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암투 한가운데서 점점 광기가 극에 달하고 있던 광해는 자신의 대역을 찾아 올 것을 도승지 (허균)에게 명한다. 암살 시도에 대비, 자신 대신 편전에 두게 하기 위함이다. 허균은 어렵사리 기방집에서 광대 노릇을 하고 있던 하선을 발견하곤 그를 데려 온다. 왕조차 헷갈릴 정도로 왕과 똑같은 외모에 목소리. 곧 진짜 왕은 정부를 찾아 궁을 빠져 나가고, 하선은 돈 몇 냥에 하룻밤 왕 놀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중 왕이 양귀비에 취해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정 공백에 따른 혼란을 우려한 도승지와 조 내시는 하선을 데려와 며칠 땜빵 왕으로 세우기로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하선은 본격적인 왕 대역에 돌입하게 된다. 궁의 법도를 전혀 모르는 하선은 처음 이런 저런 실수를 하지만, 그런 실수마저 그간 까칠한 왕을 상대하면서 지쳐가고 있던 궁궐 사람들에겐 단비처럼 느껴진다. 독기가 좔좔 흐르는 표독스런 왕이 아니라 웃기도 하고 나인들에게 자상하게 하문도 하는 광해가 그들에겐 친근하기 이를데 없다. 한편 광대 출신의 하선을 근엄하고 광기 충만한 왕으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미션에 돌입한 허균은 바쁘기 그지 없다. 진짜 왕이 없는 사이 그간 미뤄왔던 대동법과 호패법을 실시하려던 허균은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하선은 그런 각료들의 싸움이 이해 되질 않는다. 영문을 모르는 자신이 싫어 조내시에게 야간 학습을 받은 하선은 법의 취지에 공감하고 자신이 나서서 일을 추진해 나가기로 한다. 세도가들의 권력 싸움에 눈치를 보느라 왕도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단순 무식한 하선은 신나게 일사천리로 밀어 붙이기 시작하는데...


< 하선이 허균에게 왕 노릇을 자문받고 있는 중, 처음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하선은 왕 놀이에 익숙해져 가면서 조금씩 왕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었다. 영화는 왕 자리에 질릴 정도로 오래 앉아 있던 결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왕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명색이 왕이라지만 독살당할까 두려워 밥 한끼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형편이니 그가 미쳐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서 암살 시도에 대비, 단지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왕 역활에 낙찰된 하선은 왕 노릇이 생소하고 신기하다. 처음엔 허균이 시키는 대로, 본분을 잊지 않은 자세로 시키는 대로만 하던 하선은 점차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메뉴얼에도 따르지 않는, 그저 자신 역시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지지하게 된 광해에게 주저란 없다. 전혀 왕이 될만한 재목이 아니었건만, 왕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낸 것이다. 하선이 진짜 왕보다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무식했다는 점도 있었다. 그에겐 왕이 가소로운 권문세가들도, 떼거지로 몰려와 반대를 외치는 선비들도 무섭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선으로 하여금 왕의 목소리를 내게 한 것은 그에게 상식이 여전히 통했기 때문이다. 진짜 왕에겐 오래전에 흔적 없이 잊혀져버린 그 상식 말이다. 해서 하선이 갑자기 진짜 왕 역활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붕 떠버린 대신들은 왕을 제거하기로 모의를 한다. 대신들과의 충돌이 예상되자, 허균은 하선에게 진짜로 왕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하는데...

                  <이 영화의 주역들, 이 넷의 앙상블이 의외로 볼만하다.>

하층민에 불과한 광대 하선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15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광대 하선이 왕이 되어가는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그가 진짜 왕보다 더 진짜 같은 왕이 되어 간다는 나름 성장 스토리. 진짜 왕과 가짜 왕 전혀 다른 두가지 역활을 전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 이 병헌의 연기도 일품이었고, 그외 조내시를 연기하신 장광님이나, 허균의 류승룡의 명품 연기 역시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었다. 특히나 카리스마 넘치고 광기 좔좔 흐르는 인정머리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왕과 눈물 바람이 잦은 마음 약한 광대 하선이라는 극과 극의 캐릭터를 이질감없이 소화해 낸데 이병헌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동일인의 연기가 아닌 정말로 두 사람이 연기를 한 듯 보였으니 말이다. 이병헌이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고 잘한다는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외 전혀 웃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도, 오히려 그때문에 더 웃기던 조내시와 가짜 왕  하선을 쥐잡듯 잡던 판단력 빠른 허균이란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허균이라는 사람을 좋아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서도, 허균 이란 인물이 우리나라 역사에 존재하고, 그의 이름이 여전히 화자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흐믓했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은 그런 공리에 별 관심이 없겠지만서도...

 자칫 사극은 지루하고 촛점이 흐트러지기 쉬우며 전개가 느려져서 몰입이 쉽지만은 않은데, 이 영화는 적어도 그런 기우는 말끔히 해소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에피소드들로 소소하게 웃기는 장면들과 어깨에 힘빼고 주고 받는 개그같은 대사들로 재밌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장점. 다만 아쉬운 점은 별로 감동적이진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 알고 보기 때문에 더이상의 상상의 여지가 없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만서도, 어쩐지 마음을 확 끌어 당기는 무언가가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그럼에도 단 한 장면, 마음을 울린 장면이 있다면 마지막에, 허균이 나룻터에 나와 두손을 얌전히 모으고 다소곳이 정중하게 인사를 할 때였다. 그것이 바로, 백성을 위하는 우리 왕에게 우리가 취하고 싶은 자세와 마음가짐이 아닐런지...그런 왕을 기대한다는 것이 이미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인가 싶어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렇게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는 수장을 만나게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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