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구판절판


영화이든, 소설이든.. 우리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이야기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단 하나의 울타리. 세상 모든것에게서 내쳐져도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가족이란 나의 시작이자 근원이고, 가장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커다란 공감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감동의 단어이다.

아버지의 부재, 어느날 그 자리를 깨닫다.
<한낮의 시선>은 어느날 갑자기 깨달은 아버지의 부재와 그것을 향한 갈망을 맞딱드린 한 대학원생의 결핍과 갈증에 대한 이야기이다.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유난히 책임감이 뛰어나고 자식을 향한 무한의 사랑을 보였던 어머니덕에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조차 할 필요가 없었던 남자. 그런 남자가 결핵이라는 병에 걸려 요양을 위해 떠난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에서 한 노교수를 만나고, 그 노교수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없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언젠가 한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자신의 인생의 과정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족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욱 이유조차 알지 못했던 존재의 부재. 다른이들에게는 당연했던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남자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속의 이유조차 없는 이끌림까지도 맞딱드리게 된다. 마치 풍요로운 영양을 꾸준히 섭취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들이 꼭 가지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얻지 못해 걸려버린 결핵이라는 결핍의 병에 걸린 자신의 몸처럼 말이다.

한번은 맞딱드려야 했던 그의 인생.
그 누구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기에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 그래서 그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지도 못했던 아버지라는 자리를 채워넣기 위해 남자는 무작정 길을 나선다. 자신의 기억속에 없으나 어딘가에 존재하긴 했던 자신의 핏줄, 자신의 반을 채우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여정에서 그는 수 없이 불안과 공포를 경험한다. 자신이 어느결에 가지고 있었던, 그 스스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상처입을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아버지와 한 공간에 놓이게 하고도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든다. 마치 병에 걸린 자신을 이미 알았지만 의사의 확진이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는 미련함처럼 말이다. 그리고 수 없는 망설임 끝에 내뱉은 아들과 아버지의 존재. 온전히 둘만의 공간과 시간을 내주어도 수 없이 많은 숙제들이 남아있는 이들의 관계는, 그러나 현실과 부딪히여 최악의 상황으로 남자를 끌어내린다. 그를 그토록 망설이게 만들었던 자신의 상처만으로 돌아오도록 짜여진 현실. 그 안에서 남자는 그 현실을 겪고, 피를 토한다.

모두가 가지고 있기에 더욱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이름.
행복이라는 의미로 대변되는 이름 가족. 누구가 가지고 있고, 누구나 안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욱 큰 고통과 아픔으로 돌아오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한낮의 시선>은 그 가족의 빈자리를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의식하지 않고 살았던 자리, 그 자리의 부재가 사실은 의직적인 외면이었음을 깨닫고 언젠가 한번은 맞딱드려야 하는 자신의 옹이진 구석임을 알아버린 한 남자가 아버지라는 이름의 대상을 향한 막연한 그리움을 끌어안고 떠난 짧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낮의 시선>의 시선은 오랜 시간 서로를 그리워했던 헤어진 가족의 아름다운 가족 상봉기를 전하지 않는다. 현실의 욕망과 성공 앞에서 아들의 그리움과 갈증을 무가치한 것들로 만들어버리는, 그래서 자신을 위해 아들을 부정하고 잘라내는 내치는 아버지의 냉정함을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비참한 아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의 그런 고통은 그 대상이 아버지이기에 더욱 아프게 전달된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으로 고통을 이겨내지 않는다.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않는다. 그저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겪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아들은 그저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가 자신의 환상과 다를지라도, 그동안 결핍되어 있었던 그 자리를 채워넣는 것으로 자신이 걸려야했던 아버지의 부재라는 결핍을 이겨내려하는 것 뿐이다. 아들은 그렇게 가장 고통스러운 결핍을 경험하고 피를 토해낸다. 그리고 그 결핍을 확인하는 것으로 결핍을 채운다. 다시 돌아올 어머니라는 한쪽의 가족이 있기에, 그리고 그 가족에게서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으로 채울수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한낮의 시선>은 읽는 내내 편안함도 안락함도, 감동도 선물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낮의 시선>은 누군가의 결핍을 이겨내는 방법에는 그 결핍을 직접 확인하고 자신의 것들로 받아들이는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결국 그것이 자신을 마르게 하고 힘겹게 하더라도,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일부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신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한낮의 시선>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에 겹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가슴아프면 아픈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대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인생, 어쩌면 그것이 진짜 인생일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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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인류, 단지 몇몇 만이 남은 고통과 절규의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생존을 위해 남쪽으로 길을 걷는다. 아버지가 살아남은 이유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 역시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이다. 신이 있다면, 신이 남긴 마지막이 그 아들이라고 믿을 만큼 아버지에게 아들은 절대적인 삶의 이유이다. 아직은 고통과 공포만이 남은 세상에 홀로 남겨둘 수 없는 순수한 아이. 아버지는 아들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점점 고통스러운 생으로 떨어지고, 아들은 그 아버지만이 자신의 유일한 바람막이이다. 아들은 아직 무섭고 두려운 꿈을 악몽이라 말하고, 아버지는 재앙이 덮치지 전의 평화로웠던 삶에 대한 꿈을 악몽처럼 꾼다.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현재가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 남아있는 삶이고,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생을 걸고 아들을 지키는 아버지에게는 평화로웠던 과거의 기억이 단지 지금의 고통을 더욱 처절하게 느끼게 하는 악몽일 뿐이다. 아버지가 절망하는 동안 아들은 희망을 꿈꾸고, 아버지가 죽어가는 동안 아들은 성장을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을 지키고, 아들을 성장시키고, 아들에게 삶을 준다.

매카시의 소설들은, 아름답고 환상적이지 않다. 처절하게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절망과 절망을 거듭하는 동안 사람들을 아프고 지치제 만든다.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장밋빛 희망들을 늘어놓고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보다는 가장 극단적인 고통을 말하고, 무엇도 희망이라 부를 수 없는 파멸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그의 소설들을 읽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버겁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희망과 찬란한 미래를 꿈꾸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매카시의 소설에 열광하고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 없는 그의 이야기에서 마지막 희미하게 빛나는 그 무엇인가를 더욱 찬란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일것이다.

<더 로드>는 그런 의미에서 매카시스럽고, 매카시적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바로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원작을 따로 가진 작품들이 가지는 최대의 숙제는, 바로 원작의 작품성과 영화적인 재미를 얼마나 잘 섞어내느냐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더 로드>는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원작을 이미 읽고 간 이들에게는 원작의 처절하고 참담한 인류 최후의 순간을 잘 표현해낸 영화의 이미지들이 강한 매력을 느끼게 하고, 원작을 미리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절망과 비참함만이 남은 날들을 잘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장면을 놀랍도록 비슷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어 나만의 상상속에 갇혀 있던 인류 최후의 순간들을 눈으로 확인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에 연기력이라면 두 말할 나위 없는 명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굳이 장면장면을 강한 인상으로 남기지 않아도 단 한줄의 나레이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아버지와 아들,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이 가족의 생존에 대해, 그리고 무한한 부성에 대해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한들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에도 존재하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영화를 보기 전과 후, 그 거대함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것,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아들의 생이자, 아들의 희망이고,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가슴속의 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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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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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하지만 할일이 없어 그냥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한번쯤은 과거를 돌아보고, 한번쯤은 그 시간을 기억하고, 한번쯤은 그 시간속에서 그 시간의 나를 찾아내는 여행을 할 수 있는, 나는 그런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남들과는 다르게 이야기하는 인생의 이야기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 책의 제목은 그저 제목만으로도 사람의 눈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모두가 빠르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남들보다 빠르게 살아가기를 원하기 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언젠가는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듯도 보이고,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빠르게 달려가는 세상에 섞여 남들보다 빠르게 걷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을 자조하는 듯한 말로도 들린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원했던 시간이 아주 많은 그 어른이 되어,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기를 원했던 그 삶의 고단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한줄의 글, 한 마디의 말, 그저 그랬었다는 과거형의 읊조림만으로도 이 책을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쓴 저자 페터 빅셀처럼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고, 아직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시간을 가진 어른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시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가족과 삶에 대한 페터 빅셀의 조금은 색다른 이야기들이다. 짧고 간단한 이야기들로 말하는 기억를 보듬는 방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 자신을 감싸안은 가족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순간엔 과거의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한 순간엔 의미를 잃어버린 회색빛 세상을 이야기하며, 한 순간엔 진정한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기다림조차 기다릴 줄 아는 시간의 활용법,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작은 세상에 익숙해져 큰 세상을 잊어버리는 현실, 그리고 고향과 가족이라는 나의 의미에 대한 페터 빅셀의 평범하지 않은 시선, 그래서 왜 내가 시간을 자꾸 잃어버리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너무도 날카로운 지적이기도 하다.

시간을 가져라. 당신만의 방법으로...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양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부족한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넘치게 되는 까닭이란 온전히 그 시간을 가진 당사자에게 달린 일이다.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한줄의 말은, 그래서 할일없이 놀고 먹는 시간을 원하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 가끔은 과거를 되짚어보고, 쫓기듯 살아가는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어찌보면 한가로워보이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본질에 가까운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눈 앞에 놓인 일만을 하기 위해 내가 지나온 세월과 가치 따위는 볼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얻기 위해 가끔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바로 그 말 말이다. 나는 여전히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리고 페터 빅셀이라는 저자의 이 한권의 책,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덮은 지금, 나는 더욱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훗날, 그 시간으로 진정한 가치를 생각해볼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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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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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희망을 갈구한다. 행복했을때에는 더욱 행복해질 희망을, 정체되어 있을때에는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그리고 불행했을때에는 행복해지리라는 희망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온갖 세상사의 감정과 사건들이 나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힌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상자 저 아래 남아있던 단 하나의 그것, 누군가가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바로 그것으로 남은 생을 살아간다. 희망은 사람들이 살아갈 마지막 목표이자, 꿈이고, 이유이다.

끝나버린 세상. 살아남은 생존자.
<더 로드>는 좌절을 그린다. 멸망해버린 땅, 끝나버린 세상을 그리는 수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그렇듯, 세상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세상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 세상에 살아남아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한 남자와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해버린 세상, 약탈과 강도, 살인과 범죄만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저주받은 세상에 다른 사람들처럼 먼저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버린 생존자들 중 바로 이 남자와 소년이 있는 것이다. 이미 끝나버린 세상에 남아 다른 누군가에게 살인과 강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고, 길과 길이 아닌곳을 전전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부자의 이야기. 그래서 <더 로드>는 시작부터 끝까지 온통 잿빛으로 가득찬 절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들, 죽지 못해 살아있는 고통스러운 길 위의 삶.
<더 로드>의 주인공은 멸망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길 위를 움직이는 남자와 소년이다. 이미 희망이란 단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를 위해 끝없이 희망을 담은 이야기들을 나누려 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의 길 위에서의 삶이 지속될수록 자신이 처한 세상의 모양새를 점점 확실하게 인식해나가는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아들앞에 남기 위해 끝없는 절망의 길 그 위를 끝없이 나아간다. 때로는 아주 작은 어린 아이를 외면하고 떠나버리고, 때로는 길 위에 방치되다시피한 노인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건네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최소한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가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남자, 그가 착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더 로드>는 끝없이 타인의 목숨과 나의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아마도 남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주저없이 총을 쏘고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지만, 스스로가 착한 사람으로 남기를 바라는 소년의 눈빛을 위해, 언제나 상황을 피해간다. 그리고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과 소년이 살 길만을 찾을 뿐이다. 그래서 소년을 보호하는 것은 남자였지만 남자를 사람으로 남게해준 것은 소년이었는지도 모를일이다. 길 위에서 가장 처참한 세상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 남자와 소년,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참혹한 모습들이 거듭되고, 희망을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현실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소년의 변화는 <더 로드>를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 말이다. <더 로드>처럼 멸망한 세상이 아닐지라도, 우리 역시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길위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이를 먹고 세상의 일들에 익숙해지며, 우리가 점점 말이 없어지는 것은 어쩌면 소년이 잔혹한 현실에 눈을 떠갈수록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마저 힘겨워하는 그 모습과 비슷한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맥 매카시는 늘 그렇게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한 이야기로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 하는 작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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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아이단과 웜로드의 전설 기사 아이단 시리즈 2
웨인 토머스 뱃슨 지음, 정경옥 옮김 / 꽃삽 / 2009년 12월
절판


드라마틱한 전개와 아름다운 배경, 그리고 언젠가 한번쯤 나도 상상해보았던 것 같은 세상 밖의 세상, 혹은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상이상의 세상. 판타지소설들은 그 장르만의 화려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판타지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세상을 그 단어만으로 그려내어주는 힘도 가지고 있다. 어른들에게는 한 때 자신이 꾸었던 꿈을 꾸는 기분으로,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그려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판타지 소설은 시대나 장르를 막론하고 가장 자유로운 세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 장르만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래서 일까? 해리포터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신드롬을 시작하여 반지의 제왕이나 캐리비안의 해적등 시리즈물의 판타지 영화들에서 그치지 않고 트와일라잇등의 새로운 판타지로 날로 영역을 넓여가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말이다.

현실을 공유하는 반쪽의 세상, 앨리블
현실을 나누어 가지는 곳, 서로 만나지 못하지만 영향을 주고 받고, 마치 나처럼, 마치 너처럼 생긴 또다른 너와 내가 살아가는 곳, 한번도 가보지 못했거나, 혹은 평생을 걸려도 단 한번도 가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단 하나의 열쇠, 믿음만으로 그곳을 다녀올 수도 있는 곳, 기사 아이단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곳, 앨리블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에게 영향을 받는 나의 반쪽이 살아가고, 그런 반쪽들이 모여 만들어낸 세상 앨리블. 믿는 사람이 아니면 초대될 수도 없고, 가는 방법도 모른다는 그곳에 전작인 기사 아이단과 비밀의 문(왜 판타지 소설들은 다들 비밀로 시작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은 이 책의 주인공 아이단을 초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앨리블의 존재를 믿고, 그곳을 사랑하는 한명의 아이 아이단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 작품인 이 책 기사 아이단과 원로드의 전설에는 아이단이 아닌 또 다른 앨리블의 아이, 앤트워넷으로 이야기를 옮겨가며 책을 시작한다.

아이단처럼, 그러나 아이단과는 다르게..
첫 만남부터 특별함을 주었던 앤트워넷, 그리고 이미 앨리블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아이단. 앨리블이라는, 누군가는 절대로 믿지 않는 그곳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두 아이는 처음부터 인연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었던것처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앨리블에 대한 아이단의 경험을 듣는 동안 아직 앨리엄 왕의 부름을 들은 적이 없는 앤트워넷은 자연스럽게 그 동경을 키워나간다. 아이단 처럼 앨리블을 믿고, 아이단보다 조금 더 똑똑한 듯 보이는 아이 앤트워넷은 아이단이 앨리블에서 만났던 그웬과 닮은 아이이고, 그웬의 글림스였으니 이들의 우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단의 이야기로 앨리블로 가는 비밀을 풀게된 앤트워넷은 자연스레 앨리블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단이 그랬던것처럼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과 시험을 거치며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기사가 되어 간다. 이제 책 속에서 앤트워넷이 해야할일은 아이단의 절친한 친구인 로비의 글림스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로비가 파라고어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믿는 자만이 갈 수 있다는 앨리블, 그곳에서의 앤트워넷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던 판타지라는 이름의 세상.
아직은 어린 두 아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 앨리블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기사가 된다는 이야기는 성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칫 유치하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래서 현실성이 없으니 아이들이나 읽는 동화가 아니냐고 말하고, 누군가는 유치한게 딱 만화영화같다고 말할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개봉하는 수 많은 판타지 영화의 시리즈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몰린다. 그들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고, 청소년도 있으며, 나처럼 그저 아름다운 상상의 세상이 궁금한 성인도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을 찾은 부모도 있다. 누군가는 유치하고 말도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왜 이토록 사랑을 받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야기속에 언젠가 자신이 그렸던 어린날의 기억과 순수했던 마음이 묻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사 아이단과 웜로드의 전설>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심이라는 순수의 마음을 콕 찝어 짚어내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믿어야만 존재하는 세상 앨리블을 통해서 말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군가의 이야기와 누군가의 기억들을 순수히 믿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순수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추운 겨울, 해가 바뀌는 이 시간에 잠시 현재의 나와 어린날의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판타지소설, 이 장르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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