랑뿐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곤 평생토록 그가 그렇게 간절히 찾아 헤매던 시어들이 실은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 사랑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그를 보는 아내는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 라고... 그렇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바보 미련 곰탱이 같은 고집스런 남편이 언젠가는 진실을 직시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 날은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을 만나게 된 아내는  " 내일이 뭐지?" 라고 묻는 남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 내일은 영원과 하루 " 라고.


우리가 지나온 과거는 영원이며 내일은 그에 더해진 하루일뿐이다. 평생 찾고 갈구하던 시어를 마침내 얻게 된 시인은 이제 자신이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그렇게도 원하던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철학적이고, 다분히 몽환적이며, 그리스다운--어쩌면 감독 자신만의 정서일지도 모르지만서도,---정서가 듬쁙 담겨 있던 영화였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저런 세상도 있겠구나 싶은, 상상속이지만 너무도 실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영상들이었다. 그 영상속을 묵묵히 걸어다니는 배우들의 아우라는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그런 분위기며, 느낌들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전혀 이물감없이 연기해 내는 걸 보곤 넋을 잃고 바라봤다.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기다린 시간들은 진실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시인의 말에 동감한다. 우리가 거만을 떨면서 아는 척 하며 내뱉는 그 지식이란 것들은 사실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냐.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진실에 비하면 말이다. 그것들이 아무리 비루한 것이라 해도, 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보다 값진 것이 아니던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겪고, 그리고 인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평생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이 실은 아내가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 고독한 노 시인을 어쩌면 좋을까 싶었다. 보다 나은 영광이, 영감과 깨달음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채근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그런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건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는가. 하긴 자신의 인생의 빛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것을 , 자신은 그저 그 추억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도 깨달음은 깨달음이겠으나... 아마도 이 시인에겐 그것이 위안은 될 지언정,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어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손 안에 있을땐 전혀 알아채지 못하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뒤에야 비로서 그 가치를 알게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영화는 한없이 느리게 흐르고, 직설적이지 못한 감독의 완곡 어법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갑갑함을 느낄만큼 미묘하다. 거기에 그리스란 나라의 문학적 특성이려나? 형이 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렵게 풀어 나가려 한 흔적이 뚜렷하다. 한마디로 전혀 친절하지 못한 영화다.

늙은 시인을 둘러싼 짙은 고독과 외로움, 그에 대비해 그의 젊은 시절, 아름다운 아내가 등장할 때의 따스함을 보여주면서 인생의 가장 좋은 때는 사랑할 때라고, 그것을 놓치지 말라고 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서도, 글쎄... 과연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인간들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고보면 다들 그 시인같은 실수를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게 아니겠는가. 사랑을 외치면서도 실은 자신만 생각하면서 보내는 인생 말이다.

그래, 우린 언제나 너무도 쉽게 사랑을 놓치고, 사랑하며 살라는 말을 흘려 듣곤 하지. 마치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실현될 수 있다는 듯이 줄창 내일만을 기약한다. 그리곤 그런 날은 오지않는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닫곤 말지. 어리석은가? 맞다. 어리석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다. 


영화속의 시인은 말한다. "난 그때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 라고. 그건 아마 그만의 회한은 아닐 것이다. 죽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의 뒤늦은 후회이 아니닐런지...안타깝지만, 우린 그렇게  뒤늦게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만년 늦깍이 사랑꾼들에 불과하니 말이다.


<추신> 집에서 누워서 볼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를 하며 본 영화다. 영화관에서 봤다면 평이 이보단 험악해졌을 것이 분명한 영화여서...다시 말해 조금 지루하다. 아니 굉장히 지루하던가? 그래도 영상미가 아름다워서 보긴 했지만서도, 요즘의 속도감에 비하면 아주 아주 느린다는걸 감안하시고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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