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혈포 강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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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나오는 영화, 혹은 할머니들만 나오는 영화, 그것도 아니면 할머니들이 주인공인 영화. 몇해 전부터 우리 영화산업이 커지고, 소재가 다양화되어가면서 영화가 다루는 세대와 이야기들도 점점 다양화되고 있다. 그 중에서는 활기차고 경쾌한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이의 영화들 뿐 아니라 인생의 황혼기나 혹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그려보고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찾게 하는 영화들도 간혹 있었다. 진지하게 혹은 코믹하게 노년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들은 그래서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그 이면의 다른 상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을 찾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육혈포 강도단 역시 바로 그 노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검은 머리보다 하얀 머리가 더 많아지는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카락처럼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진 사람들. 한때는 젊음과 활기로 인생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젊은이들의 뒤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그들의 힘에 의해 뒤로 물러나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인생이 얼마만큼 고단하고 힘겨운지 몸으로 체득하며 살았으나 그 힘겨움을 모두 버텨내고 살았음에도 안락함을 손에 쥐지 못하고 웅크린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육혈포 강도단의 세 여인 김정자와 손영희, 그리고 강신자는 모두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을 꿈꾸는 여인들이다. 아픈 자식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 동안 입양이 되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하와이에 가고자 하는 김정자와 언제나 엄마의 인생을 비난하고 엄마를 원망하는 딸의 원망을 힘겨워하는 손영희, 그리고 평생을 아들을 위해 살았으나 효도는 커녕 어머니를 짐짝 취급하는 아들에게 서러움을 느끼는 강신자. 이 세명의 여인이 노년이 다되어 계획한, 단 한번이 될지도 모르는 지겹고 힘든 일상에서의 탈출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처절한 노력이자 사회를 향한 반항이기도 하다.
 

영화는 보는 내내 코믹하고 유쾌하게 이 세 여인의 일상탈출을 위한 소원풀이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돈을 강탈당한 은행을 찾아가 자신들의 돈을 찾으려 하는 강도짓.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각자의 사연들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를 나문희와 김수미, 그리고 김혜옥이라는 대한민국 대표 중견 배우들을 앞세워 즐겁게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보는 내내 박장대소를 하고 폭소를 터트리게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사연들과 그들의 소중하고 절실한 소원들로 사회가 가지는 몰인정과 매몰참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영화. 그래서 그 웃음이 더욱 가슴 아프고 혹은 소중하게 여겨지는 영화가 바로 육혈포강도단이다.





육혈포강도단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대표 어머니부대인 나문희와 김수미, 그리고 김혜옥이라는 세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뛰어난 웃음과 연기, 그리고 그들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독특한 캐릭터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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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파이어 세트 - 전2권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다산책방 / 2010년 1월
품절


팀 보울러라는 이름의 작가, 그의 소설 중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작품은 리버보이라는 이름의 소설이었다. 어린 소녀와 그 소녀의 고집센 할아버지, 서로를 너무나 아꼈기에 그 꿈을 대신해 이루어주고 싶었던 작은 소녀의 바람과 할아버지의 꿈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던 동화는 그저 읽기 좋은 한편의 동화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을 간직해온 한 남자의 아름다웠던, 그리고 그리웠던 꿈에 관한 이야기였고, 모든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간직하는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 읽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을 아련하고 아름다운 꿈에 있는 것 같은 설레임을 주었었다. 팀 보울러라는 이름은 그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이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것에서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던져주는 이름으로 나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중 두번째로 내가 만나게 된 작품은 바로 이 작품, 프로즌 파이어이다.

어느날 갑자기 집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오빠 조쉬. 오빠를 그리워 하는 작고 못생긴 소녀 더스티는 언제나 자신의 한 조각이자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은 조쉬 오빠를 늘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오빠의 실종은 신경과민의 엄마가 집을 떠나게 만들었고, 다정다감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여렸던 아빠에게 떠난 엄마의 빈자리와 아들의 부재를 떠넘기게 되었다. 아파하고 상처받은 아빠의 곁에서 더스티는 조쉬의 몫까지 아빠를 버텨주어야 하는 강인함을 지녀야했고, 가족은 상처받고 외로워하며 서로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조쉬. 차라리 죽음을 확인했다면 오히려 자유로웠을 더스티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오빠의 확인되지 않는 실종은 살아있으리라는 믿음과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조쉬를 떠나보낼 수 없는 미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시간을 조쉬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며 지내는 더스티에게 조쉬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소년이 나타난다.

더스티의 마음을 읽고, 조쉬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년. 조쉬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스티에게 던지며 끊임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소년의 존재는, 더스티에게는 조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이자 마지막 열쇠로 느껴진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롭고 그래서 가끔은 공포의 존재로 다가오는 하얀 소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실체로 남기지 않지만 수 없이 많은 소문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공포속에 몰아넣는 소년이지만 어쩐지 더스티에게는 그가 두려움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조쉬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사랑하는 자신의 오빠를 돌려줄지도 모르는,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 존재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는 하얀 소년. 다른 이들은 모두 두렵다 말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낸 더스티에게 소년은 만나야할,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야할, 존재를 확인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더스티는 조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조쉬를 확인하기 위해 소년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그것만이 더스티를 놓아주지 않는, 영원히 그녀 곁을 맴돌것만 같은 조쉬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임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더스티를 맴돌던 존재, 그 하얀소년의 존재는 그녀가 오빠 조쉬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계속되는 그녀의 그리움과 공포였다. 사일러스 할아버지와 안젤리카가 자신들이 확인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연속의 두려움처럼 더스티 역시 조쉬의 실종에 대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대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끝없이 오빠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어쩌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오빠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두려움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 없이 많은 소문처럼 공포로 변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신비로웠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의 존재라고 말했던 그 소년을 대면하기로 결정한 순간, 그녀는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입에서 조쉬의 죽음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더스티가 이겨낸 소년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대면하게 될 조쉬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녀가 그것을 이겨낸 순간 수수께끼를 풀 자격이 주어진 것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진실을 이미 짐작하며서도 그 사실을 대면했을때 느껴질 슬픔과 아픔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직접 보면 감당해야할 자신의 아픔. 그 아픔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외면은 아픔을 겪고 나서야 당당해질 수 있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뿐이다. 결국 모든 아픔과 슬픔은 그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겨내었을때 극복되는 것이니 말이다. 더스티는 아마도 그것을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끝없이 맴도는 오빠의 망령을 이겨내어야만 오빠의 모습에 갇힌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내고 더스티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년을 마주보려 했던 것이다. 더스티가 진정 바란것은 오빠의 죽음에 대한 진실 이상의 것. 바로 오빠의 실종으로 얼어버린 자신의 뜨거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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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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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일방적이다.
사랑은 편파적이다.
사랑은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에 빠져 있었기에 인생의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으나, 아름다움 대신 두 손을 내어주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비너스처럼, 한때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그들을 환각상태의 죽음으로 몰고갔다던 압생트 빛깔의 바닷물에 몸을 맡긴 그렇게 누군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있는 내가 너무도 한심해서, 나는 사랑을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은 나를 세상의 작은 점으로 만들어버린다고, 그래서 사랑에는 공평함이라는 것이 없다고, 사랑은 잔인하다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몸을 던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팔이 잘린 비너스처럼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듯 자기의 색을 찾고, 사랑이란 말을 듣고, 말하고, 쓰는 것 조차 유치하고 어리석다고 느껴졌을때 즈음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원래 그 누구에게도 의지를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열여섯의 어린 소녀 누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간직했던 자신의 사람을 잃는다. 자신보다 훌쩍 나이가 많은 사촌오빠, 그래서 더욱 비밀스럽고, 비밀스럽기에 스스로에게는 더욱 간절했던 은밀한 마음이 서강주의 결혼을 통해 이제는 더 이상 흘려보낼 작은 틈새마저도 막혀버리게 된 것이다. 어린 소녀의 갈 곳을 잃은 마음은 그녀를 들판으로 내몰고, 목적없이 서성이다 낯선남자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 열여섯의 소녀는 그날 자신의 첫사랑을 잃고, 처녀를 잃고, 다정했던 아버지를 잃는다. 그리고 그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강주와 낯선 남자로 갈린다. 자신의 소녀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순결했던 자신을 기억해줄 유일한 존재로 서강주만이 남자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오랜시간 간직해온 소녀의 첫사랑은 그를 잃어버린 열여섯의 어느날 그녀가 성장을 멈추기로 작정한 채로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래서 일까? 그녀가 서강주를 다시 만나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은, 인정될 수 없는 불륜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녀가 열여섯 들판에서 멈추어버린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그 들판에서 잃어버린 다정한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으리라. 아버지와 닮은, 아버지처럼 인생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서강주의 모습에서 인생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열여섯 들판에서 잃어버린 처녀와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대신할 유일한 존재를 찾아내었으니까.. 누경은 서강주를 통해 소녀에서 여인이 되고 순결했던 자신을 기억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열여섯 들판에서 처녀를 잃어버린채 낯선 남자와 서강주만을 인식하려 했던 자신과 화해하려한다.

하지만 불륜으로 이름지어진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기력함을 더욱 잔인하게만 몰아간다. 함께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할 수 없는 누경. 함께 있어도 언제나 외로울 수 밖에 없는 누경과 서강주의 관계는 그래서 누경에게 더욱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일방적인 기다림과 처분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함, 누군가는 아름답다 말하는 사랑이라는 압생트 빛 바다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팔이 없는 비너스가 되어, 그 아름다움에 취할새도 없이 휩쓸리는 그 불안함과 위태로움은 그녀가 이겨내지 못할 유일한 균열이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누경은, 어떠한 균열도 깨어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끌어안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누경은 이미 불안과 위태로움으로 균열이 생긴 사랑이라는 유리병을 자신의 팔을 잘라내어 바다에 몸을 내맡기는 것으로 끌어안고 버티며 견뎌내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정말 그렇게 끝없이 견디고 버텨야만 하는 것일까?

누경의 사랑을 보며, 나는 나의 지난 사랑들을 떠올리곤 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슬프고, 아프고,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그래서 끝내는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던 사랑을 말이다.

균열이 생긴 사랑을 끌어안고 버티며 견디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누경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병에게 남겨진 운명이라곤 언젠가 깨어지는 것 뿐이라고.. 그 안에 담긴 단 한방울의 물이라도 보존하고 싶다면 모두 쏟아내고 새로운 유리병을 준비해야한다고, 더 이상 그 무엇도 담을 수 없는 유리병이 과연 유리병이기나 하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조금 달라진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결국 사랑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균열이 간 유리병이라도 최선을 다해 견뎌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그 유리병에게 남겨진 운명이 깨어지는 것이라면, 깨어지는 것 까지도 견뎌내야 한다고, 깨어진 유리조각에 손을 베이고 피를 흘리면, 그것까지도 견뎌내야한다고 말이다. 그것들을 모두 겪고나서야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사랑을 의미한다는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을 만들어 넘쳐나는 빛을 만들어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잃어버린 자신 때문에 무기력했고, 놓쳐버린 사랑때문에 고통스러웠던 누경이 이미 깨어진 유리조각을 모아 뜨거운 열을 더하고, 액체가 된 유리로 다시 새로운 유리병을 만들어내는 유리공예를 통해, 그리고 그 깨진 유리조각으로 만들어낸 어느 창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좋아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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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무 복잡해 - It’s Complic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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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꼭 뜨겁게 불타오르는 20~30대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40대에도, 황혼으로 지는 노을처럼 아련한 50대에도,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지는 60대에도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 감정은 그대로 다음답고 고결하며 소중하다. 그저 한때의 불장난처럼 뜨겁게 타올라서 식어버리는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던 시대도 있었다지만 이제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황혼의 로맨스에 대해서, 모든 것들에 너그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 좀 더 지혜로운 사랑을 하는 중년과 노년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대가 되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기 때문이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시간 남아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죽는 날까지 꺼지지 않는 인생의 단 하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는 바로 그 중년과 노년기의 길목에 선 한 여인의 사랑과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10년전 젊은 여자와 바람나 자신을 버린 남편과 이혼한채 베이커리를 운영하며 세 자녀를 키운 제인. 자녀들이 모두 자라나 이제는 집을 떠날만큼 성장을 이루자, 언제나 북적였던, 그리고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했던 아이들 대신 공허함으로 남은 그녀의 집 빈공간은 그녀에게 외로움이라는 다소 반갑지 않은 선물을 남긴다. 그녀는 오랜 시간 바래왔던 집의 증축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녀의 집을 증축하기 위해 설계를 맡은 건축가 아담이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인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그녀처럼 아내에게 버림받아 상처받은 남자 아담. 두 사람의 나름 알콩달콩한 로맨스에 끼어드는 불청객은 너무도 어이없게 그녀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한 제인의 전 남편 제이크이다. 젊은 여자와의 결혼생활도 생각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을 보듬어주던 제인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제이크, 제인의 옆에 있는 아담을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전 부인인 제인에게 현재의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자는 제안까지 하기에 이르르는 다소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제이크를, 옛 정 때문인지 아니면 미련 때문인지 모를 감정으로 인해 제인도 매정하게 떨쳐내지 못한다. 20대의 뜨거운 사랑은 아니지만 20대의 뜨거운 시절을 함께 하고 아이들의 아버지인 제이크와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배려해주는 아담의 새로운 설레임 앞에서 제인은 모든 여성들이 사랑에 빠졌을때와 같이 망설이고 주저하며 고민하고 갈등한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는 중년을 넘긴 여성과 남성의 사랑도 20대의 뜨거운 사랑만큼 은근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유쾌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바로 나의 엄마와 아버지처럼 나이를 먹어가는 이 영화의 배우들이 나누는 사랑과 설레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진실하며 담백한 느낌을 준다. 그 누가 20대의 뜨거운 사랑보다 황혼의 은근한 사랑이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것인가라며 반문할 수 있는 영화.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시작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함께 유쾌하고 즐거운 에피소드들로 결코 지루하지 않게 은근히 피어오르는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영화. 사랑은 너무 복잡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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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절판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시집을 먼저가 어른 행세 하고 있는 여동생이 몇일 전 전화를 했다. 여군이라는 다소 범상치 않다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일반적인 업무와는 조금 다른 일들을 하고 있고,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여자들만 가지는 특유의 스트레스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달픈 처지에 놓여있는 여동생. 그녀는 직장생활 때려치우고 백수생활을 영위중에 있는 나보다는 심적으로 힘겨웠던지, 과감하게 언니를 제치고 먼저 시집가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100% 위안이 되진 못했던지 요즘들어 유난히 골골대고 심적으로 힘겨워 하던차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화말미에 이런 말을 달았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그리고 이틀후에 동생은 집에 왔다. a형간염이라는 최신 유행질병을 달고 입원을 핑계삼아 말이다. 일단 동생님이 병환으로 몸져 누운지라 전염성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병실을 지키리라 다짐한 나는 몇권의 책을 챙겨 목포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책 중에는 바로 이 책, 위풍당당 개청춘이 있었다.

위풍당당 개청춘이라는 책의 제목과, 유재인이라는 남녀 성별이 조금은 모호하다면 모호한 책을 챙겨넣을 때에만 해도 나는 이 책의 작가가 당연히 남자일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청춘이라니.... 분명 여성작가가 붙이기에는 어딘지 조금은 지나치게 과감하고 무언가 억세다는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을 무참히 깨고, 이 책의 작가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1999년 수능을 치룬, 나보다 2년 늦게 태어난, 현재까지도 a형 간염의 투명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나날히 떨어지는 간수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 나의 여동생과 동갑인 작가, 개청춘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한권의 책에 자신있게 사용할 수 있는 대담성과 장부기질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작가가 펼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그래서 처음부터 신선하고 즐거우며, 놀라울만큼 담백하게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 백수생활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청춘일기는 곧 그녀의 직장생활로 이어지고, 작거나 혹은 큰 그녀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사실 그녀 개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비슷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느끼고 한번쯤은 속으로 삭히거나 내뱉은 푸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한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특별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으나 별거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청춘의 한때, 아름답고 선명한 컬러감으로 가득찬 세상만을 꿈꾸다 막상 발을 내딛은 현실이 화려하고 평화로운 수채화이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흑백내치는 피만 붉게 표현되는 쿠엔틴 타란시노식 B급 영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청춘들의 모습은 바로 그녀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너무도 솔직해서 때로는 박장대소를 하고 때로는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 모든것이 그녀처럼 그 모습 그대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에 가능한 공감. 나 대신 세상을 향해 그래도 나는 당당하다고 외쳐주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책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꿈나무로 태어나 원대한 꿈을 향해 터벅터벅 무게감 있는 발걸음을 내딛기는 커녕, 겨우겨우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만큼을 따라가는 것도 힘겨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그녀와 나의 여동생, 그리고 내가 속한 이 세대의 청춘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망보다는 나 스스로의 실망을 감당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현실을 바로 보고, 내 원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끔은 주는 것보다 받는것이 턱없이 모자른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청춘은 이름처럼 푸르르게 유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청춘이 푸르른 것은 그 푸르름에 색이 빠지고 다른 세상들의 색처럼 희미해지기까지의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일종의 비축된 필수영양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 때려치우고 바닥에 앉아 울며불며 통곡하기 보다는 푸르름을 조금 포기하고 세상에 녹아드는 것이 청춘의 푸르름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인지도 모를일이다.

위풍당당 개청춘은 그래서 무작정 인생의 낙관론을 주장하는 백만권의 자기계발서보다 사실적이고, 근거없는 희망과 무지개 너머 원더랜드를 꿈꾸며 비현실적인 이상향만을 강요하는 교과서보다 교훈적이다. 비록 병실에 가져갔다가 간염균과 싸우고 있는 환자앞에서 미친듯히 웃게 만들긴 했지만, 그 웃음속에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청춘의 위풍과, 그 당당함으로 남은 세상에서 청춘을 더욱 불태울 당당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대인배 그녀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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