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를 걷다 - 나를 지우고, 나를 세우는 힐링 여행 산문집
동길산 지음, 조강제 사진 / 예린원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경하다는 말처럼 포구는 기실 드러나지 않는 존재감이 크다. 뭍에 살든 바다를 맞대고 살든 세월에 빗겨간 시간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좋은 것만 좋은 것이 된 지금에서 포구는 부동의 실체다. 해서 그 내연이 선연하게 밝혀 주는 속내와는 다르게 뿜어내는 외향은 그저 그렇게 읽혔다. 익숙함이 생산하는 왜곡의 소치고 편견의 민망함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 책 [포구를 걷다]는 적확한 문장과 풍미 가득한 시구로 길어 올린 산문집이다. 현대화되고 도시화된 부산의 존재 이전의 가치를 느릿느릿 완만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또박또박 눌러 낸 글이다. 저자 동길산의 글과 조강제의 사진이 절묘하게 합일하는 소실점은 문장 하나하나에 고뇌를 담고 투영한 겸손의 손놀림이 역력하다. 정 붙이고 터 내리고 사는 곳 어디라도 아니 좋겠냐마는 부산을 소개한 색다른 글이라 반갑다.

   

책은 부산의 서쪽에 위치한 강서 명지포구를 기점으로 동해의 끝단 월내로 흐른다. 저자는 포구를 통해 지나 온 삶을 반추하고 지천명에 이른 소회를 등대에 빗대기도 포말에 부서진 파도에 실어 낸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부산 토박이 시인의 글맛이 제대로 베여 있어 시나브로 읽힌다. 비린내가 주는 거리감도 시인은 경험의 거름망을 통해 고스란히 녹여 냈다. 때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온 양치기 산티아고처럼, 때론 자유를 갈망하는 히치하이커처럼 읽는 이를 위무한다. 훌쩍 찾은 여행지의 도타운 풍광에 놀란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할퀴고 싶도록 내가 미울 땐 되도록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뜬 달 보듯 나를 바라보는 건 상책중의 상책이다.” p-257

 

 

시인은 포구를 곧 뭍과 물의 경계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했다. 변방과 중심의 경계에서 시인은 포구를 딛고 맞닿은 등대를 길라잡이삼아 마음을 여몄다. 변변한 글재주 한 자락 없어도 절로 심상이 포개지고 울림에 공명한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누구랄 것 없이 고즈넉한 손길 하나에 아득해진다. 그 속에 포구가 존재했고 함께 힘겨운 시대를 살아 간 해풍의 주름에 깊게 팬 부산 토박이가 공생한다. 비록 변모하는 포구의 운명처럼 소멸될지라도.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 그런 시절은 물같이 흘러가고 기억의 등대만 오롯하다. 항상 곁에 있고 싶은 사람 그대는 누구인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p-126

 

더불어 시인의 맛깔난 지명에 담긴 부산의 포구풀이는 의외의 재미가 있다. 지명은 자연에 순응한 인간이 만든 존재의 기록이다. 지명을 통해 그 땅의 쓰임이나 생김을 담아 내 듯 부산의 포구는 각기 다른 존재를 각인했다. 포구의 꼬리와 같다 해 미포라고 쓰이지만 시인은 돌아보면 새로운 출발점이라 읽어 냈다. 모래톱이 움푹 패여 오목하게 들어간 홍티 포구, 달을 품에 안을 듯 잔잔하게 떠오르는 월내 포구.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상대성의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2곳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라고 한 작가 김연수의 글처럼 여행은 상대적이다. 해서 이 책을 통해 시인은 부산의 포구를 재조명하고 도식화된 특정 행로를 뒤틀었다. 이전에 읽히던 자갈치가 색다르고 해운대가 달리 보이는 이유, 상대성이다. 포구는 차례차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흘러가듯 존재를 거듭하는 이유가 그런지 모른다. 그저 묵묵히 붉음과 초록의 빛을 생산해 내고 그곳에 곧 순응해 나가는 등대의 숙명처럼 사람의 인생과 매한가지다.

 

이렇듯 동길산 시인의 글과 더불어 조강제 사진가의 순간을 담아 낸 찰나는 공허한 마음을 메꾼다. 부산을 찾은 여행자든 부산에 뿌리 내린 토박이든 읽히는 순간 너르게 뻗어 내린 포구 위를 함께 유영한다. 현장의 기록을 통해 시대를 아우르는 포구의 생명력은 연민이 샘솟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한다. 매몰되고 억압된 감정의 틀 속에 메여 사는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래그래 다독여 주는 둥그스름한 손길이 정답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책은 부산을 중심에 놓았다. 숱해 봐 온 부산이 가진 다이내믹한 매력과 달리 포구를 통해 본 여행은 관조적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삶을 희석시키고 중화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포구는 존재를 거듭했다. 여기가 저기로 스며들고 사람이 사람에게로 스며들길 바란 작가의 마음은 누군가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

 

공수 포구는 겉을 보고 속을 비웃은 나를 나무라는 포구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고 빈정댄 나를 나무라는 포구다, 포구에 부는 바람 소리가 공수레공수거공수레공수거 무슨 염불 같다.”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몇 해를 거친 글로 블로그에 매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숙성되지 못한 글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민망함의 언저리에 오롯이 서 서 쑥스러워 지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인 모양입니다.

 

흠모하던 김훈작가님의 말씀처럼 먹고 사는 밥벌이의 지겨움일까요?

읽고 글만 쓰고 살기를 소망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발목을 잡히던 몇 해 였습니다.

 

물론 핑계 삼아 끄적여 보며 애써 자위해 보는 위안의 의례임을,

치열하게 살고 있음에, 변명해 보는 것임을 압니다.

 

불확실한 선택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 다시 잊혔던 기억의

시간을 재생하는 것은 침잠한 열정의 에너지를 일으킬 불쏘시게로

만들고 싶은 연유가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에게 겸허해 지는 시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꿈꾸는 이는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욕망의 하녀에 비유한다. 즉, 불안을 생산하는 요체는 마음의 반응이라는 뜻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 선택에서 오는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안은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물질을 잉태한다. 희망은 곧 에너지를 모으고 삶을 고무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꿈꾸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소망의 충족이라고 했다. 원하고 바라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이다. 이처럼 꿈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에너지원이다. 파울로 코엘류가 자신의 생이 담긴 이 책에서 간절히 소망한 그 것, 진정한 자아自我를 이끌어 주는 표지標識가 바로 이다.

 

나는 코엘류의 마음을 강물처럼 사랑한다. 안토니오를 통해 자아를 찾아 순항하던 그 위대한 여정의 순간의 연금술에서부터 인간의 순수함에 공명하던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무희를 잊을 수 없다. 그가 내 마음에 아로새긴 삶을 대하는 지침은 시대를 아우르고 시간을 초월한다. 굳이 알레프 신심으로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주는 등대처럼 반짝인다.

 

이 책 <알레프>는 치유의 소설이다. 읽는 내내 먹먹함에 가슴 벅차 오르고 매몰된 꿈의 원형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코엘류의 손으로부터였으나 끝은 자신이 된다. 비록 빛의 고리를 마주 대 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내 인생에 펼쳐진 표지를 식별하는 혜안을 얻게 되리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의 여정을 헤쳐 나갈 초심자의 그 마음처럼.

 

실제 알레프 실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평행한 차원이다. 알레프 기의 운행으로 그 기저에는 윤회의 큰 틀이 담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오고 가며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나를 발견하고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동시성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은 기억의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시간의 모래밭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코엘류는 알레프 차원을 통해 전생의, 아니 다른 차원의 자아를 발견하고 용서 받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사랑의 이름으로 힐랄을 통해 치유한다. 분명 코엘류의 갈등의 극복은 생경하며 이질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합리화된 야만의 본성과 그것을 타파하는 용기를 엿본다. 타자가 형상화한 우상의 실체는 자신을 얼마나 옭죄며결박의 사슬을 끊어 내기가 힘든지에 대해 코엘류는 수도사의 눈으로 투영했다. 몽매의 억압은 지금도 풀어야 할 운명의 사슬이다. 과거는 현재를 노래하는 투영의 시간이듯 실체 없는 야만은 두려움이다. 나는 코엘류가 애써 시공을 넘나들며 그 광활한 러시아의 강철의 레일을 덜컹이는 공간을 달리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속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극중 자아인 '나'불리지 않는 대상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나'이기 때문이다.

 

알레프 경험하기 위해 코엘류는 힐랄이 피워 올린 우정의 불을 매개 삼아 불쏘시개로 이용한다. 활활 타오른 불은 위대한 자아를 낳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왕국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 우주가 모여 우리가 될 테고 산다는 것의 정당성을 획득하리라. 영혼을 정화한다는 그 가치명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산다는 것은 때론 아프고 때론 막막함에 아득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막막함인지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임은 안다. 누구나 그러하다는 불안의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테다. 이쯤 되면 나의 전생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묶는 끈은 무엇일까? 나는 해답을 알 수 없다. 오직 불어오는 불안함을 극복할 방법은 나 자신을 믿고 인생의 시간 위에 흩어진 표지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이 또한 꿈꾸는 자의 몫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만가만 읽지 않고 쟁여 둔다는 건 마치 포만감을 앞당겨 온 기분이다. 굴곡처럼 퍼덕이는 변명이라도 내 곁에 선 그것은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또 다른 표식이다. 닮은 듯 다른 일상이 매일 이어지지만 나는 침잠할 수 없다. 존재와 당위의 사이를 오고 가는 나에게 책은 더욱 그렇다. 풋풋한 설익은 향과 진득하고 노련한 향이 교차하는 오묘함이다.  

한 동안 밀어 내고 또 밀어 냈다 했음에도 돌아 와 보니 거기더라. 토해 내지 못한 문장들과 찰박찰박 파문을 일으키며 퍼지는 행간들 사이로 쓰러지는 익숙함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가뭇없어 현기증이 일어도 실체없는 불확실함은 아니다. 때론 덴고와 아오마메의 몽환적인 세계를 걷기도, 기억할 수 없는 곳에서 삼킬 듯 불어 오는 바람이 현실처럼 앞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아이야, 오늘을 기억하렴, 

  네가 만들어 낸 그 웃음,  

  너의 뇌를 헤집고 나온 순간의 문장, 

  감각의 중추가 작동한 그 모든 감정선...  

  다시 새길 수 없는 시간의 은혜임을."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1-10-13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3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3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0-1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너무 오랜만이셔요,
아이들 잘 크고 있죠. 바쁘신가봐요............

돌고 돌아도 거기라면, 그 자리가 나의 자리일지도 몰라요.
무한 회피로 돌고 도는게 아니라면 더욱 그렇겠죠. 저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볼까 하구요. ^^

穀雨(곡우) 2011-10-14 14:17   좋아요 0 | URL
아...마녀고양이님..잘 지내시죠..^^
아이는 무럭무럭 너무 잘 자랍니다. 집안일이 더 늘어 난 거 외엔 달라진 것은 없지만...
시간이 줄어드니 서재도 소원해졌네요...ㅎㅎ

큰아이랑 뜬금없이 오늘, 바로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조금 감상에 젖었나 봅니다.ㅎㅎ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히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1-10-14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7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 이가서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겁쟁이, 우리는 루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믿음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그림자와 같다. 누구나 신념으로부터 오는 용기의 순간을 겪는다. 그 과정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방향은 바뀐다. 비열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되었고 부동의 가치로 작용한다.



비겁함의 그 수치스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쉽게 와 닿지 않는 거리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생경한 주장을 하는 프린츠 M.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호기심의 촉수를 자극한다. 그는 빈 대학교의 생물과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화ㆍ인지생물과학의 전문가다. 그가 펴낸 이 책의 골자가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위 겁쟁이예찬론 정도 되지 않을까. 겁쟁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 패러다임을 풀어 나가는 이 책은 의구로 시작해 동감으로 변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진화의 웅장한 프레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자연계의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뚫고 반복과 학습의 쳇바퀴를 진화라는 물결을 흐르고 또 흐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남은 진화의 법칙,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환경에 친밀하고 빠르게 적응하고 뒤쳐진 종은 자연도태된다는 H. 스펜서의 이론이다. 때로는 돌연변이라고 하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적 효용성의 결과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더 정확하게 따져 보면 판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적자適者로 비유되는 종은 강하고 빠르다는 현상에만 치우쳤지 평균적인 수명이 긴것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혁신적인 관념의 시작이다. 살아남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별한 재능을 획득했다는 논거다. 실제 동물의 세계에 거짓말과 속임수, 기만과 조작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윤리적 잣대나 감정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로 국한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은 윤리적이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호모 사피엔스다. 윤리는 도덕적 관념을 낳고 기만과 거짓을 배척한다. 이러한 잣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진화의 상관관계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그 틀은 고정된 부동의 역사인지 모른다.



문제는 윤리의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있다. 저자가 밝혔듯 회의적인 시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또한 비겁함의 옹호를 차치하고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된 섬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사회진화의 영향도 물론있겠거니와 감정의 기준점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비겁한 겁쟁이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 이기주의자는 정치적 조직 또는 이기적인 단체의 이합 형태와 자기 사이에 놓인 분명한 선을 구분짓고 다양한 자유주의를 사랑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논거의 핵심이다.(P-228)



분명한 것은 자아우선주의와 배타적 감정의 충돌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자아우선이 사회문화적 동력이 될 것이고 혁신을 구동하는 매개가 된다는 의미겠다. 그러나 이기적 행태와의 구분은 중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병리현상은 심각하다. 대중매체와 매개된 광고의 힘은 자기중심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자텔베르거의 이념처럼 '신봉건주의의 범람' 또는 '신병리학적 자본주의 현상'의 욕망의 뒤틀린 깨달음 현상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에 대한 패러다임을 달리 쓰고자 한다. 그들이 개인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는 상호연관성을 수용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의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호하며 '자아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통용되는 법을 따른다. 그 속에는 타인을 배려하고 통념의 가치를 이끄는 행동규범으로서의 선이 존재한다. 그들에게서 삶은 목적에 충실한 작은 물결에 미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작은 모욕을 물리치는 안정된 삶을 견지한다.



이와 같이 저자의 겁쟁이예찬은 오랜 통찰과 고민의 흔적이 빗은 결과물이다. 그가 이론이 생경하고 낯선 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그 발상의 전환은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방식이나 견해를 학계에 보고한다는 것은 오히려 보수의 고착화된 사고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도덕적 근본바탕에 버무려진 진화의 패러다임, 곱씹어 볼 주제다.



비겁자란 여러 상황 속에서 숨거나 도망쳐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며 용기를 증명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으려 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신이 방해받거나 위협받지 않는 한 타인에게 적대감을 품는 일이 없으며 국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보복조차 묵묵히 감수하며 그 결과 세속에서 물러난 삶을 사는 사람이다.(p-239)



물론 도덕적 이념이 바탕이 되지 못하다면 한낱 겁쟁이를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을 지배하던 이념의 허구 앞에서 애써 외면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한 것과 같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생물학적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을 떠올린다면 도덕적 개인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의 이상은 진화의 경계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미덕이란 지속적인 실천이 모여 구축된 삶의 태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01 0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