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44년, 아직은 아니지만 30년 후의 미래엔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은 불법이라 범죄 조직들만 몰래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들은 주로 미래의 사회에선 가능하지 않은 청부살인을 과거로 보내 시행하고 있었다. 즉, 타겟을 과거로 보내 전문 킬러 조직인 " 루퍼 "들로 하여금 죽이게 한다는 것, 루퍼 입장에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고, 미래에선 타겟을 죽인 자가 없으니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엄마에게 버림 받은 후 거리를 떠돌다 루퍼 조직에 들어온 조는 냉철한 킬러이다. 낮에는 미래에서 온 자를 제거하고 , 밤에는 마약에 절어 살던 그는 친구 세스의 방문에 깜짝 놀란다. 그의 말을 들어본 즉슨, 미래에서 온 자를 죽이려 가보니 바로 30년후 미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루퍼들의 계약해지 통보 방식으로, 미래의 자신을 없애는 특이한 조건으로 그후 30년과 막대한 돈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세스가 차마 미래의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총을 거두었다는 것, 미래에서 온 세스는 새로운 보스인 레인 메이커라는 자가 악질이며, 모든 루퍼를 죽이고 있다는 말은 남긴 채 도망간다. 조직에게 쫓겨 벌벌 떨며 찾아온 세스를 조는 은궤를 지키기 위해 팔아넘기고, 결국 세스는 처형되고 만다. 세스의 죽음으로 미래의 세스 역시 사라지고, 그렇게 그 일은 일단락 지어지는 듯했다. 다만...


새로운 일을 맡아 현장에 나간 조는 미래에서 온 자가 30년후의 자신임을 알아본다. 어버버하는 사이 미래의 조는 도망쳐 버리고, 어렵사리 둘은 조가 아는 식당에서 조우를 하게 된다. 미래에서 온 조가 하는 말이, 원래 조는 은퇴식을 무사히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 갔었다고 한다. 돈이 떨어지자 다시 킬러의 세계로 돌아간 조는 아름다운 중국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에 힘입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문제는 암살당한 지 딱 30년이 되는 날 그를 잡아가기 위해 루퍼 조직에서 왔고, 그 와중에 조의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눈 앞에서 죽는 광경을 목격한 조는 이대로 순순히 죽어주지 않겠노라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어긋나 버리게 된 과거, 미래에서 온 조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새로운 과거를 만들 생각이다. 어린 레인 메이커를 잡아 제거해 미래의 골치덩어리를 해결할 생각인 그, 문제는 30년후 레인 메이커가 될 아이가 누군지 등록번호밖엔 모른 다는 점. 검색으로 그 번호를 가진 아이가 3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미래의 조는 아이들을 살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이에 현재의 조는 그를 막기 위해 그 아이들 중 한 명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조는 젊은 엄마 사라와 함께 살고 있는 귀여운 소년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모자인줄 알았던 조는 아들 시드로부터 사라는 진짜 엄마가 아니며 진짜 엄마는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수상쩍은 기운이 흘러 넘치는 이 모자, 과연 이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미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30년 후의 조와 현재의 조, 현재의 조는 미래에서 온 자신을 죽이려 하나, 문제는 미래의 조가 그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 해서 그의 제거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30년이나 잘 살았으니 죽어달라고 애원하는 조에게 , 미래의 조는 그럴 수 없다고 도리질을 한다. 아내를 살려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엄마 사라와 아들 시드, 평범해 보이는 이 모자가 실은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로 나온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멍할 수 밖엔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와,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감탄하게 해주던 장면으로, 아마도 마지막 장면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수작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영화는 일단 차분차분 미래의 세계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조가 루퍼로써의 삶을 살 수밖엔 없었던 이유와 충분히 계약조건을 이해할만큼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포함해서. 예기치 않게 일이 어긋나게 된 것은 그가 사랑에 빠졌고 , 그 사랑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데 있다. 해서 그는 살해된 아내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다. 미래의 악당으로 자랄 아이를 미리 처단할 생각으로 말이다. 미래의 조가 하는 말에 어처구니 없어 하던 현재의 조는 시드를 만나면서 비로서 그의 말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된다. 과연 시드의 비밀은 무엇일까?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한 모자의 분위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참기 힘든 궁금증을 자아내고, 결국 그 전말을 알게 되자 소름이 끼칠 수밖엔 없었다. 후반부를 보여주기 전반부를 달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후반부의 스토리가 탁월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이야기가 흘러 가길래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의아했었는데, 알고보니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던 것이더라. 영화를 보기 전엔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죽인다는 설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는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그보단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미래는 결국 현재의 선택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걸 보여주고 있었다. 근래 본 SF 영화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미에, 30년 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묘한 설득력, 그리고 감동까지, 잘 만든 작품이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좋다. 아귀가 좀 안 맞는다고 해도 용서가 될만큼 스토리 자체가 압권이다. 조셉 고든 레빗이나 브르스 윌리스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꼬마 시드를 연기한 피어스 가뇽이었다. 이 꼬마, 정말 연기 잘한다. 선과 악, 천진과 천재성을 동시에 갖춘 모호한 캐릭터를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던데, 도대체 이렇게 연기하는건 어디서 배웠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탁월하더라. 특히 마지막 홀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앙심을 품는 듯한 그 표정은 왜 조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엔 없었을지 절로 수긍하게 하던 장면이었다. 아마도 이 말은 영화를 보시면 이해하시게 되실 듯...선과 악 어디로도 튈 수 있는 싹을 길러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라는걸 설득력있게 보여줘서 고마웠다. 하여간 그 꼬마 덕분에 영화가 한층 더 재밌었다. 아마도 그 꼬마는 나이 탓에 이 영화를 볼 수 없겠지만서도, 미래가 기대되는 재능 넘치는 어린 배우를 한 명 발견한 것 같아서 흐믓하기 짝이 없었다. 그 꼬마가 얼마나 귀여운가는 영화관에서 확인해 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며 거칠 것 없이 살던 여행가 에바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정착을 하게 된다. 임신 자체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그녀는 아들 케빈을 낳았음에도 여전히 기쁘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낳지 않는 건데 라는 표정으로 넋이 나간 에바는 아이를 안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다. 후회가 되지만 어쩌랴. 이미 낳아버린 것을, 실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엄마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려 한 에바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한다.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것은 녀석이 아빠에게만 안기면 조용해 진다는 것, 해서 아무리 에바가 힘들다고 호소를 해도 남편은 믿질 않는다. 아내가 과장을 한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한번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고 도시 외곽의 멋진 집으로 이사를 한다. 한번 뿐인 아들의 어린 시절을 잘 보내게 해주고 싶다면서...성같이 널찍한 집에 케빈과 둘만 남겨진 에바는 본격적인 시련을 겪게 된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어긋나기만 하는 모자 관계는 에바가 아이의 팔을 부러뜨리는 사건을 계기로 한층 더 힘들게 꼬여간다. 미묘하게 자신을 고문하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에바는 병원에도 가보지만 의사의 대답은 케빈이 지극히 정상아라는 것. 엄마이기에 희망을 버리지 못하던 에바는 둘째로 딸 실리아가 생긴 뒤로 엄마 노릇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다. 실리아는 조금도 어렵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스러움도 케빈에겐 통하지 않는다. 오빠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여전히 오빠를 좋아하는 실리아를 바라보는 에바의 심정은 조마조마하다. 케빈이 실리아의 애완동물을 죽인 뒤 사고를 위장해 실리아의 눈까지 멀게 만들자 에바는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케빈의 소행이라는 에바의 말에 남편은 오히려 아내의 정신병을 의심한다. 결국 에바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이혼이 성사되기 전, 케빈의 16번째 생일을 앞두고 결국 그녀를 평생토록 얼 빠지게 할 사건이 벌어지고 마는데....




< 사탄의 아들같은 케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에바, 아들과 함께 있는 에바의 표정은 늘 저렇게 심각하다.>




<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여야 하는 오빠와 여동생 사이. 누가 이런 장면을 보면서 이 오빠가 여동생의 눈을 염산으로 녹이고, 조만간 화살로 쏘아 죽일 거라 짐작하겠는가. 죽임을 당하는 본인조차 믿기 어려웠을 듯....>



<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놀라서 달려간 에바는 소방관이 문을 따는 장면을 보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이 영화 내내 에바역의 틸다 스윈톤은 섬뜩하거나 얼이 빠지거나 넋이 나가는 등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여주는데, 표정만으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추측하게 하는 것이 압권이다. 그녀의 표정 자체가 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름끼치는 연기였는데, 그 자체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상황이 하도 심각하다 보니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던 영화였다. <오멘>의 현대적인 버전이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과거엔 그런 아이의 존재를 악마의 소행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지금엔 심리학 용어로 <싸이코패스>라고 카테고리화 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적어도 더이상은 미지의 영역이나 설명 불가한 영역은 아니라는 점에서 발전한 거라고 봐도 좋겠다. 물론, 싸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이 완전하게 충족되게 나와 있는 것은 아니라, 그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진 못하지만서도,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와있는 싸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이 영화에 대입해 보면...


1. 우선 싸이코 패스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는 없다고 한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보통 사람들은 절대 알아챌 수 없다고. 이 영화에서 엄마인 에바 외엔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는 것도 그때문이다. 에바가 자신의 아들이 이상하다는걸 아는 것도 그녀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케빈이 엄마가 그걸 알아 차리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선 안 나오던데, 원작인 책에서는 왜 자신은 죽이지 않았냐는 에바의 질문에 케빈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관객이 하나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냐고...너는 내가 직접 고른 관객이라고 말이다.

2. 케빈이 그렇게 된 것이 에바의 모성애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던데, 내가 보기엔 그렇진 않은 듯하다. 에바의 모성애가 문제였다면, 둘째인 실리아와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에바는 딸과 정말 잘 지낸다. 보통 모녀들처럼...에바가 끊임없이 아들에게 접근함에도 그녀가 퉁겨져 나가는 것은, 그녀의 모성애 문제가 아니라 케빈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이 괴물을 자신이 낳았다는 자책감 때문이지, 그런 아들로 길러냈다는 것에 대한 점은 아닐 것이라 본다.

3. 에바가 왜 아들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지, 그리고 케빈 때문에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박해를 꼬박꼬박 당해주는지 처음엔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녀는 피하지 않는 것일까? 알고보면 그녀 역시 피해자 아닌가. 사람들은 그녀가 잘못 키워서 아들이 그모양 그꼴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는 잘 키우려 노력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일까?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는 아들때문에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건 자신도 케빈때문에 자식을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나 싶다. 어린 딸이 아들에게 고문을 당한다는걸 알면서도 에바는 막지 못했다. 설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이함이 딸의 죽음을 초래했고, 그래서 그녀는 아는 것이 아니었을까. 죽은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불가하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내가 케빈의 엄마가 아니라면 나 역시도 케빈의 엄마에게 그렇게 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게 아니었을까. 해서 그녀는 실리아의 엄마로써, 케빈의 엄마에게 복수를 하고 있던게 아니었을 런지...직장을 구한 안도감 때문에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거리를 걷다가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한대 얻어 맞는다. 이를 목격한 다른 행인이 그녀에게 고소를 할 거냐고 묻자 에바는 대꾸한다. 아니라고, 이건 내 잘못이라고...참으로 마음 찢어지는 자백이다. 아무리 그게 이성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딸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게 아들일 리는 절대 없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안타까운 현실 아닌가. 진짜로 미안해야 할 사람이 전혀 미안해하지 않기에 그걸 다른 사람이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건 말이다. 아마도 그게 싸이코패스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의 비극이겠지.

4. 왜 에바는 케빈을 기다리는 것일까? 혹시나 그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래 보인다. 그래서 조금 갑갑도 했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고쳐질 수 없는 것을 고쳐보려 다시 한번 애를 쓴다는 생각때문에...사실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었다. 본인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럼에도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은 기 죽은 아들을 보면서 언젠가, 아들을 정상인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붙잡는 그녀를 보자니 짠했다. 과연 엄마라는 짐은 그렇게 무거워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녀에게 그 짐을 내려놔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 없으려나? 엄마라는 이유로 얼마나 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내야 하는 것일까. 영원히?


수작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고, 화면을 꽉 채우는 색들로 비극성을 암시하는 미쟝센들도 압권이었다. 그다지 잔인하다 할만한 직접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암시만으로 토할 것 같은 상황들을 잘 포착해 내주고 있었다. 특히나 주인공 에바의 불안한 심리 상태와 도래한 비극을 상징하는 빨간색은 반복적으로 나타남에도 나올때마다 충격적이었다. 주인공의 하얀 피부에 매치되어서 그 비극성이 한층 더 두드려졌던 듯. 다만 보고 나면 찝찝하거나,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그다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점은 각오 하셔야 할 것이다. 미국 콜럼바인 사태의 전말을 보는 듯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싸이코 패스에 대한 보고서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싶다. 그래, 당신들은 말할 것이다. 엄마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어라고...아니, 막아야 했어라고. 아니, 안타깝게도 그 엄마는 막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걸 명백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치명적인 헛점이 아닐까 한다. 무언가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한 점 말이다. 실은 그렇지 못한데, 왜 우리는 엄마들에게 그렇게 많은 짐을 지우려고만 하는지...엄마는, 그리고 가족은 절대 전능이 아닌데 말이다. 그점을 놓쳐버린 연출이 살짝 아쉬웠던 영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물이십니까 ?""아뇨, 제가 볼겁니다." 그리곤 늙고 행색이 초라해져 회색 인간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서점 점원을 향해 --정확히는 카메라를 향해--자랑스레 얼굴을 든다. 감동을 억누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엔 착한 눈망울들이 영롱하게 빛이 난다. 그렇다. 누군가는 그가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었다. 그에겐 그것으로 된 것이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정보 요원이 반체제 작가 부부의 삶을 도청하다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속에 "착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란 책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적격이지 싶다. 왜냐면 착한 사람들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비록 시대를 잘못 만나 착한 삶을 살 수 없었지만서도 말이다.


이 세상엔 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착한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많고. 하긴 나 역시도 헷갈릴 때가 많으니 남 말을 해서 뭐하랴만은. 그럴 때 내가 참고하게 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삶"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참고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삶을 주시하지 않는다면 난 결코 나아지는 일 없이 살다 죽을 것이다. 그것만큼 황량한 삶이 또 있을까?


이 영화는 굳건한 사랑과 양심과 내면의 소리를 쫓아가려 용기를 내는 작가부부를 염탐하다 동화되어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황량한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개략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선의를 위해 기록을 조작하는 정보 요원이라. 영화 중반까지는 과연 이런 일들이 실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체제에  쉽게 비판 없이 순응해 버렸던 동독인들을 위한 위안 섞인 환타지란 생각에 이런 미담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그들이 안스럽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눈망울을 보면서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누가 알아 주지 않는다 해도, 내가 알고 있다면 충분히 선하게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인공은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눈망울들이 내가 살아온 궤적들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실패자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는 절대 실패자가 아니었으니, 그 자신이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인생이라 할 수 있는게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본에서 지진을 계기로 우연히 만나게 된 정인과 두현은 화끈한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그들의 겉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피로도는 한계를 넘은 상태다. 정인의 끊임없는 수다와 독설, 그리고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태도에 질릴대로 질린 두현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이혼을 하고 싶지만, 아내가 무서워 말도 꺼내지 못한다. 회사에서 강릉으로 직원을 파견한다는 말에 냉큼 손을 든 두현은 아내 몰래 자유를 만끽할 생각에 행복하다. 하지만 아뿔싸. 강릉 집에 도착해 보니 이미 그녀가 집안을 장악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렇게 노력했건만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두현은 낙담한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그에게도 희망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바로 다름아닌 옆 집에서...옆 집 남자에게 여자들이 꼬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두현은 그가 전설적인 카사노바 성기로, 어떤 여자든 그의 손에 닿기만 하면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남자다. 그를 조심하라는 경찰의 말에 불이 반짝하고 들어온 두현은 곧바로 성기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리고 돈을 줄테니 아내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제발 자신을 살려 달라는 애원과 함께...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지긋지긋해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던 성기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자신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한 두현은 점점 아내와 성기가 친해지는 것을 보자 질투에 휩싸인다. 과연 이 셋의 운명은?




<전설의 카사노바를 연기한 류성룡, 처음엔 도무지 미심쩍었는데 하는 행동을 보니 카사노바 맞더라. 그를 보니 어쩌면 카사노바는 얼굴이 미남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여도 상관없다는 말씀.>


보통 영화는 초반이 좋고, 마무리가 나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 영화는 그 정석을 뒤집고 있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어찌나 유치한지 도무지 보아줄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후반부로 들어가면서부터 그럭저럭 봐줄만 하더라는 것이다. 해서 하도 짜증이 나서 몇 번 쉬고 볼 수 밖엔 없었음에도--감성도 나이를 먹는지, 이젠 쉽게 지친다. 조금 짜증이 난다 싶으면 체력적이건 정신적이건 계속 봐주기 힘듦.--마지막까지 본 것이 무척 다행이다 싶었다. 뭐, 엄청나게 잘 만들었대서가 아니라, 적어도 공평하게 평을 쓸 수 있어서 말이다. 초반만 보고 리뷰를 썼더라면 도무지 이런 유치한 영화를 왜 찍는거냐, 이렇게 유치한 것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게 이해가 안 간다. 왜 이 영화가 유치하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느냐면서 불만의 거품을 물어댔을테니 말이다. 하니, 걱정 마시라. 다행히도 나 끝까지 봤다. 적어도 후반부까지 가면 조금은 용서가 되더라는 걸 알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치한 부분에 대한 성토는 빼고--왜냐면 나는 독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서...--그나마 괜찮다고 생각되던 부분을 들어보자면...

100년간의 고독이라는 책 제목도 있듯이, 고독이나 침묵에 년수가 붙으면 일단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처음 정인의 행동을 보면서 난 두현의 입장에 섰었다. 정말로 저렇게 싸가지 없는 여자랑 어떻게 사느냐고, 저런 여자랑 사는 두현이는 바보던가, 아니면 멍청이라고...해서 도무지 왜 이혼을 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질 않게 만들던 정인의 행동이 실은 외로워서 였다는걸 알게되자 충격이었다.  7년간이나 고독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발악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싶어서 말이다. 남편이 회사에 가고 난 뒤 그 넓은 집에서 혼자 혼잣말을 하면서 지냈을 정인을 상상해보니, 그녀가 왜 그렇게 남편만 보면 닥달을 해대는지 이해가 가더라. 난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녀가 오히려 대견해 보일 정도였다. 왜냐면 나라면 그냥 침묵속에 빠져 들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난 침묵을 그다지 힘들어 하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내 주변에 나의 침묵을 깨트려 주는 온기를 가진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지, 내가 유난히 수다장이가 아니라서는 아닐 것이다. 즉 나의 침묵은 내가 선택한 것이지, 내가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게 침묵이 강요된다면 아마 나는 정인보다 한층 더 미칠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가 실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자신의 불만을 독설이라는 무기로 풀어대고 있었다는걸 알게 되자 정인이 좀 덜 싸가지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말을 그렇게 해도 그녀는 여리고 사랑 받기 원하는 여자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알아본 카사노바 성기는 그녀를 원래 그 자리에 돌려 놓았고, 성기가 돌려놓은 정인을 바라본 두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그녀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서워 하거나 도망 가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사랑하고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로써의 그녀를 말이다.

결국 상영 내내 두둘두둘 비포장 도로를 열심히 달려대던 영화는 적어도 도착지만은 제대로 도달한 듯 보였다. 참 나...이렇게 괜찮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이었으면, 좀 매끄럽게 만들었음 좀 좋아?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그랬다면 보는 동안 연기자들에 대한 반발이나 혐오감이 좀 덜했을텐데 말이다. 초반부터 하도 말아 먹다보니, 훈훈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연기자들이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더라. 참으로 안타까운 연출이었다. 그나마 류승룡님의 연기가 제일 볼만했지만서도,  광해의 허균 역에 비하면 이 역은 덜 멋있지 않나 싶다. 아마도 카사노바 보단 제 정신 차리고 있는 역이 더 어울리시는 듯...그럼에도 류승룡님의 멋진 연기 앞으로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재 중단을 통고받고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는 하루코는 만화가다. 재능이 없다고 좌절하고 있는 그녀를 부추겨 만화가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남편, " 하루상은 만화만 그려, 뒷바라지는 내가 할게" 란 말로 프로포즈를 대신한 그와 결혼한 지 이제 5년째, 둘은 이구아나를 키우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츠레가 (남편을 지칭) 우울증에 걸려 비틀대기 전까진 말이다.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한 성격에 성실함과 책임감 빼면 시체인 츠레는 일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점점 좀비처럼 되가는 츠레를 보다 못한 하루코는 폭탄 선언을 한다. 회사를 그만 두던지, 이혼을 하던지 양자택일 하라고...이에 기쁜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둔 츠레는 환자로써의 일상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년 남자라면, 더군다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라면 절대 놀아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뼈 속 깊이 박혀있던 츠레는 백수 생활이 영 어색하다. 집에서도 경직된 자세로 긴장을 풀지 못하는 츠레를 보곤 하루코는 가르치기 시작한다. 낮잠을 자는건 죄악이 아니라고, 어른에게도 방학은 필요하다고, 휴식을 숙제처럼 생각하라고...자신이 하루코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날마다 면목 없어 하던 츠레는 옆에서 조용히 지켜 보는 하루코 덕분인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의사는 우울증은 재발이 쉬운 병이라면서 좋아질때를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츠레는 과연 이 심각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루코는 골동품상 아저씨로부터 이 작은 병이라도 금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란 말을 듣게 된다. 츠레에게 금이 가지 말아 달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라고 부탁을 한다.




회사에 사표를 내러 가는 날, 츠레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책임감을 내려놓기로 결심 한다. 자신을 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게 보인다. 출근길에 집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머리가 괜찮냐고 아내에게 물어보는 츠레, 이 장면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그간 자신의 외양조차 체크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츠레가  드디어 자기 자신을 돌보려는 마음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




남자라면 낮잠을 자선 안 된다고 울먹이는 츠레에게 하루코는 낮잠을 자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차라리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이 되고 싶다는 츠레의 말에 하루코는 그러면 인간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쉬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던 이 소심남은 하루코 덕분에 조금씩 긴장을 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이해심이 많지는 않았는데...




면목이 없다고, 이불을 둘러쓰고 울고 있는 츠레, 그를 보고 하루코는 <츠레가 거북이가 되었다>고 그린다.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 집에서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이 찾아와 기운을 내라고, 자신도 쉬고 싶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다면서 너도 그러라고 충고한다. 츠레는 " 무엇을 해야 힘이 나는 거야, 지금의 나라면 무리야, 형님 같이 어떤 것에 힘을 낼 수 없" 다면서 펑펑 운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한숨짓는 하루코, 그녀는 생각한다. " 조용히 지켜봐 달라는데, 왜 더러운 발로 발을 디디는 것일까?" 라고...우울증이나 그 외 다른 환자들을 간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익숙한 광경이 아닐까 한다. 단지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이런 저런 말을 해대는데, 실은 그것이 연못에 사는 개구리에게 던지는 돌이 되기도 한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 환자들이 힘을 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울증 자체가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 놓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을 내고 싶어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다는 뜻. 무기력과 그에 동반되는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없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라는 것에 미치게 된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을 많이 하는 이유다. 그들이 자살하는 것은 절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논리론 사랑하기 때문에,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혼 동창생을 만난 하루코는 그녀가 이혼을 하느라 지쳤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제 힘 내겠다는 그녀의 말에 하루코는 말한다. 힘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괴로웠으니 힘내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까지로도 괜찮은거라고 말해 준다. 자신도 힘내지 않겠다고. 괴로워서 큰일이지만, 힘내지 않기로 했다고 말이다...일본 드라마를 보게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간바레' 즉 힘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에 파이팅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까. 힘을 내야 한다고, 발전하고 진보하며, 뒤지면 안 된다고, 더 더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세상에 맞서 하루코는 말한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고. 왜냐면 살아있으니까...그리고 이제까지 충분히 힘냈었으니까. 때론 뒤로 물러서 백기를 드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임을, 하루코는 알아버린 것이다.




하~ 츠레 드디어 웃음을 찾다. 이렇게 선하고 해맑은 사람이, 직장 생활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병에 걸렸을까 생각하게 하던 장면. 거북이와 눈이 맞았는데 귀엽다면서 오도방정 떨고 있는 중이다. 하루코는 <거북이가 거북이를 키우면 어쩌자는 거야?> 라고 불평하면서도, 기꺼이 새로운 가족으로 거북이를 데려 온다.




<츠레가 우울증에 걸렸으니 일을 주세요! > 예전에 만화를 연재했던 출판사에 간 하루코는 자신의 그림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말에 편집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곤 깨닫는다. 자신이 츠레의 우울증을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도 그것을 부끄러워 했기 때문이라고. 남들이 우울증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드디어 입밖으로 그 사실을 말한 하루코는 자기 자신을 대견해 한다. 더이상 자신의 남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그리고 그녀의 이 말은 상황을 전환시키는 한마디가 된다. 일도 얻고, 하루코 자신이 이 그림을 책으로 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그림 그릴 것이 없다고 불평하던 하루코는 자신 가까이에 그리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을 줄은...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츠레와 자신이 겪었던 일을 그림으로 그려 나간다. 그리고 그녀의 책은 우울증환자와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곡절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좋다는 말에 보긴 했는데 이렇게 잘 만들었을 줄은 몰랐다. 일단 우울증에 대한 보고가 완벽하다.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지, 증상은 어떠한지, 그들이 가장 괴로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 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울증은 그걸 인정한다는 자체가 사회에서의 도태를 의미한다. 우울증 자체로는 그다지 고통이 없다고 해도 자살률이 그렇게 높은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당장 그들을 무가치한, 잉여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해서 여기에 나오는 츠레처럼 책임감이 절어 사는 사람들은 탈출할 구멍을 찾지 못한다. 진퇴 양난의 처지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우울증에 걸려본 적이 없는 하루코가 남편을 이해하려 애쓰다, 결국엔 그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건 츠레를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루코와 츠레를 통해 부부의 힘을 보게 되었는데,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아니라면 그런 시련을 헤치고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살이라고 단정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하고, 왜 너의 짐을 나에게 지우냐고 비난하면서 서로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이 부부는 용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더라. 그걸 잘 피해가는 하루코의 유연함과 인간미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아마도 그런점들이 읽혀졌기에 그녀의 책이 일본에서 히트를 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것일테지 싶다. 현대판 열녀라고 할만한 우화이자, 배워야 할 점이 많은 일화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탄한 극본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좋았다. 이 영화를 보니 미야자키 아오이가 왜 일본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이해가 가더라. 어쩜 연기를 그리도 정감나게 하던지...어린 나이에 하는 연기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밉상인 캐릭터라도 그녀가 연기를 하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을 듯했다. 거기에 사카이 마사토는 또 어떤가. 예전부터 좋아한 배우였는데, 이 영화를 통해 더 좋아하게 됐다. 우울증 환자의 다양한 내면 연기를 어찌나 귀엽고 탁월하게 해내던지...그간 무표정하다고 불평했던 것들을 이번에 다 취소하기로 했다. 배우들이 연기도 잘하긴 했지만 특히나 드라마의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연기를 한 듯해서 고맙기 그지 없었다. 그들도 아는 듯했다. 이런 영화 하나가 사람들의 인식을 많이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선 이런 이해들이 꼭,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