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품절


사람들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마음속 저 깊이 숨겨둔 은밀한 본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극단적인 폭력성, 혹은 비열함과 속물근성.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듯, 극단적 상황에서는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신경쓸 것이 없고 그럴 여유도 없으니 그동안 남몰래 숨겨두었던 자신만의 은밀한 본성을 이용해서라도 그 극단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들. 생존은 그만큼 사람의 가장 말초적인 본성을 자극하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이성을 마비시킨다.

생존과 보상이 걸린 게임, 한치앞도 알 수 없는 미궁.
<크림슨의 미궁>은 제한된 조건만을 제공받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진행해야하는 게임이라는 설정을 세운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초반의 상황에서는 서로 공모와 협의, 그리고 절충이 가능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돌아서면 누군가 변할지도 혹은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너나할것 없이 먼저 배신의 길을 선택한 지극히 나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의 존재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잘나가던 주식중개인에서 실직의 고통을 겪고 실직자와 노숙자의 중간계에 겨우 몸을 끼워넣은 한명의 남자 후지키가 있다. 각자 동일한 내용을 담은 게임기를 하나씩 가지고 모인 몇명의 사람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첫번째 선택은 바로 게임이라 일컬어지는 이 황당한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를 첫번째 아이템을 고르는 일이다. 게임기를 고장낸채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한 아이와 파트너를 이룬 후지키. 아이의 설득으로 정보라는 무형의 아이템을 얻은 후지키는 아이와 함께 자신들이 선택한 아이템을 가지고 게임을 진행하게 되는데, 손에 쥔것은 없지만 필요한 것들을 선별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게 된 후지키는 다른 팀들보다는 비교적 유리하고 쉽게, 그리고 다른 팀들의 성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조건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사람. 바로 그 자체.
오스트레일리아의 벙글벙글이라는 황량한 곳. 벗어날 수 없는 게임의 규칙. 먹을것도, 보호받을 곳도 없는 이 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게임을 진행하며 점점 변해간다.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가치 앞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선택은 점점 결과를 예측하지 않은채 진행되고 그 결과 사람의 모습을 잃고 본성만을 간직한 식인귀의 모습으로 인간의 가장 잔악한 본성을 형상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방글방글에서는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잡아먹어야 스스로가 살아가는 식인귀가 쫓고 쫓기는 추격적은 펼치게 된 것이다

비현실적인 게임과 현실적인 트루엔트
<크림슨의 미궁>은 배틀로얄이라는 일본영화와 함께 트루먼쇼라는 헐리웃의 영화 설정을 따온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 그래서 선택의 여지 없이 점점 잔혹해져가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가장 추악한 본성들은 배틀로얄의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중계되는 방송의 하나였다는 트루면쇼의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설정은 인간의 죽음을 보며 흥미를 느끼는 이들을 위한 스너프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살짝 비틀어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은채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말이다. 사람의 가장 추악한 본성. 그것은 무엇일까? 목숨을 걸어야 살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타인을 잡아 먹는 식인귀. 그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죽음을 구경하며 흥분과 쾌감을 느끼는 바로 그 저급한 욕구일까? 어쩌면 방글방글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되어버린 그들보다, 그것을 단지 유희거리로만 만들어 즐기고 있는 돈 많은 부자들이.. 진짜 식인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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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닥터 -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 수상작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구판절판


현실과 상상, 꿈과 환각, 실제와 허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사는 세상은 현실이고 그렇지 않은 세상은 환각이나 환상, 혹은 허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현실에 대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을 그어 정해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지고 보면, 환상도, 상상도, 환각도, 허구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어쩌면 진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바로 이 책 <오즈의 닥터>를 읽으며 해보았다. 내가 지금 인식하고 현실이라 말하는 세상은 과연 진짜 현실일까? 어쩌면 이것이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내가 상상이나 환상이라 말하는 그곳이 아닐까? 혹은 어디에도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장르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비밀에 대한 이야기.
<오즈의 닥터>는 그 장르부터가 모호한 소설이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아니 정확하게는 책을 받아드는 순간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어딘지 모르게 말도 안되는 듯한 인상의 남장 여자가 출연하면서 코믹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주인공인 유머러스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예상을 하게 하는 이 책은, 책장이 넘어가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추리소설이 되었다가 스릴러물이 되기고 하고, 공포소설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장르가 섞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장르만큼이나 많은 환각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종수는 한 고등학교의 세계사 담당선생이었다. 나름대로 건실하게 근무하며 생활을 이어나가는 교직자 종수. 겉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현재 선생으로서의 자리를 잃고 교직에 있을 당시 겪어야 했던 사건으로 인해 법원으로부터 정신상담을 받도록 명령받은 상태이다. 그런 그에게 상담의의 자격으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닥터 팽이라는 말도 안되고 의사같지도 않은 사람. 그는 그와의 정신상담을 통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하나씩 기억을 떠올린다. 너무도 많은 사실들을 만들어내고 상상하여 그 자신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만큼 꼬여버린 종수의 과거, 그리고 닥터 팽이라는 정신과 상담의의 존재, 마지막으로 정수연이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한명의 여학생.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의 과거의 기억과 맞물리며 기묘한 관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과 허구란 과연 존재하는가?
<오즈의 닥터>는 끝없이 배반하고 끝없이 뒤집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종수의 과거를 뒤집고, 현재까지 뒤집어가며 닥터 팽이 이끌어내는 종수의 가장 감추고 싶은 진실은 그가 진실이 아니길 바라는, 그리고 그것만은 진실이 아니라 믿는 가장 추잡하고 잔혹한 것들이다. 종수는 자신의 과거를 채운 그 기억들에서 도망가기를 원하고 그래서 과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며 현실까지 허구로 채워낸다. 마치 진짜 자신의 현실에서는 그 스스로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잔인하고 끔찍했던 과거를 가진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 그것이 종수에게는 현실과 허구, 환각과 실제를 뒤집어 자신이 선택한 것만을 믿는 바로 그것이었던게다. 그에게 과연 현실이란 무엇일까? 현실에서 살 수 없었던 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곳, 환각의 세계, 그곳에서 그가 정당성을 부여받고 과거를 용서받으며 용서받을 수 있는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어 현실을 살아갔다면, 그에게는 그 환각의 세계가 괴롭고 아프기만 했던 현실보다 더욱 중요한 그만의 현실은 아니었을까? 물론 종수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 과거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현실에서 계속해 그 창조의 과정을 이어간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잔인한 창조의 과정말이다. 그러나 그토록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살인범인 종수에게 일말의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것 같다. 정상으로는 현실에서 살 수 없어 미쳐버린 남자. 그리고 그 미친 세상에서 누구보다 꿋꿋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남자. 그 남자의 그 발버둥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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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연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10월
품절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은 큰 것을 걸고라고 큰 것을 얻을 기회를 잡고, 그 기회로 인해 모든것을 잃기도, 모든것을 얻기도하는 굴곡진 삶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을 얻더라도 지금의 삶에서 안정과 평안함을 얻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조금은 지루하지만 그것까지 감내한 움직임 없는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인생에 걸쳐 경험하는 것과 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들은 모두가 달라지게 되지만, 단 한가지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있다. 모두가 어찌되었던 조금씩은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위든 아래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말이다.

나도 살고 싶어!
<회전목마>의 주인공 케이치는 3년여의 민간기업 근무에 지칠대로 지쳐 일이 조금 한가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공무원이 되기로 결정한다. 이유는 하나, 일은 너무나 힘들고, 살긴 살아야겠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간기업에서 코마타니 시청의 공무원이 된지 9년, 시간외 근무도 없고, 고된 스케쥴도 없는 한가하고 한가한 시청직원으로 근무를 하는 동안 바깥 세상은 재미없는 공무원이 되어버린 케이치를 안쓰럽게 생각하던 친구들의 시선을 월급 꼬박꼬박 나오고 보너스까지 챙겨나오면서 일은 한가한 선택받은 직장의 수혜자로 보게 할 정도로 점점 각박하게 바뀌어 있다. 빠르게 돌아가던 도심지의 생활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곳보다 한박자 느리게 가는 듯한 코마타니의 시청직원으로 이제 익숙해진 케이치, 그런 그에게 어느날 코마타니 내의 아테네 마을 재건사업이라는 임무가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케이치는 코마타니 시청의 공무원이 된 이후 처음으로 어쩌면 바쁜 일이 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그동안 천천히 느리게만 흘러갔던, 그래서 조금은 지루했던 삶에서 약간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코마타니나 대한민국이나 다를바 없는 정체된 정부공무원들
아테네 마을의 리뉴얼 추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케이치는 아테네마을의 리뉴얼을 계획하면서 경직된 코마니티시의 관리체계라는 한계에 계속해서 부딪치게 된다. 좀 더 새롭고 좀 더 혁신적인 이벤트로 시 이외의 사람들에게 아테네 마을이라는 테마파크를 알리고 이를 시작으로 코마타니라는 시의 인지도를 올리는 점진적인 변화를 위해 시도해보아야 할 여러 기획안들이 단치 기존의 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부와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발전을 요구하면서도 변화는 두려워하는 체제, 그래서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혁신은 불가능한 현실, 그 안에서 케이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타협가능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 안들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것으로 점차 조금씩 달라지는 아테네 마을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아테네 마을처럼 서서히 변화하는 케이치
이 책의 주인공 케이치는 분명 바깥 세상의 숨막히게 빠른 속도와 압박을 이겨내지 못해 답답하고 지루하지만 변화가 없고 덕분에 한가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이미 변화에 적응하거나 혹은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면 낙오하는 세상의 쓴맛을 본 케이치, 그래서 그는 그 숨막히는 절박함에서 살아나기 위해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안정되다 못해 경직되어 있는 공직사회, 스스로 변화를 요구했을때 혹은 변화로 시작하는 발전을 꿈꾸었을때 그 안정과 경직성이 자신의 발목을 잡아채는 족쇠가 되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케이치는 아테네 마을을 통한 변화의 시도에서 매번 답답함을 토로하고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자신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사회는 어느곳에도 없는 이 세상처럼 말이다. 아테네 마을로 대변되는 한산하지만 변화가 없는 테마마을은 그래서 우리 사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경직되고 고루한 어느 부분을 상징하기도 한다. 케이치가 시도하는 아테네 마을의 변화는 그래서 케이치 자신의 변화이고, 사회의 가장 더딘, 그러나 꼭 이루어져야 하는 변화이기도 하다. 케이치는 아테네 마을 리뉴얼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점점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금 더 열리고, 조금 더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물론 여전히 안정을 추구하지만 조금의 변화는 받아들일 줄 아는 열린 구성원으로서의 변화. 큰 원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위로,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움직이는 회전목마처럼 말이다. 물론 회전목마는 돌도 돌아 제자리로 오게 될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케이치가 그렇게 아테네 마을의 변화를 이끌어가며 아들인 텟페이의 일기에서 모습을 바꾸었든 사람은 그 변화로 언제나 살아갈 또 하나의 힘을 얻는 다는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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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그 글의 장르나 소재와는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비슷한 몇가지 기대를 건다. 권선징악이라든지,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이라든지, 혹은 밝게 빛나는 희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좌절하기 보다는 힘을 얻고, 분노하기 보다는 기뻐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록 그렇지 못할지라도 사람의 상상력과 그 사람의 의지로 창조해내는 미지의 세계에서만큼은 조금 더 아름답게 살고 싶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글의 마디마디 마다 모두 처절한 비명이 있고, 한줄한줄에 잔혹한 현실과 외면하려 애쓴 과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 말이다. 아마 그것이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싶어하지 않을것이다. 애써 고개 돌리고 외면해온 현실을 글을 통해 대면해야하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마주 보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일테니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
<핏빛 자오선>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듯 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그 분위기나 전개, 그리고 표현의 방식까지 어느 한 구석도 평범하지 않고, 때문에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부터 한참을 헤매이게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이 화려한 미사어구나 어지러운 표현력으로 한글자 한글자를 읽어내리기조차 어려운 책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그 동안 읽어왔던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그 이야기 자체가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내가 이해하는 이 내용들이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인가에 대해 스스로 수없이 의문을 가져야 했다는 것이 적절한 말이 되지 않을까? 아마 그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내용들이 계속해서 벌어지지만, 그저 원래 그랬다는듯이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었던 이 글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갔던 잔인한 시대.
<핏빛 자오선>의 시대는 제목처럼 선혈이 낭자하다. 멕시코에 고용된 용병들, 거칠고 위협적인 아파치를 잡아 그들의 머리가죽을 돈으로 바꾸어가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지기에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죽음이고, 붉은 피의 색을 지닌다. 영화로 만들어져 내 눈앞에 펼처진다면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을까 싶을만큼 잔인한 살인의 연속, <핏빛 자오선>의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는 죽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음에 익숙하고, 살인으로 돈을 벌며, 죽음과 가까이에서 죽음을 지배하기도, 혹은 그것에 일순간 자신이 지배당하기도 하는 하루앞을, 혹은 한순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핏빛 자오선>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대로 너무도 잔인한 장면을 그저 일상처럼 주절거린다. 마치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하는것처럼, 매일 일어나는 그저 평범한 일인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무감각함은 그 시대의 그들이 살아았던 일상이기에, 글의 분위기처럼 매일 일어나는 정말 평범한 일이었던 것이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그냥 그랬다는 식의 말투로 끝없이 이어지는 살인의 현장에서 이 책은 그 시대의 붉은 피와 사람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살아남아 있다.
<핏빛 자오선>자오선의 주인공은 소년이다. 어린 나이에 불행한 시대를 살고, 그 자신도 자연스레 죽음에 가까워져 살아야했던 소년, 우연히 아파치의 머리가죽을 벗겨 돈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용병대에 입대한 그 소년은 이름도 없고, 자신을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지도 않지만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아니 정확하게는 마지막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분명한 주인공이다. 피로 얼룩진 세상. 그 피가 자신의 삶을 이어주는 수단이 되는 잔인한 세상에서 주인공인 소년만이 유일하게 순수의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그려낸 미국의 잔인한 역사
수 많은 평론가들은 <핏빛 자오선>속에서 미국의 잔인했던, 그리고 그 잔인함으로 자신들의 땅을 다졌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는 작가 자신이 그 미국땅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이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한 나라의 역사,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외면하려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글로써 이야기하고, 자신의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치부라도 언젠가는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고백해야한다는 듯 말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소년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 이름없는 소년이 지금의 미국을 만든, 당신의 아버지, 그분의 동료, 그리고 바로 당신이라는 이야기, 코맥 맥카시가 이 잔인하고도 처절한 피로 물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희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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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 : 온화한 빛의 화가 마로니에북스 Art Book 20
스테파노 추피 지음, 박나래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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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대부분은 그 책에서 작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고, 창조하여 쓰는 글일지라도, 그 글의 어느 구석에서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 그리고 그 마음속의 그림자까지도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에 말이다.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다른 이들은 어떨까? 작곡가는 음악을 통해, 연주자는 연주를 통해, 가수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예술적 재능이 없는 우리는 그저 끄적이는 한줄의 메모와 일기를 통해, 혹은 걸음과 손짓을 통해 자신을 내보이지 않을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가진 화가가 그들의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테고 말이다.

네델란드, 그 나라의 미술가에 길이 남을 위대한 화가 베르메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이라는 한편의 작품으로 유명한 베르메르,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이름을 별명으로 가지고 있다는 이 한장의 그림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명화에 속한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도 이미 동명의 영화나 소설들로 그 모습들이 익숙해진 그림. 그래서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이름보다 그 그림 한장의 이름이 더욱 유명하기도 한 신비한 그림의 작가 베르메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추상화도 아니고, 어둡거나 혹은 거대한 진실을 담은 성서속의 비밀에 대한 그림도 아니기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들은 그래서 이 책을 펴는 순간 "아!"라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그가 살았던 네델란드와 17세기 시대, 그리고 그의 삶.
<베르메르:온화한 빛의 화가>는 그저 그림을 소개하고 그림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베르메르라는 한명의 작가를 테마로 하여 그의 전 생애와 알려지거나 혹은 조금은 비밀스럽게 남아있는 그의 인생이야기를 꺼내어 그의 삶이 존재했던 당시의 시대와 더불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는 베르메르와 베르메르의 그림 뿐 아니라, 17세기 네델란드의 사회상과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베르메르라는 화가와 그가 그린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조금 더 적극적인 시도가 책 전체에 담겨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을 그렸던 화가, 베르메르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한 권의 책이 시대사나 베르메르의 개인사에 치우쳐 정작 중요한 그의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의 일생을 비추어 그가 그 시간을 살며 그려내었던 그림들의 주된 소재와 당시의 미술계의 분위기등을 설명하고 그가 왜 그의 그림에서 그런 소재를 선택했는가를 스스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내용이라는 설명이 조금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베르메르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이들의 그림과 동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후세에 같은 시대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함꼐 설명하는 배려도 보여준다.


베르메르, 그를 위한 사전
이 책은 연도별로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삶, 그리고 그 시점에 탄생한 명화들을 설명한다. 그가 화가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베르메르라는 한명의 화가를 위한 연도별 사전쯤 된다고 설명하는것이 맞을 듯 하다. 덕분에 그 동안 친숙하게 보아왔던 베르메르의 수 많은 작품이 이제는 당시의 시대와 어떤 연관이 있었으며 베르메르 개인의 삶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그림은, 사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멀거나 혹은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림 한장을 보기 위해서 평론법을 배우고 미술사를 배워야 할것 같은 압박, 아마도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조금 더 멀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도 이런 유명화가의 그림보다는 즐거이 읽을 수 있는 만화를 조금 더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중 음악이 그 위상을 높여가듯, 만화도 이제는 그 위상이 날로 높아만가고 리히텐슈타인이나 앤디워홀등의 팝아트 작가들이 고전과 만화의 중간계를 형성하며 엄청난 인기를 몰고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명화라 불리우는 누군가의 그림과 우리가 읽는 작은 책자 속 만화의 위치도 어느 순간엔 일직선상에 놓이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순간이 되면 만화를 좋아하는 우리는 램브란트의 그림과 작은 책자 속 만화를 동일한 거리에서 볼 수 있게 될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우리에게 이런 명화들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와 멀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이니 말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조용히 화랑을 거닐며, 명화한편에 감동할 수 있는 여유를 그려본 사람이라면,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해야하는 전문적인 공부가 아닐지라도 이렇게 작은 책자 하나로 만나는 누군가의 그림과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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