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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평점 :
가장 이성적이라는 인간을 가장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었다는 점은 바로 전쟁의 기원을 찾기 위한 역사가들의 노력의 일단을 보여준다.
결국 트루먼은 일본에 두 발의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원자탄이 가져올 인류의 피해는 안중에 없고, 단지 일본 열도 상륙작전으로 발생한 미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눈앞의 이익만 보았을 뿐이다.
둘째, 원자탄 투하는 일본의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마련해주었다.
셋째, 원자탄 투하는 일본에 소련군이 발 들여놓지 않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소련군의 일본 진주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에게는 항복의 명분이 필요했고, 바로 그 시점에서 원자탄이 투하된 것이다.
할복을 하면서라도 끝까지 저항하겠다던 일본으로서도 원자탄을 받고 나서는 항복의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여운형은 김일성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여운형에 대해 색안경 끼고 비난하는 시각도 있지만, 진정한 좌우합작을 위해서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바로 그 점이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한 김규식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김규식 역시 미군정 및 우익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좌익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련군이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좌우합작운동을 실패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여운형이라는 한 지도자의 죽음이었다.
세계적으로 냉전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월이었다.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했고, 서유럽이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하여 마셜 플랜을 실시하였다.
한국전쟁의 개전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북한이 침략했다는 남침설, 남한이 침략했다는 북침설, 그리고 남침유도설이다.
여기서는 특히 남침유도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한국전쟁의 개전과 관련하여 최근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략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마셜 플랜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유럽 사회는 공산주의 번식에 적합하기 때문에 경제복구와 부흥을 통해서 유럽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넌은 중요한 몇 개 지역의 부흥이 극대화되면, 세계적 차원에서의 봉쇄가 가능하리라고 전망하였다. 케넌이 꼽은 지역은 영국을 비롯한 서부 유럽, 독일 중심의 중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이었다.
(...)
아울러 일본이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갈 경우 서태평양, 나아가서는 동남아시아의 미 군사기지에 대한 공격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미국이 일본을 장악하게 되면 직간접적으로 소련의 중요한 공격거점이나 방어거점을 봉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의 군사행동을 초기에 방어할 수 있다. 게다가 아시아 본토와 일본 부근의 소련 열도에 대한 군사작전을 기획할 수 있다.
자체 방위를 위한 목적이기는 하지만, 재무장을 추진한다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1951년의 샌프란시시코 조약이후부터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자위대를 창설하였고, 자체방위를 목적으로 재무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중국을 중요한 동맹으로 간주하고 일본에게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을 무장해제하고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민주화를 진행시키는 것이 일본에 대한 정책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군사력과 선진사업을 보유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1949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법정에서 '김구가 여순사건을 조종하여 대한민국의 국헌을 문란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안두희의 주장과 달리 여순사건은 남조선노동당의 군대 내 프락치들이 일으킨 것이었지만, 이런 주장이 나왔던 데는 여순사건에 좌익의 활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탈린 : 북쪽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내가 알기로는 북한군이 수적으로도 남한에 뒤진다.
둘째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있다. 적대관계가 일어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측이 이 협정을 파기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전쟁이 터졌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전쟁이 될지 감잡을 수조차 없었다.
대한민국의 고위직 인사들과 공무원, 경찰들은 서둘러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났건만, 일반 국민들은 여느 때처럼 그저 38선상의 충돌이겠거니 하며 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쟁이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할퀴고 지나갈지 알지 못했다. 이때 피난가지 않은 것이 나중에 비도강파 또는 부역자로 몰리는 빌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을 구빨치라고 하며, 전쟁 때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산으로 올라간 빨치산을 신빨치라고 한다.
구빨치와 신빨치의 차이는 후자가 정규군 출신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산에 올라가 '남부군'이라고 하는 빨치산 특수부대로 재편되었다.
남부군은 1990년대 중반, 소설과 영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미국의 38선 돌파 결정으로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었다.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미국의 전략 중 가장 큰 실패로 역사에 남게 된다.
우리에게는 압록강까지 누가 빨리 도달하나 경쟁을 벌인 멋진 전쟁 시나리오인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어째서 미국에겐 실패작이 되었을까?
아무튼 중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 13일 참전을 전격 결정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미국이 북한 지역까지 점령할 경우, 대만과 한반도 양쪽으로부터 포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 핵무기 사용이 검토되자 영국은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이것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통일이 되지 않고 북한 정권이 붕괴한다면, 그 지역을 누가 통제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당연히 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다. 그러나 유엔의 승인안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통치권을 가질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일방적으로 석방시켰다.
이것이 바로 반공포로 석방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산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으로서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의 서신 한장으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
이 사건은 한미관계에 갈등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이후 1950년대에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의 하나뿐인 아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중국군들이 전장에서 죽었으며, 사회주의 혁명 사업들이 연기되었고, 대만을 점령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고 했던 계획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군사적으로 맞섰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일본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전쟁 특수를 챙겼다.
또한 자위대를 출범시키며 재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기간에 이루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면죄부를 챙기고자 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독도문제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지금도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독일 역시 혜택을 보았다. 한국전쟁 시기를 통해 유럽에서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미국은 독일 경제의 재건과 함께 재무장이 소련에 대한 봉쇄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독일과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자 했던 소련의 정책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남한 지역을 점령한 북한은 '국군 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한국정쟁 동안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보도연맹원 학살 약 20만명, 형무소 수감자 학살 약 5만명, 빨치산 토벌과정에 약 5만명, 북한군 및 인민위원회에 의한 학살 약 10만 명 등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마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합치면 훨씬 더 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불과 3년 사이에 40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학살된 것이다.
전쟁의 비극은 남한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수많은 비극이 일어났을 것이다.
실질적인 자료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북쪽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북한이 발표한 자료만을 근거로 삼기도 어려우며, 그렇다고 남한의 자료만을 이용하는 것 또한 객관성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핵 미사일은 1991년 남북한 사이의 비핵화 선언이 이루어질때까지 계속 남쪽에 남아 있었다.
지주들은 한국전쟁기간을 통해 몰락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농지 몰수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의 가치가 하락해 재기하기 어려웠다.
인민재판에서 학살된 지주들도 적지 않았으며, 학살을 피하기 위해 피난을 떠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 지배신분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지주 계급은 한국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미국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에푸에서 호찌민에게 패배하여 베트남에서 물러날 때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가로막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점 또한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가져왔던 엄청난 실패는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미국이 제 3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은밀한 지원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게 막는 데 주력하였다.
또 다른 방안은 미국 외의 다른 국가에게 원조의 일부를 떠안기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원조를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일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한일회담을 주선하였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정책은 1950년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보는 반일 이데올로기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었고, 국민들 역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크게 반달했다. 결국 1960년대에 가서야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킴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부담을 일본에 넘기려는 미국의 정책은 성사될 수 있었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의미했다.
첫째, 소련이 우주에서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당시 미국의 언론 매체들은 소련의 인공위성이 하늘에서 미국을 공격하는 만화들을 양산해냈다.
둘째 대륙간 탄도탄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다.(...)
전시가 아니라면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상황이 왜 계속되어야 하는가? 한국처럼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한 나라에서 광범위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반민주적인 법이 언제까지 존재해야 하는가?
한국전쟁 연구의 가장 큰 공로자의 한 명인 브루스 커밍스에게 빨간 딱지를 붙이고 있는 나라는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뿐일 것이다.
미국 학자들도 커밍스가 다소 삐딱하게 역사를 본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빨갱이'로 보진 않는다. 그는 미국의 정책에 비판적일 뿐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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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된 책은 넘친다.
그런데 여태 한국전쟁에 대한 책 중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책은 없다.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브루스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왜 그럴까?
사실 한국전쟁에 대해 우린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도 그렇다.
북한의 자료가 공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진영 이데올로기때문에 좌우 한쪽으로 치우친 이념공방의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현대사 관련 도서는 함부로 집어들지 않는다.
아예 모르는 것이 더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내가 보수 또는 진보 성향을 띠고 있더라도 대놓고 한쪽으로 치우친 책은 물론이거니와 교묘한 문장으로 객관성을 담보하는 양 포장하는 책 또한 그것을 읽는 순간 독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책은, 이 책을 쓴 박태균 저자는 나의 이러한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전작 <베트남 전쟁>을 읽고 그 동안 몰랐던 이면과 전체적인 큰 줄기를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라
이 책을 고르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공개된 국제 자료와 서신을 발췌하여 객관성을 도모하였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판단을 열어두는 점이 단연 돋보인 책이었다.
다만, 이런 강점은 전쟁 스토리를 빈약하게 만드는 단점을 지닐수 밖에.
하지만 그 동안 수많은 영화와 책에서 애국심에 도취되어 열광해왔지 않은가.
한국전쟁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음을 '빨갱이'나 '수구꼴통'으로 모는 세상은
현재도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음을,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처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안타까운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