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차분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던 영화다. 낳은정이냐 기른 정이냐는 닳고 닳은 주제를 가지고 과연 들어볼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기필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 합격점을 받아도 좋지 싶다.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나, 자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막다른 선택 앞에 선 자들의 갈등등 모두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은 가볍게 넘어가는 대신, 아이를 바꾸는 과정속에서 변해가는 두 가족의 마음의 결을 곱게 따라간 것이 특징. 특히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제목이 암시하듯, 바뀐 아버지의 주인공중 한 명인 료타의 심정 변화가 압권이다. 그렇다면 이 뻔해 보이는 주제 속에서 감독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버지 료타의 시선을 따라 가보기로 하자.

대기업 간부 료타는 자신의 아이 케이타가 병원에서 바뀐 남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현실이 되어 버렸을 때의 충격이란 ...글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생겨났는지 분노할 새도 없이 상대 부모와 만남을 가지게 된 료타는 다소 의기양양해진다. 자신의 친 아들 류세이를 키우고 있는 상대방 아버지 유다이가 거의 백수이다시피한 게으르고 무식한 전파상 주인이란게 한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만나자 마자 위자료 운운하는 속물 근성에 쉬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부부 사이등...료타는 은근히 자신이 두 아이를 다 키워도 되지 않을까 자신만만해 진다. 일단 두 부부는 아이들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시간을 두고 친해진 뒤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합동 나들이, 만나면 만날 수록 두 가족은 접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싶게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동경의 고급 아파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긴 했지만 다소 쓸쓸해 보이는 케이타네와 달리 류세이네는 시골 가게 뒷방에 살림집을 차려 놓고 올망졸망 동생 둘과 치매끼가 있는 할아버지등 여섯이 복작대며 살아왔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케이타와 거칠 것 없는 야생마 같은 류세이, 정이 든 케이타와 낯설기만 한 류세이...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라는 기로에서 선 료타는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 것이 신기하다. 정답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하련만,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만 커간다. 아이들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료타와 몸 부서져라하고 아이와 놀아주는 유다이...처음 유다이를 만만하게 봤던 료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자인 자신보다 그가 더 좋은 아빠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당황한다. 아내 역시 그에게 부족한 아빠라고 질타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은 그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억울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 타격을 입힐 상대는 바로 다름아닌 자신의 친아들이었으니...과연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그 아이의 도발을 어떻게 해결을 해 나갈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라는 질문이 대변하듯, 부모들의 입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6년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가 바뀐 아이란 소리를 들었을때 기겁을 하는 것은 물론 부모들일테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들이 타인이라는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충격 역시 만만찮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 역시 부모만큼이나 충격을 받고, 현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 하며, 미래를 두려워 할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서도, 아이들의 경우는 그 사건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탄스러운 것은 부모들이 더할 지도 모르지만, 정작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른들에겐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서도, 아이들에겐 위로는 커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어른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반면,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어휘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래서 우리는 지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상처를 받는 것은 어른이라고 말이다. 가장 갈등을 하는 것도 역시 어른이고, 여지껏 부은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아파하는 것도 어른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이 영화는 말한다. 사랑을 주는 것은 어른뿐만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린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그러니 그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냐고 관객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런 생소한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지 싶다. 아버지 료타...그는 직장 일에 바빠 아이 키우는 것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린 인물이다. 홀로이다 시피 아이를 키우면서 반복되는 서운함과 외로움이 딱지로 자리잡았을 무렵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료타의 아내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격은 남편에게 당신은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는 일갈을 하게 한다. 이에 료타는 억울하다. 그는 단지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을 뿐이고, 여리고 순하기만 한 케이타가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해나갈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며, 거기에 재능까지 없는 아들이 누굴 닮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와의 현재에 마냥 행복한 아내와 달리 료타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케이타가 아들로써 부족했기에 아이가 바뀐 것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냐는 아내의 말에 료타는 상처를 받는다. 료타는 자신의 진심을 알릴 길 없어 답답하다. 그렇게 오해가 쌓이면서 가족의 불화가 계속될 것 같았던 그때, 그에게 강적이 나타난다. 똑똑한데다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줏대를 가진 인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자신의 미니미, 류세이다. 류세이의 눈을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오해받음직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그제서야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케이타가 사실은 상처를 받았다는걸 깨닫게 된다. 과연 그는 아이의 상처를 어떻게 보살펴 줄 수 있을까?
전형적인 일본 영화답게 미묘하고 (subtle) 은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 이런 작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응이 되면 그것도 영화의 묘미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하던데, 아마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톤은 상당히 바뀌지 않을까 한다. 보다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풀어나갈테지. 뭐, 명백하고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킬 것이라는 것이 다른 매력이 되긴 하겠지만서도, 이 영화가 가진 생명력과는 다른 맛이지 않을까 한다. 등장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사랑을 들려줘서 고마웠다. 특히나 주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그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배역을 만난 것 같아 흐믓했다. 그의 필모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영화가 아니었을지...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줘서 감사했다. 처음엔 영화의 제목이 탐탁치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이 제목외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기나긴 시간을 동반한...아버지가 되어 가는 한 남자의 멋진 여정에 동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