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글.사진 / 나무수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는 게 그러하듯 여행도 깊어지면 어느 한순간 막막해질 때가 있다. 무엇 때문에 떠났고 또 무엇 때문에 걷는지조차 모호해진다. 그럴 때면 그림 같은 풍경에도 시들해지고 외로움이 먹물처럼 스며든다. 흐바르에서 내가 꼭 그랬다.(p-265)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거창하게 준비하고 꼼꼼하게 계획하고 떠나도 일순 시들해질 때도 있기 마련이다. 마음은 이미 여행의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무엇 때문에 떠났는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다. 사람에게 치이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어느 새 어깨위로 올라탄 짜증이 슬금슬금 고생으로 바뀌니 말이다. 그러기를 수차례 경험하다 보면 판에 박힌 여행이 신물이 나기도 하고 별 감흥이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곱디 고은 자연 빛 황홀한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마음은 달뜬다. 기억의 재생력이 아메바처럼 짧은 것도 다행이기도 하지만 아직 내딛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지천에 널렸다. 길을 따라 아르라이 휘감고 도는 흐드러진 풍광과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보다 더 푸른 하늘은 아찔한 유혹처럼 다가든다. 크로아티아는 딱 그런 곳이리라. 행복이 번져 가는 곳 크로아티아.

 

실제로 나는 크로아티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소개한 것처럼 축구에 열광하고 유고슬라비아내전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란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생소한 나라다. 그러나 저자가 스케치한 크로아티아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이다.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정신을 쏙 빼 놓게 만들지만 무엇보다 길 위에서 만난 크로아티안들의 소박한 삶의 정취가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발칸반도에 자리 잡은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크로아티아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제국의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해상무역이 발달하고 법률과 규범이 제정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로마의 모든 것을 옮겨 다 놓은 것처럼 로마시대의 건축물과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가 인정한 문화의 보고다. 비록 내전으로 인해 얼룩지고 일부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한 곳이다.

 

책은, 멋들어진 사진조각처럼 고백하듯 담백하게 흐른다. 저자가 겪고 본 것에 대해 사실적인 단상보다는 자분자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래서 이렇게 어우러진 작가의 사색과 상념이 고스란히 저며 들어 읽는 것만으로 그 감동을 배가시켰다. 한 편의 서정시처럼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 마음을 훔치고 자그레브의 빨간 지붕처럼 선명하게 인상적으로 다가선다. 누구나 그 자리 그 곳에 가면 그런 감정에 몰입되어 빠져 들만큼 말이다.

 

저자는 구 도시와 신도시를 숱하게 걸었다. 두브로브니크를 필두로 고대 로마의 향기를 간직했다는 풀라, 비엔나를 닮은 자그레브, 달미티아를 돌아 아드리아 해를 따라 이어진 바닷가 마을을 마음으로 밟고 넘었다. "탱고가 뭐 별거인가요? " 부르짖으며 열렬히 환영해 주던 여유로움이 넘치는 그들을 만난다면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보고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렌다. 낯선 이방인에게 '즈드라보(Zdravo, 안녕)'를 외치며 넉넉한 마음 한 켠을 내 주는 소박한 심성을 가진 크로아티아인. 이처럼 여행의 묘미는 뜻 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연이 주는 기쁨이다.

 

사람, 풍경보다 아름다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했다는 저자의 크로아티아 기행문은 객관적인 정보에 치우친 여느 여행지보다 값비싼 반가움이리라. 인터넷을 조금만 뒤적이면 넘쳐 나는 화려한 문구에 도취된 여행문구가 이 보다 좋은 순 없다. 크로아티아를 몰랐어도 이 책만으로 크로아티아의 맑은 공기 한 움큼을 나누어 마신 것처럼 개운해 진다. 어쩌면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픈 곳이 또 하나 늘어나 삶이 조금 더 설레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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