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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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란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몇몇만의 비밀. 그래서 비밀은 그 단어 자체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가장 부끄러운 치부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나 한 두가지쯤의 비밀을 가지고 있고 그 비밀만큼은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비밀이 바로 그 사람의 핵심이자 근본이요, 무엇인가의 원천이고, 치부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비밀이라는 두 글자에 열광한다. 비밀이라는 단어 하나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조
우리에게 정조라는 이름은 한 시대를 움직이고자 했던 개혁군주이자 학자이며, 언제나 모든 것들에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를 던져 이룩해내던 성군의 모습으로 이야기 되곤 한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몇 해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이산"이라는 드라마의 영향이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그 보다 더 깊은 곳에는 이 시대에도 필요한, 변화를 주도할 누군가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든 것들의 개혁을 추구하고 이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역사속의 정조의 모습과 부합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누군가의 모습을 역사속에서 정조라는 대상으로 찾아내었고, 그에게 현재가 원하는 이상향을 부여했으며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개혁군주 정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에게 정조는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고 인자한, 그리고 언제나 강직한 지극히 선비적 인품을 가진 인물로 느껴지곤 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믿은 바를 끝까지 이루어내고자 했던 강직한 인품, 그리고 이를 이룩해내기 위해 밤 잠도 이루지 못한채 몇날 몇일을 꼬박 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성군의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조의 모습은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정조의 모든 것이었을까?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자 하는 바로 그 모습이 정조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정조를 바로 알고 있는 것일까?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제목의 이 얇은 한권의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정조가 재위기간 심환지라는 조정의 인사에게 보내었던 수 많은 편지들, 어찰첩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그 수많은 서신을 통해 공식적인 역사속에 남겨진, 혹은 우리가 그토록 추앙했던 개혁군주의 모습이 아닌,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그리고 그래서 더욱 진실일 수 있는 정조의 가려져있던 모습들을 찾아보고자 한 책. 그것이 바로 <정조의 비밀편지>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정조
<정조의 비밀편지>에서는 그간 우리가 알아왔던 정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모들을 알 수 있다. 강직하고 심지가 굳은,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고지식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했던 정조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공식적 입장과 개인적 입장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획책을 서슴지 않은 정치성 강한 지략가. 온화하고 올곧은 품성으로 언제나 인자한 미소만을 지을 것 같은 성군의 품성이 아닌 성격이 급하고, 기분에 따라서는 막말도 불사하는 다혈질. 언제나 근엄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군왕이기 이전에 유머러스하고 인정 많은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여과 없이 설명하고 보여준다. 말 그대로 비밀편지였기에 가능했던 수 없이 많은 그의 가려진 모습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역사속에 남겨진 그저 평면적인물이 아닌,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화가 날땐 화를 내고, 사람의 정을 그리워하거나 혹은 그것마저도 이용할 줄 알았던 입체적인 인물로서의 정조를 만나게 되는 기쁨은 그래서 대단히 크다.


군왕이라는 자리에 가려진 정조의 본 모습
한 나라의 군왕이라는 자리는 분명 많은 것을 요구하는 위치이다.. 그것은 단지 그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지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끝없이 요구되는 무게일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았던 역사적 인물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단련했을 것이다. 역사는 그래서 그들을 한명의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군왕.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로서만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을 기억한다. 정조 역시 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리에 앉아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에게 개혁군주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며 그들의 업적과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다 할지라도 한 가지 남겨지는 진실은 그들 역시 인생 하나를 살다간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기록하는 군왕으로서의 정조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심환지와의 어찰 350여통은, 그래서 단지 정조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수 많은 역사적 인물들에게도 인간적 고뇌와 공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존재했다는 점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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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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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세상. 임사체험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죽기 전에는 온전히 그 곳에 다녀올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곳에 대해 가끔 호기심과 의문을 담아 이야기하곤 한다. 상상도 한다.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상상과 꿈들은 그저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려보는 환상일 뿐이다. 대부분은 산 사람들의 입장만을 반영한채 말이다. 죽은 자의 세상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상은 그래서 이기적이고 편협할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러블리 본즈는 14살에 이웃의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살해당한 소녀라고 해서 그녀가 어떻게 살인당했는지 혹은 그 살인의 비밀이 어떻게 밝혀졌는지에 촛점을 맞춘 영화는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의 사랑하는 이들과 안녕을 고해야했던 소녀의 남은 꿈들과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죽은 이들에 대한 살아있는 자들의 바람과 상상을 더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물론 동명의 소설이 있긴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만든 감독 피터잭슨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상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 더해져 더욱 강하고 확실하게 죽은자의 세상과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그리고 그 안에 모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사랑과 삶에 대한 애착들을 보여준다.


[러블리 본즈]는 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유대감이나 관계의 친밀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주인공의 이름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말았던 영화의 제목에는 수지의 죽음을 통해 다시한번 삶과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고 더 강한 유대로 사랑을 확인하는 재생의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첫 키스 조차도 해보지 못한 순수했던 14살의 아름다운 소녀 수지 샐먼, 그리고 더 없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그녀의 가족들이 수지의 죽음 앞에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고 한 단계 성숙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바로 이 영화 러블리 본즈가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영화는 억울하게 살해된 수지의 원한을 바로 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수지 이외에도 많은 아이들을 죽인 연쇄 살인범에게 완전범죄라는 특권을 주고 그들의 죽음을 영원히 비밀속에 묻어버린다. 오로지 그들의 죽음이 또 다른 사랑과 믿음에 온전한 거름이 되어주었음만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에게 죗값을 묻긴 하지만 말이다.






러블리 본즈는 또 살아남은 자들의 관점만이 아닌, 먼저 세상을 떠난 죽은 자들의 안타까움도 담아낸 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살해당한 채로 억울함을 간직하고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수지의 애잔함은 그녀가 자신의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함에도 있지만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루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장 망설임도 놓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4살 소녀의 작은 소망이었던 사랑하는 이와의 첫키스,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수지의 14살의 삶은 자신을 끝없이 사랑했던 아빠를 위해,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애쓴 동생을 위해 억울함도 미련없이 버린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준비된 천국의 그곳으로 가게 된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어서도 사랑함을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 14살 소녀의 죽음 위에 핀 붉은 꽃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영화가 바로 러블리 본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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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 - Parallel Lif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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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사람들은 운명을 늘 궁금해하며 살아간다. 경기가 나쁠수록 점성술이나 운명을 점치는 사업들이 더욱 번성한다고 하니 불안한 운명에 대한 궁금증은 시대가 어렵고 어두울수록 그 궁금증을 더하는가보다.
 



 

평행이론은 이미 알려진대로 일정한 주기를 두고 서로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인생이 반복된다는,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평행이론이라는 이론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영화이다. 최연소 부장판사의 자리에 오른 김석현이 살해된 부인을 죽인 범인을 뒤쫓는 과정에서 30년전 자신처럼 최연소 부장판사의 자리에 오른 한상준과 동일한 인생의 흐름을 보인다는 일치점을 찾아내면서 남겨진 자신과 가족들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의 큰 가닥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운명이 누군가의 인생의 반복이며 그 반복되는 인생이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최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한 남자의 고통이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적 재미라는 측면에서 볼때 평행이론은 전제가 있어야 하는 영화이다. 바로 평행이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론에 대한 개인적인 수용의 여부가 이 영화를 즐기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 실제로 영화를 함께 관람한 친구는 평행이론이라는 이론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문을 달고 영화를 관람한 결과-_-;; 영화 전체에서 단 하나의 재미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많고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세상이니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라는 인생관을 가진 나의 경우는 평행이론이라는 이론에 대해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영화의 주요 흐름에 집중이 가능했던지라 영화의 재미를 십분 느낄 수 있었던 경우였다. 영화를 즐기기 위해선 평행이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심보다는 그럴수도 있다라는 약간의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2시간의 영화를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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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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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에게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란 단지 실록등의 글로 적은 역사서 뿐이 아닐것이다. 한장의 그림, 한줄의 싯구, 길가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글자 하나까지도 우리의 과거를 밝히고 옛 조상들의 발걸음을 뒤쫓을 수 있는 하나의 근거이자 자료가 된다. 특히 사실 그대로에 사관의 주관을 섞어 기록했던 비교적 보이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긴 역사서보다는 눈에 보이는 글귀나 사진한장은 없으나 그래서 더욱 은유적이고 당시의 분위기와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 그림 한장이 풍부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중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세한도의 시작, 탄생, 현재
그런 의미에서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바로 그 한장의 그림, 추사의 그림에 담긴 수 많은 사연들과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그 안에 숨쉬는 추사 김정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세한도라는 그림을 매개로 총체적으로 묶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한도가 만들어지기 전의 추사 김정희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세한도가 그려지는데에 필요했던, 혹은 자연스레 그림에 스며들었던 추사 김정희의 사상적 면모가 다듬어지는 과정, 그리고 세한도를 그리던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추사의 당시 상황, 여기에 세한도가 그려진 후 세한도가 움직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들이 모두 한데 담겨진 이 책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한도의 출생배경부터 출생의 과정, 그리고 변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모든 이야기들을 담아냈다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추사와 세한도
사실, 세한도의 작가인 김정희는 우리에게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나 권력의 핵심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서 보다는 추사체로 알려진 특유의 서체를 만들어낸 서예가로서 더욱 친숙하다. 그래서 일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어딘지 조금은 어색했다. 이미 세한도라는 이름과 그 그림의 작가가 추사 김정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한도를 그린 그림의 작가 추사 김정희는 붓을 들고 글씨를 쓰는 서예가 추사 심정희보다는 어딘지 어색하게만 느껴지곤 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세한도라는 이름이 그토록 유명한데도 그 작가 김정희와 세한도를 한데 뭉쳐놓으면 어딘지 익숙치 않은 바로 그 이유 말이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 추사라는 별호를 쓰던 김정희라는 문인에 대해 배운 정보라는 것이 바로 추사체 하나이기 때문은 아니었나 되짚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나에게 역사를 수 놓았던 한명의 문인이 문인이라고 불리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양의 사상을 접하고 자신의 사상체계를 성립하기 위해 공을 들이며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지를 비로소 조금 알게 해준 값진 시작이 되어준 책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곧 그 시대이며, 추사 자신이다.
그래서 일까?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안에 담긴 추사의 일생과 그의 우정, 그리고 세한도의 글귀 하나하나와 나무 한그루의 가지는, 모든 것이 그 시대와 추사 자신을 설명하고자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사실 세한도를 촬영한 책 속 수록된 도판을 살펴보면 세한도는 그림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닌 서예가 추사 김정희로 유명한 작가의 이력까지 더해지는 마당이니 정말 책 구절 어딘가의 한마디 처럼 '이게 정말 그 유명한 세한도??'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화려한 색감으로 가득 채운 서양화나 동양화속에서도 웅장한 자연과 화려한 테크닉을 찾으려했던 내 눈엔 서너 그루의 나무와 얼기설기 대충 그린 것 같은 집 한채, 그리고 글자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함이 그토록 어색했던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그 세한도 안에 공허하게 남겨진 여백과 황량한 분위기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추사의 상황을 더해 가득 채워넣을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가 책으로서 가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대와 인생을 한장의 그림에..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그림을 그리는 종이 한장의 선택과, 그토록 어설퍼 보이는 화풍 역시 그가 그토록 노력하여 얻어낸 결과물이었음을, 그리고 그렇기에 시대를 거슬러 세한도라는 한장의 그림이 후세에 이르른 것임을, 그래서 한장의 그림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 화면이 아닌 그 이면의 배경과 작가의 사상이 맞물릴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세한도라는 한장의 그림과 추사의 일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더해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여전히 서예가 추사 김정희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친숙한 그의 인생을 그림을 매개로 담아냄으로써 우리가 자칫 잊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하고 망각해버린 역사 속의 문인으로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물론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묻혀버린 위대한 우리의 사상가나 문인이 비단 추사 김정희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시간이라는 무게에 눌려 빛을 잃고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세한도: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은 바로 그 단편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다각적인 관심과 지적 호기심으로 우리 역사를 좀 더 깊이있게 보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 그것이 현실이 아닌 단지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일지라도 그 이면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을때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충고 한마디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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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품절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이나 지인들이 일상에 지쳐 힘들어할때, 혹은 크나큰 시련을 당했을때 자연스럽게 술 한잔을 기울이거나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는 것으로, 혹은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오기 위해 노력해주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기 위해서는 그토록 쉽게 내밀 수 있는 한잔의 술과 한마디의 말들, 하지만 그처럼 망설임 없이 내밀었던 술잔과 위로는 가끔 너무도 어렵고 인색해지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었을때, 나 스스로 나를 돌아보고 내 속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일, 그것만으로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 일들이 바로 나를 향하는 그 순간, 가끔은 너무도 손 쉬워 보였던 그 일들이 너무도 어렵고 어색하며 인색해지곤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타인을 바라보는 사랑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아한다. 오히려 주저하고 망설이며 스스로를 더욱 외롭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왜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에는 주저하게 되는 것일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쓰는 대필작가.
아홉번째 집 두번재 대문에는 모든 것에 무덤덤하고 일상의 재미를 잃어버린 것 처럼 살아가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거의 매일을 라면으로 끼니를 잇고, 라면이 아니면 나가서 대충 한끼 사먹고 마는, 같은 동네에서 집과 사무실을 겸해 살아가고, 그래서 언제나 그 동네에 붙박이처럼 붙어 움직일줄 모르는, 그렇게 대충 넘겨도 시간만은 일정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듯한, 그래서 남들처럼 인생의 무엇인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인생에 홀로 남져진듯한 그 남자는 이런저런 글들을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논문이나 공모작을 의뢰받지 않는는 탓에 주로 자신들의 인생을 추억하고 회고하고자 하는 자서전들을 써주는 경우가 많은 대필작가.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이름 속에 숨어 글을 써주지만 그들의 인생을 쓰기 위해 그들의 인생을 듣고, 그들의 인생을 기억하며 그들의 인생을 다듬는다. 제3의 작가라는 그의 영업성명처럼 제3의 눈이 되어, 혹은 3인칭 작가시점이 되어 타인의 인생을 대신 돌아봐 주는 일. 새로운 것들 창조해 이야기를 짓는 소설가가 아닌 그저 일어났던 일들만을 회고할 뿐인 그 남자의 대필작가로서의 일은, 그 남자에게 생계를 이어주는 수단임과 동시에 그 남자의 현재이기도 하다.


미래를 보았던 아내, 죽은 자를 보는 남자.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달려온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에게 버림받듯, 인생이라는 시간위에 내던져진 남자. 하지만 그에게는 언젠가부터 생긴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어귀에서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아내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특히나 잘 알고 있었듯, 그에게도 주어졌던 다른 이들과는 다른 그 능력은 살아 숨쉬는 자와 죽은자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아내가 죽은 뒤 미래 대신 과거만을 되짚으며 살아간 그에게 현재이자 미래가 되어간다. 살아있을 때에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집념으로 죽어서도 남아있는 영혼들에게 연민을 던지고, 그들이 죽어서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고 남아 과거를 맴보는 것도 결국은 살아 있는 자들의 욕심임을 알아가는 그의 현재는 그래서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추억만을 되짚으며 현재를 이어나가는 과거로 얼룩진 그를 과거가 아닌 현실로 돌려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의 인생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이미 죽어 존재 자체가 과거가 되어버린 영혼을 통해 현재로 돌아가는 법을 배우는 그. 그래서 그의 능력은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던 그에게 진짜 현재로 돌아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빛 하나가 되어준다. 너무 희미하고 작지만 그래도 빛이었던 그만의 유일한 한줄기 빛 말이다.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야 미래를 기다릴 자격이 주어진다.
글을 써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낸 혹은 자신의 마음과 상상을 이어낸 한권의 책을 쓰고 싶어한다고 한다. 하지만 글을 써서 삶을 이어가는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의 그는 소설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어느날 장사익이라는 인물이 묘한 계약을 제안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되 자서전이 아닌 소설로, 그리고 작가는 의뢰자가 아닌 대필자의 이름으로 출간할것을 전제로 한 계약. 뭔가 석연치 않지만 얼렁뚱땅 맺어진 계약은 얼마간의 계약금과 함께 그의 손에 맡겨지지만, 장사익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채 망자가 되어버린다.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계약. 잊어도 무방한 그와의 약속은 끈질기게 그의 주변에 남고, 그는 그의 인생을 되짚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도 되짚게 된다. 드러나지 않는 제3의 위치에서 타인의 인생만을 살피던 이행하지 않아도 될 약속의 주변을 맴돌며 비로소 자신의 삶에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보았던 그는 그렇게 조금씩 살아있는 자신의 과거를 지나 현재로 나오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날 때 쯤 중절모를 쓴 장사익과 나누었던 계약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 본 이만이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계약은 아마도 제3의 작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완료될 것이다.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에만 익숙했던 그,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자신을 들여다 보는 일에는 익숙치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 보는 일을 하지 못한 그는, 그래서 자기 자신도, 타인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아내, 태인이.. 그가 그들을 잊지 못하고 길고 긴 과거 속에 자신을 담은 채 현재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은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과 안타까움, 그리고 외로움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을 들여다 보지 못했던 사람의 외로움. 그 외로움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누구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일이었을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이제 과거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 글을 쓸 것이다. 다른 이의 인생을 보던 건조한 눈이 아닌 충분히 자신을 사랑한 후의 햇빛을 담은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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