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번째 3·1혁명일 아침, 길 위의 인문학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지승룡 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 한 편을 우연히 접한다. 날이 날이라 백용성 스님과 대각사, 그리고 3·1혁명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글을 읽고 즉시 오늘 걷기 경로를 정한다: 충무공 생가터-> 대각사-> 종묘-> 창경궁-> 창덕궁-> 탑골공원. 이만하면 오후 나절 걷기로 팽하다고 여긴다.

 

한양 풍수상 남산이 안산(案山)이다. 안산 북쪽 줄기를 안산룡(案山龍)이라 한다. 안산룡 기슭과 이 기슭 끼고 흐르는 건천(乾川)을 따라 명당이 형성된다고 한다. 진위를 떠나 정인지, 양성지, 김수온, 노수신, 허균, 유성룡같이 뜨르르한 인물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날 필동 중북부와 인현동1가인데 바로 이 인현동131-2가 충무공 탄생지다.


 

민중이 자발로 탑을 세워 보존한 인헌공 낙성대에 비하면 안내판 하나로 남은 충무공 탄생지는 못내 아쉽다. 물론 생가터 아니어도 충무공은 우리 영혼에 각인돼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안내판만 달랑 보고 마는 심사가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토착 왜구와 잔류 왜구가 여전히 왜장독장치는 현실이라 3·1혁명은 여태도 계속된다고 느끼니 그저 울가망하다.

 

연휴 즐기는 표정 일색인 사람 사이를 걸어 대각사에 다다른다. 오래전에 스치고 지나간 기억이 있다. 겉모양만 보고 껄렁한 신흥 불교 절집이려니 했음에 틀림없다. 백용성 스님과 3·1혁명, 그밖에 독립운동, 불교개혁에 얽힌 사실을 알고 나니 내 행망쩍음이 점직하기만 하다. 3·1혁명 그림으로 올린 특별한 단청에 삼가 예를 표해서 새 순례지로 새겨 둔다.


 

대각사와 종묘는 지척 간이라 도리어 새삼스럽다. 3·1혁명 기리는 날 종묘 걷는 일은 각별하다. 곧장 정전·영녕전으로 들어가 3·1혁명이 이 두 신성 공간과 만나 어떤 서사를 구성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조선과 대한민국, 그 사이 3·1혁명은 연속과 불연속 역설을 창조하는 카이로스다. 어쩌면 우리 통념보다 3·1혁명은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일는지도 모른다.

 

3·1혁명 직전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이 없어 역사 맥락과 사회 지평을 정확히 알지 못하나 당시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는 정치 각성을 이루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1혁명이란 사건은 이런 변화 모두를 아우르는 새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본다.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창경궁으로 건너가기 직전 나무 한 그루를 유심히 살피는데 누군가 관심을 보인다. 상가롭게 설명하자 그가 갑자기 관심사를 넓힌다. 이야기는 궁·능과 숲으로 번져간다. 날이 날인지라 나는 문맥을 자연스럽게 이끌며 왜놈 제국이 궁·능과 숲을 어떻게 약탈했는지 자분자분 말해준다; 언제 어디서든 사소한 인연에서조차 반제 전사로서 증언하며 살아간다.

 

창경궁과 창덕궁 거쳐 탑골공원으로 향한다. 익히 아는바 이 신성한 공간은 언제부턴가 남루하거나 너절한 인간들 볼모가 되었다. 밖은 뜻 모를 왜자김에 들뜬 술판으로 어수선하고, 안은 정체 모를 3·1절 기념행사로 게저분하다. 소음일랑 귓등 송가 삼고 나는 3·1혁명 새 기상을 발원한다. 3·1혁명 당시도 세상 한가운데에 물색없는 분대질은 있었으리라.


3·1혁명 순례 회두리로 삼일문 앞에 선다. 어라? 현판 글씨가 달라졌다. 오래 전이지만 내 기억은 꽹하다. 박정희 졸필임을 알아보고 쌍욕을 퍼부었으니까. 즉시 검색한다. 2001년 민족 단체 회원이 낫으로 뜯어내 버린 뒤 2003년 독립선언서에서 채자(採字), 다시 걸었단다. 속이 확 풀린다. 내친김에 뜨끈한 국밥에다 소주 한잔으로 몸을 마저 풀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를 읽는 법(트리스탄 굴리), 이 책은 읽고 나서 숲으로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 지식을 지혜로 이끄는 힘은 마음이 아니라 몸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깨닫게 하기에 팽한 책이다. 오늘은 쉽게 접근해 크게 체력 소모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서울 둘레길 열째 마디(우면산)를 이 책과 더불어 걷는다.

 

내가 숲에 드는 목적은 공부와 연동돼 바뀌어 왔다: 숲 자체에 깃들기, 비인간 식물 생명 우러르기, 지의류와 버섯(균류 자실체) 기리기, 숲속 물 모시기, 그리고 이제 나무가 건네는 말 듣기. 이렇듯 목적이 남과 달라서 숲에 들 때는 늘 혼자다. 겉보기론 등산이지만 속보기론 윤림(淪林)이다: 숲에/~서 스미기.

 

숲에 스며든 들머리,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소리 쪽으로 다가간다. 두 줄기가 접합한(inosculate) 나무다. 우리는 연리목(連理木)이라고 부른다. 오른쪽 나무줄기가 분기해 자라면서 왼쪽 나무줄기와 만나 비비다가 마침내 서로 부둥켜안으며 잘리고(오른쪽) 파인(왼쪽) 상처를 아물려 한 생명을 이룬 듯하다.


 

동물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생명 현상이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식물이 동물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명력을 지녔다 할 수 있다. 종 편견을 깨닫지 못하고 식물 함부로 대하는 인간이란 동물이야말로 편향된 양성 되먹임 진화가 빚어낸 오만에 휘감긴 괴물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고요히 절한 뒤 물러난다.

 

어느 순간 누가 나를 응시한다는 육감이 파고든다. 느낌 따라 본 건너편에 내 몸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기이한 눈 하나가 있다. 나무는 생애 중에 빛을 수확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 가지와 스스로 작별한다. 진이나 액으로 헤어진 자리 밀봉해 방독하고 사람 눈 모양 표지를 남긴다. 이 눈으로 남쪽을 알려준다.

 

빛이 들어오므로 남쪽에는 가지가 많다. 그 많은 가지가 다 유용하지는 않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눈으로들 남는다. 더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간은 이 눈을 인식하고 지남력을 이용할 줄 알게 됐다. 눈 모양 표지가 아니었다면 인간이 훨씬 더 일찍 알아챘으려나. 나무가 무심하니 인간만 덕 본다.


 

둘이었다 하나 되든, 하나였다 둘이 되든 나무는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채로 완전하다. 오늘 숲에서 겪은 일만으로도 내 영혼은 거늑하고 말고다.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사 바깥으로 떠도는 일이 배회일 수만은 없다. 이렇다 할 표지 없이 아뜩하게 떠내려왔으나 결국은 인간도 거기서 왔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맹세컨대 내가 한 영화를 작정하고 다시 본 적은 단연코 없다. 오늘 케데헌을 두 번째 본다. 세 번째 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싶으니 다따가 앉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바다 같은 원효 이야기로 끝낼 참이었다. 어디에선가 도랑물 졸졸거리는 소리를 여돌차게 들은 듯 옴나위없이 영화에 끌려든다. 에나, 머선129?

 

먼저, 루미가 무당이라는 설정은 내게 각별하다. 40대 중반에 수능 다시 쳐 한의대 입학하고 50대 초반에 정신장애를 숙의 치료하는 한의사가 되면서 나는 자신을 무당으로 여기며 여태까지 살았다. 나무 풀, 그러니까 숲 공부할 땐 풀빛 무당(Green shaman)이었다. 그 다음엔 달·물 무당이었다. 이젠 먼지 무당이다.

 

무당은 마주 가장자리에 선 중재자다. 이렇듯 쉽게, 편하게만 보고 말면 원효에 범한 오류를 답습하고 만다. 루미는 악령 정체성도 지닌다. 그는 단순한 무당이라기보다 신화 속 Trickster, Maleficent; 거북섬(북아메리카) 토착민 설화 속 나나보조/마나보조다. 루미가 품은 고뇌와 긴장은 순혈선이 뭔지 묻는다.

 

순혈주의 선한 영혼이 혼혈 세계를 구해 순혈 세계로 만드는가? 순혈주의 선한 영혼만이 순혈주의 악한 귀마를 이기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독선, 그러니까 절대 선은 절대 악과 무엇이 다른가? 질문이 여기에 닿는 찰나 허/무로 떨어지고 말지 않는가? 고결을 전유하는 독선은 세계를 사랑도 구원도 하지 못한다.

 

눈 덮인 도봉산 회룡계곡에서 길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며 헤매다가, 나 또한 제국주의에 잠겨 악한 삶을 살았다는 진실, 그러니까 부역자 본성과 홀연히 마주쳤다. 그전까지 나는 순혈 반제 전사로 자처하고 왜미(倭米) 제국에 부역한 매국노를 향한 선한증오와 적개(敵愾)만으로 일관해 살아왔다. 틀렸다. 잘못됐다.

 

폭포 물 떨어지는 벼랑 위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통곡했다. 비록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나 또한 엄연한 부역자라는 깨달음 뒤에야 비로소 내 삶은 원효를 참으로 닮아갔다. 케데헌이 내 영혼을 붙잡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도봉산과 벼랑 위 소나무가 강용원 소도듯 남산과 서낭나무는 루미 소도다. K-무의식이다.


 

케데헌 본 뒤 나는 숲에 든다. 전과 달리, 나무가 건네는 말을 들으며 걷다가 이드거니 서 있기를 거듭한다. 상처 입은 나무가 분기하며 남긴 지피융기선 화살표 방향을 살펴 운명을 예측한다. 아래로 향하면 위험하고 위로 향하면 안전하다. 내 인생 분기는 어떤 융기선을 남겼을까? 내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내다보는 예언을 한 오가논다족 추장 오렌 라이언스는 그 징조 중 하나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될 것을 꼽았다.(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316) <엡스타인 아이들이 징조다>라는 글 들머리에서 한 말이다. 하나가 더 있다. “바람이 유례없이 세차게 불면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처음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아서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산불을 떠올렸다.

 

강릉원주대학교 생물학과 이규송 교수에 따르면 대형 산불이 일어나 중심부 온도가 1천도 이상 치솟으면 공기가 급격히 팽창해 강력한 상승기류가 형성되고, 공기가 빠져나간 지표면이 급속하고 강력한 국지 저기압 상태에 놓인다. 이때 주변 차가운 공기가 맹렬하게 빨려들어 예측 불가능한 돌풍을 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진화가 더 어려워져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상황은 악순환으로 치달린다. 오렌 라이언스가 영성으로 떠올린 바가 바로 이 장면 아니었을까?


산불은 이미 지구 차원 문제가 돼버렸다. 단순히 산림 피해에서 그치지 않고 생태계 전반을 심각하게 타격하는 거대 악조건이다. 인류가 자초한 기후 위기 결과요 원인이다. 이는 분명히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임을 알리는 울부짖음이다. 숲이 살해당하면서 토하는 피 울음이다. 이 피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니 않는 일이 죄다. 누구보다 이 문제를 통감한 천하 시인 김선우는 시 <지구라는 크라잉 룸>에서 이렇게 울었다.

 

...

오늘도 어김없이 지구 어디선가

죄없이 아이들이 죽고

...

죄없이 숲이 벌목되고

죄없이 작은 것들의 노래가 짓이겨져 파묻힌다

...

한때 아름다웠던 별

어디에 무릎 꿇어야 죄를 덜 수 있나?

...

지구라는 크라잉 룸

당신 안에서 우느라 당신의 울음을 미처 듣지 못했다

 

지구를 크라잉 룸으로 만든 범인은 인류다. 인류세(Athropocene)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었다. 틀렸다. ‘죄없이 죽은 아이들은 죄 없다. 죄없이 죽임당한 거북섬(아메리카) 선주민은 죄 없다. 인류세가 아니라 제국세(Imperialicene).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헤게모니-블록-. 더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트럼프-머스크-엡스타인-. 인류세란 말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투사, 그러니까 뒤집어씌우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자본가 범죄를 은폐한다.

 

현실에서는 제국에 머리 조아린 식민지 특권층 부역 세력이 더 야비하게 악랄하다. 최병성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불은 산림청 소행이다; 산림청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개 산하·이익단체와 야합해 활엽수를 살해하고 소나무를 강제로 심어 산불을 유도한다. 온 국민에게 산불 예방을 계몽하며 자기 죄를 투사한다. 귀마가 숲이, 지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리 만무다. 귀 밝은 자는 여기서도 풀 사람뿐일 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 가는 일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아이팟이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일도 전혀 없다. 한의원 TV가 없어진 뒤부터는 지나치면서 드문드문 눈에 들여놓던 영화도 없어졌다. SNS 셀럽이 이따금 올리는 영화 이야기도 더러는 읽지만, 감상할 생각은 않는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은 여태 없다. 이제 와서 이드거니 돌이켜보며 기억 몇을 떠올린다. 그 기억, 열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띄엄띄엄 박혀 있는 에피소드들이 지니는 연속성을 찾아낸다: 영화 속 서사 또는 연기() 세계와 내 현실 세계 사이 격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

 

영화 속 타자 세계와 내 세계 사이 경계를 명확히 짓지 못해 그 극단으로 극화된 타자 세계로 빨려들어 허우적거리거나 그냥 내 세계를 송두리째 허무 속에 놓아버리거나 한다. 작위와 부작위가 다를 뿐, 이들은 전형 우울증세다. 진실을 모른 채 쌓인 습관이 망연히 오늘까지 이어졌다.

 

이 습관에서 케데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케데헌 서사 일부를 귀담아들었을 뿐 영화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원효 사상까지 내세우며 케데헌 담론을 구성한 뒤에야 워메, 뭔 일이다냐?’하고 관심이 느지거니 움직였다. 때마침 딸이 아이팟에 담아 놓았으니 보라 해 봤다.

 

오만 년만에 보는 영화다. 워메, 참말로 뭔 일이다냐? 눈을 떼지 못한다. 내 어휘로 곱촘하게”, 한자 어휘로 섬세치밀하게 만들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studium:punctum, pheno:geno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하며 유장하게 흘러간다. 세계가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며리가 있으렷다.

 

이 글에는 케데헌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50년 넘게 화두 삼아 온 원효를 잘못 읽는 사람이 많아 오해를 풀 생각에서 출발했다. 앞서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실은 김범진이라는 명상가다. 그가 쓴 케데헌에서 발견하는 한국의 사유들을 읽고 든 의문이 발단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만이 아니라 대부분 원효를 매끄럽게이해한다. 전형이 일심(一心)을 그냥 한 마음으로, 화쟁(和諍) 목표를 화해로 이해하는 일이다. 지난 시절 권위주의 정권이 내세운 국론통일” “국민 화합과 뭐가 다르나. 그 정도라면 구태여 원효를 내걸고 얻는 날찍이 뭐 있나.

 

일심은 한 마음이 아니다; 대칭 운동하는 이문(二門) 사건을 같은 시공에서 경험하여 진실 전경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삶이다. 화쟁 목표는 화해가 아니다; 일심을 향해 걸림 없이 살아가는 날카롭고도 동그란, 단단하고도 말랑한 역설 창조다. 하나든 화해든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으로 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바라보는”(위 책 128) 일을 사람들은 너무 쉽고 편하게 말한다. 더 높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 상태가 아닌 한 이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에서 일()을 뜻할 수밖에 없다. 그 일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입에 담는 찰나 그 무엇은 이 세계 속에 도로 갇히고 만다. 결국 그 하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원효가 밝힌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통속한 오해와 달리 하나를 지향하거나 결론으로 움켜쥐지 않는다. 이 또한 일원론이라는 극단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로 몰아버리는 짓은 인도유럽어를 구사하는 서구 단치(單値) 논리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 전경은 둘이 아니므로 하나도 아니다.”. 흔히 둘도 아니고/지만 하나도 아니다라고 읽는다. 아니다. 속 보깨는 이 진실에 닿지 못하면 원효는 영원히 오독된다.

 

케데헌은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통속 담론을 뛰어넘는다. 루미가 진실 전경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도 문양은 없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순수 투명한 일관(一貫)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자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원효 실제 삶이 그랬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