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교사 헨리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세상과 어느정도 거리를 둔채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는 기간제 임시 교사다. 새로 발령받아 가게 된 학교에서 그는 꺼리낌없는 태도로 아이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것에서 그들의 신뢰감을 얻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아이들을 바로 잡아 교육을 시킨다는건 이미 불가능이 된지 오래라는걸 잘 알기 때문이다. 참담한 현실을 부여잡고, 더이상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안간힘을 쓰는 동료 교사를 보면서 헨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자문하게 된다.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르치는 아이들이건 그 누구건 간에  마음을 열 생각이 없던 그이지만 세상의 비참함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울려댄다. 견딜 수 없이 비참한 인생들에 비통함에 젖어 살던 그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늙은 남자에게 섹스를 해주는 어린 매춘부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돈도 받지 못한 채 맞고 거리에 내 팽개친 것을 본 헨리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던 초연함을 벗어 던지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어른으로써, 그녀의 나이와 처지, 그리고 미래를 생각한 동정 어린 조치였지만, 받아들이는 아이는 그걸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집보다 거리가 낫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게 됐다는 에리카는 동정 말고 빵을 달라고 한다. 이에 자신의 집으로 에리카를 데리고 간 헨리는 그녀와 어설픈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거리에서 배회하지 말라고 자신의 집을 내어 준 헨리는 그녀가 자신이 학교에 간 사이에 집에서 매춘을 하자 분노한다. 그는 자신이 어렵사리 내어 준 동정심으로도 아이들이 망가져 가는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음에 절망하고 마는데...

미국의 교육 현실이 참으로 처참하구나 라는걸 느끼게 해줬던 영화다. 이 영화속에선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교사도 아이들도 나오지 않는다. 교사가 무엇을 하건 그걸 삐딱하게 보는 아이들과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나오고, 그런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현실에 붙들여 보려 애를 쓰는 교사들이 나올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각을 하는 교사들에 한해서 말이다. 제목이 <디태치먼트-초연함>인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대부분의 교사들은 형편없는 아이들과 현실에 질려서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월급을 받아갈 뿐이니 말이다. 그들에겐 아이들을 교화를 하겠다는 의지나 바꾸어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이 어떻게 일그러 지는지 경험을 통해 충분히 봐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명한 것이라는걸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하지만 현실은 너무 암담해서 결국 그들의 마음의 봉인이 해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헨리가 마음이 약해져서 에리카를 집안으로 들이게 된 경우처럼 말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던 것일까? 인간으로써의 연민때문에 이런 저런 금기를 깨게 되지만, 과연 그들의 진심을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하는 것은 굳이 영화의 결말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과거의 감동적인 교육 영화에서라면 , 헨리의 진심에 감화된 에리카가 개과 천선해서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게 교복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났겠지만서도, 요즘의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었다. 암담한 교육 현실, 그것을 부추기는 엇나가는 아이들, 그들이 왜 그렇게 자랐는지 짐작하게 하는 무식하고 무심한 부모들, 그나마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생각에 안간힘을 쓰던 교사들마저, 점점 현실의 벽에 의지가 꺽이고 만다. 과연 요즘의 교육 현실에 대안이나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 영혼이 사라진 교육 현장에 과연 미래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암담한 현실을 교사들에게 다 일임해 버리고, 밖에서 훈수만 두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정말로 몰지각하고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던 영화다. 영화는 내내 우울하고 비극적인 톤이라, 솔직히 보는 것이 그다지 편하진 않았다. 거기에 보고 나서도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이런 현실을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나 역시도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니 말이다. 다만 안도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그래도 미국 아이들 처럼 막나가지는 않는다는 것.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하니 부디, 그들이 행복했으면 하고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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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려 가기 위해 끌려가고 있던 흑인 노예 장고 일행앞에 한밤중에 느닷없이 장돌뱅이 치과의사 닥터 슐츠가 나타난다. 다짜고짜 장고를 찾은 그는 악덕 삼형제를 찾고 있는 중이라면서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느냐고 장고에게 묻는다. 그렇다는 장고의 대답에 곧바로 그를 노예상에게 사는 슐츠,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긴 했으나, 슐츠가 주장하는대로 그건 그저 정당방위였을 뿐이니 그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거침없는 언변에 어느상황에서건 느물댈 수 있는 침착함, 흑인을 대하는--모든 인간을 대하는?--공정하고도 신선한 시각, 입이건 총이건간에 상대의 헛점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슐츠의 행동에 장고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장고에게 있어 슐츠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특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슐츠가 장고에게 보여준 것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치과 의사 노릇이 따분해진 나머지 그보단 돈 벌이가 짭짤한 현금 사냥꾼에 나서게 되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마인드의 슐츠가 장고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돈이며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백인이라면 무언가를 빼앗아 가는 존재라고만 알고 있던 장고는 자신을 노예 취급하지 않는 그를 주저없이 따라 나선다. 한편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장고를 데려왔던 슐츠는 그가 현금 사냥꾼이 되기 위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고에게도 악연이 깊었던 악덕 삼형제를 처단한 후, 슐츠와 장고는 찰떡궁합 파트너가 되어 현금사냥꾼 생활을 하게 된다. 슐츠로부터 현금 사냥꾼이 되기 위한 기본기를 차근 차근 익혀 나간 장고는 어느덧 슐츠를 능가하는 총솜씨를 보유하게 된다. 돈과 자유를 얻게 되면 헤어져 팔려간 아내를 찾아 남부로 가겠다는 장고의 말에 슐츠는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남북 전쟁 전의 미국 남부는, 더군다나 그가 찾아 가려는 미시시피주는 흑인 남자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위험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어느덧 봄이 되고 돈이 어느정도 모인 둘은 계획대로 남부로 향한다. 그곳에서 장고의 아내가 팔려간 곳을 알아낸 슐츠는 하필이면 그녀가 있는 곳이 포악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미스터 캔디의 농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잔인하고 무모한 캔디에게 섣불리 접근했다간 장고의 아내를 되찾기는 커녕 볼 수도 없을 것이란 것을 파악한 슐츠는 냉정하게 계획을 세워 나간다. 다시 한번 파트너가 되어 미스터 캔디 앞에 나선 둘은 혐오감과 증오를 억누른 채 캔디의 마음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슐츠의 재치와 장고의 매력으로 캔디의 신임을 얻게 된 둘은 그들의 계획에 한발 한발 다가서게 된다. 하지만 난관을 용켸 헤쳐 나가면서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던 두 사람은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누가 봐도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타란티노표 서부극이다. 장고~~~ 라는 귀에 익은 OST가 흘러 나오는 가운데, 황량한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흑인 노예들을 비춰주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단지 오래된 서부극의 향수를 그려내려는 것인가 라는 의아심을 조금뒤 슐츠라는 사내의 등장으로 불식시키고 있었다. 오래 되기는 커녕 요즘 만든 영화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만치 신선감이 넘쳐주었으니 말이다. 남북전쟁 전 시대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라고 감탄을 자아낼 만큼, 타란티노는 그만의 감각으로 서부 무법시대를 새로운 캐릭터로 무장해 보여주고 있었다. 어찌나 신선했는가 하면 초반 20분 가량은 그냥 멍하니 입 벌리고 쳐다만 봤다고 보심 된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전개로 관객들을 사로 잡아서 말이다. 전작 < 버스터즈>에서 나찌를 신나게 두들겨 패더니만, 이번 영화에서는 포악한 남부 농장주를 역시나 신명나게 패주고 있었는데, 아마도 타란티노 본인이 자신의 사명을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는데 올인하고 있는게 아닐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뭐, 타란티노의 복수극이야, 워낙 유명한 것이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봐지는 것이라서, 일단 영화를 보면 이해를 하실 것이고... 그외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명불허전, 배우들의 연기였다.

 

우선 가장 인상 깊었던 배우는 슐츠를 연기한 크리스토프 왈츠다. 독일계 미국 이민자이자 떠돌뱅이 치과 의사인 닥터 슐츠를 연기한 그는 초반부터 확실히 영화의 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면서부터 비로서 영화가 살아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별다른 긴장감없이 등장하는 도입부 씬에서조차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더라. 그 이유는 아마도 영화를 보시면 이해가 되시지 않을까 싶고. 분명 나쁜 사람인데--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니까--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었던, 아니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가장 공감이 가는 사람이 그라는 것은 흥미로웠다. 장고를 구원해주고, 이끌어주며, 도와주는 존재로써의 역이었는데, 조연임에도 캐릭터가 워낙 존재감 있어서인지, 끝나고 나서도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얄밉게 깐죽대는 장면조차 그 나름의 표현력으로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만들던데, 그가 이 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도 놀랍지 않다 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른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해서 타기 힘들다고는 하지만서도, 후보에 오를만한 연기였으니 말이다. 하여간 그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외에 장고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는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인물로 본인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호연으로 평생 처음 해본다는 악역을 살벌하게 소화해낸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 역시 그가 달래 명배우인가 재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 사뮤엘 잭슨...난 처음 그가 누군가 했다. 나중에 그가 사뮤엘 잭슨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작 놀라고 말았는데, 너무도 완벽하게 늙은 노집사로 변신을 해서 말이다. 능구렁이 같은 노집사 역을 깜쪽같이 해내고 있던데, 슐츠가 백인임에도 아무런 댓가 없이 흑인인 장고를 돕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다면, 그는 흑인임에도 백인보다 흑인을 경멸하는, 슐츠와는 정반대로 구시대를 표상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런 사각 구도가--장고와 슐츠: 미스터 캔디와 노집사--가능하다고, 개연성 있다고 여기게 만들도록 한데는 무엇보다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에 있었지 않는가 한다. 표면적으로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한 여정을 그린 영화였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네 남자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이였기에 아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어쨌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선 무언가 명분이 필요했을터이니, 아내 구출, 나쁘지 않다. 지금 이 영화가 전 세계적 박스 오피스 1위라고 하던데, 그럴만도 하다. 그만큼 재미 면에서는 보장이 되는 영화니 말이다. 대사는 재치와 재기 넘치는데다, 배우들의 연기는 감칠맛 나고, 행여 관객들이 지루해할까 곳곳에서 유머와 폭탄과 폭력을 터뜨려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정의가 실현되는 카타르시스 역시 시원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 타란티노의 복수극으로 이만하면 성공한 케이스가 아닐까 한다. 내 생각엔 타란티노의 작품들 중에서 <펄프픽션>다음으로 수작이지 싶더라. 버스터즈 다음으로 무엇을 내놓을까 저으기 궁금했었는데, 그가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서 반가웠다. 복잡하지 않으면서, 환타지가 분명한데 묘하게 현실감 있으며, 허를 찔러대는 기발함에, 웃기고, 시원하며, 통쾌한 영화를 원하신다면 보셔도 좋을 듯...다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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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자해 공갈단, 사기, 간통등 범죄에 있어선 한가닥들 했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도소 7번방에 이상한 신참 용구가 들어온다. 유아 살해범이라는 말에 다들 이를 갈며 싫어하던 7번방 수감자들은 곧 그가 단순히 이상한게 아니라 지능이 모자란 다는 것을 알게 된다. 6살에서 지능이 멈춰버린 용구는 사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그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해봤자 딸 예승이랑 알콩달콩 사는 것일뿐이지만, 죄가 사람을 만든다고 유아 살해범으로 낙인이 찍혀진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그를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다. 교도소에서도 딸 걱정만 하면서 겉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방장을 도와주고, 고마운 것을 헤아릴줄 아는 방장은 용구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한다. 용구의 소원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딸을 만나는 것, 이에 한번 말을 뱉었다 하면 지키는 걸 생명으로 아는 조폭 출신 방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예승이를 교도소에 반입하게 된다. 처음엔 용구와 예승이의 관계를 미심쩍어했던 7번방 수감자들은 부녀의 상봉을 보고서는 자신들의 불신을 해소한다. 순도 100% 부녀의 사랑이 보는 이의 마음을 모두 녹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시간만 머물기로 되었던 예승이의 교도소 체류는 갑작스런 사정으로 하루를 넘기게 되고, 이에 행여나 들킬까 걱정인 7번방 수감생들의 불안을 높아져만 간다. 희희낙낙하며 마냥 행복한 용구와 예승이 두 부녀만 빼고 말이다. 교도관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예승이를 무사히 밖으로 내보내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던 수감생들은 촉이 좋은 교도소장의 눈에 뜨여 결국 발각이 되고 만다. 다시 생 이별을 하게 된 부녀, 과연 둘은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이서 용구를 지켜본  7번방 수감자들은 그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데...



만화 <플란다스의 개>를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건방진 꼬마가 심부름집 아저씨들에게 묻는다. " 이거 어떻게 끝나요?" 라고...이에 평소 말수가 극히 적은 아저씨 하나가  이렇게 대답한다. " 울게 될거야." 라고...(영화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중에서) 이 영화를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울게 될 거야' 라고...먼저 웃긴 하겠지만서도, 울면서 나오게 될거야...재미는 것은 이 영화를 보기 전엔 아무도,  이 영화가 이렇게 울릴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재밌는 영화인줄 알고, 연기의 달인 류승룡님이 좀 모자라는 역으로 변신을 하신다기에 얼마나 잘 하시나 보려고 간 것일 뿐인데, 그만 줄줄 울다 나왔다. 평소에 잘 울지 않기로 유명한 내가, 남들 펑펑 울때 고작 요런것 가지고 울다니 참 한심하군, 좀 더 살아봐. 얘~~! 라는 표정으로 처다보던 내가 말이다.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더 열받았던 것은 이야기 자체가 그다지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애정이 넘치는 부녀의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다른 여타의 사정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줄거리였는데,--쉽게 말해 현실성 대체로 희박해주신--그럼에도 울 수밖엔 없더라.  알면서도 속는 기분이 이럴까나? 찜찜했다. 한쪽 머리로는 이건 절대로 불가능해, 저건 있을 수 없어, 아니 스토리가 이렇게 숭숭 뚫리면 곤란하지라고 하면서도(법적인 관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한쪽 머리로는 줄곧 울어 제끼고 있었으니, 이성과 감성의 분열로 말미암은 나의 당혹감이 이해 되시려나 모르겠다. 영화의 분위기를 대충 요약해 보자면, 아마도 한국판 <인생은 아름다워> 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부성애를 그렸다는 것이나, 아버지의 희생으로 자식이 살게 된다는 것이 둘 다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다들 감동을 받았다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서도 저건 좀 오바아냐? 라면서 딴지 걸고 있었던 내가, 명백히 신파인 이 영화를 보면서 울어 제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음,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마음이 이렇게도 말랑해 진걸 보면 말이다. 어찌되었건 이 부녀의 사랑에는 두손 두발 들 수밖에는 없었고, 거기에 막강한 설득력을 부여한것은  무엇보다 류승룡님의 연기와 예승이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힘이 컸다고 본다. 둘을 보면서 도무지 이것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나 리얼하게 연기를 하시던지, 둘이 진짜 부녀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두 주연을 받쳐 주는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도 좋았지만, 부녀로 나오는 두 배우들의 연기는 진짜 보기 전에는 실감이 어려우실 것이라 본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도 여전히 숭숭 뚫린 전개에는 반감이 줄어들지 않지만서도, 만약 이 영화가 단지 부녀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 완벽한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점들때문에 눈감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발상 자체가 신선했다는 것이나, 배우들이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모습들은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지 않나 한다. 하여간 여성분들중 이 영화를 보러 가실 생각이라면, 왠만하면 마스카라는 자제하실 것을 권해드린다. 판다가 된 채 영화관을 나오고 싶지 않으실테니 말이다. 과장이라고? 영화관에 울려 펴지는 흑흑대는 소리를 들어 보시면 아마 느낌이 오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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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인간에게 잃은 뒤 인생의 목표를 딸 마비스 잘 키우는 것에 올인한 드라큐라 백작은 깊은 산 속에 거대한 성을 짓고는 인간의 접근을 차단한다. 이른바 몬스터 호텔, 온갖 괴물들은 환영하지만 인간만은 사절인 그런 곳이다. 드디어 딸 마비스가 118살이 되는 생일 전 날, 몬스터 호텔은 오랜만에 숙박객들로 북적인다. 드렉(드라큘라의 줄임말)의 절친인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가족,투명인간, 미이라, 좀비, 마녀 등등 생일파티 손님들로 가득찬 호텔 로비는 정신이 없다. 그런 광경을 흐믓하게 바라보던 드렉은 뜻밖의 광경에 눈이 튀어나올만큼 놀란다. 배낭을 맨 멍청한 인간 하나가 신기하단 표정으로 어슬렁대며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냐는 물음에 모두들 무서워 접근조차 못한다는 소문에 호기심이 생겨 오게 됐다는 그의 이름은 조니, 인간 나이로 21살인 그는 전세계를 돌면서 여행을 하고 있던 모험 청년이었다. 딸의 생일날 인간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심하게 부담감을 느낀 드렉은 어떻게 해서든 조니를 퇴치해 버리려 하나, 아뿔싸, 일은 한없이 꼬여 오히려 딸과 조니를 극적으로 만나게 하는 사태를 만들고야 만다. 난생처음 자신의 또래를 만난 마비스는 한 눈에 조니에게 빠져 버리고, 조니 역시 매력적인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해 버린다. 어떻게든 둘을 떼어놓으려는 아빠 드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니는 밖으로 빼돌리려 애 쓰지만, 이상한 것은 그러면 그럴수록 조니가 괴물의 세계로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된다는 것이었다. 인간과는 상종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모든 괴물들에게 전파한 장본인인 드렉은 자신의 호텔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조니를 프랑켄슈타인의 육촌으로 변장을 시킨다. 활발하고 음악 좀 알고 제대로 놀줄 아는 조니는 당장 괴물들의 호감을 얻게 된다. 처음엔 그것이 못마땅해했던 드렉은 의외로 조니가 괜찮은 청년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가 좋아진다. 비록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때문에 인간을 멀리하긴 했지만 편견으로 마음까지 닫힌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니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해서 딸과 사귀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었기에, 드렉은 딸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떠나라고 조니를 협박한다. 하는 수없이 몬스터 호텔을 떠나게 된 조니, 이에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던 마비스는 좌절한다. 딸의 슬픔을 지켜보던 드렉은 자신이 평생 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해야 함을 알아차리는데... 

 

재밌을까?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괴물들이 총출동 하는데다, 내용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은둔을 택한 드라큘라의 이야기라는데...어째 좀 뻔한 내용일것 같아서 망설이다 보게 된 영화다. 그런데 이런 왠걸...이거 왜 이리도 재밌는 거야? 초반을 넘어가자 마자 영화에 폭 빠지고 말았다. 컨트롤 프릭( 무엇이든 통제하려는 완벽주의자)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드라큘라는 그러나 알고보면 딸바보에 허당이라는 매력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고 있었고, 드랙이 살아가는 목표인 딸 마비스는 드라큘라가 이렇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강단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순진한, 아버지가 사랑으로 키워서 아직은 세상을 모르는 귀여운 딸의 모습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인간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아빠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위의 사진은 슈렉의 고양이 이후로 최고의 동물 귀염이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깨물어 주고 싶을만치 귀여워서, 왜 드렉이 딸을 그렇게 노심초사 보호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더라. 저런 딸네미라면 어떤 아빠라도 함부로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외에도 갖가지 조연 괴물들의 향연이 심심치 않은 눈요기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괴물들이 하도 못 생겨서 보기 징그럽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하는 행동들이 다 엉뚱하고 귀엽다 보니 애초에 그런 걱정을 했단 사실 자체를 잊어 버리게 되었다. 무섭다는 괴물들을 다 모아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영화로 만들어 내다니, 편견을 전복시키는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재미에 감동에 귀여운 캐릭터들에, 신나는 음악에...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로써의 소임은 다하고 있던 영화였지 싶다. 다른걸 떠나 일단 재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약간 울컥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괴물들의 한바탕 소동을 보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이건 자막으로 봤는데, 기회가 되면 더빙으로도 한번 더 보고 싶다. 컬투의 더빙이 잘 됐다는 소문에 얼마나 재밌을지 궁금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번 더 보고 싶어서~~~!


<결정적인 때에 소환되어 기막힌 정보를 드렉에게 알려주고 있는 늑대인간의 막내딸. 그녀 역시 주목해서 보시길...두어장면 등장하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빵빵 터뜨려 준다.이 영화의 스토리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서도, 여성들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여성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건 특출난 개성을 지녔건 탁월하건간에 존재감 하나는 확실히 보장해 주는걸 보면서 말이다. 여성이라면 특히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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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부부의 모범이라고 보여질만큼 평화롭게 살고 있던 조르주와 안느, 그 둘의 일상은 아침 나절 잠시 혼절한 안느로 인해 깨지게 된다. 가벼운 뇌출혈이라는 말에 수술을 하게 되지만 결국 안느에게 오른쪽 편마비라는 휴우증을 남기고 만다. 퇴원한 그녀는 남편에게 다시는 자신을 병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본인도 노쇠한 판에 아내 병 수발을 들게 된 조르주는 다른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살뜰하게 그녀를 보살핀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아내를 잘 보필하려 애를 쓴다 한들, 간병이 힘에 부치지 않을리도 순조로울리도 없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간병을 최선을 다해 애쓰는 조르즈,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은 바로 안느였다. 평생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아온 우아하고 지적인 안느에게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불구의 몸이란 좌절 그자체였던 것이다. 이제 나빠질 일만 남았다고, 과연 앞으로 무엇을 기대해야 하겠느냐고 좌절한 눈으로 묻는 안느에게 조르쥬는 화는 낸다. 그 자신도 그걸 모르진 않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한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버겁긴 하지만 그저 묵묵히 대처해 나가는 수밖엔 없다고 암묵의 동의를 한 둘은 하루 하루를 살아나가기로 한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둘에게 인생은 잔인하기만 하다. 도움을 받기 위해 들인 가정 간호사는 무능한데다 무심하고, 오랜만에 친정집에 들른 딸은 엄마를 방치한다고 화를 낸다. 그나마 적응해 나가던 안느는 두번째 뇌출혈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 밤이고 낮이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안느를 돌보면서 조르쥬의 두려움은 점차 커져간다. 그는 언젠가는 결단의 시간이 올 것임을 예견하지만, 그 날이 조금이라도 늦춰지길, 내진 자신의 손으로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게 되길 기다리는데...


 




감독은 축복받은 노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일단 관객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잠재운다. 이 둘이 정말로 사랑하는 부부였고,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었으며,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주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이 아무 이유없이 쉽게 목숨을 버릴 사람들이 아닐 뿐더러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더불어 그들이 미쳤거나 무식하거나 분노한 사람이라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앞으로 벌일 일들을 생각하면 유용한 방패막으로 활용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아주 아주 가난했고, 삶에 찌들었으며, 매일 매일 전쟁을 하며 살아가는 무식한 노부부였다면, 영화는 쉽게 촛점을 잃었을 것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살인으로 비춰졌겠지. 간병에 지친 노인네가 평생 해로해온 가엾은 아내를 죽인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똑같은 상황임에도 우리의 판정은 그렇게 다르다. 불공평하다고? 아니, 원래 인생이 그런 법이다. 토를 달면서 항변하기엔 너무 지쳤으니 이젠 그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는... 아니라고? 무슨 소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간병처럼 재밌는게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희생하고도 웃을 수 있는 인격을 남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이다. 왜 요즘도 간간히 뉴스에 나오질 않는가. 간병하던 치매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하는 노인네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그런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그 노인을 안됐다고 동정하는 논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살인을 하고 만 노인네의 정신상태에 대해 분노하는 논조는 봤어도. 그들은 쉽게  이름을 붙인다. 아내를 살해한 남자라고. 그녀가 병들었다는 이유로. 그가 지쳤으며 더이상 다른 길이 없다고 아주 아주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지 못한 채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댄다. 다른 수가 있었을 거라고, 어떻게 무방비에 놓인 아내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냐고, 간병에 지쳤다고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그렇게 쉬워서야 되겠느냐고 성토를 해댄다. 그런 기자들의 논조에 그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 노인네를 증오하게 된다. 늙었다는 것도 추한데, 거기에 살인이라니...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욱했다고 해서 , 병든 노인네가 걸리적댄다고 죽여대면 곤란하다고,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목숨은 다 아름답다고 귀중한 것이라고 말이다. 어찌보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단지 그런 이유때문인 것일까?

이 영화가 특별했던 점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독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조르쥬가 안느를 죽여야 했던 것이 걸리적대서가 아니라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사랑의 속성을 뭐라 생각하는가? 당신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가? 사랑때문에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고 당신을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건 사랑의 크기에 달린 것일 것이다. 나같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사람을 죽인다는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살인은 커녕 때려 본 적도 없는 내가 언감생심, 사람을 죽이라고? 나의 소심한 심장은 그런걸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나의 행동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다고 판단되어 진다면, 어쩜 나도 살인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도무지 전생에 어떤 죄를 졌길래 이런 끔찍한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형기를 채우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비참한 투병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 손을 더럽힐만큼 그나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아서 살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다. 어쩜 사랑하지 않기에 고통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하긴 내가 아픈게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곤 신은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죄라는 개념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아무리 대단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저 고통에 비하면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면, 이런 고통을 두고볼 신도 없을 것이고, 이런 것이 가능하지도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유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묻는다. 내 인생이 이렇게 무가치해도 되는가 하고. 하지만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부여잡고 흐느껴 우는 병자들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니 살아있으라고 말이다. 어떻게 있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거기에 맞서 병자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죽음의 매력이 살아있음보다 더 커진다면 때론 죽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는게 아니냐고? 어쩜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감독이 우리에게 들려 주고 싶어했던 골자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 영화에서, 아내를 죽인 조르쥬에게 그나마 면죄부(일말의 동정)가 주어지는 것은 두가지 때문이다. 안느가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걸 분명히 했다는 점과 부부 사이가 정말로 좋았다는 점 말이다. 둘 사이엔 그간 쌓아온 진정한 사랑이 많았다. 둘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를 진정 사랑하고 아끼면서 부지런히 사랑의 저축을 해온 커플이었다. 아이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았다는 사람들이 아니라...둘이 늘 서로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들을 주목해 보시라. 그렇게 늙어간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쌓은 정이 많다보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그저 지켜만 볼 것인가? 이 이상의 수모와 추한 꼴을 당하는걸 보면서 그게 그녀의 운명이니 알아서 하라고,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나는 두 손 놓고 말 것인가 라고 말이다. 만약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 일이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말년을 보내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아내였다면, 진심으로 그녀의 고통에 공명하게 되지 않을까. 그녀의 비참한 감옥 생활을 그만 끝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적절하게 생각되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정말로 사랑이 아니라면 조르쥬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살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그가 아내를 살해하게 된 이유이다. 바로 사랑 때문에...젊은 이들은 사랑이라는 것이 로맨스로만 생각하지 이렇게 비루한 일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엔 언젠가는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옸을때 우리는 바라지 않겠는가. 최소한 인간적이길, 최소한 고통이 덜하긴, 최소한 존엄을 지킬 수 있기를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걸 바랬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삶의 어떤 지점에 이르면, 그것이 정당한 요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상당히 무겁게 전개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생각보단 흔연스러웠다. 실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면 ,보는 것마저 힘들었을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쩜 그건 의도적이지 않았을까 했다. 주르쥬가 간병에 힘겨워하는 현실에 압도당하기 보단, 조르쥬가 안느의 고통에 공명하는 사랑에 촛점을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다들 숨막혀 하면서 지켜볼텐데, 그 이상의 충격을 줄 필요는 없었겠다 싶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건 나와 상관없는 간병의 어려움이 아닐테니 말이다. 영화는 수작이라고 칭찬을 받고, 여러가지 상도 받았지만서도, 과연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면서 훌쩍이는 사람들도, 내일 신문 조그만 귀퉁이에 치매에 걸린 아내를 죽인 남편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찰테니 말이다. 간병이란, 내가 하지 않는다면 전혀 힘들지도 상관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고민할 거리가 못 되는 것을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현실이 그렇다는걸 잘 아는 나이다 보니, 내가 바라는 것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주십사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굉장히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이해해 주셨음 한다. 이해하는데 별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거기에 이해란 때론 당신의 인품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겨우 남의 사정 하나 봐주는데 인품까지 높아진다면, 그까짓거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닐런지, 같은 인간으로써 한번 생각해 보심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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