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일이다. 격앙되고 힘이 들어 간 상담원의 낯선 전화는 으레 스팸처럼 걸러 내려가기 마련이다. 고객님을 VIP로 모시겠다는 달달한 말로 추켜 세워주던 시대도 지났건만 우직한 목소리에서 뿜어 나오는 간청의 프로포즈는 의외였다. 그것도 나긋나긋한 여성 상담원이 아닌 굵은 테너의 남성이라 더욱 그랬다.

 

그가 던진 제안은 창비의 계간지에 연간구독회원이 되어 달라는 전언이었다. 그네의 사정이 절박한 지 알길 없으나 전화선을 타고 넘는 감정은 절박했다. 창비의 계간이 읽히고 안 읽히고를 떠나 그 상담원에게 할당된 몫은 줄지도 않는 고장 난 눈금의 지침처럼 멈춘 듯 했다. 오늘이 두 번째 전화다. 바쁜 외근 길에 걸려 온 전화는 건성으로 넘기고 고려해 보겠다는 기약 없는 변을 달고 사정없이 끊어 내지 못한 나의 마음 어딘가를 파고들었음은 당연하다.

 

나는 가끔 상담원의 전화가 불편하기 보다 애잔하게 다가 올 때가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보험이 출시되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자동응답기처럼 토해내고 물건을 파는 상담원들의 전화가 저릿할 때가 있다. 상담원의 전화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있다. 내키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부단히 사투하는 찰나의 현장이 치열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난 막연한 적의를 품어 대할 수 없다. 사람 좋아서도 아니고 그네들이 겪을 고통, 숨 가쁘게 달려야 할 불편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화선을 타고 넘어 온다. 신경숙 선생의 전화벨은 결핍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나에게 걸려 오는 상담원의 전화는 처절한 현실이다.

 

그의 전화가 딱 그랬다. 닿을 듯 말 듯 승낙의 언저리에서 달리는 평행선은 긴장이 고조된다. 듣는 이로서는 짜증이 날 테고 지겹게 듣고 닳아빠진 레퍼토리이겠지만 그에게는 긴박하다. 그의 부탁, 난 뿌리치지 못했다. 이유는 3가지다. 창비의 계간이 마음에 흡족할 만큼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들의 동향과 트렌드를 익히기에는 더 없이 좋다는 이유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간절함이었다. 진정성에서 묻어 나오는 간절함과 한 때 문학을 흠모했을 그의 언변에서 풍기는 야릇한 향기에 취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덤으로 끼워 주는 책도 있다는 말에 혹해 내질렀다고 하면 너무 삭막해질게 뻔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뿌리치지 못한 이유는 글 몸살이다. 책을 읽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제대로 쓰는 것에는 소원한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 이렇다 할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글에 대한 생각을 붙들어 매는 연습을 한 것도 아니므로 매번 글을 쓴다는 것은 상당한 진통이 뒤따른다. 해서 계간지에 실린 전문비평가의 매서운 눈을 통해 책을 드려다 보는 연습을 하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다. 누구나 생각을 글로 써 나가기는 쉽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탄탄한 문장력을 기반으로 은유적 작법을 구사하는 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눈으로 익히고 쓰고 반복하기를 숱하게 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시발점은 서평, 리뷰다.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출발하고 개별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책과 합쳐지는 교차점을 끌어안는 것이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문장과 정제되지 못한 글의 행방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로감을 몰고 다니며 반듯한 인식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의 신문서평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 윤색되지 못한 개성을 잃은 글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글 몸살은 늘 이러한 깊이를 모르는 늪에 빠져 들기 일쑤다. 일종의 매너리즘처럼 다양화되지 못하고 색깔을 잃은 글로 지지부진해진다. 글은 타자의 시선을 속살같이 끌어안아야 하며 잡은 끈을 통해 매듭을 짓고 풀기를 반복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감상이 되었든 통찰이 되었든 힘이 없는 글은 베낀 글보다 못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마 그의 전화가 나의 이런 빈틈을 제대로 짚어냈지 싶다. 운이 맞았고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도 그것도 진정성이 낳은 결과다. 참고로 창비의 계간은 통권 150호를 발간하고 지난한 역사의 한 가운데를 오도카니 눌러 선 인식 있는 간행물이다. 그러니 나의 이러저러한 이유가 다 소용이 없다할지라도 나는 앞으로 1년 동안 4번의 창비의 소리를 듣고 득음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혹여 공감한다면 구독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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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동감해요...저도 그런 편입니다...전화선 너머 현실. 저릿함. 아아..너무 와닿아요...영업분야가 삶의 현장과 그리고 그 절절한 생존의 무게와 가장 통하는 것 같아요. 할당량. 흑흑. 기억이 스멀스멀. 계간지 저는 문동꺼 한 번 읽어 봤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구요. 곡우님 글 김훈 생각나요. 더 닦으시면 위로 훌쩍 올라가실까 걱정됩니다^^;; 곡우님 글 읽으며 이쁘고 고운 어휘들 많이 발견합니다.

穀雨(곡우) 2010-09-15 08:5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은 제게 박카스같은 넘치는 에너지를 줍니다.
모자란 글도 이쁘다 해 주기를 반복하니 제가 진짜
잘 난 줄 안다니까요...^^
김훈선생님 글처럼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ㅋㅋ

세실 2010-09-1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곡우님도 이리 글에 대해 고민하시는데 저도 더욱....불끈^*^
서평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서평지를 읽으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요 서평지는 어려워서 읽기 힘들어요. 전 그저 쉬운 서평을 쓰고 싶은데...ㅎ
blanc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글 참 맛깔스럽게 쓰세요^*^

穀雨(곡우) 2010-09-15 09:02   좋아요 0 | URL
제글이 어딘지 모르게 싱겁고 객쩍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글이 저 글 같고 개성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해서 제 로망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쉽고 간결하고 임팩트하게....
글을 적는거예요....^^ 한방에 훅~~^^

열시에산다 2010-09-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굵은목소리의 창비 상담원의 전화를 받고 저 역시 구독을 하고 있는데.. 그분 정말 대단하신 듯 합니다. 그후로 가을호까지 3번의 책을 받았고 이제 한 번 남았네요. 그래도 구독하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책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계간지를 읽으며 책을 읽는 사람에서 책을 쓰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곡우님의 정진하시는 모습 멋있습니다. 화이팅!!

穀雨(곡우) 2010-09-17 17:50   좋아요 0 | URL
내공이 부족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혹여 이러다 정말 글이라도
술술 흘러 나올까 싶은 어설픈 마음에.....ㅎㅎㅎ

열시에 사는넘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노무현 대통령, 당신을 떠올리면 감정이 출렁인다. 살아생전 그에 대해 나는 이렇다 할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여론의 뭇매에 그가 쓰러지고 아파할 때도 나는 알지 못했다. 살기에 바빴고 혐오에 가까운 정치에 현기증이 났을 뿐, 무엇 하나 엮이고 싶지 않았다. 밀쳐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그가 남긴 커다란 발자취는 아련한 추억처럼 마음을 후벼 파 댔고 얼어붙은 마음을 움직였다. 나를 움직인 원동력은 그의 진심이 담긴 진정성에서 비롯함은 물론이거니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연대된 부작위에 대한 의식이 더 컸음이다.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잔인무도한 권력의 이면을 무방비로 감내한 당신의 아픔을 나는 그렇게 외면했다. 처절하게 파고든 권력의 탐욕은 끝끝내 돌아오지 못할 벼랑으로 당신을 밀었고 단말마의 고통과 함께 기구한 삶의 마지막 비행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아직 미완성이다. 현재도 그에 대한 비판과 헐뜯기는 진행형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현실은 언젠가는 종착점에 이르러 역사의 겸허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책벌레였다.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고 토론하고 건전한 비판을 통한 합리적인 이성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매사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에 아마추어 대통령이라는 오명까지 덮어 쓰며 변혁을 이끌어내는 열려 있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런 당신을 사로잡은 책을 함께 읽고 토의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가 못 다한 생각의 총합, 꿈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줄 책을 함께 공감한다는 것은 노무현, 당신의 눈으로 본 희망에 출렁이는 세상의 이면이다.

 

이 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한다>는 오마이뉴스와 한국미래발전연구원과 2009년 9월부터 11월까지 10권의 책을 바탕으로 참여정부에 몸 담았던 강사들을 선정하여 강독회를 열었던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된 책이다. 강독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게 토의하고 밀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 냄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강독회의 책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글이 되고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무게감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강독회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진 글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지향점을 향해 나간다. 그 속에 담긴 함의를 각자의 필터를 통해 확대재생산하는 것보다 하나의 큰 틀을 통해 읽어 나가는 것은 생각의 집결지를 한 곳으로 모으는 효과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강독회의 대상이 된 주제는 일정한 주체적 의식과 부단한 생각이 밑바탕 되어야 하며 이로 인해 더욱 발전된 통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본다면 텍스트에 곁들여진 팩트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분명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리는 작업의 일환에서 기획된 편집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집착은 거부감의 대상이 된다. 각 각의 책의 중요한 핵심과 사상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가늠하는 것은 좋았으나 더 나아가 현재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대비하는 토론이 부족하였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책의 기반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대변하는 10권의 책을 선정하고 강독하는 책의 특성상 완만한 흐름의 유지는 불가피해 보인다. 물론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그 태양은 판이하게 갈리겠지만 호불호에 따라 갈라질 것은 피할 도리가 없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완성도가 높은 역작들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짚어 내고 갈무리하였기에 지식의 층위를 불문하고 이채로운 경험이 가능하다. 정치, 경제, 환경, 사회 제 분야의 인식 있는 학자들의 책들이 결집되고 하나의 중심축을 향해 나아가기에 하나하나의 책을 따로 떼 놓고 읽어도 통찰의 힘을 키워주기에 충분한 양서다. 또한 강독회의 열기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그 자리의 열기를 밀도감 있게 전달해 주고 있으므로 충만했던 당시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독회는 같은 곳을 여럿이 함께 보는 협업의 힘을 맛볼 수 있기에 독서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사랑한 10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굵직한 카테고리로 나누어 분류하여 보면 국가, 경제, 사회, 환경, 문화를 주춧돌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탐색하고 고민하는 통찰의 작업이다. 장하준 교수가 지은 <국가의 역할>과 람 이매뉴얼과 브루스 리드가 지은 <더 플랜>은 신자유주의의 실상과 국가가 지녀야 할 비전에 대해 날카로운 물음을 던진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경제에 안긴 폐해, 부자감세로 이어지는 양극화의 불안한 기조, 친기업정책일변도의 자본지상주의에 대한 통찰은 작금의 현실과 대비시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고하게 제시한다.

 

또한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한다>는 정치적 색깔의 명분의 허상을 짚는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이며 둘을 하나로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여 줄 전 방위적인 인식의 지표는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책이다. 노벨경제학상을 거머쥔 경제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정치 문화적 생리를 탁월하게 끄집어 내 엮어 가는 이 책은 흡입력이 대단한 책으로 각인된다. 아마도 이러한 각 분야를 넘나드는 폴 크루그먼의 통찰의 힘에 노무현 대통령이 반하지 않았나 싶다. 아울러 강독자로 나선 김창호 노무현 재단 기획위원의 경륜에서 나오는 경험과 맞물려 지속가능성에 대한 화두를 제대로 이끌어낸다. 그는 미국식 보수와 진보의 생래적 차이와 정치적 영향에 따라 진보가 보수의 불분명한 경계를 지적하고 거버넌스(governance)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수립한다. 현대 정치사회의 핵심은 '거버넌스', 즉 시민의 정치적 참여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일갈한다.

 

로버트 라이시가 쓴 <슈퍼 자본주의>와 제프리 D.삭스의 <빈곤의 종말>은 대비하여 읽으면 재미날 책으로 보인다. 자본에 대한 상대적인 평등의 개념과 빈곤의 역학관계를 지형도를 그리듯 보여주는 책으로 그 내용 또한 옹골지다. 빈곤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국가 시스템적인 역할에 대한 자리매김이 확고한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0권의 책 중 제러미 리프킨이 지은 <유러피언 드림>에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번이고 잘 쓴 책이라는 칭찬을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아끼고 또 아꼈다고 한다. 강독자인 김성환 전 비서관이 요약본을 만들어 보고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청사진이자 롤모델로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은 미국식 자본주의로부터다.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를 바탕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영웅식 자본주의의 획득과정이다. 하지만 실제 오늘날 미국에서도 양극화의 복병으로 인해 발목이 잡힌 상태이며 드림은 종말을 맺은 상태다. 더 이상 성공신화를 자력으로 써 내려가기에는 레드오션의 혼잡한 세상이며 그 대안으로 이 책은 유러피언 드림을 꼽는다. 기술의 진보와 발전으로 계몽주의시대를 극복한 오늘날, 대화와 타협은 민주주의를 든든하게 세우는 터전이 된다. '공감의 시대, 공감의 정치'와 '새로운 정치파트너로서의 시민사회의 가치'는 똘레랑스를 통한 공감의 세상을 이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모든 가치가 실현되는 유럽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로 인식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에 당신은 앤서니 기든스의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을 읽고 몹시 부러워했다고 한다. 영국의 인식 있는 학자가 당당하게 나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고 그 대안으로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토양이 부러웠을 테다. 우리에게 없는 그들의 관용과 여유, 포용하는 대통합의 정치가 그랬을 테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시스템을 시민과 함께 고민하고 평등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그네들의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정책대결은 사뭇 우리네 정치판과 비교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이념을 떠나 더불어 잘 사는 나라로 이행하는 비전을 사회 전체가 함께 공유하는 시민의식이 바닥 깊숙이 녹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의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은 다른 책들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앞서의 책들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 경제, 사상의 시스템적인 메커니즘을 통찰했다면 이 책은 리더가 갖추어야할 역량에 대해 주목한다. 책은 두 가지 리더로서의 기준점을 설정하고 자아실현 욕구를 자극하는 변혁적 리더와 거래적 리더의 차이를 통해 변화를 이끄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번스에 의하면 사람은 두 가지의 태양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어느 것이 우위에 서느냐에 따라 리더로서의 역할과 자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변화는 마음을 붙잡을 때 시작되는 것이라는 이치를 생각해 볼 때 공감의 변화는 거슬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지은 요시다 타로의 책은 환경을 화두로 한 지속가능성에 프리즘을 갖다 댄 대안적 환경저서다. 아바나의 절박한 환경이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어지고 도시 전체가 새로운 녹색성장환경으로 뒤바뀌는 놀라운 변혁을 통해 대안경제의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 녹색성장의 진정한 가치와 성장모토가 어디인지 생각하는 인식의 지표를 뒤바꾸는 유익한 내용으로 엮여 져 있다.

 

끝으로 <생각의 오류> 쓴 토머스 키다의 책은 노무현 대통령과 악연의 사슬로 묶인 언론의 책임에 대한 고민을 이끌어 내는 내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시절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수구 보수신문집단에 시달리고 괴롭힘을 당했다. 언론이 왜곡되면 얼마나 쉽게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당하고 진실이 잠식당하는지를 이 책은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생각이 우발하는 오류는 감성적이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우연성에 기대며 지나친 단순화와 기억의 왜곡의 근거 없는 믿음이 유발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 6가지의 오류는 광범위하게 인간의 의식체계를 지배한다. 수치화된 통계자료보다 이야기의 감성적 호소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보면 그 나약함을 우리는 잊고 사는지 모른다. 따라서 이 책에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증명하라는 저자의 주장은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으로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한다.

 

 

이렇듯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를 대신하여 가늠할 수 있는 책의 총체다. 노무현 대통령이 위키피디아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 2.0을 건설하고 네트워크와의 결합을 시도하였으나 비록 실패하였으나 이 책 10권으로 그의 담대한 사상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향한 꿈을 껴안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세상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 실현되고 구현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공존과 상생의 세상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변하지 않는 가치는 참여에서 시작된다. 참여는 깨어 있는 지성을 요구하고 인식 있는 사고를 고무한다. 분명 이 책은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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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14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감정적으로 좋아합니다. 그의 행적을 낱낱이 들춰내고 의심가는 대목을 짚고 진정한 진보로서의 한계를 적시하고 이런 대목에서 저는 도망칩니다. 논리적으로 공박하고 머리로 그를 얘기하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퇴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행복하다고 미소지었던 다큐3일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행복해서 좋았어요. 그런데 그런 최후를 맞이하고 저는 그가 이런 책을 꼭 쓰고 싶다고, 마지막까지 펼쳐져 있던 <유러피안 드림>을 저는 울면서 읽었습니다. 누가 너무나 사랑했던 책은 그 사람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저의 경박한 이해도로 그 책을 전부 소화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저변에 깔린 그 인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너무 좋았습니다. 곡우님의 글을 읽으니 참 그리워집니다.

穀雨(곡우) 2010-09-15 09:04   좋아요 0 | URL
시간이 되면 10권의 책을 다 읽어 볼 참이예요. 당신께서 어디에 마음을 뒀는지
어느매에서 감동에 벅차올랐는지 드려다 보고 싶어요.
이 책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계속 지배적이더라구요....그립기도 하고.
 

 
딸아이와 제 엄마와의 사이는 각별하다. 몇 해의 계절을 뒹글며 경험하는 동안 훌쩍 웃자라버린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기만 하다. 그 호기심을 해갈해 주는 통로는 바로 엄마다. 엄마의 표정과 행동에 담긴 틈새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 가 앵무새처럼 느닷없이 엉뚱한 지점으로 아이는 거침없이 뱉어 낸다. 아이의 의식세계의 어느 지점에 걸려 있던 흡수했던 모방의 흔적이 툭 튀어 나온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예측할 수 없다. 어디로 날아 갈 지 행방이 묘연하다.

 

이른 저녁을 끝내고 자기 전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각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 든 새로운 생명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유치원에서 배운 지식과 의문이 겹쳐지는 접점에 이른 모양이었다. 아이는 태연작약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배 속의 아기 씨는 아빠에게 뺏아 온거야?

 아님 아빠가 엄마에게 준 거야?"

 

순간, 몰아치는 황당함, 뒤이어 몰려 오는 엉뚱함이 유발한 폭소.....

 

자지러질 듯 웃음을 선사한 아이는 영문을 모른 채 커다란 눈망울만 재빠르게 굴리기에 바쁘다. 아이가 가진 지식의 경험치로는 분명 주고 받는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리라. 아이의 눈에 비친 새 생명의 출현과 사고에 대한 경계는 소화내기 힘든 현실이다. 분명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제 엄마의 신체변화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을테고, 아이의 눈으로는 아빠의 것으로 인식되는 아기 씨를 어떻게 엄마가 가져 왔느냐는 도통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같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소유의 대상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아이의 영악함에 놀랐다기 보다 순수한 생각의 우듬지에서 걸러 나온 엉뚱기발한 생각이 신통방통하다. 한창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나이라서 그렇다지만 아이의 세상은 어른의 경직된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므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행위는 아이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주는 리시버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칫 정제되지 못한 말랑말랑한 생각을 기존의 관념으로 자르고 해체하다 보면 아이에게는 저항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는 유아서의 대체법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거리감이 든다.

 

나는 재차 아이의 눈에 담긴 호기심을 곱씹어 본다. 아이의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흘러 나왔을지를 가늠해 보고 아이가 내 놓은 결과치에 딱 부합할 정도의 언어로 다시 보내 주려 노력한다. 아이에게 아기의 탄생은 닭이 알을 쑥쑥 낳는 것과 같은 맥락의 수준이다. 드러난 그 대로 불쑥. 그러니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압축되고 추상적인 대답은 막연하다. 그 막연함에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이의 눈망울이 대변해 준다. 아이에게 1+1=2라는 공식보다 1+1=3이 될수도 있다는 불가해의 영역처럼 말이다.

 

"너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의 결실이란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아끼기 때문에

 아빠의 몸에 있는아기 씨를 엄마의 아기 집으로 보내

 준 거란다."

 

성(性)이라는 게 대 놓고 말하기가 참 민망하다. 구성애 여사의 말씀에 의하면 성은 아름답고 솔직해야 된다는 데 나는 한참을 멀었다. 이건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는 더 뒤로 뒤로 밀쳐진 이야기였을테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엄마의 배꼽에서 나왔다느니 하는 왜곡되고 결락된 진실은 가뭇없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솔직함을 요구하고 그렇게해야 제대로 된 부모 구실을 한다. 부모의 의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지겨울만큼 확증된 사실이므로 달리 토를 달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렵다.

 

어쨋든 아이에게 성에 대한 관념을 심어 주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한 것은 변함없다. 유치원에서 주워 들은 아빠와 엄마의 신체구조에 따른 성 아이덴티티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직접 대입해 보는 것을 보면 어설픈 은닉은 위험하다. 더불어 생각이 든 한 꼭지. 아이는 이렇게 크고 자라는 구나하는 조화로운 진실에 겸허해진다. 그동안 나의 굳은 생각의 프리즘으로 아이를 재단한 것은 아닌지하는 겸연쩍은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철 지난 광고 하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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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젤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예요, 그쵸?

穀雨(곡우) 2010-09-10 15:24   좋아요 0 | URL
전 크게 웃었습니다...므훗....^^
 

 
바람길이 바뀐다는 것은 몸이 먼저 알고 흡수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바람은 변한다. 태풍이 오겠다는 기별 뒤에 스스로 제 몸을 낮춰 소멸한 말로의 남겨진 꼬리가 여름을 데려갔다. 밤새 바람이 다르다. 끈적하게 타고 흐르던 눅진한 바람이 이제 몸집을 줄인 모양이다. 둔중하게 고여 있던 느낌은 오간데 없고 바람은 가볍다. 가볍다 못해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한들 거리는 5월의 봄바람은 아닐지언정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은 상큼하다. 밍기적 뒤채다 늦은 여름의 끝자락도 소슬한 바람 앞에서는 위력이 없다. 송글 송글 맺혀 비져 나오던 땀자락도 바람 앞에서는 무혹(誣惑)할 수 밖에 없다. 

 

바람은 때론 곁가지를 달고 온다. 내가 사는 곳은 바람에서 소금기가 퍼진다. 살짝 부딪히는 바람에도 진한 소금 내음은 코끝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전률한다. 분명 짧은 바람이었음에도 강렬한 감각이다. 그가 몰고 온 소금기는 파도에 실려 세상을 순회했을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바람에게 나이가 있다면 지구의 나이와 엇비슷하겠다. 부정합으로 퇴적된 지층을 뭉치고 덮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안 바람은 제 모습을 계속 변하고 변했을테니. 어찌보면 바람에게 시간의 관념은 의미가 없다. 인간이 만든 시간의 기록은 바람에게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어떤 자리에든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단지 변화의 정도에 따라 힘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 외에는 바람에게 시간은 사치다. 

 

변화는 이렇듯 소리없이 다가온다. 기약하지 않아도 예정대로 흐른다.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감지한 뒤에는 저만치 앞 서 나간 후의 일이다. 시작은 바람이다. 바람이 해의 길도 바꾸고 달의 모자란 기울기도 채워준다는 착각마저 분다. 바람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이 이 뿐이겠는가. 손으로 꼽아 세울만큼 의식화하지 못한다. 다의적인 바람의 영향은 자연을 회전하고 사람의 기운도 탈피하듯 바꾼다. 무의식중에 느낀 그 가벼운 바람이 상념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자연으로부터 배운다는 상생의 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바람의 변화가 무슨 대수겠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딱히 돌려 줄 말이 없다. 그저 바람이 바뀌었으니 여유를 찾고 주위를 좀 더 돌아보자는 정도지 애면글면할만큼 선후를 다투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람의 변화는 잠시나마 정체되어 둔해진 탁한 공기를 신선한 공기로 대체해 주는 역할만큼 중요한 일이다. 변화의 순간은 사소하고 미묘한 것에서부터다. 빠름에 익숙해진 일상에 바람은 충분히 윤활유가 된다. 살갗에 감기는 바람의 촉수에 마음도 분명 변화의 가운데에 선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시간이 되면 바람 맞으러 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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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0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09 09:14   좋아요 0 | URL
바람~하니까 예전에 제가 썼던 시가 생각나서 올려봤어요.
푸히히~~유치하지만...
'바람의 제자'라는 태그도 붙였었죠.

穀雨(곡우) 2010-09-09 09:36   좋아요 0 | URL
마기님, 시가 제 부족한 글과 잘 어울리네요.^^
채움과 비움, 어제와 오늘.....
가을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기를.....^^
 

 
1. 

걱정한 만큼 일은 대개 맥없이 끝난다. 기대도 마찬가지다.

2.

신새벽부터 비가 흩뿌리는 역사를 뒤로 하고 몇시간을 나아가기만 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의 기차는 고요한 물 속처럼 정지된 듯 움직임이 둔하다. 표정이 정지한 상태다. 그네들의 사정들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몸짓은 닮았다. 그것도 주말을 끝낸 월요일 이른 아침의 기차칸이라면 평소보다 더 성마르다. 아마 식사도 평소보다 빨랐을테고 리듬이 흔들려 불안정한 상태에 겨우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매번 이 시각에 출발하는 기차는 바닥처럼 가라앉는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웠으니 더 더욱 그랬는지도......


어떻게 보면 생체시계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에 미친다. 해가 사라지면 몸은 활동을 멈추고 의도적인 경직상태로 돌입하고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를 몰아내는 반복된 살기 위한 진화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는지 모른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작용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주기적인 리듬과 규칙을 메트로놈의 정형화된 순서에 맞춰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구속이 될 수도 있거니와 갑갑함이 발목을 붙든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한켠에는 새로움을 찾는 물질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쨋든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지 구부려져 얽히는지 움직이고 나아간다. 리듬이 얼만큼 벌어진 사람들을 태우고 기차는 목적지에 격한 숨소리를 내 쉬며 멈추기를 반복한다. 사람들은 기차 속 풍경과는 다른 사뭇 잰걸음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갈 듯 이동한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의 눈빛은 밤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밤의 지배는 마법처럼 서서히 해가 제법 떠오랐을 즈음에나 풀리리라. 


어지럽게 뒤엉키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서울역의 끈적하고 탁한 공기는 갈라진 간극의 틈입처럼 아득하다. 널부러진채로 간밤 도시의 혹독한 냉기와 오염된 시간을 버텨 냈을 노숙자들에게는 이 도시는 지겨울테다. 아니, 영혼을 붙잡혀 벗어날 수 없는 지옥경처럼 두렵다는 게 적확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서울역은 죽음의 광기와 삶의 집착이 들짐승처럼 배회하는 섬뜩한 곳일테니 말이다. 그들에게서는 원시의 공기가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도시화의 한 가운데에서 원시의 태고적 내음이 섞여 흐른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그들의 굴곡같은 삶,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락적인 허기를 채우는 그것보다 인간적인 위로가 더 필요할테니 말이다.


3.
 
마음은 실체가 없으되 취약하기 짝이 없다. 아침 나절 분주하게 펼쳐지는 이동에 위압당하고 덩그마니 찌를 듯 솟은 콘크리트에 짓누를 듯 무겁다. 파고드는 것은 현기증 뿐만 아니라 붙들 곳 없는 불안이다. 그래도 마음은 호기심이 앞선다.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언제나 생동감있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뒷목을 끌어 잡고 바닥에 나뒹구는 택시기사와 그악스러운 아주머니와의 신랄한 몸싸움을 구경하는 재미와 같다. 뭐, 달리 재미라는 감정외에는 구체적으로 형용할 말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 대해 "불안은 삶의 조건이다.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보통의 말을 풀이해 보면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면 또 다른 불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이 된다. 


돌이켜 보면 불안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재료다. 불안이 마음과 엉키면 평온은 부서지고 긴장은 고조되며 동요는 버무려진다. 불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그것이 기쁨으로든 슬픔으로든 바뀌는 것은 불확실한 불안의 재료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불안을 적절하게 조절 가능할까? 레시피에 맞춰 요리를 하 듯 불안을 몇 스푼만 첨가하면 최적의 상태, 즉 행복을 만드는 재료가 될까하는 거다. 그러므로 보통이 불안의 출현이 마음의 결핍, 사랑에서 온다고 했는지 모른다. 사랑은 불안을 중화시키고 희석시키는 최고의 첨가제다. 


나를 사랑한다면 불안의 통제를 통해 삶의 만족,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걱정은 일의 경중, 익숙함의 정도, 환경, 주위영향에 다분히 관계를 맺는다. 걱정이 커지면 불안이 된다는 이치는 분명하다. 사소한 걱정이 불안으로 바뀌기 전에 유쾌한 긴장을 위한 평정의 상태로 바꾸는 것이 불안을 통제하는 수문통제소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나는 빈번하게 반복한다. 걱정하고 긴장하며 불안해하고 믿고 통제하는 과정. 때로는 믿는 객체를 더욱 넓혀 신의 영향력에 기대는 것도 이와같은 의미와 같다. 마음은 앞서서 보았듯 실체가 없으나 형태는 다양하다. 마음을 드려다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마음을.
 

 

p.s) 늦게 내려 온 밤, 말로의 위용에 놀라고 쓴 맛을 본 리뷰소식에 아쉬웠다.
       마음은 또 안정보다 살아있음을 내비친다. 그래도 아쉽다. 결과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단지 민망한 기대를 한 나 자신에게 아쉬울 따름이다.


p.s 2) 단연 최고라는 머쓱한 어느 님의 위로가 없었다면 아쉬움은 진하게  

         머물렀을지 모르겠다. 그 님의 진심이 담긴 말. 마음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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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9-0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의 묘사 한 줄 한 줄이 들어와 박힙니다. 어휘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는 예전에 송혜교가 어느 드라마에서 했던 대사를 참 의미심장하게 들었어요. 작은 걱정만 하며 살고 싶다,는 말. 이 말 살수록 너무 와닿아요. 불안의 경중도 그게 너무 커서 불안이라는 말 속에 담을 수도 없을 만한 것을 대면했을 때 자잘한 걱정과 불안이 있던 일상을 그리워 해 본적도 있어요. 결국 삶은 곡우님 말씀처럼 불안을 통제하는 기술의 연마 과정인 것도 같아요.

리뷰를 곡우님 리뷰를 안뽑아 주면 대체 누구를 뽑아 주나요? 최고 맞아요^^

穀雨(곡우) 2010-09-07 15:18   좋아요 0 | URL
아, 블랑카님. 작은 걱정만 하고 살면 좋겠다는 말, 콕콕 와 닿네요.
음...호사다마란 말도 그런 뜻이니 그것도 어찌보면 같은 뜻이겠어요.
불안을 떨쳐 버릴 수는 없으니 불안을 통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뷰소식은 다른 곳에 대회가 있었거든요. 근데 미역국만 잔뜩....ㅋㅋ
이제 괜찮아요. 분명 글이 산으로 갔으니 제 자리는 없는게 당연해요...
그것보다 블랑카님의 위로가 더 고맙고 살가워요....^^

비로그인 2010-09-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고 다른 불안으로 이동된다기 보다 하나의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낳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가는 과정은 아닐까 싶은데...
나 예전에 이거 읽다가 스탑했는데...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穀雨(곡우) 2010-09-08 16:31   좋아요 0 | URL
아...저도 그 뜻으로 적은 거예요. 불안이 꼬리를 문다는 의미로....
보통의 이야기는 마음이 허할때 읽으면 좋아요.
전 언제든 내키면 꺼내 읽거든요...^^

비로그인 2010-09-08 15:46   좋아요 0 | URL
언제든 내키면 허하시다는?
푸히히~~
허한 느낌이 자주 든다는 건...나이가 먹어가고 있다는 거.
오늘 이곳은 글루미한 하늘이예요.
부산은 어떤가요?

穀雨(곡우) 2010-09-08 16:33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아무래도 제가 조증이 있는 모양입니다.^^
부산은 바람이 따뜻해졌어요. 밤새 바람길이 바뀌었는지 선선하다 못해
약간은 긴장이 되는 바람이더군요.
지금은 찌뿌둥한 구름사이로 간간히 해가 보였다 말았다 그러네요.
하지만 바람과 햇빛 사이에 소금기는 여전해요.
어디서부터 온 바람인지는 몰라도....^^

비로그인 2010-09-08 19:25   좋아요 0 | URL
소금기가 있는 바람이니 바다에서 왔겠네요.
ㅎㅎ갑자기 '남쪽으로 튀어'에 배경이 되었던 오키나와가 생각이 나요.
읽는 동안 완전히 빠져설랑 오키나와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한참을 그랬거든요.
'이웃집 토토로'의 그 시골도 좋구.
허하거나 좀 생활이 무료하다 싶을 때는 저렇게 공기가 신선한 곳에서 깨끗한 맘으로 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곡우님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으로 달래시네.ㅎㅎ
빈 곳을 채우는덴 책이 최고져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