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는 알지만 [캡틴 하록]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람으로, 단지 류승룡이 더빙을 하셨다기에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궁금해서 보게 된 영화다. 알고보니 그것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나은 점으로 작용했는데, 왜냐면 나는 과거의 하록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지금의 하록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애정만화 주인공 필이 나는 정감 넘치는 하록과 달리 이번 하록은 칼에 찔려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공미 쩔은 하록이었기에, 과거 하록의 팬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듯해서 말이다. 뭐, 내가 봐도 그 차이가 엄청났으니, 그들이 어이없어 하는 것들이 이해가 가긴 하다. 이름과 코스프레만 똑같을 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등장인물을 같은 사람이라고 우기니 얼마나 생경했겠는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아니면 적응이 영 안 되거나.

뭐, 일단 줄거리는 우주의 반역자이자 해적선의 선장이 되어 나타난 하록과 그를 저지하려 혈안이 된 우주 위원회 가이아의 대립으로 시작된다. 지구를 멸망시켰다는 죄책감에 우주의 시간을 되돌려 초기화 시키려는 하록과 자신의 실수로 형을 불구로 만든 죄책감에 하록을 암살하기 위해 하록의 선함에 잠입한 야마...서로를 적대시해야 마땅한 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파괴했다는 공통의 죄책감때문에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이 가이아 위원회에서는 환상이 지속되는 한 우주는 평화롭다는 모토하에 하록 일당을 저지하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만다. 지구의 멸망에 맞서 과연 하록과 야마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과연 희망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줄거리는 영화를 보면서 따라가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그치기로 하고, 대충 내가 영화를 보면서 든 느낌만 정리하자면...

일단은 우주 배경이나 우주 함선을 표현하는 것들이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멋졌다. 이렇게 탁월하고 정교하게 우주 미래를 구현해 내다니, 비록 만화속에서지만 일본 사람들이 존경스럽더라.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하면 미국이 먼저 떠오르고, 그들의 스케일이야말로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니 그렇지도 않더라. 섬세하고 엄청난 기술력등은 미국 못지 않았으며, 어떤 장면들에선 애니라서 가능한 상상력들에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지...대단하다는것만은 인정해야 겠다.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건 , 하록 선장이 망토를 휘두르는 장면이 왜 이다지도 많을까 싶었던 점이다. 툭하면 바람에 화르르~~망토가 휘날리던데, 일본어로 가꼬이, 즉 멋지다라는 감탄사를 듣기 위해 각고의 애를 쓰는듯한 느낌이었다. 문젠 처음엔 그래도 멋져 보였는데, 지나치게 남발하니 식상해지더라는 것. 오로지 가꼬이를 위해서만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이랄까. 왜 꼭 이다지도 멋져 보여야만 하는지, 멋진 캡틴이 아니라 지적이고 영리하며 정감이 가는 캡틴이여도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멋지게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캐릭터의 인간미는 제대로 살리지 못한듯 보여서 말이다. 아마도 이런 겉멋 잔뜩 든 멋짐에 환장을 하는 것이 일본의 정서인 듯 보이긴 하는데, 우울한 천재, 완벽한 고독남, 인류의 운명을 한 손에 쥐고도 불평하지 않는 사내에 대한 일본의 로망은 사무라이의 잔재 때문일까? 일본 영화다 보니 일본정서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지만서도, 종종 심했다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살짝 오바다 싶은 것이지, 영화를 감상하는데 치명적인 결점은 아니었으니 감안해서 들으시길...

세째는 더빙판으로 봤는데, 그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기대했던 류승룡님의 하록이 별로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은 누가 배역을 맡았을까, 그는 이보다 더 잘 했을까가 궁금했는데,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오구리 슌이 했다고 한다. 원작 예고편을 보니 우리나라 더빙보다 훨씬 낫다. 그건 아마도 일본 영화의 색을 누구보다 일본 사람들이 잘 알아서 그런 것일 것이고,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일본 제작진이 더 적확하게 찾아낸 것일테지. 하여간 누가 더빙을 했는가에 따라서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던데, 만약에 보실 생각이라면 자막으로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나는 다음에 볼 기회가 생긴다면 자막으로 보겠다. 정말로 원본 같다. 우리나라 더빙이 복사본 같다면...

네째는 3D영화로 본 건데, 보는 내내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이 3D 효과라는 것인지, 그것이 크게 다가오지 않아서 말이다. 2D로 봐도 3D와 별 차이가 없는게 아닐까 싶던데, 내가 잘못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다섯째는 영화가 약간의 진화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을 내용속에 집어 넣으려 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절대 멸종하지 않을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고는 있지만, 멸종은 과거에 늘 반복되었던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에도 벌어질 사실이고 말이다. 그런 멸종이 있어 왔기에 현재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양 큰소리 땅땅 치면서 사는 기회를 얻은 것이고, 우린 이런 현재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 우리 역시 언젠가는 멸종될 것이라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종말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렇다고 그걸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가 두려워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운명도 아니고, 또 그것이 아주 아주 먼 미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런 이야기가 일반적인 대화속에선 흔하게 접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보면서 솔깃했다. 그걸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영화속 헛소리처럼 들려왔을지 모르겠지만서도...

2시간 여를 흥미진진하게 봤다. 다만 중간에 깜빡하고 졸길래 피곤했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나처럼 졸았다는 분이 더 계시더라. 그 말은 즉, 어쩜 피곤해서가 아니라 지루해서 였을지도...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을 뿐이고, 영활 보는데 지장이 있는것이 아니었으니, 고로 결론은 재밌었던 걸로. & 볼만한 영화였던 걸로. 하지만 12세 이하는 관람시키지 않는 걸로. 재밌으면 조카 보여줄 생각으로 봤는데, 안 보여 주기로 했다. <그래비티> 이후로, 왠만하면 연령가는 지키기로 마음 먹었는데, 이 영화 는 12살 이상가이면 적절하지 않는가 싶다. 해서 조카는 나중에 나중에 알아서 보라고 하기로. 12세 이상 되시는 분들 역시 알아서 하시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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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본 거 없고 가본 곳 없어 인터넷 중매 사이트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월터 미티. 17살 이후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살아온 이 42살의 남자에게서 한때 모히칸 머리를 하고 킥보드 우승을 거머쥐던 꿈많은 소년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지금의 직장인 <라이프>지에서 사진 인화 당담을 해온 지 어언 16년,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그의 인생은 어찌보면 단조롭고 소심하게 보입니다. 그런 그의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겨나죠. 아니, 변화라기 보단 변화를 시도하고픈 일이 생겨났다는 것이 정확한 것일 겁니다. 바로 그의 직장에 어여쁜 이혼녀 쉐릴이 들어온 것이여요. 그녀에게 반한 월터는 어떻게해서든 그녀에게 관심을 끌어보려 하지만 그의 소심함은 이때에도 그의 발목을 붙들게 됩니다. 우연히 쉐릴이 e-하모니란 중매 사이트에 가입했다는 말을 줏어들은 월터는 그녀에게 접근해볼 생각으로 큰 맘 먹고 그 사이트에 가입을 합니다. 하지만 프로필 난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는 살아있는 좀비같은 그의 이력은 매칭 시스템 자체에서 그를 걸러지게 만드는 수모를 당하게 되죠. 상상속에서만은 누구보다 용감하고 재밌고 말발 죽여주는 그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현실속의 그일뿐이니 말입니다. 이에 자신이 한심스러워진 월터, 하지만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개선을 위해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일일 것입니다. 그는 다시 소심하게 주저앉고 말죠. 그렇게 조금이나마 용기를 내보았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의 인생에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직장인 <라이프>지 사가 하룻밤새 팔려 버린 것이죠.월터는 이제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잡지의 마지막 호를 위해 사진을 인화해야 합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 마지막 호를 발행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모자라, 그 기념비적인 마지막 호를 장식해줄 표지 사진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방군데를 찾아봐도 사진은 나타나지 않고, 결국 월터는 사진 작가인 숀을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혹시나 그가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죠. 문제는 숀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모험과 아름다움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는 방랑가라는 것이고, 해서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 벼랑위에 서 있는 월터, 과연 그는 그의 마지막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우직하고 책임감이 강한 소시민을 위한 찬가라고나 할까? 세계적인 영화배우긴 하지만 어딘지 루저의 인상이 짙은 벤 스틸러가 자신에게 딱 맞는 역을 가지고 멋진 영화를 만들었다. 루저들에게 연민과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준다는 점에서 벤 자신이 무척 선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얼마든지 거들먹 거리면서 승자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있음에도,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에 치이고 치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착한, 그래서 험난한 세상에 더 치이고 치이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그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려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고나 할까, 해서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벤 스틸러가 감독겸 배우를 했다.)의 메시지에 태클을 거는 사람들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적어도 메시지 자체는 훌륭했다는 뜻이다. 거기에 무엇보다 화면이 화려하다. 난 벤 스틸러가 이렇게 영화를 그림같이 찍으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감독으로써의 역량을 다시 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는데, 곳곳의 풍광이나 화면을 구성하는 면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멋지더라. 월터의 직장을 <라이프>지로 한 것도 다 이런 화면을 위해서였구나 싶을 정도로 화면들이 탁월했다. 영화들 중에서는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큰 화면에서 보지 않아도 충분한 영화가 있고, 3D 촬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2D로 보는 것이 더 나은 영화들도 있다. 제작사에서 내건 것과 실제로 보면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집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본 영상과 직접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본 영상이 너무 큰 차이가 나서 하는 말이다. 아마도 굉장히 공들여서 찍었을 듯한 곳곳의 풍광들은 그 자체로 눈을 시원하게 했다. 안구 정화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야 라는 듯 말이다. 하니, 만약 월터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솔깃하신 분들이라면 되도록이면 영화관에서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다시 말하지만 작은 화면으로는 감독이 보여주려 한 풍광들의 감흥이 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쩌면 그 풍광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료 값을 하지 않을까 한다. 화면이 그만큼 신선했다.

 

등장인물들의 따스함이나 정감 같은 인간적인 면모, 커다란 화면을 꽉 채우는 탁월한 영상미, 그리고 배우들의 허술하지 않은 연기등 장점들이 많은, 그래서 TV에서 광고 영상을 보여주는데 왠지 내가 전에 가본 여행지를 우연히 둘러 보는 듯한 아련함과 애틋함이 배어나는 장점이 많은 영화임에도, 다만 단점이라면 이야기가 비교적 단조롭다는 것이다. 초반을 지나고 나면 대충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짐작이 되고, 더이상 뻗어나갈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타협을 한게 아닐까 싶었다. 최소한의 배우들과 최소한의 이야기로 대신 영상만큼은 최대한으로 하자는 선에서 말이다. 그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가본 곳 없음 해본 곳 없음에 동의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다. 아마도 그의 프로필 난이 nothing에서 something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들에 같이 환호성을 지르게 되질 않을런지... 적어도 난 그랬으니 말이다. 더불어, 이 영화의 핵심 키 플레이어인 숀이 말한 Life의 정수를 담은 25번째 사진은 정말로 기발했다. 마지막 감동을 위한 반전용으로 이보다 더 적절하긴 어렵겠다 중얼 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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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차분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던 영화다. 낳은정이냐 기른 정이냐는 닳고 닳은 주제를 가지고 과연 들어볼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기필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 합격점을 받아도 좋지 싶다.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나, 자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막다른 선택 앞에 선 자들의 갈등등 모두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은 가볍게 넘어가는 대신, 아이를 바꾸는 과정속에서 변해가는 두 가족의 마음의 결을 곱게 따라간 것이 특징. 특히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제목이 암시하듯, 바뀐 아버지의 주인공중 한 명인 료타의 심정 변화가 압권이다. 그렇다면 이 뻔해 보이는 주제 속에서 감독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버지 료타의 시선을 따라 가보기로 하자.

 

대기업 간부 료타는 자신의 아이 케이타가 병원에서 바뀐 남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현실이 되어 버렸을 때의 충격이란 ...글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생겨났는지 분노할 새도 없이 상대 부모와 만남을 가지게 된 료타는 다소 의기양양해진다. 자신의 친 아들 류세이를 키우고 있는 상대방 아버지 유다이가 거의 백수이다시피한 게으르고 무식한 전파상 주인이란게 한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만나자 마자 위자료 운운하는 속물 근성에 쉬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부부 사이등...료타는 은근히 자신이 두 아이를 다 키워도 되지 않을까 자신만만해 진다. 일단 두 부부는 아이들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시간을 두고 친해진 뒤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합동 나들이, 만나면 만날 수록 두 가족은 접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싶게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동경의 고급 아파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긴 했지만 다소 쓸쓸해 보이는 케이타네와 달리 류세이네는 시골 가게 뒷방에 살림집을 차려 놓고 올망졸망 동생 둘과 치매끼가 있는 할아버지등 여섯이 복작대며 살아왔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케이타와 거칠 것 없는 야생마 같은 류세이, 정이 든 케이타와 낯설기만 한 류세이...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라는 기로에서 선 료타는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 것이 신기하다. 정답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하련만,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만 커간다. 아이들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료타와 몸 부서져라하고 아이와 놀아주는 유다이...처음 유다이를 만만하게 봤던 료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자인 자신보다 그가 더 좋은 아빠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당황한다. 아내 역시 그에게 부족한 아빠라고 질타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은 그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억울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 타격을 입힐 상대는 바로 다름아닌 자신의 친아들이었으니...과연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그 아이의 도발을 어떻게 해결을 해 나갈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라는 질문이 대변하듯, 부모들의 입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6년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가 바뀐 아이란 소리를 들었을때 기겁을 하는 것은 물론 부모들일테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들이 타인이라는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충격 역시 만만찮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 역시 부모만큼이나 충격을 받고, 현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 하며, 미래를 두려워 할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서도, 아이들의 경우는 그 사건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탄스러운 것은 부모들이 더할 지도 모르지만, 정작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른들에겐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서도, 아이들에겐 위로는 커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어른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반면,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어휘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래서 우리는 지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상처를 받는 것은 어른이라고 말이다. 가장 갈등을 하는 것도 역시 어른이고, 여지껏 부은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아파하는 것도 어른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이 영화는 말한다. 사랑을 주는 것은 어른뿐만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린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그러니 그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냐고 관객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런 생소한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지 싶다. 아버지 료타...그는 직장 일에 바빠 아이 키우는 것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린 인물이다. 홀로이다 시피 아이를 키우면서 반복되는 서운함과 외로움이 딱지로 자리잡았을 무렵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료타의 아내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격은 남편에게 당신은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는 일갈을 하게 한다. 이에 료타는 억울하다. 그는 단지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을 뿐이고, 여리고 순하기만 한 케이타가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해나갈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며, 거기에 재능까지 없는 아들이 누굴 닮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와의 현재에 마냥 행복한 아내와 달리 료타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케이타가 아들로써 부족했기에 아이가 바뀐 것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냐는 아내의 말에 료타는 상처를 받는다. 료타는 자신의 진심을 알릴 길 없어 답답하다. 그렇게 오해가 쌓이면서 가족의 불화가 계속될 것 같았던 그때, 그에게 강적이 나타난다. 똑똑한데다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줏대를 가진 인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자신의 미니미, 류세이다. 류세이의 눈을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오해받음직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그제서야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케이타가 사실은 상처를 받았다는걸 깨닫게 된다. 과연 그는 아이의 상처를 어떻게 보살펴 줄 수 있을까? 

전형적인 일본 영화답게 미묘하고 (subtle) 은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 이런 작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응이 되면 그것도 영화의 묘미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하던데, 아마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톤은 상당히 바뀌지 않을까 한다. 보다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풀어나갈테지. 뭐, 명백하고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킬 것이라는 것이 다른 매력이 되긴 하겠지만서도, 이 영화가 가진 생명력과는 다른 맛이지 않을까 한다. 등장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사랑을 들려줘서 고마웠다. 특히나 주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그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배역을 만난 것 같아 흐믓했다. 그의 필모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영화가 아니었을지...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줘서 감사했다. 처음엔 영화의 제목이 탐탁치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이 제목외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기나긴 시간을 동반한...아버지가 되어 가는 한 남자의 멋진 여정에 동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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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생일날 팀은 아버지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바로 그들 가문의 남자들에게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죠. 처음엔 아버지의 장난인줄 알았던 팀은 아버지 말대로 컴컴한 곳에 가서 두 손을 꼭 쥐자 자신이 가고 싶어하던 시간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놀라움도 잠시, 곧바로 자신의 능력에 적응한 그는 바로 그것으로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수 있을까 궁리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그의 아버지는 너의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인생을 헛살 수도 있다는걸 알려 주면서요.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원했던 팀은 자신의 능력으로 첫사랑을 이뤄 보려 하지만, 시간 여행으로도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그는 런던으로 가서 초짜 변호사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런 일 없이 3년을 보낸 그는 어느날 우연히 메리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첫눈에 그녀가 좋아진 팀은 그녀에게 작업을 걸어보지만, 남을 도와주기 위해 시간여행을 쓴 덕분에 오히려 그녀와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여러번의 시간 여행 끝에 메리의 마음을 얻게 된 팀, 과연 그녀와의 인연은 천생 연분이 맞았던 것일까요? 우연히 과거 첫사랑과 재회한 팀은 그녀의 유혹에 흔들리게 되는데요...





로맨스 영화라고 해서 뜨악해 하다가, 먼저 보신 리뷰어들의 호평에 궁금해서 보게 된 영화다.일단 제목이 <사랑에 관하여>가 아니라 <시간에 관하여>인 점에 주목을 해야 하지 싶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것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아지니 말이다.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그 능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물음에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심플하게 사용하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만약 그런 능력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일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위해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팀은 전적으로 가정적인, 그저 가정만을 위해서 사는 괜찮은 인간이다. 그에게 시간 여행을 바꾸어놓을만큼 대단한 일들이란 타인에게 예기치 않게 무례를 범하거나, 반한 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동거하는 여인의 부모님에게 안 좋은 인상을 되물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가장 심각한 일이라면 나쁜 남자에게 빠져 인생을 망치고 있는 동생을 위해 시간 여행을 했던 때 뿐...그는 수차례의 시간 여행을 통해 자신과 남의 인생을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깨닫게 된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게 된다면 굳이 시간 여행이라는 것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해서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 살자...라는 것이 이 영화의 교훈이지 않았는가 한다.

착한 영화다. 다소 무난하게만 이야기를 풀어 나간것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서도, 어찌보면 무난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어려웠을 거란 생각도 든다. 시간 여행이란 것이 어찌 쓰이냐에 따라서 여러 버전이 가능한데, 그 버전을 해석해 내기엔 우리가 시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해서 내 생각엔 이 영화의 작가가 자신이 아는 최대한의 시간 내진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 넣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그리고 인생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들려주진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것을 알기엔 우리 모두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해서 적어도 작가가 자신이 아는 것을 잘 풀어놓았다는 점에서만큼은 인정을 해줘야 할 듯 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집어 넣은 것이 아닌 아는 것만 설득력있게 풀어놓은 것이 정직해 보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화가 하려는 말을 유추해 본다면,  우리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자, 뭐, 이런 말이지 않는가 한다. 누구나 잘 알지만서도, 실천이 안 되서 문제인 주제를 가지고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써서 설득력있게 풀어놓았지 싶다. 아쉬운 점이라면, 전반적으로 무난하긴 했는데, 그게 다였다는 것이다. 딱 1% 부족한 그런 느낌? 다시 한번 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매력적인 장면이나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 러브 액추얼리>나 <노팅 힐> 은 참 잘 만든 로맨스 영화이지 싶다. 톡쏘는 매력이 남아 있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어느정도는 현실성 있으면서도 사랑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인가 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토를 단다고 해도 인정해야 할 단 한가지...팀의 아버지를 연기한 빌 나이의 캐릭터만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아버지 어디 없나요 싶게 지혜로운 아버지 상을 연기하시던데,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심금을 울렸다 .특히나 아들의 결혼식장에서 한 들러리 연설은 최고...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새겨들어 볼만한 말이었지 싶다. 빌 나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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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라. 왜  제목이 바람이 분다일까 라는 의문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풀린다. 폴 발레리의 시 '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라는 시에서 따온 제목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장이라고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은퇴 작품으로 선택한 이 영화, 과연 그는 자신보다 대부분이 한참 어릴 관객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난 그것이 궁금했었다. 격변의 세월을 70년 넘게 사셨으니, 무언가 인생을 사는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가 누군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손꼽히는 애니매이션계의 거장 아니던가. 그런 그가 하고픈 말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 평생을 정리하면서 그는 분명 무언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변명이건 사죄건 이해를 구하는 것이건 아니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건 간에...영화관을 나오면서 들었던 가장 큰 느낌은 불쌍하단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갔어야만 했던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건 일본 사람들이건 중국 사람들이건 간에...그들이 누구이던가. 지진을 겪고, 전쟁에 휩쓸리고, 내란을 겪고,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가난과 무지와 절체절명의 폐허속에서 일어나야만 했었던 사람들 아니던가. 그 속에서도, 단지 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신이 아직은 멀쩡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했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라는 시 구절에서 허무함을 읽는 것은 비단 나뿐인 것일까? 그 절망과 비참함과 수치심, 불안과 슬픔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바람이 불어오니 살아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현재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았었다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남는 것은 치욕과 파멸뿐이었고. 세월을 되돌아보니,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후회된다고, 그럼에도 후회를 딛고 우리는 그렇게 한 세상을 살아냈으니, 너희도 살아라, 라고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전쟁이란것은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보내고 있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그것이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데 하필이면 제로센의 창조자인 지로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볼멘 소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본 시각에선 그것이 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좋아하는 최고의 것들을 모아 이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애니가 그간 그가 만들었던 모든 작품들을 모아 놓은 듯한 인상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 싶다. 이 영화에서는 붉은 돼지와 토토로와 코난과 포비와 나나가 보인다. 그가 평생을 사랑해온 모든 것이.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런지...이게 바로 내가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이야 라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 전범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지로를 내세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이상은 환상의 뒤로 숨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진짜 사나이>에서 요즘은 실전 모의 전투에 레이저 총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마치 어른들이 총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저 총이 실탄을 장전한 실제 총이라면 그들에게 그런 여유가 묻어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테니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에 나가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서 경석처럼 딸 바보 아빠일 수도 있고, 장혁처럼 성실한 근육맨일 수도 있으며, 샘처럼 호기심에 군대에 끌려 나온 사람일수도, 멋 모르고 차출된 아기 병사일수도, 어디에 세워 놓든 구멍 병사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개인이라는 것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그저 우리 모두 하나의 나사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정신을 차리면 되지 않았느냐, 왜 그런 악의에 가담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린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고, 강한 존재였던 적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가 누가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 그가 우리들을 어디든지 이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앎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 역시 전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우수한 무기를 가졌을 때에는 그것을 통제/ 제어하는 보다 높은 도리, 의리의 마음과 과학 정신이 필요하다."고.

 

이 영화는 멋진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을 천재 비행기 설계자가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어떻게 이용당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단지 우리는 천재인 그가 그런식으로 이용당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지로에겐 얼마든지 다른 선택이 가능했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우수한 전투기를 만들어 낸 그에게 전쟁광의 혐의를 씌워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한 엔지니어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최선이 그런 살상을 불러왔다는 것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난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이 노거장은 실은 우리는 보통 사람이었다고 , 그걸 알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느껴졌다.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믿고 꿈꾸고 장난치면서 살아가고 팠던 인간들이었다고 말이다.

 

 

이 영화를 보기전에 가장 큰 두려움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일어나서 " 이봐! 너희들은 가해자야, 피해자가 아니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고 소리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반딧불의 묘>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찌나 가증스럽던지, 그전까지 줄줄 울고 있었던 것을 되돌려 받고 싶었던 기억이 생생해서 말이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화질은 큰 화면으로 보길 잘 했다 싶게 생생하게 아름다웠고, 군데 군데 신경을 많이 쓴 흔적들에는 일본 사람들의 꼼꼼함과 완벽을 추구하는 집념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재미가 없고,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일과 사랑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도 못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면서도 인간들은 어찌나 순수한지 거의 믿기가 힘들었고, 영화속 내의 로맨스는 이미 가치를 오래전에 상실한 듯한 순애보를 다루고 있어서 헛웃음이 나더라. 우린 시대에 뒤쳐져 버린 듯한 그의 감성을 지켜 보면서 계면쩍음을 감출 길이 없어 하지만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감성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그 시대를 살아낼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당신은 어떨 것이라 보는가? 그런 시대에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약간의 환상과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그 만의 방공호였다면, 우린 그를 조금은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면 그 가혹한 시대를 살았던 것은 우리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에게 조금씩 빚을 졌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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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3-09-0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우익의 초점은 늘 '잔인했던 일본의 만행'을 애써 외면하고, 불쌍했던 일본인들, 가난했던 시절, 지진... 전쟁과 원폭...으로 맞춰집니다. 당연한 거죠. 그런 우익조차 갖지 못한 한국이 불쌍한 거구요.

이네사 2013-09-09 11:46   좋아요 0 | URL
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