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독재 치하에 태어난 내가 박정희 쿠데타 이전까지 아는 바는 50환짜리 동전에 새겨진 얼굴이 이승만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조차 알 리 없던 어느 날 낯선 외지인이 들어와 종조부와 나누는 이야기에 김종필이란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 훗날 기억함으로써 그때 그런 일이 있었음을 되짚을 따름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 학령기 이전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다만 푸른 숲과 파란 하늘, 그리고 맑은 물일 뿐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뭐 이런 군가를 배우며,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한 채 흘러가다가 1965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왔다.
사는 장소가 바뀌었을 뿐 세상일에 대한 무지는 매일반이었다. 쿠데타를 몰랐으니, 박정희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태초부터 존재한 물리 법칙 같은 무엇이었다. 가난에 짓눌려 허덕지덕 초등학교를 졸업장 없이 마쳤으나 자식 교육에 관심 없는 부모 덕분에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정규 중학교 아닌 고등공민학교를 중간에 보결로 들어가 기초 학력 누락된 채 중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내 일생을 전복한 사건 둘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국민윤리 선생 입에서 튀어나온 ‘박정희가 새벽 4시에 나라를 도둑질했다.’라는 말이었다. 이 진실은 천생 “반골”인 나를 일깨운 죽비로 줄곧 작용했다.
이 사건과 결합한 다른 사건은 증조부가 반제 항일 무장 투쟁 전사로서 왜놈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셨다는 사실이었다. 알게 된 경위가 아이러니다. 박정희를 대놓고 비판하는 맹랑한 소년을 아버지는 무작스럽게 때렸다. 그러고는 증조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박정희가 친일 매국노였다는 사실을 몰랐음이 틀림없다. 부역질을 세탁할 요량으로 민족이 어떻고 충무공이 어떻고 떠들어댄 박정희에게 속아 신도가 됐으니 말이다. 박정희가 증조부와 결이 같은 사람이라 믿어 아들에게 진실을 밝혔음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끝내 흑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환갑도 채 넘기기 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버지 그림자를 벗어난 나는 혼잣손으로 그 몽매에 맞서는 길을 찾아 나섰다. 법학도에서 신학도로 길을 바꾸는 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계, 특히 정치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갔다. 조직 활동 가장자리를 떠돌며 중심으로 가로질러 가는 변방살이 고단한 여정이었다. 내 작은 여정은 나라 큰 정치 변동과 맞물리면서 천천히 그러나 뒤돌아가지 않으면서 자주 민주를 향해 전진했다. 공부, 글쓰기, 강의로 출발해 노동운동 길섶과 노동자 지역 정치 활동 외곽에까지 스며들며 늦깎이 내 천명을 부끄럽고 소심하게 붙잡았다. 40년 뒤에도 그럴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6월항쟁 직전부터는 거리로 나섰다.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 앞에서 단체 속하지 않은 개인이 ‘가투’를 벌이는 일은 고투 너머 고독이었다. 이대 앞에서는 ‘지랄탄’이 머리에 떨어져 안경이 깨졌고, 서울역에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혼자 백골단과 마주쳤고, 김귀정 열사가 죽임당한 날은 바로 그 백병원 앞에 있었다. 이 길목을 통과하면서 나는 또 다른 각성에 이르렀다. 서구 신학을 걷어치우고 국학, 그 가운데 의학, 그러니까 한의학으로 살길을 바꾸었다. 우유배달로 생계를 잇고 하루 2시간 자면서 수능 준비에 매진했다. 40대 중반쯤 빈 머리를 달달 볶아 마침내 한의대에 입학했다. 인제 와서 따져 보면, 이때 내가 반제 전선 들머리로 들어선 셈이었다.
제국에 부역하며 보편 의학을 전유한 양의학과 날 선 마주침이 한의대 다니는 6년 내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질병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다를 뿐인데, 저들은 한의학을 아예 의학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으니 말이다. 상황은 지금도 동일하다. 의료 대중도 마찬가지 태도를 지닌다. 한의원은 한약방이고, 한의사는 침쟁이다. 한의원 연 지 21년째인데 아직도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환자가 있다. 온갖 병의원을 떠돌다 동네 경로당에서 ‘침이나 한번 맞아봐.’라는 소리 듣고 찾아온 환자가 두 번째 침 맞으러 와서는 ‘왜 낫지 않느냐?’ 따진다. 내가 대한민국을 식민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런 살풍경을 견디며 “가난한” 의료인으로 살아와 이제 70에 꼬리 달린 나이가 됐다. 최근 6년 동안은 비인간 생명, 특히 식물과 그 이전 생명, 그러다가 제국주의를 정색하고 한무릎 공부하면서 내 반제 전선은 확대 심화 일로를 걸었다. 갈수록 의식과 실천에 날이 푸르러졌다. 그 와중에 노무현을 잃고, 박근혜를 쫓아내고, 윤석열과 김명신이 일으킨 내란을 겪다가 막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때 25번, 윤석열·김명신 때 50번 거리에 서서 자주 민주 세상 꿈을 이어갔다. 이재명 정부를 세우는 데 나름 애를 다 썼다. 늙바탕에 모멸스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뿔싸, 이 노고가 도로에 지나지 않을 줄은!
아랫글은 내가 지난 9월 말 페이스북에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어서>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다. 내란 세력을 척결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이 곧 숭미 모일 매국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세우는 일이라 믿고 적극 지지했던 이재명 대통령이 기대를 저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말 그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썼다. 윤석열이 검란을 일으킬 때부터 내 입에는 욕설이 다글다글 했다. 그 물건 잡고 나서 욕설이 없어졌는데 요즘 다시 달렸다. 그때보다 훨씬 더 심하다. 국힘 종자들은 유서 깊은 도둑 떼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민주당 간판 걸고 된 대통령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실로 암울한 때다.
[“나는 60대 후반이다. 유권자가 된 이후, 여태껏 투표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고 사전 투표했다. 지금 친일 매판 집단 총궐기를 막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모멸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판단 딱 하나 때문이다.” 2022년 대선 때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윤석열과 이재명, 둘 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으나, 윤가 놈 찍으면 곧장 식민지로 회귀한다는 판단 아래 이런 글을 올렸다. 내 트위터 사상 최고 반응(좋아요! 1,122/ 리트윗 522/ 댓글 30)을 이끌었음에도, 비당원으로서 어떤 민주당 당원보다 큰 효과를 냈음에도 결과는 주지하는 바다.
내가 둘 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이유는 이렇다. 윤석열에 관해 뭐 더 말할 며리는 없으나 비교 차원에서 얘기하면, 얘한테서는 ‘사창가 양아치 두목’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 될 때, 임명장 받는 장면을 우연히 보았다. 근데 이 자가 대통령과 눈을 맞추지 않는 거다. 아, 이 새끼 사기꾼이구나! 했다. 이재명은 그가 성남시장일 때 세월호 광장에서 마주쳤다. 일행을 대동하고 걸어가며 담소하는 모습을 3m 이내 거리에서 쭉 지켜보는 동안 받은 첫인상은 이거다: 아, 얘는 시장 동네 골목대장이구나!
양아치 두목과 골목대장, 전자는 거들먹거리고 후자는 으스댄다는 점에서 다르다. 같은 점이 중요하다. 둘 다 공적 위상과 사적 정체성을 혼동한다. 윤석열이 최고 헌법기관인 대통령 위상을 어떻게 사유화했는지는 이미 겪은 바다. 목하 우리가 고통스럽게 겪고 있는 것은 이재명의 사유화다. 그 상징이자 핵심이 SNS 활동이다. 최고 헌법기관의 SNS와 자연인의 SNS가 한 데 뒤엉켜 있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는 이 문제를 흔히들 얘기하는 윤리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나쁜 놈’이 아니다. 발달이 어느 시점에서 멈춘 아이일 뿐이다. 자랄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그 아이는 페르소나 어른으로 급격하게 웃자라서 마침내 최고 헌법기관까지 되었다. 여기부터 더 심대한 문제로 비화한다.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 대부분이 매혹되는 진원은 소년공을 기축으로 하는 입지전 서사다. 십분 공감하고 이해한다. 내가 두 번에 걸쳐 그에게 표를 주고, 그러라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떨쳐내지 못한 걱정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너무나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중고등학교는 아예 발길조차 들이지도 못했고, 검정고시 거쳐 대학 가서는 사시 공부에 몰두했고, 소년공 시절에 입은 상해로 병역의무가 면제되었으니, 그는 사회 제도와 조직 거의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변호사라는 우월한 조건을 타고 사회·정치판에 등장한 뒤, 조선일보와 검찰, 심지어 민주당 일각이 꾸민 악마화를 딛고 일어나 비교적 짧은 시간에 파라곤이 되어버렸다. 이 영웅신화에 드리워진 그림자,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내 걱정이 바로 거기를 향한다.
이 영웅신화에 드리워진 그림자란 무엇일까? 사회 제도와 조직을 경험하는 동안 교육, 사회관계를 통해 함양할 수 있는 대의 정서와 명분 의식 누락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를 세계 정치·경제 체제 안에서 범주적으로 파악하는 거대 담론부터 한 개인이 처한 사회정치적 위치 지향을 모색하는 치열한 고뇌까지 아우르는 “학습”이 현장 실무와 행정 능력으로 치환되어 이른바 효능감 중심 도구적 “실용주의”를 증폭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인제까지 진행 중인 친명: 반명 분쟁 소용돌이에서 친명을 자처하는 일베충 뉴이재명 아닌 진심 친명인 민주당 당원들이 뽑아 든 전가 보도가 대통령 효능감이다. 십분 공감하고 이해한다. 실제로 취임 초 국무회의 중계방송, 외교 등 치밀하고 기민한 행정 달인으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찬사를 얻었다. 나 또한 석열이 놈 검란 때부터 입에 붙어 다니던 쌍욕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선동(!)하길 잘했다고 주위 사방에 떠들고 다녔다. 내가 싸한 느낌을 일차로 감지한 것은 검찰 개혁 문제부터였다.
정성호를 법무부 장관에 앉힐 때, 뭔가 툭 떨어지는 느낌을 애써 감추었던 까닭은, 흔히 말하는, 이재명은 고수다, 무슨 생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라는 논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불길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속도감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시간만 흐르고 정부가 들고 간 개혁안은 오리무중 여부 묘연에 휩싸였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김민석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복마전으로 터져나가 이 지경까지 왔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효능감은 사라졌다. 아니다. 추종자들이 느끼는 효능‘감’은 여전했지만, 효능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다시, 아니다. 처음부터 실체로서 효능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옳다. 추종자들이 효능 아닌 효능감을 내세우는 행위가 이미, 효능이 없는데도 느끼는 허구 이미지 배치라는 증거다. 그 허구 감정이 믿어 의심치 않는 고수 이재명을 더욱 가뭇없는 소실점으로 끌고 간다.
그렇게 가면 돌아올 수 없다. 길이 일방통행이라서가 아니다. 따라가는 주체가 뒤돌아볼 줄 모르는-메타 인지 또는 사유를 하지 못하는- 아이기 때문이다. 뉴이재명 떼거리뿐 아니라 김민석 휘하 민주당 지도부는 물론 소속 국회의원 거의 전부가 이 아이“스러움”에 집단 감염되어 있다. 참으로 암담하다. 참담하다. 민주당이 모진 종자들 숙주로 떨어졌으니 나라 앞날이 잿빛이다.
이 시점에서 정색하고 톺아본다. 본디 민주당은 독립운동했던 민족주의, 좌파 진영 사람들을 자유당과 손잡고 때려잡은 집단에서 발원했다. 내 도식으로 표현하면, 민주당 주류는 B급 친일·친미 부역자, A급 엘리트 중심이고, 자유당은 A급 친일·친미 부역자, B급 엘리트 중심이다. 결국 민주당은 제 운명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한 셈이다. 거물급은 아니지만 명백한 자발 능동 적극 친일 부역자 집안 출신인 백낙청이나 식민 치하 양의사 개신교도 집안 출신인 김용옥이 현 정국에서 대통령 손을 들어 준 사건이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민주당 정체 상징이다.
이 민주당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참 지지자라면 등을 돌려서도 냉소와 풍자에 그쳐서도 안 된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에 나서야 한다. 진보 좌파를 속임수로 전유한 채 제국주의·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가는 민주당을 살리고 싶다면,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 최고 통일전선을 구축해 참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모름지기 마지막 기회다. 시간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다.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옳다’라는 말을 빌어와 마무리 문장에 갈음한다.]
오늘 다시 살펴보며 생각을 좀 바꾼다. 대통령 이재명이 하는 정치만 놓고 판단해야겠지만 개인 속성과 전혀 무관할 리 없으니 그 문제를 되짚는다. 회의 석상에서나 SNS에서 하는 언행을 보면 그는 감성과 이성, 통틀어 인성 전체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 최고 헌법기관이 공적으로 드러내는 언행에 사적 심기와 격정, 심지어 조롱까지 여과하지 않고 담아낸다. 공적 기관이 지녀야 할 절제와 예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그래서 어쩌라고?” 식 태도가 기본에 깔린 풍경을 기탄없이 연출한다. 개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도덕적 흠결 요소가 너무 뚜렷하다. 이런 기조에서 발원한 더욱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인용 글에서 ‘대의 정서와 명분 의식 누락’이 ‘도구적 실용주의’를 증폭시켰다고 한 말을 소환해 좀 더 깊이 논의한다. 이재명이 지금까지 보인 실용주의는 ‘구조적 다수’를 만들기 위해 보수/우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요직에 기용하고 SNS에서 일베나 펨코와 접속하며 연결성을 도모하는 식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자칭 타칭 이 나라에서 보수/우파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은 모두 보수/우파가 아니다. 심지어 극우라는 명칭조차도 그들에겐 과분하다. 그들은 그냥 매국노일 뿐이다. 일본과 미국에 민족과 제 영혼을 팔아먹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매국 야합이다.
이재명에게 누락된 대의 정서의 골갱이 가운데 하나가 “자주”다; 반제국주의 기치다. 대한민국이 사실상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 근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각을 그가 분명히 한 적이 없다. 내가 이재명 정체성을 확인한 순간 가장 절망했던 부분이 바로 여기다. 비록 무지렁이로나마 거의 한평생을 반제 전선에서 살아오다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민주당 대통령에게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푸닥거리 한번 해야죠.”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내 머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차마 머리를 떼어내지는 못하고 미친 듯이 술이나 퍼마실 뿐이었다. 나 죽기 전에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어쩌면 영영 그러리라.

강감찬 숲
이런 관지에서 내 인생 70년을 회고하고 증언하다니 여간 허망하지 않다.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나는 그 마음 그대로 끌어안고 낙성대 인근 ‘강감찬 숲’과 그 건너편 ‘이순신 숲’-충무공 선영에 내가 붙인 이름-을 천천히 걷는다. 외적에 맞서 나라를 구해내신 두 분 성웅을 영(靈)에 모시며 초라한 내 인생과 가엾은 내 조국을 위해 숲과 더불어 처연히 기도 올린다; 여태 온 길을 그대로 가도 되는지 여쭙는다; 달라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여쭙는다. 답을 듣지 못한 채 나는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알 수 있으리라 믿어서가 아니다; 질문이 더 묵직하고 옹골차지기를 바라서다. 아, 아무쪼록!

이순신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