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오빠 부자 동생
로버트 기요사키 외 지음, 이주혜 옮김 / 명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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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갤럽조사에 따르면 부자의 마지노선은 자산 30억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인간답게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최소의 기준이기도 함을 뜻한다.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흔히 부자가 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자의 개념은 자본주의사회일수록 궁극의 목표로 이해되곤 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가르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의해 누구나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라면 성공한 사람쯤으로 넘겨짚는 일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부자의 개념이 평면적인 의미인 경제적 범주로만 국한해서 규정 짖는다면 부자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바라지만 누구나 될 수 없는 것이 부자다. 한 때 “부자아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를 다면적인 방법으로 해석한다. 이 책 <부자오빠, 부자동생>은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더 나아가 뚜렷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부자가 되기 위한 기준은 산을 오르는 방법만큼 부지기수로 많다. 세간에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도서의 종착역인 성공을 위한 보너스가 부자로 이끄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책들은 하나같이 최선을 다하고 열과 성을 쏟아 붓는다면 부자는 멀지 않은, 곧 우리의 모습을 미리 대변해서 투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종의 자기암시와 같은 주문처럼 흔해빠진 성공주문을 덮고 나면 캄캄한 어둠에 금방 노출되는 아득함만 남는다. 분명하게 보고 만지고 체득했지만 실체가 없는 허상을 본 것처럼 허무함이 도사리는 것은 목적과 현실의 간극이 주는 현상 때문이리라.




나 또한 이 책의 표지만 대충 훑어보고 여느 자기계발도서와 엇비슷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은 로버트 기요사키와 그의 동생 에미 기요사키의 전기를 통해 자신들이 성찰한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올바로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과정을 담은 책이었다. 오히려 술술 막힘없이 풀어가는 자전적 이야기에 몰입되고 깨달음에 한 걸음 성큼 다다른 커다란 만족감이 어마무지하게 남는 희열이 상당한 책이다.




로버트 기요사키와 에미 기요사키는 다르면서도 같은 성향을 가졌다. 세상을 향한 도전의 몸부림은 비록 달랐지만 공통점을 갖는다. 둘은 21세기판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벅민스터 풀러를 멘토로 삼았다. 벅민스터 풀러는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주창한 미래학자로 보기 드문 통찰력이 예리한 지식인이다. 그의 책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에서 인간의 지속가능한 가능성을 역설하고 협력과 공생을 통한 인류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요사키 남매는 분명한 삶의 지침을 벅민스터 풀러를 통해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은 로버트와 에미의 관점으로 나누어 성공스토리를 풀어 나갔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보편적인 원리를 구획하고 나눈 계기도 소명의식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원리는 4가지로 ‘모든 개체는 복수다’, ‘선행(先行’), ‘단명화(短命化)’, '지체(遲滯) ‘의 조합이다. 이들 요소들이 혼합하여 상승하기도 하락하기도 한다는 것이 인생을 아우르는 기준점이다. 동양적 사상과 결부된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논하기도 하지만 간명하게 상대적 관점을 지칭하는 의미기도 하다.




실제 인간의 행위는 관계 속에 파생된 상대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 4가지 요인이 그러한 상대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유 또한 인과관계의 연관성, 파장범위, 간섭현상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요사키 남매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조화로운 어우러짐을 추구했다. 예컨대, 단순히 부자가 된다는 희망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듯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소명의식으로 발전할 때 선한 부자가 된다는 논리겠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순간에 노출된다. 뜻하지 않은 좌절과 고통은 당시로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지만 한편으론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 무엇을 얻고자 바라는 강한 집념과 영적인 소명의식이 결합된다면 성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무한 잠재력이다. “희망은 희망 없는 자의 몫이다.”라는 로버트의 말처럼 인생은 가능성이다. 그러하기에 살만한 가치가 무궁무진한 희망이 넘쳐나는 곳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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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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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정희 작가의 글은 생활인의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세월의 더께에 묻혀 깎이고 다듬어진 삶의 질감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여준다.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관념과 단상을 예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듬었다. 이 책 또한 전작 <돼지꿈>에 이은 단편 옴니버스 식 우화 모음집이다. 그래서 이즘이면 토설하듯 뱉어내는 작가의 글이 반갑기도 하고 살가움마저 생긴다.




여자의 존재와 정체성을 일상의 모습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오정희 작가의 특유의 붓놀림이다. 그러하기에 오정희 작가의 글은 누구나 공감하고 편안함이 주는 글맛이 강점이다. 무엇보다 한 편 한 편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사변으로 치닫는 무거움의 두께를 걷어냈다는 데 있다. 어느 곳, 어느 때에나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우리네 일상의 이야기이기에 그 속에 담긴 감동이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기는지 모른다.




짧은 글담 속에 담긴 패턴은 오욕칠정이 빚어 낸 희로애락이다. 중년으로 접어 든 여인들을 통해 삶의 본질과 현실에 비친 존재 사이의 괴리감을 적절하게 조명하는 이야기가 주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내달린 시간의 흐름에 어느 새 변해 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어찌 보면 이것이 인생이라고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 글이 선명하게 각인되는 느낌마저 기운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고저장단을 홀로 넘는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물음의 기저는 정체성의 경계를 되묻게 된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것을 요구받고 척척 해내기를 응당 강요받는다. 관념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피할 수 없는 무거움이다. 때가 되면 단계별로 올라서듯 일정한 패턴을 그려나가기를 은연중에 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사회적 시선을 감내하기로 약속한 무언의 강요다.




따라서 여자라는 신분의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한다. 자신이기보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감에 신분적 타성에 젖고 내면의 자신은 오롯이 억압당하는 게 대개다. 밍크코트가 로망이라는 어느 시어머니의 바람이 며느리에게 곱지 않게 보이는 것은 상대성이다. 또한 순수했던 시절 펜팔친구의 우연한 만남에 설레었으나 보험외판원으로 변한 현실에서 조우하는 씁쓸함은 철 늦은 사랑노래다.




그래도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랑이라는 작가의 여유로움처럼 허무만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물질이 있기에 분위기에 취하고 흥에 겨워지는 것도 잠시의 이탈이 만들어주는 신선함이다. 나라는 존재감이 그곳에 있기에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분출해 내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결국은 소녀적 감성이 여자를 채운 내피인지 모른다. 날선 세상에 구르고 닳아도 여자는 여자라는 뜻이다.




제 아무리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눙쳐도 금세 현실로 돌아서는 그네들의 모습은 모성이 주는 넉넉함이다. 여자는 관심을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존중해 주길 바란다.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감정의 불규칙성 속에서도 여자는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 비록 삶의 무게로 어느 새 시들어 버렸다 할지라도 꿈꾸는 사랑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일상은 서릿발처럼 차가워도 마음은 청춘이기에 여자는 오늘도 아름다움을 꿈꾼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주는 글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을이기에 주는 감성적 변화도 물론 한 몫 하겠거니와 무시하지 못할 이 책의 재미는 더 없는 공감이다. 가난에 치이고 생활에 억눌려도 삶의 화두는 사람 사는 곳에서부터 나오기에 여자의 시각을 통찰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글이다. 한적한 오후 감미로운 커피와 함께 곁들여 본다면 더 없이 만족스러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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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0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참 좋아요.


穀雨(곡우) 2009-11-05 08: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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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는 게 그러하듯 여행도 깊어지면 어느 한순간 막막해질 때가 있다. 무엇 때문에 떠났고 또 무엇 때문에 걷는지조차 모호해진다. 그럴 때면 그림 같은 풍경에도 시들해지고 외로움이 먹물처럼 스며든다. 흐바르에서 내가 꼭 그랬다.(p-265)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거창하게 준비하고 꼼꼼하게 계획하고 떠나도 일순 시들해질 때도 있기 마련이다. 마음은 이미 여행의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무엇 때문에 떠났는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다. 사람에게 치이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어느 새 어깨위로 올라탄 짜증이 슬금슬금 고생으로 바뀌니 말이다. 그러기를 수차례 경험하다 보면 판에 박힌 여행이 신물이 나기도 하고 별 감흥이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곱디 고은 자연 빛 황홀한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마음은 달뜬다. 기억의 재생력이 아메바처럼 짧은 것도 다행이기도 하지만 아직 내딛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지천에 널렸다. 길을 따라 아르라이 휘감고 도는 흐드러진 풍광과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보다 더 푸른 하늘은 아찔한 유혹처럼 다가든다. 크로아티아는 딱 그런 곳이리라. 행복이 번져 가는 곳 크로아티아.

 

실제로 나는 크로아티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소개한 것처럼 축구에 열광하고 유고슬라비아내전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란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생소한 나라다. 그러나 저자가 스케치한 크로아티아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이다.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정신을 쏙 빼 놓게 만들지만 무엇보다 길 위에서 만난 크로아티안들의 소박한 삶의 정취가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발칸반도에 자리 잡은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크로아티아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제국의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해상무역이 발달하고 법률과 규범이 제정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로마의 모든 것을 옮겨 다 놓은 것처럼 로마시대의 건축물과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가 인정한 문화의 보고다. 비록 내전으로 인해 얼룩지고 일부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한 곳이다.

 

책은, 멋들어진 사진조각처럼 고백하듯 담백하게 흐른다. 저자가 겪고 본 것에 대해 사실적인 단상보다는 자분자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래서 이렇게 어우러진 작가의 사색과 상념이 고스란히 저며 들어 읽는 것만으로 그 감동을 배가시켰다. 한 편의 서정시처럼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 마음을 훔치고 자그레브의 빨간 지붕처럼 선명하게 인상적으로 다가선다. 누구나 그 자리 그 곳에 가면 그런 감정에 몰입되어 빠져 들만큼 말이다.

 

저자는 구 도시와 신도시를 숱하게 걸었다. 두브로브니크를 필두로 고대 로마의 향기를 간직했다는 풀라, 비엔나를 닮은 자그레브, 달미티아를 돌아 아드리아 해를 따라 이어진 바닷가 마을을 마음으로 밟고 넘었다. "탱고가 뭐 별거인가요? " 부르짖으며 열렬히 환영해 주던 여유로움이 넘치는 그들을 만난다면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보고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렌다. 낯선 이방인에게 '즈드라보(Zdravo, 안녕)'를 외치며 넉넉한 마음 한 켠을 내 주는 소박한 심성을 가진 크로아티아인. 이처럼 여행의 묘미는 뜻 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연이 주는 기쁨이다.

 

사람, 풍경보다 아름다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했다는 저자의 크로아티아 기행문은 객관적인 정보에 치우친 여느 여행지보다 값비싼 반가움이리라. 인터넷을 조금만 뒤적이면 넘쳐 나는 화려한 문구에 도취된 여행문구가 이 보다 좋은 순 없다. 크로아티아를 몰랐어도 이 책만으로 크로아티아의 맑은 공기 한 움큼을 나누어 마신 것처럼 개운해 진다. 어쩌면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픈 곳이 또 하나 늘어나 삶이 조금 더 설레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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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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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는 두 개의 달이 뜬다. 붙박이처럼 들러붙어 존재감을 상실한 달과 서늘한 채취를 풍기며 오롯이 떠 있는 이끼 낀 푸른 달이 뜬다. 이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시간에게 금지된 일들이 버젓이 피어오른다. 그 속에서 생성된 푸른 달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상징하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왜 두 개의 달이 존재하는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상을 놀래어 주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상실의 시대>를 거쳐 <해변의 카프카>로 이어지는 그의 전작에서 드러난 탁월한 인물묘사와 심리전개의 칼날은 녹슬지도 않고 오히려 더욱 벼려진 모습이다. 뜬금없이 출현해 암호부호를 연상케 하는 <1Q84>의 의문부호(Q)는 강한 호기심을 확대 유발한다. 대관절 그 곳에 무엇이 있기에.




인간은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갈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를 통해 정체성을 구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고독하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물질적인 풍요는 가져 다 주었을 지언즉 정신적인 만족까지는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결여된 상실이다. 세상에 함몰되어 가고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개성과 정체성이 사라진 상실의 전형이다.




하루키는 인간을 향한 원형적인 물음에 충실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강한 메타포(암시)도 인간성의 회복이다. 인간이 고안한 이념의 실체와 당위의 대립과 체제의 충돌이 그 기저에 유유히 흐른다. <1984년>은 또한 조지오웰의 단편선의 제목이다. 그 속에 빅브라더가 존재한다면 이 책에는 리틀 피플이 존재한다. 대립각의 극단에서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세계는 무기력함으로 물든 인간을 통찰하는 동시성을 가진다.




이처럼 하루키는 이 책의 완성도를 위해 상당 수준 노력한 흔적의 추출물이 다분히 함유하고 있다. 장중하게 깔리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위시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케 하는 상상력과 판타지적 요소는 공력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의도되었든 우연이든 하루키는 익숙한 극적요소를 적절하게 버무려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재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뜻 언뜻 다가오는 낯익은 정경은 신비하기도하며 농염하며 동시에 지극히 보편적이고 평범하다.




책은 간결한 호흡으로 시작된다. 여주인공 아오마메(靑豆푸른콩)와 덴고의 주거니 받거니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현실의 경계를 통해 하나로 이어지는 통로의 알고리즘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거니와 숨은 그림 찾기처럼 모습을 감춘 편린을 찾는 것도 나름 흥미롭다. 각권으로 방대한 분량임에도 지루함이나 이해를 저해하는 대목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 숨에 흐른다. 무엇을 볼 지도 어떻게 흐를 지도 예정해 내달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가오는 종착역은 아쉬움이라는 큰 산으로 되레 버티고 섰다.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으나 끝이 아닌 미완의 무엇이 있기를 간절히 갈구하는 마음이다.




아오마메는 이단종교집단인 ‘증인회‘에 심취된 부모의 손에 자랐다. 집집마다 돌며 성경에 새긴 문자 그대로 악행을 멈추고 따르기를 강권하는 혹독한 종교단체다. 아오마메는 자신의 이름만큼 수치스러워 했으며 혐오했다. 어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뺏어 간 증인회는 압제의 대상이었다. 반면, 덴고의 아버지는 NHK수금원이다. 일요일마다 어린 그의 손을 붙들고 밀린 수금활동은 치욕스럽기까지 했다. 둘의 공통점은 타의에 의한 지배다.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기성화 된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의 대항인 셈이다. 결국 자유를 위해 희생된 단절과 결별은 고독을 잉태한다.




하루키는 그들로부터 인간에게 결락된 삶의 모습을 투영코자 하였다. 인간에게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 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삶의 모습을 다양한 상념으로 녹여냈다. 설명 안 해 주면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덴고의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독백처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지 모른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만 의지하고 믿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으로 당위의 부정을 추동하는 요소다.




실제 세상은 인간의 착각으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관념과 실제의 경계에서 의식이 전환되고 유형의 물질에만 집착하는 것은 무형의 가치를 파괴하는 원형이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가르고 삶이 통찰하는 가치를 분명하게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는 명제보다 더 어려운 대상이다.




아울러 하루키는 달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보다 내밀하게 관찰하고자 했다. Lunatic과 Insane의 미묘한 차이다. 달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중세시대의 암흑이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어둠이 지배하던 불운한 시절 달이 인간을 광적으로 돌변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원인으로 인식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도사린 공포다. 달이 기울고 차는 현상에 따라 인간도 따라 움직인다는 귀납적 추론인지 모른다. 따라서 인간에게 달은 만조에 따라 인간을 조종하기도 밝혀주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루키는 보이는 것, 즉 존재하는 것에 착안했다.




하루키는 또한 책 속에 나타난 이단종교를 통해 기성사회의 문제점을 적시하며 통찰했다. 덴고가 디스렉시아(난독증)에 걸린 17세 소녀 후카에리의 <공기 번데기>를 리라이팅하는 계기를 통해 알게 된 코뮌(주민자치)의 변화된 모습은 인간이 걸어 온 사회적 역사를 아우른다. 안톤 체호프가 <사할린섬>에서 만난 원주민 길랴크인의 삶의 형태로부터 출발한 원시사회의 모습은 코뮌에서도 이완된 형태로 나타난다. 당위와 실재의 이상에서 코뮌은 다양한 세력, ‘선구’와 ‘여명’의 출현으로 이지러지고 변형된 해괴한 모습으로 변한다. 조지오웰이 <1984년>에서 그렸던 빅브라더가 지배하던 통제와 구속의 망령이 자유를 밀어내고 토착한 세상의 전형적인 오마주다. 




원시적 충동과 현실과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자아다. 자의식이 인간의 감정을 다스리고 물질과 실체를 구별하고 경험을 통해 불완전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과 동일성을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하기에 하루키는 선험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 인식의 확장을 염두에 두었다. 이른바 인격의 형성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적 규범과의 관계,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를 의미심장하게 통섭하였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예정된 하나의 지향점을 응시한다. Parallel World(패러럴 월드)의 필연적인 교차점이다. 병행하게 존재하는 세계의 출현이다. 리틀 피플이 지배하고 의식하는 자를 통해 계획하고 받아들이는 자를 통해 균형을 맞추는 어둠의 세계다. 그 곳에 떠오른 이끼 낀 푸른 달은 동시에 하나로 묶기기도 외따로이 나누어지기도 한다. 찰나의 순간을 통한 만남이 그들을 강력한 끈으로 묶은 것은 사랑이다. 상실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불멸의 사랑이다.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 <세 가지 질문> 中에서 톨스토이 -




이렇듯 <1Q84>는 낯선 질감과 형질로 가공된 태생이 다른 이야기다. 인간을 이루는 단위를 쪼개고 남은 기초적인 물질로 다시금 조합하여 짜 맞추어 새로운 세계를 출현시켰다. 적확하게 분석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수리적 해석은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전형을 이룬다. 달, 공기 번데기, 리틀 피플, 10살의 자아 그리고 상실. 체계적으로 조합되는 인자들은 이 책을 추동하는 힘이며 하루키의 라이팅 파워(writing pow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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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이 너무 어려워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겠네요ㅜㅠ

穀雨(곡우) 2009-10-30 15:45   좋아요 0 | URL
풀어 쓴다는 게 그만, 재주가 미천해서 그런가 봅니다.
 

 
주말 내 뒹굴거리다 늦은 점심으로 조기구이가 나왔다.

옆지기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살만 살금살금 발라 주느라

정신이 없다. 대충 눈치껏 작은 녀석에게 잘 익은 부위만

골라 발라 내 주고 얼른 한 모금 삼켰다.

 

그게 화근이었다. 평소 기관지가 좁아 목이 잘 붓는 편인데

생전에 없던 생선가시에 걸리고 만거다. 아프다기 보담

가뭇가뭇 걸리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물도 들이키고 맨밥도 한술 꿀꺽 삼켜 보았건만 요지부동이다.

눈에라도 보이면 위안이라도 되련만 보이질 않으니 답답하기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큰 불편함이 없으니 참기로 하고 하루를 보냈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병원으로 내달려 잠시의 손놀림으로 상황종료.

 

허무할 만큼 간단하다. 생각보다 크다. 어떻게 저런 걸 목에

넣고 견뎠을까. 미련하기가 곰보다 더 하다. 의사도 한마디

거든다. 이런 경우 참지 말고 병원으로 바로 오시는 게 좋단다.

자칫 잘못하면 생선가시가 인후를 찌르고 들어 가 염증도 생기고

제거하는 데 곤혹을 치른단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소한 게 큰 일로 변하는 게 세상이치다.

쓰나미처럼 몰아 닥치는 재앙도 알고 보면 바람길이 바뀌고

자연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참을 때와 나아갈 때를 안다는 것은 살아가는 지혜다.

생선가시 하나로 출발한 불편이 삶의 법칙까지 눙치고 있지만

산다는 게 다 그런 게 아닐까? 불편도 모아 두면 습관이 되어

무엇이 불편함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의 그늘이 되지 않겠는가.

 

파르르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움이 아닌 진지한 생활의 태도가

더 없이 필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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