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나는 내고향(故鄕)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십년(十年)이나 되건만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文化住宅)이 서고
사당(祠堂)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 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 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오대(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後苑)의 은행(銀杏)나무나 부둥켜 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긁도록 정(情)이 든 그 산(山)과 그 들을
무슨, 낯작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접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줄 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최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追憶)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 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山)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前)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고향(故鄕)엔 가지 않겠소.

1932.1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심훈



너에게 무엇을 주랴
맥(脈)이 각각(刻刻)으로 끊어지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드리모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엇을 주랴

눈물도 소매를 쥐어짜도록 흘려 보았다.
한숨도 땅이 꺼지도록 쉬어 보았다.
그래도 내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만 가고
시방은 신음(呻吟)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소용(所用)이 없다.
「죽음」이란 엄숙(嚴肅)한 사실(事實) 앞에는
경(經) 읽거나 무꾸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장에 숨이 끊어지는 너를
손끝맺고 드려다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에게 딸린 생명(生命)이 하나요 둘도 아닌 것을…………

오직 한가지 길이 남았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따끈한 피를
그 입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우리는 반드시 소생(蘇生)할 것을 굳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정성(精誠)을 다하여
산 제물(祭物)로 우리의 몸을 너에게 바칠뿐이다!

19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생명의 한토막


심훈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th C까지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ᄉힲᆯ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음과 우리의 설음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咏嘆) 노래를 부르고 싶소.


창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음이 복받쳐 몸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畫家)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미레이」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버리고 싶소!


1932.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설 견생기적
Happy Diamond 지음 / 부크크(bookk)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강산이여


                                 심훈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 보니

큰 봉오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視線)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山)줄기

네 품에 안켜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고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木覓)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三角山)은 적(敵)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번만 찔르면 먹장구름 쏟아질듯이

아직도 네 기상(氣象)이 늠늠(凜凜)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수(繡) 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목음 마시면 한백년(限百年)이나 수(壽)를 할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넘쳐 흐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위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음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兄弟),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姉妹)여

부디부디 백골(白骨)이나마 이 흙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쑤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19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