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나 자동차 내부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흔히 선팅을 한다. 선팅은 노출증사회의 반증이다. 가릴수록 관음증은 격화된다.


나는 밤과 새벽에 묵상할 때, 창문을 연다. 창밖은 온갖 나무, 풀, 새, 벌레, 흙, 그리고 드물지만 행인, 때로 눈, 비, 안개, 바람이 살아 움직이는 자그만 산이다. 신들의 영지다. 방에 불을 밝힌다. 나는 신들에게 오롯이 보인다. 신들은 내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을 뿐이다. 묵상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거나 하루를 시작할 때, 불은 끄되 창문은 꼭 닫지 않고 쪼끔 열어둔다. 잠자는 동안에도 신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다. 내가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내 묵상의 공간이 그 소리와 냄새를 간직해둔다.



나는 신들의 비밀을 보려 욕망하지 않는다. 신들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기 위해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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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결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평범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이 박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범함이 비범함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인습을 버리면, 평범함에 깃든 은은한 숭고를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함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웃음도 울음도 직업도 모두 평범함이라는 인감을 찍어놓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우울장애조차도 평범하다 고백하는 듯했습니다. 그와 숙의하는 과정도 똑 그와 같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저 또한 그렇게, 평범하게, 나직나직, 우울과 삶을 이야기해 나아갔습니다.


우수 서린 눈, 허스키한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이미 그의 내면 전경이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애초기부터 똑똑하지 못 해서, 잘생기지 못 해서 공공연히 비교 당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인정해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신 것 자체만으로 상처를 덧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 아무런 존재감이 없거나 소외된 채로 지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우울증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는 않았습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자신의 능력에 늘 불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것도 어렵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도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울은 어김없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상담을 하면서도 그는 여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담담하게 숙의를 계속했습니다. 그 신근한 평범함이 그를 나직나직 높은 곳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의 행복 설정치가 한 뼘 높아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맺은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애하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양육하는 긴 과정 내내 그는 가족과 함께 잊지 않고 저를 찾아옵니다. 극적인 감동과 보람을 안겨준 어떤 환우보다 제게 그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스스로 빛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소중히 간직해주는 데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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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오랫동안 기조우울증(서구 정신의학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적인 우울장애를 지칭하기 위해 내가 만든 용어다.)으로 고통 받았다. 고통의 다양한 양상이 있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아침지옥이다. 졸저 『안녕, 우울증』68쪽에 소개한바, 잠에서 막 깨어나 일어나기 전까지 시간에 맛보는 정서의 지옥 상태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온 영혼을 짓이겨버린다. 삶의 무의미감, 혐오감, 곤혹감, 그리고 아뜩함 때문에 하루 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신은 파김치가 된다.


아직까지 드러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자려고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시간대도 본질이 같은 불편함으로 영혼이 무너져 내린다. 아침지옥과는 달리 이 시간에는 물 먹은 솜 같이 주저앉는 고단함, 는적는적 해체되는 느낌, 끝날 것 같지 않은 생의 피로감으로 깊은 신음을 토해내게 된다. 내일 아침 다시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속절없이 젖어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맞으면 그 날 전체가 송두리째 지워진다. 본디 이 두 시간대는 농밀하고 은밀한 자기신뢰의 본진이다. 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없이 소중한 ‘자기 허니문’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은 자기부정의 덫에 걸렸으므로 이 자기 허니문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이른바 ‘건강한 사람’은 이 자기 허니문의 소중함을 모른 채 덧없이 흘려보내고 만다. 아파봐야 깨닫는 인간숙명을 알아차리고서야 이 자기 허니문의 애용 이치를 증득한다.



아침 허니문은 거대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 가능한 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아침에 일어나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펼쳐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거대 의식을 앞세우고 걷는다. 밤 허니문은 소미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잠자리에 들면서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정리해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닫는다. 소미 의식에 맡긴 채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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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잠깐 망설이다가 받으니 젊은 여성이 제 이름 뒤에 ‘아저씨’를 붙이고 맞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자신을 아무개 큰딸이라 소개합니다. 아무개, 그는 얼마 전 세상 뜬 내 고교 동창입니다.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여러 곳에서 내 전화번호가 발견되어 대체 누군가, 궁금했답니다. 생애 마지막 무렵 아주 힘들 때, 숙의치료를 해준 한의사라 하니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만나 달라 합니다. 진료를 끝낸 뒤, 근처 음식점에서 마주앉았습니다.


죽은 그 벗은 아주 어두운 유년시기를 보냈습니다. 나이 차가 많은 씨 다른 큰 누이한테서 모질게 학대당했습니다. 그 원한감정을 끝내 떨치지 못한 채 우울증, 알코올중독, 간암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 쉰여덟 어느 이른 여름날, 큰 누이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영원히 떠났습니다. 그 마음 한 자락 붉은 곳에 내 손이 닿았던 인연으로, 저는 그의 딸아이 마음까지 다독여야 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딸아이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주 자주 제 말을 메모해가며.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좀 더 일찍 아버지 상태를 질병으로 인식하고 치유의 관점을 확보했더라면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가 그 하나입니다. 사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목까지 아내와 두 딸한테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폭력으로 가족 모두를 피폐하게 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한결같게 그의 상황을 인격과 윤리 차원에서 이해하였으므로 치유는 물론이고, 용서도 화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흔한 살풍경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 모두 특히, 어린 막내딸이 필경 입었을 상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막내딸이 아버지한테서 관통상을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아버지를 똑 닮은 남자친구에게 집착하여 어머니와 언니 속을 태우고 있다고 전합니다. 상처가 내면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떠난 사람, 떠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처로, 질병으로 엄연히 머물러 있습니다. 시급히 치유 받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아서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돌아가는 큰딸의 가벼울 리 없는 발걸음을 보면서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큰딸에게서도 그 아버지의 모습이 꽤나 많이 어른거리는 것을 본 터라, 제 발길 역시 비에 젖은 그 이상으로 무거웠습니다.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낭창거리게 해보았습니다. 죽은 벗이 큰딸을 보내주었음에 틀림없다는 가벼움의 대칭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빗속을 뚫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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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중반 아이가 다급한 어조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부모의 동의를 얻은 것도 아니고, 치료비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지만, 상담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형편이 그 정도니 교통비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지방도시에 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이가 교통비는 있다고 하기에 제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쌤이 사기꾼처럼 느껴지지 않니?”


“아뇨.”


안정된 음성이 건너왔습니다. 다음 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오전 중으로 올라오라 말했습니다. 다소 들뜬 짧은 대답 소리와 함께 아이는 벌써 제 마음 한편에 궁금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 나타난 아이는 예상대로 온몸에 불안과 체념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한 가득 허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여느 사람 눈에는 영락없는 날라리였겠지만, 제게는 아이의 가난과 슬픔의 풍경이 남김없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는 조잘조잘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정신병이 있었고, 진즉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우울증에 빠진 아버지는 가정을 적극적으로 수습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최소한의 생존 조건만 제공한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방치된 상태에서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예 공부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왕따 당하고 매 맞는 것이 학교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급우들은 심심하다고 때리고, 화난다고 때리고,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엄마놀이하며 때렸습니다. 아이는 왠지 알 수 없지만, 매를 맞을 때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습니다. 문제 삼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담임선생도 아버지도 알 리 없었습니다. 아이 사정을 알게 된 날라리들이 아이에게 집을 개방하라 요구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사들고 들어와 실컷 놀고 자고 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쌤,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문득 말을 멈춘 아이가 영판 다른 얼굴로 제게 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먹먹하더니, 느닷없이 던진 질문을 들으니 머리가 멍멍해졌습니다. 이런 처지의 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이 있기는 할까요? 침묵하고 한참 아이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이도 제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습니다.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아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제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밥 먹자!”


아이는 냉큼 일어섰습니다. ‘나는 오늘 밥 먹으러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는 참으로 오달지게 밥을 먹었습니다. 저는 밥 한 그릇을 더 시켜 가만히 아이 앞으로 밀어주었습니다. 아이는 눈 한 번 반짝 크게 뜨더니, 이내 밥그릇을 끌어당겼습니다. 잠시 뒤 그 밥그릇마저 깨끗이 비어 있었습니다. 콧잔등에 송송 맺힌 땀방울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보내고 돌아서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한 끼 밥이 백 마디 말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밥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인간행위라는 진실.


아이는 이제 20대 중반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저를 어떻게 기억할지, 아니 기억이나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기억에 저는 없고 밥 한 그릇만 남아 있어도 좋습니다. 그 날처럼 오달지게 밥 먹는 나날이 계속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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