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공원에서 아이들이 떼거지로 놀던 중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막대기로 후려치고 만다, 맞은 아이의 이가 두개나 나갔으니 부모 입장에선 대형 사고다. 때린 아이를 잡아다 실컷 두들겨 패도 시원찮을 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질 않는가. 배울만치 배운 우리들은 그 정도의 사건은 또래 소년들 사이에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걸 이해한다. 해서, 뉴욕 중산층을 대표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벌여놓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지극히 점잖고, 서로를 이해하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공기중에 떠돈다. 때린 아이의 부모는 자기 자식의 망나니 짓에 경악을 했다고 토로하고, 맞은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도 얼마든지 가해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고 맞장구를 친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벌인 일이지만, 철이 든 자신들은 지성적으로 해결해 보자고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이 부부들, 어째 분위기가 점점 수상쩍어진다. 변호사인 가해자의 아빠 앨런 코윈은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제끼느라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놓고, 그런 남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아내 낸시는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남의 집 거실에서 토하고 만다. 이보다 더 가관인 것은 피해자의 엄마인 페넬로페다. 처음 안경을 끼고 컴푸터 자판을 두들기면서 명랑하게 사건을 정리할 때부터 심상찮던 그녀, 모든 이에게 자신이 얼마나 너그럽고 지적이며 우아하고 세계평화에 일조를 하려 노력중인지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그녀는 가해자 부모의 작태에 비난을 퍼붓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무능하고 착하기만 한 남편 마이클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에 허허실실 좋은게 좋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던 마이클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아내를 코윈 부부 앞에서 까발리고 마는데...가겠다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다간 이런 저런 사정으로 다시 마이클의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코윈 부부, 매번 다시 들어갈때마다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기만 하는데, 과연 이 소동의 끝은 어찌 될까나?


재밌을 거라는 생각에 봤는데, 결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인가 그다지 재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커풀이라면 공감의 웃음을 지으며 볼 것이라고 하던데, 글쎄...내가 위선적인 아내나 늘상 핸드폰을 손에 쥐고 놓지 않은 남편과 살아 본 적이 없어서인가, 남의 집 거실에서 신나게 싸워 대던 그들의 말싸움이 흥미진진하단 생각이 들지 않더라. 잘 모르겠다. 내가 결혼 생활을 해봤더라면 그들의 짜증이 정말 내 일처럼 느껴졌을런지. 공감이 안 되서인가, 싸움이 번지는 과정들도 자연스럽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저런 장치들을 끼워넣은듯해서 억지스러웠다. 더군다나 그들의 유치한 말장난이라니... 서로를 힐난하는 말들도 그닥 와닿지 않았다. 남의 집 안방에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부부들이라.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인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었다. 물론 네 배우들의 연기는 기가 막혔고,( 가장 인상적인 배우를 꼽으라면 앨런 역을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 )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모인 지적이고 우아한 중산층 부부들이 결국 자신의 모든 가면들을 벗어던지고 발악을 해대는 모습이 가관이긴 했다. 특히나 페넬로페의 변신은 그야말로 눈이 부셔서, 영화가 끝날 쯤이 되니 그보다 가증스러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얄밉더라. 또 그런 페넬로페의 가식과 위선에 꼬박꼬박 비아냥을 대던 앨런은 얼마나 영웅적으로 보이던지...영화가 시작될 때에는 가장 짜증나고 속물적인 사람이 앨런 같아 보였는데, 끝날때쯤 되니 가장 인간적이여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그라는건 정말로 아이러니했다. 특히 제인 폰다 같은 여자를 보면 당장 뛰쳐나가 AAA에 가입하고 싶어진다고 하는 그의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내가 유일하게 박장대소한 장면) 그래, 이렇게 털어놓자니 좀 뻘쭘하긴 하지만서도, 그런 여자들의 열성이 지나치게 느껴지는게 사실이지 않나.  워낙 정당하고 올바른 명분을 외쳐대니 뭐라 말은 못하지만서도, 반발심이 들게 하긴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어쨌거나, 사람은 절대 겉모습이나 행동 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영화, 내리막길을 줄창 걸어가는 부부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영화,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떻게 그 갈등을 봉합하려나 궁금하기도 했던 영화가 되겠다. 결론은?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 누구도 그 답을 내려주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인가 마무리가 갑작스럽다. 마치 어떻게 종결을 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몰라서 그냥 끝내 버린 듯이. 어쩜 바로 그걸 노렸는가는 모르겠으나 왠지 더 있는데 그만 둔 듯한 기분이 들어 어정쩡했다. 연극을 원작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아마도 원작에선 그렇게 끝이 나나 보다. 연극에선 그렇게 끝이 나도 암전으로 끝을 알려주니 여운처럼 느껴질 수 있었겠으나, 영화속에선 그게 잘 먹히지 않았다. 아니 이게 다야? 맥없이 이렇게 끝나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다만 마지막 장면은 블랙코미디 답더라. 소동을 일으킨 주역들이 부모들과는 달리 잘 지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이미 벌써 사건을 몽땅 잊어버리고 친구가 되어 있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혹 모르지, 이들 부부도 나중에는 각자가 친구가 될지도...남편은 남편들끼리, 아내는 아내들끼리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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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던 하나는 강의실에서 늑대처럼 홀로 떨여져 앉아 있는 '그' 를 만나게 된다. 외로운 처지의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그'는 어렵사리 자신이 늑대 인간이라는 것을 밝힌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 정도는 무섭지 않았던 하나는 임신을 하고, 곧 연년생 아이 둘이 태어난다. 눈과 비가 오던 날 태어났다고 아이들의 이름을 유키와 아메로 지은 두 사람은 행복에 젖는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그만 사고로 죽고 만다. 늑대가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전혀 아는게 없던 하나는 늑대 아이를 어떻게 홀로 키우나 걱정이다. 유일하게 남겨진 '그'의 흔적인 운전 면허증을 보면서 하나는 다짐한다. 비록 혼자일 지라도 아이들 잘 키워 내겠다고, 그러니 지켜 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역시 늑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본인들도 자신이 인간인지 늑대인지 헷갈리는 듯한 아이들은 화가 나거나 신이 나면 순식간에 늑대로 변해서 뛰어다니기 일수다. 늑대로써의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머나먼 시골로 이사를 간다. 결심을 단단히 하고 온 사람들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는 산골에서 하나는 빈집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면서 아이들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하나 가족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하나의 진지함과 열성에 감화되어 점차 그녀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하나가 산골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나가는 사이 아이들 역시 무럭무럭 자라난다. 외향적이고 겁이 없는 큰 아이 유키는 부산하기 그지 없고, 둘째 아메는 남자 아이임에도 내향적이고 소심하다.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유키는 엄마를 조르고 졸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절대 늑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학교에 다니게 된 유키는 곧 학교에 적응해서 신나해 하지만, 아메는 좀처럼 누나처럼 적응하질 못한다. 결국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쯤 되자 둘의 차이는 인간과 늑대의 간격만큼 벌어지게 된다. 늑대가 되어 숲에서 살고 싶은 아메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 속에서 살고 싶은 유키, 둘의 갈등을 지켜 보면서 엄마는 알지 못할 불안감에 떨기 시작하는데...

<유키와 아메의 어린 시절, 놀다가 집을 어질러 놓은 현장을 보고 계심>          

 <하나 가족의 행복한 한때, 그들이 아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때>

늑대와 인간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힘들게 키운다는 이야기의 영화다. 맨처음 영화가 시작되면서 드러나는 화면이 압권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오는 장면도...어떻게 저렇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을 할까 입이 안 다물어 질 정도로 장관이다. 하지만 애니는 영화다. 그림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이야기도 재밌어야 한다는 뜻이다. 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궁금했었는데 ,일단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지 싶었다. 특히 하나가 아이들을 위해 산골로 가게 되면서 적응하는 과정들이 볼만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양육 전쟁만 그린줄 알았는데, 오히려 산골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들이 더 흥미진진하게 묘사되고 있었지 않나 한다. 마치 이야기는 이렇게 풀어나가는 것이야 하는 듯, 서두르지 않으면서 하나와 산골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친밀해지는 과정들을 정겹게 그려내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결국 영화 초반엔 엄마 혼자 키워낼 수 있을까 한없이 걱정되던 두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인간 꼴을 갖춘 어린이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훈훈했다. 거기에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보는 건 덤!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해낸 엄마에게 박수를, 하지만 그렇게 대견한 그녀에게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그 아이들의 반쪽 유전자는 늑대라는 것, 해서 자신의 본능을 잃어버리지 못한 아메는 결국 엄마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과연 하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 것인가?

                          <아이들의 키를 재고 있는 하나,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이런 장면들이 익숙하실 것이다.>


아이들을 키웠던 12년이 꿈이나 동화같았다고 말하는 한 엄마의 회상기다. 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양육기는 늑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변칙성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시는 분들에게 아주 아주 익숙하게 들려온다. 늑대의 아이건 인간의 아이건 간에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은건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낳은 아이가 결코 자신과 같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그를 보내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하나의 여정이 매우 쉽게 공감이 되었다. 아이를 놔주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 자신이 아무리 막고 싶다해도 막아선 안 되는 것임을 결국엔 받아들여야 하는 것 또한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누구에게나 때가 오는 법 아니겠는가. 그가 자신의 길을 간다고 나섰을때 막아설 순 없다는 것을 , 설령 그것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라 할지라도 말이다.


걸작이라는 말에 보긴 봤는데, 그저 괜찮다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중반까지는 재밌게 보긴 했는데, 중반 이후로 마무리가 어째 밋밋하게 흐르는 듯했다. 아무리 내가 낳은 아이라도 나와 다른 존재이니 그의 성장과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주제에는 백번 공감하지만서도, 다만, 그것이 그다지 감동적으로 다가오진 않더라. 아마도 내가 그걸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서도, 아니면 엄마인 적이 없어서? 하여간 모자의 이별 장면에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전혀 상관없이 말똥 말똥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든 불평 하나. 누가 이걸 전체 연령가로 해놓은 거야? 이게 전체 연령가라니, 그럼 유치원생이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란 말야? 적어도 12살이나 15살은 되어야지나 이해가 될 듯 싶은 영화를 전체 관람가로 해놓다니, 7 살인 조카랑 갈까하다 혼자 갔는데, 보는 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데리고 갔었다간 매우 미안해 하면서 영화관을 나왔을 테니 말이다. 하니, 제발, 전체 관람가는 진짜로 전체가 관람할 수 있는 것에만 붙여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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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암투 한가운데서 점점 광기가 극에 달하고 있던 광해는 자신의 대역을 찾아 올 것을 도승지 (허균)에게 명한다. 암살 시도에 대비, 자신 대신 편전에 두게 하기 위함이다. 허균은 어렵사리 기방집에서 광대 노릇을 하고 있던 하선을 발견하곤 그를 데려 온다. 왕조차 헷갈릴 정도로 왕과 똑같은 외모에 목소리. 곧 진짜 왕은 정부를 찾아 궁을 빠져 나가고, 하선은 돈 몇 냥에 하룻밤 왕 놀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중 왕이 양귀비에 취해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정 공백에 따른 혼란을 우려한 도승지와 조 내시는 하선을 데려와 며칠 땜빵 왕으로 세우기로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하선은 본격적인 왕 대역에 돌입하게 된다. 궁의 법도를 전혀 모르는 하선은 처음 이런 저런 실수를 하지만, 그런 실수마저 그간 까칠한 왕을 상대하면서 지쳐가고 있던 궁궐 사람들에겐 단비처럼 느껴진다. 독기가 좔좔 흐르는 표독스런 왕이 아니라 웃기도 하고 나인들에게 자상하게 하문도 하는 광해가 그들에겐 친근하기 이를데 없다. 한편 광대 출신의 하선을 근엄하고 광기 충만한 왕으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미션에 돌입한 허균은 바쁘기 그지 없다. 진짜 왕이 없는 사이 그간 미뤄왔던 대동법과 호패법을 실시하려던 허균은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하선은 그런 각료들의 싸움이 이해 되질 않는다. 영문을 모르는 자신이 싫어 조내시에게 야간 학습을 받은 하선은 법의 취지에 공감하고 자신이 나서서 일을 추진해 나가기로 한다. 세도가들의 권력 싸움에 눈치를 보느라 왕도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단순 무식한 하선은 신나게 일사천리로 밀어 붙이기 시작하는데...


< 하선이 허균에게 왕 노릇을 자문받고 있는 중, 처음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하선은 왕 놀이에 익숙해져 가면서 조금씩 왕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었다. 영화는 왕 자리에 질릴 정도로 오래 앉아 있던 결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왕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명색이 왕이라지만 독살당할까 두려워 밥 한끼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형편이니 그가 미쳐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서 암살 시도에 대비, 단지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왕 역활에 낙찰된 하선은 왕 노릇이 생소하고 신기하다. 처음엔 허균이 시키는 대로, 본분을 잊지 않은 자세로 시키는 대로만 하던 하선은 점차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메뉴얼에도 따르지 않는, 그저 자신 역시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지지하게 된 광해에게 주저란 없다. 전혀 왕이 될만한 재목이 아니었건만, 왕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낸 것이다. 하선이 진짜 왕보다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무식했다는 점도 있었다. 그에겐 왕이 가소로운 권문세가들도, 떼거지로 몰려와 반대를 외치는 선비들도 무섭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선으로 하여금 왕의 목소리를 내게 한 것은 그에게 상식이 여전히 통했기 때문이다. 진짜 왕에겐 오래전에 흔적 없이 잊혀져버린 그 상식 말이다. 해서 하선이 갑자기 진짜 왕 역활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붕 떠버린 대신들은 왕을 제거하기로 모의를 한다. 대신들과의 충돌이 예상되자, 허균은 하선에게 진짜로 왕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하는데...

                  <이 영화의 주역들, 이 넷의 앙상블이 의외로 볼만하다.>

하층민에 불과한 광대 하선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15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광대 하선이 왕이 되어가는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그가 진짜 왕보다 더 진짜 같은 왕이 되어 간다는 나름 성장 스토리. 진짜 왕과 가짜 왕 전혀 다른 두가지 역활을 전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 이 병헌의 연기도 일품이었고, 그외 조내시를 연기하신 장광님이나, 허균의 류승룡의 명품 연기 역시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었다. 특히나 카리스마 넘치고 광기 좔좔 흐르는 인정머리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왕과 눈물 바람이 잦은 마음 약한 광대 하선이라는 극과 극의 캐릭터를 이질감없이 소화해 낸데 이병헌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동일인의 연기가 아닌 정말로 두 사람이 연기를 한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이병헌이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고 잘한다는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외 전혀 웃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도, 오히려 그때문에 더 웃기던 조내시와 가짜 왕  하선을 쥐잡듯 잡던 판단력 빠른 허균이란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허균이라는 사람을 좋아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서도, 허균 이란 인물이 우리나라 역사에 존재하고, 그의 이름이 여전히 화자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흐믓했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은 그런 공리에 별 관심이 없겠지만서도...

 자칫 사극은 지루하고 촛점이 흐트러지기 쉬우며 전개가 느려져서 몰입이 쉽지만은 않은데, 이 영화는 적어도 그런 기우는 말끔히 해소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에피소드들로 소소하게 웃기는 장면들과 어깨에 힘빼고 주고 받는 개그같은 대사들로 재밌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장점. 다만 아쉬운 점은 별로 감동적이진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 알고 보기 때문에 더이상의 상상의 여지가 없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만서도, 어쩐지 마음을 확 끌어 당기는 무언가가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그럼에도 단 한 장면, 마음을 울린 장면이 있다면 마지막에, 허균이 나룻터에 나와 두손을 얌전히 모으고 다소곳이 정중하게 인사를 할 때였다. 그것이 바로, 백성을 위하는 우리 왕에게 우리가 취하고 싶은 자세와 마음가짐이 아닐런지...그런 왕을 기대한다는 것이 이미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인가 싶어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렇게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는 수장을 만나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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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벽돌공 테드는 5살때 이래로 집 앞 정원을 파며 고고학자로써의 꿈을 키워온 청년이다. 언젠가는 자신이 대단한 것을 찾아낼 것이라는 집념 하나만은 그대로인 테드는 그 열정때문에 올해만도 7번째 해고를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럼에도 마냥 낙천적인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주어 진다. 친하게 지내던 고고학 교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황금의 도시인 파이티티를 찾아가는 페루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것, 파이티티를 열 수 있는 비밀의 열쇠라는 반쪽짜리 석판을 가지고 떠난 테드는 공항에서 나머지 반쪽을 가지고 있는 사라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고 만다.

                                            < 석판을 맞춰 보고 있는 테드와 사라>


하지만 석판을 쫓는 것이 둘 만이 아니라서, 테드는 페루에 도착하자마자 악당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테드는 사라의 아버지가 같은 일당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사라와 테드는 사라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마추피추로 가게 된다. 마추피추에 도착한 일행은 사라의 아버지를 찾기도 전에 악당들에게 다시 잡히고 만다. 악당들 손에 잡혀 있던 아버지와 만나게 된 사라 일행은 협박에 못 이겨 석판을 넘겨 주게 된다. 드디어 파이티티가 어디에 있는 지 알게 된 악당들은 사라의 아버지를 데리고 떠나고, 남겨진 사라와 테드 일행은 석판의 열쇠 뒤에 위치해 있던 진짜 파이티티의 지도를 발견하게 된다. 악당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걸 알게 된 테드 일행은 진짜 파이티티를 향해 탈출을 시도 하는데...과연 그들은 파이티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황금의 도시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전설상으로만 내려오는 뜬구름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별로 재밌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탓에 별 기대 없이 보러 갔는데, 의외로 그럭저럭 괜찮았다. 혹시나 작년에 본 <아더의 크리스마스> 같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적어도 그 수준은 아니더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아더의 크리스마스>가 진짜로 끔찍하긴 했나보다. 그 트라우마가 본 지 1년이 다 되가는데도 여전히 상기되는걸 보면 말이다. 하여간 영화도 잘 골라야지 잘못 골랐다간 이렇게 잔상이 남아서 악몽을 꾸게 된다. 해서 굉장히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영화, <테드>는 딱히 굉장하다는 점은 없었지만 소소한 재미로 점수를 따는 그런 영화였다. 말하자면 강한 한방은 없지만 계속해서 작은 잽들을 날려대는 그런 영화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보자면, 강한 캐릭터는 없지만 깨알같은 웃음을 주는 등장인물들로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나 분노한 새로 나오던 앵무새는 벨조니가 압권이었는데, 말을 못하는, 새라고 불리는걸 싫어하는, 건방지고, 삐닥하며, 한 성깔하는 인물로써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이 등장하면 왠지 분위기가 살면서 무언가 재밌을 거란 기대를 갖게 했다는 점에서 이 애니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한다. 그외 쿠키라면 불물을 못 가리는, 덕분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고만 치고 다니지만, 그 사고 덕분에 우연히 테드 일행을 구해주기도 하는 강아지 제프나, 걸어다니는 만물상으로 모든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는 프레디는 그 탁월한 장사꾼 기질로 관객들을 웃기고, 나머지 시간에는 테드 일행들이 모험을 무사히 마치게 하는데 일조함으로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더 무섭게 생겼구만 테드를 보곤 벌벌 떨던 파이티티의 수호신 미라도 눈길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별 의미없는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알보고니 나름 존재감이 있는 등장인물이더라. 특이하게 생겨서인가 아이들에겐 그 캐릭터가 더 인상이 깊게 보여지는 듯했다. (아, 이때의 아이들이란 내 조카를 일컫는 것임. 내가 아는 아이가 조카밖엔 없어서리...단수를 복수로 확대 해석함엔 주의 요망~~~!)


< 주연들 외의 등장 인물들을 모아놓은 포스터, 이 영화에선 오히려 주연보다 조연들의 활약이 더 돋보인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과연 민주적인 애니라고 할 만했음.>


더빙판으로 봤는데, 최고의 더빙이었다고는 못하지만 괜찮았지 싶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엔 하하를 좋아해서인지 테드의 목소리에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만 아쉽게도 3D 효과가 워낙 미미해서 2D로 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아마 차이가 없지 않나 싶다. 3D 효과라고 할만한게 없었으니 말이다, 딱히 3D의 강렬한 효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서 불평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서도, 이렇게 별 차이 없는 3D라면 굳이 3D로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지 싶다. 스토리도 그냥 저냥 무난하고, 유머도 간간히 터져 나오고, 앵그리 버드는 귀여운데다, 결론도 화끈해서 적어도 애니로써의 이름값은 하지 않았는가 한다. 처음 만난 스페인 산 애니인데, 자국에서 유독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걸 보면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은 여전히 잉카 제국의 황금에 대해 미련 내진 향수가 남아 있는가 보다. 영화 줄거리 속에 투우 장면이 뜬금없이 나와서 수상타 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뜬금없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스페인의 정서가 배여 있어 스페인 사람들이 열광한게 아닐런지...그런데 여기서 의문!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면서 왜 굳이 주인공을 미국인 벽돌공으로 한 것일까? 그게 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애니의 주인공이 늘 미국인이여야 한다는 법은 없을텐데 말이다. 갑자기 이유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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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이 넘어서도 아버지 정육점에서 배달일을 데이비드 우즈냑은 걸어다니는 사고 뭉치다. 일을 시켜도 제대로 해낸 적이 별로 없는 그를 가족들 이하 주변 사람들은 갈구기 바쁘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의 페이스로 일을 해나가는 그에게 남 모르는 걱정 거리가 있으니 바로 오래전 진 빚 때문에 깡패들이 쫓아 다닌 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이모 저모 노력을 하긴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돈을 꾸어줄 멍청이가 세상 천지에 있을리 없다는게 문제다. 혹시 돈벌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대마초의 수경재배까지 시작했건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잘 자랄 생각이 없는 녀석들때문에 그는 애가 탄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어디서 돈을 구해오나 걱정하고 있을 즈음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 두가지가 전해진다. 한가지는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20여년전 정자 은행에 팔았던 씨(?)들이 모두 장성을 해서 그를 찾는다는 것. 자식이 한 명 생길 거라는 소식에도 가슴이 폭삭 내려앉았던 데이비드는 자신의 자식이 이미 533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 중 142명이 자신을 알고 싶다며 소송을 걸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곧바로 동네 변호사 친구를 찾아간 데이비드는 절대 자식들을 만나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한다. 데이비드를 변호하게 된 폴은 그의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를 건네주고, 아무 생각없이 그 중 하나를 뽑아든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고 마는데...





부모님을 이태리 여행에 보내 드리느라 빚을 진 한 청년이 있다. 그에겐 돈이 간절히 필요했지만 배운게 없는 그에게 호락호락 돈을 빌려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정자은행에 가서 스타벅이란 가명으로 자신의 정자를 팔게 된 청년은 그 이후로 그 일을 까맣게 잊어 버린다. 그 자식들이 그를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해서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중년의 사내가 이 황당한 상황에 당황하는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이것이 그에겐 불행일까 , 아니면 행운일까. 처음엔 기 막혀 하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던 사내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부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자식이라고 나타났다. 과연 그 아이들에게 부성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게 의문이었는데, 주인공이 하도 정이 많은 사람으로 나와서 그런가, 그 점을 설득하는데 무리가 없더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해가 가도록한 것이 이 영화의 장점. 예를 들어보자면 자신의 아이들 중 하나가 축구 유망주라는걸 알게 된 데이비드는 당장 축구장에 달려간다. 그리곤 경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면서 경기를 주시한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전혀 상관없는 아이었는데도, 자신의 아이라는걸 알게 된 후에 그렇게 달라진 것이다. 우습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너무 그럴 듯 했다. 실제로 자신이 아는 사람이 경기장을 누비고 다니면 경기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그걸 시작으로 해서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찾아 다니면서 조금씩 도움을 주는 데이비드. 딱히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건 아니지만,  그보단 수호천사격의 착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들이 감동적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선행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리요. 그에게 진한 부성이 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 주다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특했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비로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아이들이 아니였다면 그가 철딱서니 없는 민폐형 띨띨이에서 벗어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돌보려면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그걸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관람 포인트, 주고 받는 대화들이 재치있고 유머스러워서 남세스러운 소재임에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감동적인 가족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마음에 드실지도. 물론 적어도 15살은 넘어야 하겠지만서도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만약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생각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과 네 자식의 그 현격한 거리가 이 영화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동서양 공통이라는것을 깨닫게 해준 영화. 아이를 싫어하시는분들은 한번 보심도... 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그렇게 내 자식 내 자식 하는지, 그 마법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 내 아이들이 소중하다는걸 알게 되자 남의 아이들의 안전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데이비드>




< 자식들 중 하나를 따라 얼떨결에 들어간 호텔에서 데이비드는 그곳이 자신을 찾는 자식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동받아 울컥하는 데이비드. 그가 얼마나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 보여주던 장면으로 , 아마도 이런 장면 때문에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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